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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 어울림의 길
처갓집 가훈이〔근면,성실,정직〕인데 그 가운데‘성실’이라는 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담겨져 있는지 까진 가늠하긴 어렵지만, 아마도 어머니 혹은 사랑이란 단어 비슷하게 많이 담겨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한때 나는‘성실(誠實)하려는 것은 사람의 길이요, 성실 그 자체는 하늘의 진리다.’라는 경구를 나의 좌우명으로 삼고자 했던 적이 있었는데 후에 이 경어의 출처가《중용》이라는 것을 알고는 중용이 무엇인지, 성실하면 중용인지, 그냥 중립을 지키는 것이 중용인지를 생각하며 이유 없이 성실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그저 성실하다는 말이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중용》의 성실을 다시 대하면서는 어떤 거대한 벽 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중용》은 사서오경(四書五經)*의 사서 중, 하나로《불경》,《성경》과 같이 경전이라고 불린다. 《중용》의 저자는 자사(子思)로 알려져 있는데,《사기》〈공자세가〉에 “공자는 리(鯉)를 낳았고 그의 자는 백어(伯魚)이다. 백어는 나이 쉰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백어는 급(伋)을 낳았고, 급의 자는 자사(子思)인데, 62세까지 살았다. 자사는 일찍이 송나라에서 고생을 하였고《중용》을 지었다.”고 했다.
(孔子生鯉 字伯魚 伯魚年五十 先孔子死 伯魚生伋 字子思 年六十二 嘗困於宋 子思作中庸)
*사서오경:《논어》《맹자》《중용》《대학》을 사서라 하고,《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를 오경이라 함.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사마천이《사기》를 쓸 당시에 자사는 이미 죽은 지 300여 년이 지났고, 공자의 학맥을 이었다고 하는 맹자(BC 372∼289)도 공자의 제자 증삼과 자사를 자주, 높이 일컬으면서도 정작 자사의 학문을 이었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맹자는 공자보다 100여년 뒤에,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죽고도 반세기 뒤에 태어났다. 공자 - 자사로 이어지는 학맥을 이으려면 자사의 제자의 제자로부터 배워야 할 것인데 그런 내용을 언급한 바가 없으며 맹자 스스로 ‘아직 공자의 문도가 되지 못하였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중용》은 공자의 학문을 자사가 저술한 것이 아니라 맹자가 살던 전국시대에 저술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보편적 시각이라고 한다.
《중용》을 자사의 저술로 보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내용에 보이는 사상적 특성인데 유가사상 흐름에 비추어 볼 때 맹자가 저술 한《맹자》이후에나 나올 법한 사유가《중용》에 내재되어 있어서 《중용》을 자사시기에 저술했다고 보기 어렵고 전국시대의 저술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용》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誠), 성실에 대해 “성스러움(성실)이란 힘쓰지 않아도 알맞게 되고,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들어맞고, 하잔하게(주위가 텅 빈 것 같은 외롭고 쓸쓸한 느낌)있을 때도 이치에 맞는 것이니 이는 성인의 경지다.”(誠者 不勤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라고 한 것인데, 이는 도가(道家)의 무위사상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제 천하를 모는 수레에는 바퀴 간격이 같고, 서체는 글자의 형태가 같으며, 행위에서는 모듬살이(공동생활)의 규범이 같다.”(今天下 車同軸 書同文 行同倫)고한 말은《순자》*에 나오는데, 이것은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 한 뒤, 혹은 천하통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책의 편저자는 《중용》은 자사나 맹자보다 순자의 사유에 가깝다고도 한다.
*순자 : 이름은 순황(荀況). 자는 순경(荀卿). 공맹사상을 체계화했으며, 사상적인 엄격성을 통해 이해하기 쉽고 응집력 있는 유학사상의 방향을 제시했다. 유학사상이 2,000년이상 전통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부분 유교철학에 공헌한 순자 때문이다. 저작인〈순자〉는 대부분 순자가 직접 쓴 것으로, 후대에 수정되거나 위조되지 않고 원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순자사상의 핵심은“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선한 것은 수양에 의한 것일 뿐이다.”는 선악설이다.
