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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무)신교총연합회ㅡ사)한국신교협동조합 원문보기 글쓴이: 소서노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을때...
답변 3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였던것처럼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잖아요. 일본이 우리에게 악행을 저질렀던 것처럼 영국도 인도에게 일본처럼 악행을 저질렀을까요? 질문자 채택된 경우, 추가 답변 등록이 불가합니다. 질문 재등록 설정질문 제목,내용,디렉토리를 보다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수정 후 재등록을 원하시면 ‘수정 후 재등록’ 을 눌러주세요. 4번째 답변 영국에 의해 인도는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식민지배를 당하면서 대략 2~3천만이 사망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을 때, 인도는 1769년에서 1770년까지 벵골에서 100만 명이, 1782년에서 1783년까지 첸드라에서 측정 불가, 1791년부터 1792년까지 차리사에서 1,100만 명이, 1789년부터 1795년까지 바라에서 1,100만 명이, 1837년부터 1838년까지 아그라에서 80만 명, 라즈푸타나에서 1868년부터 1870년까지 200만 명이, 오리사에서 1865년부터 1867년까지 100만 명이, 라즈푸타나에서 1868년부터 1870년까지 150만 명이, 비하르에서 1873년부터 1874년까지 측정 불가, 1876년부터 1878년까지 인도 전역에서 1,030만 명이, 오리사와 비하르에서 1888년부터 1889년까지 15만 명이, 1896년부터 1997년까지 전역에서 500만 명이, 1889년부터 1900년까지 100만 명이, 1905년부터 1906년까지 붐바이 관구에서 23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아래는 관련 자료들입니다.
참고로 제가 복사해서 옮긴 자료들이지만, 제가 원 저작자라는 점을 앞서 말씀드립니다.
American Holocaust : The Conquest of the New World, David Stannard
Oxford University Press(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약 2천만 명의 인도 주민들이 19세기 후반 영국 식민주의자들의 혹정, 불평등 무역, 책임 유기로 인한 대량 아사 사태로 희생되었다." - 역사가 David Stannard가 쓴 'American Holocaust : The Conquest of the New World, Oxford University Press(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1993.
(아래의 내용 10년에 걸쳐 발생한 인도인 희생자 수치를 논하는 것으로, 위 책의 내용에 나온 인도인 총 희생자 수치와 무관함을 앞서 말씀드립니다.)
인도의 비밀 역사 : '수백만명이 사망한 홀로코스트'
영국의 보복으로 10년에 걸쳐 1천만명이 사망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Cawnpore(칸푸르) 전투 - Cawnpore(칸푸르)에서 영국 수비대가 전멸하고, 뒤에 여자와 아이들이 대량학살되었다. 그들의 죽음으로 영국이 원하는 전쟁이 초래되었다. 사진 : Hulton Archive/Getty
150년 전에 발생한 사건으로, 19세기에 어떤 유럽 열강에 대한 가장 극심한 도전이었던 것으로 인정되고 있는 세포이 반란에 대한 새로운 역사에 의하면,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영국은 10년에 걸친 살인적인 캠페인을 실행하여, 자신들에 맞서 감연히 봉기한 수백만명의 사람들을 처리했다고 한다.
Mumbai(뭄바이)에서 활동하는 작가 겸 역사가인 Amaresh Misra는 'War of Civilisations: India AD 1857'에서 1857년부터 10년에 걸쳐 약 1천만명의 죽음을 초래한 '밝혀지지 않은 홀로코스트'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영국은 세계의 초강국이었으나, 자국의 가장 중요한 소유물인 인도를 거의 잃어버리게 될 뻔 했다고 Misra는 말한다.
전통적인 역사가들은 잔인한 보복으로 학살된 인도 병사들의 수를 10만명으로 기록했지만, 필사적으로 질서를 잡으려는 영국군에 의해 살해된 반군 및 시민의 수를 계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Misra는 강변한다.
2008년 3월 7일, 뉴델리에서 인도의 부통령(오른쪽)인 Shri M. Hamid Ansari에게 'War of Civilizations: India AD 1857' 책을 저자인 Amaresh Misra(왼쪽)가 양도하는 모습. (오른쪽 사진은 책 확대 모습)
'역사의 대차대조표'가 인도인들이 1857년 사건의 여파로 얼마나 많이 살해되었는지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저자는 말한다. Misra는 가디언(Guardian)지에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수백만명이 죽은 홀로코스트였다. 그것은 영국 입장에서는 필요한 홀로코스트였다. 왜냐 하면, 영국은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마을과 촌락의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순하고도 잔학한 것이었다. 앞길을 가로막는 인도인들은 살해되었다. 그러나, 그 규모는 비밀로 유지되었다."
그의 계산은 중요한 세 가지 근거에 의존하고 있다. 두 가지는 살해된 종교적 저항 투사들, 즉 영국을 쫓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이슬람 반군이나 힌두 용사들의 수와 관련된 기록들이다.
