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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의 풍광, 情恨이 많은 땅-독특한 장흥문학 발흥 21C는 문화의 세기,장흥문학이‘장흥 희망시대’리드 |
◈…… 이 글은 유선호의원이, 2007년 5월호 <국회보>‘내 고장 자랑’에 실릴 원고를 청탁받아 쓴 글로, 내용이 좋고 장흥군민이 긍지로 삼아도 될 내용이어서, 유선호의원의 허락을 받아 여기에 전재한다. 유선호 의원은 이 글에서 장흥의 문학적인 전통과 역사성을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그러한 문학적인 전통위에 오늘날 장흥의 현대문학이 타지에 비해 탁월한 경쟁력을 갖고 있으므로, 이를 장흥의 고유한 자원으로 재창출해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편집자 주>……◈
지금의 '장흥군'이라는 지명은, 고려 인종(재위 1123∼1146) 때 인종의 비였던 공예태후(문하시중으로 정안후에 봉하여진 당시 정안현 출신 元厚의 딸)로 인해 얻어진 명칭이다. 즉, 공예태후의 고향이라고 해서 당시 정안현이었던 지역을 장흥이라는 명칭과 함께 부사고을로 승격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장흥부는 인종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부사고을이 되었고,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개편이 추진되면서 지금의 장흥군이 된 것이다. 고려, 조선조 부사고을이었을 때 장흥부는 지금의 보성의 회천면과 웅치면, 완도의 금당면, 강진군의 일부까지 포함하는, 전라도 서남부 지역에서 제일가는 요충지였다. 고려, 조선조에 지금의 전라남도에서 부사고을은 순천부와 장흥부였을 뿐이고 전라도 중부에 나주부(또는 목), 조선 중기 이후 광주목이 있었을 뿐이다. 부사를 중심으로 해서, 지방토호 선비들이 모여들고, 열띤 담론이나 강론을 벌이다 보니, 이들 정자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사림士林문화가 생겨나게 된다. 지금 장흥군의 별칭의 하나는 文林義鄕이다. 文林의 고을이며 義鄕의 고을이라는 뜻이다. 文林은 장흥지방에서 '가사문학'이 유난히 활발히 일어나서 붙여진 이름 일 것이다. 그리고 의향은 임진난, 병자란 때 유독 장흥에서 의병으로 참전한 사람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 일 것이다. 이들 문림이니, 의향이니 하는 의미는 결국 장흥지역에 士林문화, 즉 선비문화가 두드러졌고, 특히 선비정신이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선비사상은, 고려 때부터 수세기를 거쳐 부사고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온 장흥지역의 독특환 역사적, 문화적 풍토에서 기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士林은 곧 文林으로 통한다. 다시 말해, 선비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은 文林문화 즉 문학이 발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좋은 예가, 장흥의 가사문학이 조선조 가사문학의 최고봉이었다는 사실이다.
■장흥은 호남 가사문단의 중심무대
이처럼 조선조 장흥지역은 호남지역의 쟁쟁한 가사문단으로서, 가사문학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 장흥의 가사문학의 중심에는 바로 기행가사의 효시로 불려지고 있는 '관서별곡'을 쓴 기봉 백광홍이 자리해 있다. 가사문학에서 최고의 작품은 백광홍의 ‘관서별곡’과 정철의 ‘관동별곡’이다. 이들 두 작품은 한국문학사에서, 우리 말의 아름다움,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 우리 민족성의 아름다움을 문자로 형상화한 최고의 작품들로 꼽힌다. 그리고 ‘관서별곡’은 기행가사의 효시로,‘관동별곡’은 기행가사의 백미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기봉의 ‘관서별곡’(1556년)이 ‘관동별곡’(1580년)보다 무려 25년이나 앞선 작품이고, 기봉의 작품이 송강의‘관동별곡’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조 이후 모든 기행문학의 모체로까지 전해지면서도 늘 그 작품성과 명성이(송강)에 가려져 왔다는 점이다. 시조가 단가라 한다면 가사는 긴 시조 쯤이다. 시조가 지금의 시문학이라 하면, 가사는 지금의 소설문학, 즉 산문문학인 것이다. 조선전기에 출발한 가사문학은 중기, 후기, 개화기로 이어 오면서 양반 사대부에서 여성 평민층의 문학으로 보편화된 우리민족 문학의 큰 갈래였다.