여기서 이 책의 편저자에 대해 알아보자. 저자 정천구는 1967년생으로 부산대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석·박사가 되었다.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 문학과 사상을 비교연구하고, 대학 밖에서 인문학 강좌를 하고 있으며, 저서로는「논어 그 일상의 정치」,「맹자독성」,「동양의 이상」, 명심보감을 번역한 「밝은 마음을 비추는 보배로운거울」, 일본 불교설화집「일본영이기(日本靈異記)」,「삼국유사 바다를 건너다」등이 있다.
《중용》은 제1장‘어울림의 길’부터 제36장‘소리도 냄새도 없어라’까지 모두 3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런 분류법은 보통 쓰이는 주자의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북경대에서 발간한「예기주소(禮記注疏)」를 저본으로 하여 분류한 것이라고 한다.
제1장은“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라고 하였는데 이는‘하늘이 내려준 것을 본바탕이라 하고, 본바탕을 따르는 것을 길이라 하며, 길을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라고 해석하였다. 여기서 첫 글자는 천명이다. 천명이란 무엇인가? 사실 공자는 천명(天命)과 성(性)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고 나중에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오십오이지우학 삼십이립 사십이불혹 오십이지천명 육십이이순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吾十五而之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고 하여 천명을 언급했는데 천명은 곧 하늘의 명령이지만 해석에 따라 여러 가지로 풀이된다. 고대로부터 알려져 있던 천명과 공자가 말한 천명의 차이를 알아야 여기《중용》에서 말하는 천명을 이해하게 된다.
천명은 기원전 1050∼기원전 1045년 즈음에 주(周)왕조가 상(商)왕조를 멸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면서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으로서, 주나라가 상나라를 깨뜨리고 도성으로 들이닥치자 상나라 주왕(紂王)은 스스로 불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에 주나라를 개국한 무왕(武王)이 한 말이 바로 천명을 따른다는 것이었다.
「무왕은 도로를 치우고 사직과 궁을 수리하게 하였다. 때가 되자 100명의 장사가 운한기(雲罕旗)를 들고 선두에 섰다. 무왕의 동생 숙진탁(叔振鐸)은 의장대를 이끄는 상거(常車)를 몰았고, 주공(周公)단(旦)은 큰도끼를 쥐었으며, 필공(畢公)은 작은 도끼를 쥐고 무왕의 좌우에 섰다. 산의생(散宜生), 태전(太顚), 굉요(閎夭)는 모두 검을 들고 무왕을 호위하였다. 무왕이 성에 들어가서 사직 남쪽 주력부대의 왼쪽에 서니 좌우가 모두 따랐다. 모숙정(毛叔鄭)이 명수(明水-정화수)를 받쳐 들었고, 위강숙(衛康叔)봉(封)은 자리를 깔았으며, 소공(召公)석(奭)은 예물을 올렸고, 사상보(師尙父-태공망)는 제물을 끌고 왔으며, 윤일(尹佚)이 축문을 읽었다.
‘은(殷)의 마지막 자손 주(紂)는 선왕의 밝은 덕을 모두 없애고 신령을 멸시하여 제사도 지내지 않았으며 상(商)백성들을 난폭하게 다루었으니 이에 천황상제(天皇上帝)께 모든 것을 환희 드러내 아뢰옵니다.”고 하고, 무왕이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니 윤일이 “대명을 받아 은을 바꾸었으니 삼가 하늘의 영명한 명을 받습니다.”고 하였다. 무왕은 다시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 다음 물러나왔다.」
새로 개국한 주나라는 상나라가 섬기던 천황상제께 상나라 주왕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아뢰었는데 이는 패망한 왕조의 신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상제를 대신할 존재로 천(天)을 내세웠다. 윤일이‘대명을 받아 은을 바꾸었으니 삼가 하늘의 영명한 명을 받듭니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대명과 영명한 명이 바로 천명인 것이다. 천명을 실제로 받았는지, 주기나 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고 오직 왕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사후 합리화고 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제사장인 왕이 천명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한 천명은 공자가 말한 천명과는 확연히 다르다. 공자가 말한 지천명의 천명은, 자신 밖에 있는 지고한 존재, 다시 말해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자각(自覺)해서 알아채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왕이 아닌 사람, 누구라도 천명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공자시대에 이르러서는 천명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천명으로 대체된 것이다.