세번째 근거는 영국의 노동력에 대한 기록들이다. 그 기록들에 의하면, 광할한 인도 전역에서 인력이 1/5-1/3 줄었다고 한다. 그것은 한 영국 관리가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이, '무시무시하고 불행한 그 시절에 필수불가결한 영국의 국력 과시로 인한 것으로, 수백만명의 불쌍한 양민들이 죽은 것으로 보인다.'
많은 편지 속에는 소름끼치는 내용들이 깔려 있다. 한 예로, Misra는 어떻게 해서 2백만 통의 편지들이 개봉되지 않은 채 정부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지를 말한다. 관리들에 따르면, 그 편지들은 우리 아이들이 우리의 여인들과 어린애들을 살해한 비열한 힌두교 신자들과 이슬람 교도들에게 틀림없이 갚아주었을 그러한 종류의 복수심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Misra가 주장하는 희생자 수는 인도와 영국에서 이의가 제기되었다. Shabi Ahmad 인도역사연구회 1857 프로젝트 단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단지 우리가 그 희생자들의 일부는 살해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분쟁 지역을 떠나 있었는지를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보복의 범위를 평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지역에 인구가 준 것은 살해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동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영국 역사가 Saul David가 쓴 'The Indian Mutiny'
"그것은 과장된 것같다. 분명히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기아가 있었고, 그것은 영국의 무자비한 행위에 의해 악화되었다. 제국주의를 공박하는 데, 이러한 수치들이나 홀로코스트 이야기를 들먹일 필요없다. 제국주의는 평판이 상당히 좋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영국이 끊임없이 인도의 역사관을 없애버리려고 한 그 시기에 Misra가 어떤 것을 폭로하는 것이 현명했다고 말한다.
Amar Farooqui 델리(Delhi) 대학 역사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860년과 그 세기 말 사이에 장기간 동안 토착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침묵의 기간이 있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이러한 이야기들이 알려지고 있으며, 그 이야기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Misra나 [William] Dalrymple 등과 같은 저자들의 저서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주변에 많은 재료들이 널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발견하려면 찾아보아야 한다."
바하두르 샤 자파르(Bahadur Shah Zafar), 인도 무굴왕조의 마지막 황제(재위 1837~1857)로 세포이 항쟁 때 반란의 지도자로 추대 되었으나, 실패로 끝나자 후에 영국에 의해 유배되었다
영국이 1857년에 바하두르 샤 자파르(Bahadur Shah Zafar)의 이름으로 아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건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다. 5월 10일에 인도 중부 도시 Meerut에 주둔하고 있던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인도 병사들은 남쪽 델리로 행진하기 전에 반란을 일으켜, 자신들의 영국 장교들을 살해했다. 반란군 병사들은 당시 72세의 자파르(Zafar)를 힌두스탄(Hindustan)의 황제로 선포하고, 붉은 성(Red Fort)에 노란 깃발을 높이 달았다.
Misra가 그리는 것은 제국주의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국민들이 봉기한 이야기인 최초의 인도 독립전쟁이었다. 비판가들은 그 의도와 동기는 보다 뒤죽박죽이 되었다고 말한다. 일부 인도인 용병들은 장교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을 위협하고 있다고 오인했다. 결국 영국의 지배는 또 다시 90년 동안 연장되었다. Misra의 분석은 새로운 근거를 무너뜨린다. 그는 그 전쟁이 인도 북부에 국한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고 주장한다. Misra는 말한다. 히말라야 산맥 근처 Tamil Nadu 남부와 버마와의 접경 지역에서 반영(영국에 반대하는) 폭동이 발발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범 인도적이었음이 틀림없다."
Misra는 또한 델리의 재탈환이 최후의 중요한 전투였다는 널리 인정된 견해를 반박하면서, 그 폭동은 초기의 폭동이 실패한 뒤에도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고 주장한다.
인도 역사가들이 모든 각도에서 1857년 사건을 토론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역사적 성숙함의 표시라고 많은 사람들은 보고 있다. 40년대와 50년대에 폭동들은 당혹스런 것으로 간주되었다. 네루와 간디는 비폭력을 설파했다. 그러나 오늘날 1857년 사건은 인도의 국내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되고 있다. 그것은 커다란 변화이다.
그들이 한 이야기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유명한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 "내가 인도의 총사령관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신의 허락을 받은 그 약속을 지킬 것을 그들에게 선언한다. 그것은 그 종족을 근절시키기 위해 내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칼 마르크스(Karl Marx), 독일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
칼 마르크스(Karl Marx) : "문제는 영국이 인도를 정복할 권리가 있느냐가 아니라, 인도가 영국에 의해 정복되는 것보다, 인도가 터키에 의해, 페르샤에 의해, 러시아에 의해, 정복되는 것을 더 좋아하느냐의 문제이다."
