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원권이 처음 나왔을 때 일이니 2009년 여름쯤 이야기겠다.
어느 날 아침, 등교 준비를 하던 작은놈, 준호가 끌탕을 했다. 엄마, 은행이 ... 내가 학교 끝나서 가면... 언제 안 하나?
중 3이지만 2% 부족한 이놈의 질문인즉슨, 자기가 학교 수업 끝나고 가면 은행에서 창구 업무를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땐 닫아. 그렇지만 에이티엠 기계에서 하면 되는데, 뭐 할 건데? 엄마가 해 줄까?
아냐, 아직 더 모아야 해. 3만 8천원 밖에 안돼.
으잉? 저 녀석이 뭔 돈이 그렇게 많아? 주는 용돈 빤하고 쓰는 데 빤한데 말이다. 어림 계산으로 따져보니 만 오천원 정도 차이가 있다.
얘가 돈이 어디서 나서 그 돈을 모았지? 그 사이 이모들 만난 적도 없는데... 마음이 무거워졌다.
너, 엄마 돈 삥쳤니? 얼렁 자수해, 엄마 사고치기 전에.
애들한테 이런 말투는 교육상 안 좋다. 잘 알면서도 사안이 당혹스러울 땐 말이 이렇게 양아치 버전이 된다. 두려워서 농담버전으로 급전환하는 것이다.
이 놈..., 말이 없다. 그럼 정말 내 지갑에 손을 댄 거란 말야?
미치겠네. 이 걸 어쩐다?
엄마 돈이긴 하지만 지갑에서 가져 간 건 아니다, 모. 내 돈일 수도 있어.
그게 뭔 소리야, 빨랑 말 못해? 고개 돌리고 딴청 하면서 엄청 속을 뒤집다가 털어놓는다.
교통카드... 5천 원만 찍었어. 세 번... .
그 생각도 했다. 그 사이 교통카드 충전한다고 만원씩 세 번 타 갔다. 하지만 사용 기간을 대충 따져봐도 충전 금액과 큰 차이 없길래 그쪽으론 생각을 접었던 것이다.
그래? 근데 날짜가... .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올 때는 걸어왔단 말야.' 한다.
차비 아끼느라 학교 끝나고 집에 올 때는 걸어왔단다. 운동 좀 시키려고 그렇게 꼬드겨도 따라 나서지 않는 놈이 그 더운 여름 날, 30 분도 넘는 거리를!
그러니까 자기 돈일 수도 있다는 논리다. 으휴.... .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멍하니 아이를 쳐다 보다 물었다.
니가, 돈이 왜 그렇게 필요한대?
5만원 모을라구.
그러니까 왜, 왜 5만 원이 필요하냐구우?
5만원짜리 신권, 돈 모아서 바꾸려고.
5만원 신권 발행 기사가 며칠 티브이 뉴스를 장식했을 때, 놈은 침을 꼴깍 삼키며 눈을 반짝였다.
와, 멋있다. 엄마, 나 저거 하나만 사주라. 비싼가? 아... , 나두 갖고 싶다...
옆에서 듣던 누이가 한심하다는 듯 퉁박을 줬다. 야, 그냥 5만 원일 뿐이야. 뭐가 비싸? 참, 나.
그럼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줄 서서 사는 거야? -모자란 놈.
저건 번호가 앞번호라서 기념된다고 바꿔가는 거야. 더 비싼 건 아니라구. -잘난 누나.
헌 돈도 좋으니까 만원짜리 한 배낭만 생겼으면 조케따. - 나.
그러니까... 내가 만 원짜리 5만 원 갖고 가면 5만 원 신권으로 바꿀 수 있다는 거지? 하고 내 모자란 아들놈은 히죽 웃었다.
그랬었다, 그때.
그런데 준호는, 좀 오래 걸리긴 했지만 5만 원을 다 모으고도 신권으로 바꾸지 않고 은행에 저금했다. 관심이 예금 통장 잔액 숫자로 옮겨간 것이다. 이놈이 돈 모으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 결코 남겨서 저금할 수 없는 용돈에서 오백 원, 천 원을 아껴 오만 원 십만 원을 만들고야 만다. 물론 내가 방만히 관리하는(!) 동전 주머니가 미약하나마 일조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가끔 주머니가 완전 거덜나면 놈에게 고리 대출을 쓰다 갚기도 하고, 뭐 그렇게 잼나게 산다. (아이구, 내가 지금 뭔 쓸데없는 말까지.. 흠냐~)
아무튼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놈은 고딩이 되어 코밑도 거시키 밑도 조금씩 시커매지면서 목소리에서 어린애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몸만큼은 아니지만 머리도 많이 영글어져, 조마조마 다니던 주말 산행이 많이 편안해진 어느 금요일 저녁, 일주일치 용돈을 받으려 손 내밀고 있던 놈이 내 지갑 안에 있던 빳빳한 오만원권을 보게 됐다.
아 오만 원짜리다. 맞어, 나 저거 갖고 싶었었어. 그러더니 냅다 자기 방에 들어가서 돈다발을 갖고 나오는 것이다. 천원짜리, 오천 원짜리와 만 원짜리 합해서 딱 십만 원. 추석 명절에 외가에서 용돈을 받은 까닭에 제법 모은 것이다.