공자가 말한 지천명의 천명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자신에게 부여된 시대적 소명을 말하는 것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장구한 역사를 꿰뚫어보면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역사에 대한 예리한 인식이 있으면 천명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역사인식을 갖게 하는 말이 《논어》〈위정(爲政)〉편에 나온다.
“자장이 열 세대 뒤의 일을 알 수 있습니까?”하고 묻자, 스승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은나라는 하나라의 예법에 말미암았으니, 덜고 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법에 말미암았으니, 덜고 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주나라를 잇는다면 백 세대 뒤의 일이라도 알 수 있다.”라고.(子張問 十世 可知也, 子曰 殷因於夏禮 所損益 可知也 周因於殷禮 所損益 其或繼周者 雖百世可知也)
공자는 열 세대 뒤의 일뿐만 아니라 백 세대 뒤의 일도 알 수 있다고 했다. 과거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이해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명을 알고 미래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어떤 종교적 제의(提議)나 천신(天神)의 개입도 필요하지 않고, 오직 인문적인 교양과 통찰력을 가지면 가능하다고 한 것이다. 공자가 학(學)을 강조하고 중시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 책 제목이〈중용, 어울림의 길〉이듯이 《중용》에서는 어울림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어울림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희로애락지미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 중야자 천하지대본야 화야자 천하지달도야 치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
이는‘기쁨·성냄·슬픔·즐거움 따위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알맞음이라 하고, 일어나고 나서는 모두 상황에 알맞은 것을 어울림이라고 한다. 알맞음이란 천하의 큰 뿌리요, 어울림이란 천하의 온갖 것이 가야할 길이다. 알맞음과 어울림이 이루어지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지키고, 온갖 것이 잘 자란다.’
경전이라고 불리는 고전이라서 그런지 말들이 딱딱하고 조금은 생소한 것 같기도 하다. 《중용》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렵고 그렇다는 말이다. 제6장에는 이런 말이 있다.
‘子曰, 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踏也 中庸不可能也’
(자왈, 천하국가가균야 작록가사야 백인가답야 중용불가능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천하와 나라와 집안은 고르게 다스릴 수 있다. 높은 벼슬과 녹봉은 사양할 수 있다. 시퍼런 칼날을 밟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상에서 알맞게 하는 일은 잘 할 수 없다.”〈중용불가능야〉라는 것은 일상에서 중용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잘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만큼 중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진시황(秦始皇)은 중국 최초의 황제다. 아무도 그의 칭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참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춘추시대 제후들간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하나의 국가로 통일을 이루었는데 현재의 중국은 진시황의 제국에서 시작되었다. 알렉산더 제국도, 로마 제국도, 칭기스칸의 제국도 다 사라졌으나, 진시황의 제국만은 아직도 굳건하다. 역사가 2천 년 넘게 이어올 수 있었던 데는 진시황이 인재를 적재적소에 잘 쓰기도 했지만, 당시 승상이었던 이사(李斯)의 힘도 컸다.
이사는 본래 초나라 상채(上菜)사람이었다. 그는 젊을 때 군에서 지위가 낮은 관리로 있었는데 어느 날 관청 뒷간에서 쥐들이 더러운 것을 먹다가 사람을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는 꼴을 보았다. 며칠 뒤 이번에는 곳간에 들어갔다가 쥐들이 곡식을 먹으면서도 사람이 들어가도 안중에 없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에 이사는‘사람이 어질다거나 못났다는 것을 비유하자면 쥐와 같아서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에 달렸을 뿐이구나.’라고 탄식하였고 이에 깨달은 바 있어 순경(荀卿), 즉 순자를 찾아가 천하를 다스리는 제왕학을 배웠다. 몇 년 뒤 스스로 공부를 다 했다고 생각한 이사는 얼른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초나라 왕은 섬길 인물이 못된다고 생각하였고 다른 다섯 나라는 모두 약소국이라 뜻을 펼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서쪽 진나라로 갔다. 그는 스승과 작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때를 얻으면 꾸물대지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만승(萬乘)의 제후들이 바야흐로 서로 세력을 다투고 있는 때라 유세가들이 정치를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진나라 왕은 천하를 집어삼키고 제(帝)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이는 지위나 관직이 없는 선비가 능력을 펼칠 때이며 유세가의 시대가 왔음을 뜻합니다. 비천한 자리에 있으면서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는 것은 짐승이 고기를 보고도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본다고 하여 억지로 참고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큰 부끄러움은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며, 큰 슬픔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것입니다. 오랜 세월 낮은 자리와 곤궁한 처지에 있으면서 세상의 부귀를 비난하고 명리를 미워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선비의 마음이 아닐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진나라로 가서 유세하려고 합니다.”