프랑스 일간지 L'Estaffette : "인도를 위해 개입하는 것, 해상에서 우리의 모든 함대를 발진시키는 것, 영국령 인도에 반대하여 러시아와 함께 공동노력하는 것... 그러한 것들은 프랑스의 영광스런 전통에 걸맞는 유일한 정책이다."
가디언(The Guardian)지 : "우리는 그와 같이 배우게 된 무서운 교훈은 결코 잊지 않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우리는 토착민 병력들에 의존할 수도 있으나, 그들은 유럽인들에 의해 관리되어야 한다."
출처 : 가디언(Guardian)
영국 군사과학자들은 인도 식민지배 때 인도인들에게 독가스를 실험했다 - 영국의 생체실험
사진 : Porton Down 실험들 (아래)
사진① 설명 : 많은 실험 대상자들은 생식기를 비롯하여 피부에 심한 화상을 입었으며, 여러 날, 심지어 수주일 동안 고통을 겪었다.
사진② 설명 : 영국 군사과학자들이 수백명의 인도 병사들을 가스실로 보내, 그들을 독가스에 노출시켰다. (문서에 적혀 있는 'SECRET[기밀]')
사진③ 설명 : 국립기록보관소에서 새로 발견된 문서들은 처음으로 완전한 규모의 실험을 보여주었다. (사진문구 : WARNING! THIS FILE CONTAINS PHOTOGRAPHS WHICH ARE OF A DISTRESSING NATURE[경고! 이 파일에는 비참한 사진들이 포함되어 있다.])
사진④ 설명 : 많은 사람들이 생식기를 비롯하여 피부에 심한 화상을 입었으며, 여러 날, 심지어 수주일 동안 고통을 겪었다. 일부는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사진⑤ 설명 : 그 보고서들은 어떤 경우에는 인도 병사들이 마스크만 착용한 채 독가스에 노출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국 군사과학자들이 수백명의 인도 병사들을 가스실로 보내, 그들을 독가스에 노출시켰다고 가디언(Guardian)지에 의해 밝혀진 문서들이 밝혔다. 가디언지는 영국군이 인도 병사들이 어떤 질병들을 발전시켰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들 뒤에 그 병사들을 검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독가스가 암과 다른 질병들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 이제 인정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생식기를 비롯하여 피부에 심한 화상을 입었으며, 여러 날, 심지어 수주일 동안 고통을 겪었다. 일부는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 실험들은 전면적인 규모의 실험들을 처음으로 확인해 주는 국립기록보관소에서 새로이 발견된 문서들에 의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인도가 식민지배 하에 있었던 시기에 인도 군대는 영국군의 지휘 하에 있었다.
실험들은 현 파키스탄의 Rawalpindi 군사시설에서 2차대전 전과 중에 10년 이상 동안 실시되었다. 그 실험들은 Wiltshire의 Porton Down 화학무기공장에서 일본을 향해 사용할 독가스를 개발하기 위해 아대륙에 배치된 과학자들에 의해 실시되었다.
인도 실험들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Porton 대인 화학무기 실험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1916년과 1989년 사이 Porton에서 2만명 이상의 영국 병사들이 신경 가스와 미란성 독가스와 같은 독가스와 관련된 화학무기 실험들에 참여했다.
그 영국 병사들 중 다수가 속아서 그 실험들에 참여했다고 진술했는데, 그들은 그 실험들이 끝난 뒤 몇년 동안 건강을 손상당했다.
그 보고서들은 어떤 경우, 인도 병사들은 마스크만 착용한 채 독가스에 노출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번은 인도 용병(민간인)의 가스 마스크가 벗겨지는 바람에 그는 눈과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게 되었다.
그 실험들은 전장에서 살상하려면 가스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파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1942년에 Porton의 과학자들은 인도 및 영국 실험대상자들 중 다수가 가스로 인해 화상을 입었다고 보고했다. 일부는 화상이 매우 심해 병원에 가야 했다. 심한 화상을 입은 환자들은 아주 비참했고, 절망에 빠졌으며, 불편한 생활을 했다고 과학자들은 말했다. 다른 병사들은 직접 독가스의 결과를 측정하기 위해 '훈련용 반바지와 면으로 된 카키색 노타이 셔츠'를 입고 가스실에 들어갔다가 1주일 동안 병원신세를 졌다.
그러한 실험들은 Porton의 과학자들이 영국인 피부보다 인도인 피부에 더 심한 피해를 가할 독가스를 찾아내려고 한 193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 5백명 이상의 영국인 및 인도인이 독가스에 노출되었다.
Porton에서 실험 대상이 된 영국 군대를 대변하는 변호사 Alan Care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특히, 그러한 실험들이 제왕의 시대에 행해진 상황에서, 이들 인도인 실험대상자들이 그러한 실험에 참여하는 데 대한 어떤 유효한 동의를 했다면,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사전에 알았더라면,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Porton의 관리들은 그러한 실험들은 다른 시기, 즉 분쟁 중에 실시되었기 때문에, 오늘의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국방부는 인도 병사들이 그 실험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는지를 말할 수 없었다. 국방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도의 화학 방어연구시설(Chemical Defence Research Establishment)에서 수행된 연구 분야는 방어 연구, 무기 연구 및 생리적 연구였다. 그러한 연구들은 환경이 다른 영국에서 모의 실험 조건들로 실시된 연구들을 뒷받침해 주었다."
