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사후 세도정치기 동안에는 정조의 정치 이념을 유지한다는 명목상인 기능만 남은 채 실질적인 기능은 유명무실화되었다. 초계문신 제도가 사실상 폐지되고, 규장각의 실무를 담당하는 잡직들이 대폭 감축되었다. 사권, 영첨, 감서 등의 잡직이 폐지되고 각감과 검서관, 사자관 8명, 화원 10명, 형조에서 파견된 검률 1명만 남게 되었다. 세도정치기에 규장각의 활동은 대폭 축소되었고, 편찬물의 양이나 질도 현저하게 떨어졌다.
고종 즉위 후에는 종친부(宗親府)와 홍문관의 기능 강화를 통해 왕권을 높이려 했던 대원군의 정책에 따라 규장각은 그 위상이 크게 약화되었다. 대원군은 1864년 종부시를 종친부에 합치고 창덕궁에 있던 규장각의 현판을 종친부로 옮겼다. 고종의 친정(親政) 이후 규장각은 고종이 추진한 개화 정책의 중심 기관으로써 개화 서적 수입을 주도하는 등 그 기능과 위상이 회복되었다. 고종대의 규장각 건물들은 경복궁에서는 수정전(->관문각->가회정->협길당->집옥재)을, 창덕궁에서는 서향각을 중심으로 재배치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건물 배치는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정치적 선도 기구로써의 기능은 예전과 같지 않았고, 차츰 왕실 도서관으로써의 기능만 남게 되었다.
규장각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궁내부에 소속되었고, 이듬해 규장원(奎章院)으로 변경되었다가, 1897년(고종 34)에 규장각으로 환원되었다. 규장각에 대변동이 일어난 것은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한 1907년 이후였다. 1907년 궁내부 관제가 개편되면서 규장각은 홍문관의 업무 기능을 통합하여 조직이 확대되었다. 일제는 1908년 9월 규장각 조직을 좀더 정비하여 규장각 내에 전모과(典謨課), 도서과, 기록과, 문서과 등 4개의 과(課)를 설치했다. 이것은 일제가 규장각 도서에 대한 점검과 목록 작성의 필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규장각 조직이 확대되면서 규장각은 본래의 규장각 도서 이외에 홍문관, 시강원, 집옥재, 사고(史庫) 등의 도서까지 관장하였다. 이들 도서들은 1909년 11월 경사자집(經史子集)의 분류 체계에 의거하여 [제실도서목록(帝室圖書目錄)]으로 간행되었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한 이후 규장각은 폐지되었고, 소장도서들은 이왕직(李王職) 서무계 도서주임이 관리하도록 조치하였다. 1911년에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이 규장각 도서를 인수하였고, 1922년 11월부터는 학무국에서 규장각 도서를 관리하다가, 1928년부터 1930년 사이에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이관하였다. 1945년 광복과 함께 규장각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서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인계된 규장각 도서들은, 1992년 서울대학교 안에 ‘규장각’이라는 건물이 신축되면서, 자료 보관과 학술 연구기관으로 발전하였다. 2006년 설립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정조대에 설립된 규장각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한국학 연구의 중심기관으로 그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
첫댓글 현재 규장각은서우래에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