과연 이사는 진나라로 가서 승상 여불위(呂不韋)를 찾아 그의 사인(舍人-집사)이 되어 기회를 노렸다. 그 후 진왕을 만나 객경(客卿)이 되었으며, 그의 계책이 받아들여지고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그는 승상이 되었다. 법률과 제도를 밝히고 율령을 만들었으며,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한 것들이 모두 이사의 머리에서 나왔다. 제국의 질서를 구축하는 공을 세운 이사는 승승장구하여 아들은 진황의 부마가 되고, 딸은 모두 공자들에게 시집을 갔다.
이때 삼천군(三川郡)태수가 된 맏아들 이유(李由)가 휴가를 얻어 진나라 수도 함양(咸陽)으로 돌아왔을 때 이사는 집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여러 관원들이 이사의 집을 찾아 장수를 기원했는데 이때 이사의 집 대문 앞과 뜰에는 수레가 수천대나 늘어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아 나는 스승 순자가‘사물이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한 말을 들었다. 초나라 상채에서 태어난 평민으로 시골마을의 백성일 뿐인데 주상께서는 내가 아둔하고 재능이 없는 줄도 모르고 뽑아서 오늘날 이 지위에까지 오르게 하셨다. 지금 다른 사람의 신하 된 자로 나보다 윗자리에 있는 이가 없고 부귀도 극에 달했다고 할만하다. 만물은 극에 이르면 쇠하거늘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구나!”
이사는 한낱 평민에서 제국의 승상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런 그가 왜 탄식하면서 앞날을 걱정했을까? 그것은 자신의 탐욕으로 지위가 높이 올랐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탐욕스런 자는 탐욕으로 말미암아 몰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사는 진시황이 갑작스럽게 죽자 환관 조고(趙高)의 꾐에 넘어가 조서를 거짓으로 꾸미는 일에 협조하면서 몰락으로 치달았고 결국 조고와의 권력싸움에서 패하여 참혹한 죽음을 맞게 된다. 조고가 이사와 그 아들 이유가 모반을 꾀했다고 꾸몄던 것이다. 이사의 최후에 대해 《사기》〈이사열전〉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2세 황제 2년 7월, 이사에게 오형(五刑)*을 갖추어 죄를 논하고 함양의 시장 바닥에서 허리를 자르도록 하였다. 이사는 옥에서 나와 함께 잡혀온 둘째 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 너와 함께 다시 한 번 누런 개를 이끌고 상채 동문으로 나가 토끼 사냥을 하려고 했는데 이제 그렇게 할 수 없겠구나!’
드디어 아버지와 아들은 소리내어 울고, 삼족이 모두 죽음을 당했다.”
*오형: 대명률에 의거하여 죄인을 처벌하던 다섯가지 형벌.태형(笞刑),장형(杖刑), 도형(徒刑),유형(流刑),사형(死刑)을 말한다.
이사는 통일된 진나라의 기반을 다지는 등 큰 업적을 남겼지만 일상의 소박한 즐거움을 누리지는 못했다. 언제나 누릴 수 있었지만 결코 누리지 못했다. 승상의 지위에 올라 부귀가 극에 달했을 때, 그가 했어야 할 일은 탄식이 아니라 중용의 길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뿐 아니라 삼족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부귀가 극에 달했음을 알았을 때, 그리고 앞날에 대한 일말의 걱정과 두려움이 생겼을 때, 그는 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소박한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을까?