화학전
1916년에 설립된 Porton Down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화학전 연구시설이다. 1950년대까지 Porton은 미란성 독가스와 신경가스와 같은 화학무기들을 개발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Porton은 또한 생물학 무기들, 주로 탄저병 폭탄들을 고안했다. 현재 Porton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화학 및 생물학 무기들에 대해 군대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인 장비들을 개발하는 것이다. Porton은 영국군이 세계에서 가장 방어가 잘 되는 일부 장비들을 갖추고 있다고 믿고 있다.
Porton은 언제나 실험에 참여할 군 요원들을 모집해 왔다. 항공병 Ronald Maddison이 1953년에 액체 신경 가스가 자신의 팔에 떨어져 사망함으로써 가장 시끄러운 논쟁이 벌어졌다. 2004년의 검시에서 그는 불법적으로 살해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작년에 정부는 본인의 동의 없이 LSD를 복용한 세 명의 군인에게 보상을 해주었다.
출처 : 가디언(Guardian)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이 인도에 저지른 참혹한 홀로도모르 - 숨겨진 벵골 대기근의 실체(19금)
"아직도 굶고 있는 간디(당시 비폭력 단식투쟁 중)가 안 죽었느냐?" - Winston Churchill, 영국 수상ㅣ1943년, 인도에 기근이 들자 마지막 영국인 인도 총독 Louis Mountbatten이 처칠에게 식량 원조를 요청하자 이에 답변한 말
"나는 인도인들을 증오한다. 그들은 추잡한 종교를 가진 추잡한 족속들이다."- Winston Churchill, 영국 수상ㅣ1942년 9월 9일 Churchill이 인도의 외무장관 Leo Amery에게 했던 말을 그가 자신의 일기에 적은 내용 중
"현 상황에서 그들은 여분의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인도의 현 생활수준에서 가장 작게 나빠지는 것은 인도인들이 서서히 굶어 죽는 것을 의미한다."- Winston Churchill, 영국 수상ㅣ1935년 인도인들에 대해 영국의 하원에서 했던 연설의 내용 중
"인도 문제에서 처칠은 제정신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히틀러와 처칠의 사고방식 사이에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 당시 인도의 국무장관으로 영국의 국회의원, 장관, 총리를 역임한 정치가인 Leo Amery가 자신의 일기에 적은 내용 중
1943년 12월 미국의 신문에 인도의 벵골 대기근으로 인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소년과 강아지가 굶어죽은 사진의 모습(왼쪽)과 벵골 대기근으로 인해 굶어죽기 직전의 인도인에게 부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물을 주고 있는 모습(오른쪽)
"히틀러 만큼이나 처칠, 루스벨트도 비난받아야 한다." - Nicholson Baker,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미국 소설가로 이스트먼 음악학교에 진학해 작곡을 공부했으나, 곧 전공을 바꿔 하버포드 대학에서 영문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다수의 소설을 썼으며, 2001년 미국도서비평가협회상을 받았다. 현재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이자 반전평화주의자, The New Yorker의 기고가이다ㅣ2차대전 비판적 성찰작으로 논란을 일으킨 그의 논픽션 저서 '인간연기(Human Smoke)'의 내용 중
"처칠의 벵골 홀로코스트는 2차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홀로코스트보다 규모가 더 큰 학살이다." - Gideon Polya, 태즈매니아 대학교를 다녔으며, 오스트레일리아 남부의 플린더스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MWC News의 정치관련 최고 편집장으로 있다ㅣ2010년 9월 13일에 올린 논설문의 내용 중
"수백만명이 굶어죽은 아일랜드와 인도의 대기근을 수수방관한 영국의 처사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사성일,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를 나왔고 출판저널 기자를 지냈다. 현재 도서신문에서 출판 평론가로 있다ㅣ아마르티아 센이 저술한 <정체성과 폭력>의 출판에 2009년 12월 25일 '제국주의보다 더 위대한 세계화?'라는 제목으로 시사IN에 올린 출판평 글의 내용 중
"기아는 일부 사람들이 충분한 식량을 갖지 못하면서 발생하는데, 이때 식량부족의 징후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 Amartya Kumar Sen, 캠브리지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영국 옥스포드대학교 교수, 미국 하버드대학교 교수, 영국 캠프리지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노벨 경제학상으로 '기아와 빈곤 문제에 초점을 맞춘 경제학의 틀 확립'이라는 분야로 수상했고 현재 하버드대학교 경제학 교수로 있다. 인도 벵골지역에 태어나서 10세 때 목격한 1943년의 '벵골 대기근'은 그의 학문에 큰 영향을 미쳐 수백만의 죽음을 지켜본 그는 평생 빈곤과 기아라는 주제에 천착했고, '후생(厚生)경제학'의 최고 대가로 자리를 잡았다. 기아의 원인이 식량 부족이 아니라 잘못된 분배라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증명한 최초의 학자이다ㅣ그의 대표 저서인 <Poverty and Famines : An Essay on Entitlement and Deprivation(빈곤과 기아 : 권리부여와 박탈에 관하여)>의 내용 중