그런데 왜 이 가사문학의 산실이 그동안 전남 담양 지역으로만 알려진 것인가. 이는 송강 정철의 명성 외에도 광주호 상류 지역에 있는 소쇄원, 식영정, 면앙정 등 잘 알려진‘가사문학의 유적’때문이며, 정철 외에도 송순, 기대승, 김성원, 김인후, 고경명, 김덕령 등 소위‘인물 파워 브랜드’ 덕분이기 때문이다.
■조선조 산문문학 계승
80년대 삼성출판사에서 간행된 ‘제3세대 문학전집’은 당시 중진급 작가들의 소설문학을 중심으로 기획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이다. 이 책을 기획한 실무진들은 작가를 선정하면서 지방의 군(郡)단위의 한 지역에서 세 명의 작가를 어김없이 포함시켜야 한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여기서 그 작가들이란 이른바 우리지역 출신의 송기숙, 이청준, 한승원 세 분이었다.(윤수옥 전 문화원장의 증언) 이 세 분의 문학적 성과는 오늘날 한국 현대소설문학사에 뚜렷한 한 획을 긋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시문학에서도 김제현(시조-회진), 정재완(시-안양)을 비롯해 최근 시문단에 확실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김영남(대덕), 이대흠(장동), 위선환(장흥), 전기철(관산), 이성관(장동)등 많은 시인들과 아동문학의 김녹촌(부산), 소설문학의 김석중(부산), 윤석우(장흥)등 나름대로의 탄탄한 문학적 입지를 굳히며 활동하는 문인들이 부지기수다.
현재 장흥군에서 파악되고 있는,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해 활동하고 있는 문인수가 무려 70여 명에 이른다고 하니, 시쳇말로 ‘장흥가서 글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 것이다.
■정한의 땅, 장흥에 문학이 일어선다 기실, 장흥에는 옛부터 탄탄한 문학적인 자원이 전승돼 왔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는 바야흐로 열리고 있는 장흥문학의 르네상스 기운으로 이어지고 있다. ‘천년학’이 이를 단적으로 상징한다. 장흥문학의 1천년 전성사대가 열리고 있음을 상징한다. 본래부터 장흥은 문학이 꽃피울 수 있는 땅이었다. 천혜의 아름다움과 情恨을 지닌 곳이었었다. 득량 앞바다와 천관산 제암산 억불산 사자산 등 수려한 산들 그리고 호남 3대강인 탐진강 등 천혜의 자연조건이 바로 문학을 싹틔우는 토양이었다.
조선조 장흥부는, 제주목을 제외하면, 지정학적으로서울에서 가장 원거리에 위치한 부사고을이었다. 이런 오지의 장흥부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탐관오리들의 득세, 부사 등 중앙관리의 압정과 수탈이었을 것이다. 해서, 장흥부에 부사가 부임해 3년만 있으면 평생을 먹을 것을 착복해간다는 말도 생겨났다. 즉 장흥에서는 세군 데서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백성을 수탈하는 관리들이 도사렸던 곳이다. 이조 말, 왜 장흥에서 동학운동이 거세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당시 장흥지방에는 그만큼 관리들의 극심한 횡포와 수탈이 심했고, 그만큼 압제를 당했던 농민들이 많았고, 그런 연유로 동학교가 성행하고 이것이 바탕이 되어 장흥에서 동학최후의 격전이 치러질 수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이 당하는 수탈과 핍박은 恨을 잉태한다. 그 恨은 情恨의 노래가 되고 가락이 된다. 그리고 시가 되고 가사가 되고 문학이 된다. 장흥이 서편제의 본향으로서 판소리와 남도국악의 중심무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현대 장흥작가들에 의해‘동학문학’(송기숙‘녹두장군’, 한승원‘동학제’)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 그 장흥문학으로 인해 장흥이 일어서고 있다. 그 장흥의 비상을 바로 엊그제 개봉한 ‘천년학’이 이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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