스승 순자에게 당당하게 말했던 성공에 대한 열망이 탐욕으로 치닫지 않도록 제어할 수 있는 굳은 마음, 참다운 군자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말이 있다. 의를 저버리고 부리던 사람을 내치는 경우에 쓰인다.‘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는 삶기게 된다는 뜻이다.‘하늘 높이 나는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은 소용이 없게 되어 창고에 간직하게 된다.(高鳥盡良弓蔣)’는 말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토사구팽의 고사는 한(漢)나라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의 대군과 맞서 싸울 때 지략과 용맹의 장수 한신(韓信)이 항우를 이기고 유방을 패왕에 올렸으나, 유방은 한신이 반란을 꾀할 것을 우려해 그를 내쳤던 것에서 유방에게 토사구팽 당한 한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달 읽은 〈춘추전국사〉에서 춘추시대 마지막 패자가 되었던 월나라 구천(句踐)은 유방보다도 500여년이나 앞서 이미 토사구팽을 실천하였으니 그래서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하는가 보다. 회계산의 치욕을 갚고자 구천은 오나라 부차(夫差)의 변(便)을 맛보는 등으로 그에게 충성하면서 와신상담(臥薪嘗膽)으로 복수의 칼을 갈아 20년 후 다시 오나라로 쳐들어가 부차를 사로잡았고 부차에게 용동(甬東)이란 곳으로 가 그곳을 다스리라고 하였으나 부차는 나는 이미 늙었으므로 왕을 섬길 수 없다며 자결하였다.
구천이 오왕 부차를 사로잡고 패업을 이룬 데는 그 자신 섶에서 누워 자고 쓸개를 씹어 맛보는 등 의지를 다진 강함도 있었지만, 그의 곁에는 계연(計然)과 범려, 그리고 책사 문종(文種)이라는 인재가 있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문종은 구천이 회계산의 치욕을 갚고 월나라를 다시 일으킨 계책을 만든 인물이었다. 하지만 문종은 비극적 최후를 맞는데 『오월춘추』는 이렇게 적고 있다.
「구천은 오왕 부차를 자진하게 만든 뒤, 오나라 도성에 입성해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군신들이 모두 기뻐하였으나, 구천의 얼굴에는 기뻐하는 빛이 없었다. 이에 범려는 구천이 욕심이 많아 군신들의 죽음을 애석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챘다. 범려는 이제 구천의 곁을 떠나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신하로서 예를 잃을까 걱정했다. 그리고는 문종에게 권했다.
“그대도 곧 떠나야만 하오. 월왕은 틀림없이 그대를 죽일 것이오.”
문종이 듣지 않자 다음날 그에게 서신을 보냈다.
“천지자연이 그렇듯이 사람도 성쇠의 변화가 있소. 지극히 현귀(顯貴)한 자리에 오르면 반드시 밑으로 떨어지기 마련이오. 진퇴와 존망의 변화하는 이치를 파악하는 것은 지극히 지혜로운 자만이 할 수 있소. 나는 비록 재능은 없으나 그 이치를 분명히 알고 있소. 높이 나는 새가 흩어져 사라지면 좋은 활은 창고 속에서 묵히게 되고, 영리한 토기가 사라지면 좋은 사냥개는 삶기게 되는 법이오. 월왕의 관상을 보면 목이 길고 입이 튀어나오고 매의 눈초리에 이리의 걸음을 하고 있소. 이런 상은 환난은 같이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는 없소. 그대가 월왕을 떠나지 않으면 그는 장차 그대를 죽이고 말 것이오. 틀림없을 것이오.”
그러나 문종은 끝내 범려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범려의 편지를 받고나서 우울해진 문종은 조정에 나가지 않고 있었고, 범려는 구천 24년(기원전 471)월왕과 작별해 그의 곁을 떠났다. 범려의 스승이었던 계연도 미친척하며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 다음 어떻게 되었을까? 『오월춘추』에는 계속해서 이렇게 적었다.
「이듬해인 구천 25년 1월 7일 이른 아침에 구천이 문종을 불렀다.