"1943년 인도 벵골 지역의 대기근으로 300만 명이 아사할 때 그 원인은 식량이 없어서가 아니라 당시 영국의 식민지 농업정책의 실패 때문이었다. 북한의 현재 상황도 벵골 지역의 대기근 당시와 유사하게 분석될 수 있다." - 존 박, 미국 의회가 국제평화와 갈등해결을 위해 만든 초당파적인 독립연구기관으로 미국 의회의 자금지원을 받는 미국 평화연구소(USIP)의 선임연구원ㅣ2009년 12월 22일 뉴데일리에 '화폐개혁으로 북 식량난 가능성'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기사의 내용 중
"연합국의 포격으로 희생된 사람들, 파괴된 건물들, 노르망디 상륙 이후 연합군 군인들이 자행한 각종 절도, 약탈, 성폭행 등이 대거 발생했는데 지금까지 역사가들이 제대로 연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합군 포격을 받은 브레스트나 캉과 같은 도시도 마찬가지이다. 전쟁이 동반하는 폭력은 불가항력적인 사건이라며 간과하거나, 전쟁 시기였고 또 '폭로'하기에는 너무 어두운 과거이며, 창피한 사건이라고 하여 묻어버려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전쟁기의 어두운 분야에 대한 연구에 부정적인 사람들의 주장에 동의한다면, 역사가들은 언제나 승자의 기록만 유지, 평가하고 그것에만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 앙리 루소, 국립과학연구소(CNRS) 산하의 현대사연구소(IHTP)가 창립될 때 창립 회원으로 참가했으며, 같은 연구소에서 소장을 역임했고, 2005년까지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하버드대학을 비롯하여, 파리정치대학, 뉴욕대학 등에서 강의했다. 2000년 6월 ‘콜레주드프랑스’를 제외한 프랑스의 모든 고등교육기관에서 강의할 수 있는 자격증(habilitation)을 획득했고, 2001년 9월부터 파리 10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루소의 전공은 현대사 그 중에서도 특히 제2차 세계대전사이다. 〈Vingtième siècle. Revue d'histoire〉, 〈Société et Droit〉, 〈Les Cahiers du judaïsme〉, 〈Passoto e Predente〉(이탈리아 학술지)의 편집위원, 프라하 프랑스연구소, 부다페스트 역사연구소 등 국제 학계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 <비시 신드롬>은 프랑스 사학계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로버트 팩스턴의 <비시 프랑스>라는 저서를 통해 프랑스 비시 정권이 나치즘에 자발적으로 협력했다는 주장의 테제가 옳았음을 증명했다ㅣ그의 저서 <비시 신드롬> p564~p565
Winston Churchill, 영국 수상
"내가 역사를 쓰려고 하는 한, 역사는 나에게 호의적일 것이다."- Winston Churchill, 영국 수상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에서 인도에서는 아주 참혹한 일들이 일어났다. 최소 300만 명(수치에 대해서는 400만 명을 주장하는 이도, 500만을 주장하는 이도, 700만을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일반적으로는 300만 명으로 보지만 이전에 있었던 아래의 대기근 수치들을 미루어 짐작했을 때 그 이상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의 인도인들이 모두 굶어서 죽은 것이었다. 이는 히틀러의 유대인 홀로코스트와 맞먹는 최악의 범죄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러한 사건이 처칠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을 때, 인도는 1769년에서 1770년까지 벵골에서 100만 명이, 1782년에서 1783년까지 첸드라에서 측정 불가, 1791년부터 1792년까지 차리사에서 1,100만 명이, 1789년부터 1795년까지 바라에서 1,100만 명이, 1837년부터 1838년까지 아그라에서 80만 명, 라즈푸타나에서 1868년부터 1870년까지 200만 명이, 오리사에서 1865년부터 1867년까지 100만 명이, 라즈푸타나에서 1868년부터 1870년까지 150만 명이, 비하르에서 1873년부터 1874년까지 측정 불가, 1876년부터 1878년까지 인도 전역에서 1,030만 명이, 오리사와 비하르에서 1888년부터 1889년까지 15만 명이, 1896년부터 1997년까지 전역에서 500만 명이, 1889년부터 1900년까지 100만 명이, 1905년부터 1906년까지 붐바이 관구에서 23만 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영국의 인도 식민지 총독 Archibald Wavell(왼쪽)과 그의 일기를 편집하여 쓴 <Wavell : The Viceroy's Journal(웨벨 : 총독의 일기)>의 모습(오른쪽)
"처칠은 무슬림들, 아랍인들 및 인도인들을 증오했으며, 굶어죽고 있는 600~700만명의 인도인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것에 대한 나의 청원을 냉혹하게 거부했고, 캐나다의 구조 시도를 봉쇄했다." - Archibald Wavell, 대영제국 당시 인도를 식민지배 했을 때 총독ㅣ그가 저술한 일기를 작가인 Penderel Moon이 옥스퍼드 출판사를 통해 저술한 <Wavell : The Viceroy's Journal(웨벨 : 총독의 일기)>의 내용 중
영국의 무제한 착취를 통한 식민지배로 인도에서는 대략 최소 2천만에 이르는 인명이 기아와 굶주림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대기근이 물론, 대영제국이 저지른 식민지 만행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외에도 영국은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와 합작으로 착취하여 1,000만 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영국의 만행은 이외에도 보어 전쟁으로 잘 나타난다. 이 중심에 바로 벵골 대기근이 있는데, 벵골 대기근의 경우는 현대사에서, 그러니까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사건임과 동시에 근대를 벗어난 시대에 그것도 의도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 있다.