엄마, 이거랑 바꿔주세요. 새 걸로. 빳빳한 걸로.
놈은 바꾼 돈을 양손으로 마주 쥐고 냄새를 킁킁 맡다가 뺨에 대보다 하며 난리를 쳤다.
아~, 나는 돈 냄새가 너무 좋아. 근데, 엄마, 이 돈은 만 원짜리보다 돈 냄새가 덜 나서 별루에요, 에이.
나는 한 번도 코를 대고 맡아 보지 않아 모르겠는데 놈의 말에 의하면 돈에는 아주 좋은 냄새가 있으며, 돈마다 조금씩 냄새가 다른데 만원짜리가 제일 맛있는 냄새가 난단다.. 그래서인지 준호는 잡내 섞이지 않은 신권에 집착했고 신권이 생기면 꼭 냄새를 맡았다. 언젠가는 낡은 오천원권과 기막히게 반짝이는 천원짜리 신권 한장을 바꾼 적도 있다. 자기 엄마랑. -_-
5만 원권 두 장을 들고 제 방 책상에서 희희낙낙하는 아이를 보고 배낭을 꾸려놓곤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 아이는 다음날이 놀토라고 늦도록 뭔가 꼼지락거리며 앉아 있었다. 토요일 새벽, 아이들이 아직 잠든 시간에 집을 나와 하루 산행을 마치고 어둑한 시간에 집에 들어섰다. 누나는 아직 안 돌아왔고 작은 놈은 자고 있었다. 엄마 없이 하루 잘 지내준 게 고마워 뺨에 뽀뽀를 쪼옥~ 해주고 일어서다 책상 앞 벽에 붙어 있던 상장 옆에 뭐가 하나 더 있는 걸 발견했다.
얘가 뭘 새로 받아왔나 싶어 불을 켜 보고는 쓰러지는 줄 알았다.
뭐 하는데 두 장씩이나 필요하냐는 내 말에 다 이유가 있다더니... .
어이가 없어 허,허 대는 내 소리에 놈이 부스스 일어나더니 다짜고짜 엄마, 그거 손대지 마! 한다.
얌마, 누가 떼어가면 어쩌려고 이렇게 해 놔?
엄마만 안 건들면 돼요.
내가 왜 니 돈을 건드리냐?
엄마도 돈 좋아하잖아욧.
완전 떡실신 된 저녁이었다.
또래보다 머리 돌아가는 게 많이 뒤처져 학교에서도 왕따인 놈이 어떻게 저런 꾀는 냈는지 지폐 헐까봐 풀이나 테잎을 쓰지 않고 비닐을 씌웠다. 웃기는 웃었지만 또 걱정이 생겼다.
돈을, 그것도 자기의 전 재산을 저렇게 벽에 붙여 놓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 난감했다. 아이가 부족하다 보니 매사 한 바퀴 더 돌아 생각해 보는 습관이 몸에 밴 탓이다.
하지만 학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것은 내 기우에 불과했음을 알게 되었다. 기말고사 끝낸 아이가 친구들과 롯데 월드에 놀러 가기로 했다며 (담임이 반장을 부추겨 끼워 준 것이다) 군자금 요구를 하길래 니돈 있잖아, 로 거절했다. 놈은 제방 벽 [五萬 액자] 앞에서 아주 잠깐 고민하는 척하더니 별 미련없이 테잎을 찍 뜯고 돈을 챙겼다.
에잇, 어차피 쓸 건데... 라고 중얼거린 것도 같은데 난 모른 체 하며 씨익 웃었다.
그때 준호가 좋아한 [돈]은 교환가치로서의 돈이 아니었다. 모양이 예쁜 향지우개나 멋진 호수 풍경 표지의 새 스케치북 같은, 용도대로 써버리기엔 그 자체로 너무 맘에 드는 어떤 물건이었던 것이다. 책상 서랍 처음 칸에 빳빳한 천 원짜리 지폐를 소복이 쟁여놓고 수시로 쓱 열어보곤 씩 웃는 그 모습은 그보다 한참 어렸을 때 온갖 모양의 지우개를 모으며 좋아했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요즘은?
나하고 같다.
엄마, 더러워도 좋으니까 많이만 주세요. ^^
첫댓글 너무 귀여운 준호, 준호만큼 사랑스러운 준호 엄마.
느리지만 조금씩 조금씩 커가는 아이의 마음과 생각에 때로 마음 졸이고 때로 미소짓는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하군요.
엄마란 힘들어도 참 좋은 자리입니다.
돈을 액자에 걸어놓는 마음이 천사 같습니다. 상장 내용을 좀 보려하는데 글씨가 작아서 보이지 않네요^&^
이 글을 보니 5만원짜리 지폐가 이제 예사롭지 않게 보입니다. 돈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교훈도,,,^^
돈을 뒤집어 걸어 놓으면 돈이 나가지 않고 더 들어온다는데
글을 올리고 돈 냄새를 한번 맡아 봤는데... 별로 존 냄새는 아니더라규..-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