“내가 듣건대 적을 알기는 쉬워도 자기편을 알기는 어렵다 했소. 그러니 내가 어찌 상국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겠소.”
“슬픈 일입니다. 대왕은 신이 용감하다는 것만 알고 신이 어질다는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신은 여러 차례에 걸쳐 직언을 하며 대왕의 심기를 건드린바 있습니다. 신이 이로 인해 죄를 얻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신은 이미 대왕의 속마음을 읽었습니다.”
구천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문종은 상국부로 돌아온 뒤 자신의 똥을 받아 상국을 상징하는 세발솥 손잡이 부분에 칠했다. 그러자 문종의 처가 물었다.
“당신은 일국의 상국자리를 천시하니 왕이 내리는 봉록을 무시하는 것입니까? 평민에서 상국의 자리에까지 올랐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라는 것입니까?”
문종이 대답했다.
“나는 월왕을 위해 모든 계책을 바쳤소. 그럼에도 월왕은‘적을 알기는 쉽고 자기편을 알기는 어렵다’고 했소. 불길한 징조요. 내가 장차 다시 궁에 들어가게 되면 살아나오기 어려울 것이오.”
얼마 뒤에 구천이 다시 문종을 불렀다.
“그대는 비밀스런 계책으로 오나라를 무너뜨렸고, 아홉가지 계책 가운데 지금까지 겨우 세 가지만 썼는데도 강대한 오나라를 깨뜨릴 수 있었소. 나머지 여섯 가지는 지하에서 나의 선군들을 위해 써주시오.”
문종이 밖으로 나오며 탄식했다.
‘아아! 큰 은혜는 보답 받을 수 없고, 큰 공은 보상 받을수 없다더니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한 말이었구나. 범려의 말을 듣지 않고 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후회스럽다.’
이후, 구천이 문종에게 촉루검(薥鏤劍)*을 내리자 문종은 검 위에 엎어져 자진했다. 구천은 문종을 도성 서쪽에 장사지냈다.」
*촉루검 : 춘추시대 말 월나라 명장(名匠) 구야자가 만든 검. 오나라가 월나라보다 국력이 강했던 시기 오왕 수몽시절에 월나라를 압박해 받아낸 명검 중 하나로 오왕 부차가 상국이던 오자서를 죽이기 위해 이 검을 내렸는데 속뜻은 이 검으로 자살하라는 의미였다. 또한 나중에 월왕 구천도 오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명신 문종에게 이 검을 내렸다.
범려가 말했듯이 구천은 환난은 함께 할 수 있어도 태평시절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 원수는 반드시 갚지만, 환난을 함께한 동지조차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어찌 참된 강함이라고 하겠는가? 그것을 모르고 바르게 처신하지 못한 문종은 진나라 승상 이사와 똑같이 후회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한편, 제나라 도(陶)땅에 간 범려는 주공(朱公)이라고 이름까지 바꾸고 장사를 해 크게 성공했다는 이야기는《사기》에 실려 있다.
《중용》제10장에는 이런 말이 있다.〈忠恕違道不遠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충서위도불원 시거기이불원 역물시어인)“참된 마음과 헤아리는 마음은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 남이 자기에게 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나 또한 남에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논어》에도 같은 말이 있다. 공자가 제자 중궁이 어짊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한다.‘문을 나서서는 큰 손님을 뵙는 듯이 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하라.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 나랏일에서도 틀어진 사람이 없게 하고, 집안에서도 틀어진 사람이 없게 하라.’〈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在邦無恕 在家無恕〉(출문여견대빈 사민여승대제 기소불욕 물시어인 재방무서 재가무서) -《논어》〈안연(顔淵)〉는 말이다.