나치 독일만큼 대영제국이라는 영국의 제국주의 국가도 대학살을 저지른 주범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영국의 만행 중에서 1943년 벵골 대기근이 주목할 만한 것은, 히틀러가 사악한 악이라고 주장한 영국의 수상 처칠이 히틀러에 대항하여 싸우는 와중에 그런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것도 구할 수 있는 인명을 일부러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와 아주 흡사한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인도인들을 대했던 것이다.
시카고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거치고 뉴욕에 있는 공립대학과 헌터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는 부교수이자 벵골출신 역사학자인 Madhusree Mukerjee(왼쪽)의 모습과 그가 저술한 벵골 대기근을 폭로한 저서인 'Churchill's Secret War(처칠의 비밀 전쟁)'
"당시 인도는 버마로부터 쌀을 수입해왔으며, 영국이 지배하던 인도에 군인들과 전쟁 참여자들을 위한 쌀을 저장해 놓았으면서도 일반 인도인들에게는 쌀을 주지 않아 그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 시카고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거치고 뉴욕에 있는 공립대학과 헌터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는 부교수이자 벵골출신 역사학자인 Madhusree Mukerjee가 자신이 저술한 책의 내용 중
"전시라 인도에 필요한 식량 수송에 쓸 배가 없었다"고 후에 처칠은 주장을 했으나, 이는 사실과 달랐다. 이는 마치 히틀러가 "전시라 유대인들을 먹여서 살릴 식량이 없었다"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인도 주재 영국 관리들은 처칠에게 청원을 했지만, 필사적인 식량 요청을 처칠이 묵살했다. 이 1943년에 일어난 벵골 대기근은 일본이 벵골 지방에 쌀을 수출해왔던 미얀마를 점령한 이후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인도 식민지배자들인 영국인들은 군대와 징용근로자들을 위한 식량을 대량 비축했었다.
시장심리 불안으로 야기되는 최대한의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매점, 매석하는 이른바 패닉 바잉(Panic-buying)이 당시에 벌어졌는데, 일본이 침공을 한다면 그 많은 쌀이 일본이라는 적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위 관리들은 쌀을 싣고 가는 우마차를 몰수하는가 하면 보트를 파괴하는 등의 일이 발생했으며, 따라서 쌀값이 치솟고 쌀의 분배 통로는 막혀버려 기아선상의 인도인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Max Hastings,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로 Charterhouse School과 Oxford University에서 공부했으며, Daily Telegraph 수석편집자, Evening Standard 편집자를 지냈고, BBC에서 역사 다큐멘터리 제작에 자문을 하였으며, 1982년에 '올해의 언론인', 1988년 '올해의 편집인'을 수상하였다. 2002년에는 영국의 황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취득
"벵골출신의 역사학자 Mukerjee가 7년간의 작업 끝에 내놓은 이 'Churchill's Secret War(처칠의 비밀 전쟁)'이란 책은 의미있는 책이며, 영국인들은 이 책을 불편해 할 것이다" -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로 Charterhouse School과 Oxford University에서 공부했으며, Daily Telegraph 수석편집자, Evening Standard 편집자를 지냈고, BBC에서 역사 다큐멘터리 제작에 자문을 하였으며, 1982년에 '올해의 언론인', 1988년 '올해의 편집인'을 수상하였으며 2002년에는 영국의 황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취득했던 Max Hastings가 이 책이 나온 것을 평한 내용 중
따라서 갑자기 시장에서는 쌀을 구경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희귀한 것이 됐으며, 굶주림은 벵골지역 일대에 걸쳐 확산되었고, 윈스턴 처칠은 비상식량용을 풀어 달라는 수차례의 요구조차 묵살해 버렸다.