‘어짊이 무엇이냐?’고 하는 제자의 물음에 공자는 거침없이‘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남에게 시키지 마라’고 답한 것을 보면 이는 대단히 어렵고 쉽게 도달 할 수 없는 경지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실제로 공자는 《논어》〈공야장〉에서 “평생토록 간직하며 행할 만한 말 한마디를 해 주십시오.”라고 한 제자 자공에게도 같은 말을 해 주었다. 사람은 겉모습과 사는 방식, 살아가는 환경은 제각각이지만 기본적인 심리는 별반 다르지 않다. 남과 내가 같은 마음이거나 바람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이는 자신에게 ‘참된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참된 마음이란 남을 향해 가지는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반성하면서 내면을 갈고 닦고 다듬어야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원석을 쪼고, 갈고, 닦고, 다듬듯이 거칠기 짝이 없는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숨겨진 결을 찾아내려고 애써야만 비로소 가지게 되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남들에게 쓸 때, 그 마음을 서(恕)라고 하는데 마음이 헤아리는 마음인 것이다.
며칠 갑자기 찾아 온 추위에다 컴퓨터가 고장 나 수리를 맡기느라 책을 계속해 읽는데 문제가 생겼었다. 그리고 연말에 일본여행을 가기로 하고 있어서 그런지 짬도 잘 나지 않고 해서, 대충 줄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여기까지 썼다. (2018.12.13.)
이 책에도 여러 번 인용되고 있는 요순(堯舜)시대의 요순임금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어진 마음과 올바른 판단으로 천하를 다스린 이가 요순이었다. 요가 순을 기용하여 일찌감치 자신을 대신하게 했던 것은 아들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아들보다 순이 더 현명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하여 요는 자신의 아들 단주(丹朱)를 제쳐두고 순에게 제위를 선양했다. 순 또한 자신의 아들 상균(尙均)이 모자라다고 여겨 우(禹)에게 제위를 넘겨주었다. 이렇게 하여 천하가 계속 태평할 수 있었다. 요순은 어질면서도 올발랐고 올바르면서 어질었으니 이것이 바로 참된 어짊이다.’
맹자는 이 참된 어짊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요는 순을 얻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걱정이었고 순은 우와 고요를 얻지 못하는 것이 걱정이었다. 100무의 밭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걱정인 자는 농부다.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은혜라 하고 착함을 남에게 가르치는 것을 참된 마음이라 하며, 천하를 위해 사람을 얻는 것을 어짊이라 한다. 이런 까닭에 천하를 남에게 주는 것은 쉬우나 천하를 위해 사람을 얻는 것은 어렵다.” - 《맹자》〈동문공상〉(堯以不得舜爲己憂 舜以不得禹皐陶爲己憂 夫以百畝之不易爲己憂者 農夫也 分人以財謂之惠 敎人以善謂之忠 爲天下得人者謂之人 是故以天下與人易 爲天下得人難) (요이부득순위기우 순이부득우고도위기우 부이백무지부이위기우자 농부야 분인이재위지혜 교인이선위지충 위천하득인자위지인 시고이천하여인이 위천하득인난)
독후감을 쓸 때 처음에 출처와 내용을 잘 모르면서도 나의 좌우명으로 삼고자 했다고 한 성실에 대해 ‘성실하려는 것은 사람의 길이요 성실 그 자체는 하늘의 진리다.’라고 했는데 이 부분을 제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중용》제22장에 이 책의 편저자는 성(誠)을 성실이 아닌 성스러움으로 번역했다.
“誠者 天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誠者 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성자 천하도야 성지자 인지도야. 성자 불면이중 불사이득 종심중도 성인야. 성지자 택선이고집지자야)가 그것이다.
“성스러움은 하늘의 길이요, 성스러워지려는 것은 사람의 길이다. 성스러움이란 힘쓰지 않아도 알맞게 되고,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들어맞고, 하잔하게 있을 때도 이치에 맞는 것이니, 이는 성인의 경지다. 성스러워지는 것은 좋은 것을 가려서 그것을 굳이 지키는 일이다.”