당시 굶주림으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수많은 사람들이 콜카타로 몰려들었다. 또 콜카타 지방에서도 당시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과 영국과 손을 잡은 중산층의 인도인들은 클럽이나 자기 집에 쌀을 수북하게 쌓아 두고 풍족하게 식사를 하며 살아간 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골이 메말랐고 눈은 흐려진 이들은 음식물 쓰레기를 놓고 다투었고 피골이 상접한 부녀자들이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어갔다
영국 전시내각의 회의록이나 잊혀졌던 정부 문서들, 개인 기록 등은 "당시 호주에서 곡물을 가득 실은 선박이 인도를 들리지도 않고 곧바로 지중해 쪽으로 항해했고, 엄청난 양의 곡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을 알려준다.
Ramachandra Guha, Delhi University에서 문학 학사, Delhi School of Economics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철학 박사학위를 땄다. Indian Institute of Management 과정을 수료, Uttaranchal에서 사회사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현재 인도의 역사가로 The Telegraph과 Hindustan Times 신문 칼럼니스트
"Mukerjee가 내놓은 'Churchill's Secret War(처칠의 비밀 전쟁)'은 한 위대한 인물(처칠)의 편견이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기근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처음으로 명확히 입증했다." - Delhi University에서 문학 학사, Delhi School of Economics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철학 박사학위를 땄다. Indian Institute of Management 과정을 수료, Uttaranchal에서 사회사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현재 인도의 역사가로 The Telegraph과 Hindustan Times 신문 칼럼니스트를 맡고 있던 Ramachandra Guha가 이 책이 나온 것을 평한 내용 중
당시 미국과 호주가 인도에 식량 지원 의사를 밝혔지만 영국 전시내각이 배를 내놓지 않아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다. 또한 미국이 자국 배에 실어 곡물을 실어다주겠다고 까지 제의했으나 영국은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Churchill은 인도사람들에 대해 거북한 이야기를 많이 했으며, 비서에게 '인도사람들이 폭격이나 맞았으면 좋겠다'는 인종적인 혐오를 나타내기도 했다.
"처칠은 영국이 계속 인도를 통치하도록 미국이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있었기 때문에 인도 사람들에게 화가났다"고 Mukerjee는 말한다."Churchill은 식량 지원을 요청한 인도주재 영국 관리들에게 "왜 간디는 아직 죽지않았느냐"는 말로 응답하기도 했다. 그는 Leo Amery 인도담당국무장관에게 "나는 인도인들을 증오한다. 그들은 괴상한 종교를 가진 괴물같은 사람들이다"고도 말했다. Amery 장관은 이런 폭언을 하는 처칠에게 화가나서 한번은 "히틀러와 사고 방식에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르네 뤼힝거(역사학과 독문학을 전공, <빌란츠>의 편집장) 외 6인이 저술한 <경제학 산책>
"센의 연구에 따르면 벵골의 대기근이 발생했던 1943년의 전체 식량 공급량은 1941년에 비해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런데 1941년에는 기근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1943년의 문제는 인플레이션과 이로 인한 식량의 가격상승이었다. 그러나 농부들의 임금은 이에 상응하게 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근이 발생한 지역의 식량은 구매력이 더 강한 도시 쪽으로 이동했다." - 르네 뤼힝거(역사학과 독문학을 전공, <빌란츠>의 편집장)와 바바라 쾰러(경제학을 전공, <빌란츠>의 편집위원), 디르크 루슈만(정치학을 전공, <빌란츠>의 편집위원), 슈테판 바르메틀러(경제사와 경제학을 전공, <빌란츠>의 편집위원), 도미니크 플람머(경영학을 전공, 경제전문 저널리스트 겸 <빌란츠>의 편집위원), 토마스 부옴베르거(역사학 박사이자, 프리랜서 방송인 및 저널리스트), 마르쿠스 딤 마이어(경제학을 전공했고,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이자 경제학을 강의)가 저술한 <경제학 산책> p218
Amery 장관은 일기에도 "인도 문제에서 그(처칠)가 제정신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고 적어놓기도 했다. Mukerjee는 처칠의 이런 태도가 빅토리아시대의 가치관이 몸에 배인 때문으로 분석했다.
처칠은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 처럼 인도를 단지 대영제국의 왕관에 박힌 보석의 하나로만 생각했다는 설명이다. 처칠의 일생에 관해서는 수백권의 책이 이미 나와있지만 무케르지의 책은 새로운 사실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저서로 환영을 받았다.
Mukerjee는 "이 기근은 의도적으로 야기된 면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1943년 초에 인도는 처칠의 주장에 따라 쌀을 수출했으며 전쟁 중 영국은 인도를 무자비하게 수탈하면서 기근이 발생한 후에도 수탈을 멈추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Leo Amery, 당시 인도의 국무장관으로 영국의 국회의원, 장관, 총리를 역임한 정치가
"인도 문제에서 처칠은 제정신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히틀러와 처칠의 사고방식 사이에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 당시 인도의 국무장관으로 영국의 국회의원, 장관, 총리를 역임한 정치가인 Leo Amery가 자신의 일기에 적은 내용 중
Mukerjee는 "벵갈의 대기근이 역사책에서도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벵갈 출신으로 지금은 독일에서 살고있는 그는 "학교 다닐 때 벵갈 대기근에 대해 배워본 적이 없으며 부모님도 말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Mukerjee는 "처칠을 겨냥해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고 대기근을 연구하다 보니 처칠이 관련된 사실을 서서히 알게됐다"면서 "지금은 처칠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기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그(처칠)는 나보다는 식량이 아깝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Mukerjee는 말했다.
현대사에서 벌어진 대기근은 다음과 같은데, 우선 1930년대 초반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스탈린의 소련 공산당은 농지를 국유화하는 집단농장 정책에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반발하자 식량은 물론 종자용 씨앗까지 빼앗아갔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식량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떠나지도 못하게 막았다. 그 결과 500만~1,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Mahatma Gandhi,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에서 법학을 공부하였고 인종 차별반대투쟁단체 지도자, 사티아그라하 투쟁 선얼과 행진을 주도하였으며, 인도국민회의파 연차대회 비폭력 저항을 주창한, 반영불복종운동을 했던 인도의 민족지도자
"당신의 적들(영국)에 의해 묘사되는 바와는 달리, 나 또한 히틀러씨가 괴물이라고 믿지 않는다."-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에서 법학을 공부하였고 인종 차별반대투쟁단체 지도자, 사티아그라하 투쟁 선얼과 행진을 주도하였으며, 인도국민회의파 연차대회 비폭력 저항을 주창한, 반영불복종운동을 했던 인도의 민족지도자인 Mahatma Gandhi가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중
1950년대 말 마오쩌둥에 의한 중국의 대약진운동으로 인한 희생자는 홍콩 등지의 자료에 따르면 이 시기 아사를 비롯한 희생자가 3,000~4,000만 명에 이른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고난의 행군'으로 인한 아사 희생자도 있으며, 2000년대 초반 짐바브웨의 대기근도 독재 정권이 빚어낸 참극으로 꼽힌다.
이러한 영국의 작태에 분노를 느낀 Mahatma Gandhi는 오히려 대영제국의 적이었던 나치 독일의 Adolf Hitler에게 동정을 느끼고, 이러한 Hitler에 대한 영국의 선전이 거짓이라고 믿게 된다. 오히려 참혹한 것은 대영제국과 처칠이며, 히틀러 또한 피해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봐도 영국의 만행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간혹가다가 처칠의 이 명백한 범죄를 부정하거나 축소하려는 이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흔히 '네오나치'로 몰아가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을 찬양하고 변호하려는 이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홀로도모르 숫자가 과장되었다거나, 독일의 책임이지 처칠의 책임이 아니라는 식이다.
1945년 4월 19일, 영국군이 Bergen-Belsen 수용소를 인수인계 받은 후, 수감자들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해 불도저로 밀어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연합국의 공세로 인해서 14,000명이 영국이 수용소를 인수인계 받은 후에 굶어서 사망했다
하지만 처칠이 이 기근을 알고도, 그것도 미국과 호주가 식량을 지원해주겠다는 요청도 거절하고 이 벵골 대기근을 방치하여 결국 수백만의 인명을 살상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를 할 수 없다. 그렇게 따지면 나치 독일에 의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표적으로 그리스의 경우 30만 명의 인명이 굶어서 죽었다. 이외에도 소련을 비롯한 수많은 유대인들이 대부분 아사를 통한 정책으로 수백만이 죽었다. 소련에서의 나치 독일의 레닌그라드 포위전으로 인해서도 마찬가지로 수백만이 죽었다.
그들의 논리라면 히틀러가 지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히틀러 잘못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생긴 희생양인 것이다. 북한에 의해서 굶어죽은 사람들 역시 김일성과 김정일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이 북한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굶겨서 죽이려고 했다는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도 일본에 의해 200만 명이 기아로 죽었다. 이 역시 정당화가 가능하며, 제2차 세계대전 말에 나치의 강제 수용소, 대표적으로 Bergen 수용소에서 Auschwitz-Birkenau에서 철수하느라 인원이 초과되어 인원 5~6만 명이 되었는데, 영국이 인계를 받은 이전에는 7,000명이 죽었을 뿐이지만 그 이후에 14,000명이 죽었기 때문에 이는 연합국의 나치의 강제 수용소 부근과 길목에 대해서만 무차별 폭격을 하여 수용자들에 대한 식량중단과 전염병을 창궐하게 했기 때문에 연합국의 책임이자 잘못이라는 논리가 가능하다.
이상입니다.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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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무)신교총연합회ㅡ사)한국신교협동조합 원문보기 글쓴이: 소서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