성(誠)을 성실이 아닌 성스러움으로 풀이하는 이유에 대해‘사실 성은 경(敬)과 같이 사람사이에 쓰인 말이 아니다. 하늘이나 신에 대해 쓰던 말이다. 《예기》〈제통〉에 “현자가 제사 지낼 때는 그 성스러움과 미쁨, 참됨과 지극함을 다한다.”고 한데서 본래적 의미는 드러난다.’고 하였으며 이 말은 《맹자》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是故 誠者 天下道也 思誠者 人之道也 至誠而不動者 末之有也 不誠 末有能動者也”(시고 성자 천하도야 사성자 인지도야 지성이부동자 말지유야 불성 말유능동자야) - 《맹자》〈이루상〉
“그러므로 성스러움은 하늘의 길이요, 성스러움을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길이다. 지극히 성스러우면서 남을 움직이지 못한 사람은 아직 없었고, 성스럽지 않으면서 남을 움직일 수 있었던 자도 없었다.”
《중용》에서는 성지(誠之)라고 한 것을 《맹자》에서는 사성(思誠)으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는데 《중용》은 성스러움이 어떠한 경지인지, 성스러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를 언급하고 있으나, 《맹자》는 성스러우면 효용이 크다는 것만 언급하고 있다. 다시 말해 《맹자》에서 말한 성을 《중용》에서는 훨씬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중용》의 저자가 공자의 손자가 아니라, 맹자 이후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것이다. 그리고 순자에 이르면 이 부분은 더 세밀하고 풍성해진다.
“군자가 마음을 기르는데 있어 성스러움보다 좋은 게 없다. 지극히 성스러우면 달리 할게 없으니, 오로지 어짊을 지키면 되고 올바름을 행하면 된다. 마음을 성스럽게 지니고 어짊을 지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신묘해지고, 신묘해지면 교화시킬 수 있다. 마음을 성스럽게 지니고 올바름을 행하면 이치에 맞고, 이치에 맞으면 분명해지고, 분명해지면 변화시킬 수 있다. 변화와 교화가 번갈아 일어나면 이를 하늘의 덕이라 한다. 하늘은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높다고 받들며, 땅은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두텁다고 받들며, 사계절은 말을 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때를 기다린다. 대체로 이에는 한결 같음이 있는데 이는 지극한 성스러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 《순자》〈불구〉
이쯤 되면 《순자》는 《중용》과 《맹자》를 모두 아울렀다 해도 될 만큼 포괄적이고 자세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강오륜〉은 《논어》나《맹자》에 나오는 고전인줄 알지만 여기 《중용》에도 그 내용이 있다. 《중용》제18장에 “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 曰, 君臣也 父子也 夫婦也 昆弟也 朋友之交也 五者, 天下之達道也 知仁勇三者 天下之達德也 所以行之者一也”(천하지달도오 소이행지자삼 왈, 군신야 부자야 부부야 곤제야 붕우지교야 오자, 천하지달도야 지인용삼자 천하지달덕야 소이행지자일야)라고 했다.
“세상에 이르러야 할 길이 다섯이며, 그 길을 가면서 갖추어야 할 것이 셋이다. 말하자면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 지아비와 지어미, 형과 아우, 벗끼리의 사귐이다. 이 다섯은 세상에서 이르러야 할 길이다. 앎과 어짊과 용기, 이 셋은 세상에 갖추어야 할 덕이다. 길을 가고 덕을 행하게 하는 바탕은 하나이다.”
이런 군신의 의리와 붕우지교까지 다섯 가지 관계에 대해서는 맹자도 말한 적이 있는데 “사람에게는 가야할 길이 있으니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으며 편안하게 살면서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짐승에 가까워진다. 성인은 이를 걱정하여 설(契)을 사도(司徒)로 삼아서 모듬살이에 지켜야 할 도리(人倫)을 가르쳤으니, 아비와 자식 사이에는 가까움이 있고,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올바름이 있고, 지아비와 지어미 사이에는 다름이 있고,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고, 벗들 사이에는 미쁨, 즉 신의가 있다.”고 했다. “人之有道也 飽食煖依 逸居而無敎 則近御禽獸 聖人有憂之 使契爲司徒 敎以人倫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인지유도야 포식난의 일거이무교 즉근어금수 성인유우지 사설위사도 교이인륜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삼강오륜〉을 끝으로 무술년 끝자락에 《중용》의 독후감을 끝낼까 한다. 언제나 끝은 곧 시작이듯 내년 기해년에도 고까운 마음으로 읽고 또 베끼는 재미를 생각해 본다. 2018.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