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2]
살며생각하며
중앙대교당 100년을 맞이하며
심암 이동초_서울교구
천도교중앙총부는
포덕59년(1918) 4월 천일기념식을 맞아
의암성사를 비롯한 140여명의 교역자들이 참석한
교구총회(부구部區총회)를 개최하고,
건축자금은 교인들의 성금으로 충당하여
교당을 신축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 교인들에게
호당 10원 이상을 성금으로 낼 것을
종령으로 반포하여 모금을 시작하였다.
모금이 시작되자 전국의 교인들은 생활수단인
논과 밭 황소 등을 팔고 짚신을 삼아 성금을 냈다.
1918년 12월까지 전국 각 교구에서
중앙총부에 납부한 성금은 8만6천여 원에 달하였다.
일제는 건축성금을 독립자금으로 의심하여
기부행위금지법 위반이라며
교당건축에 관한 지출부를 압수하고
이미 모금한 성금을
각 교구에 되돌려 주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중앙총부는 1919년 2월에 4만원을
각 교구에 우편환으로 송금해 주고
나머지는 4월5일 천일기념식까지 납부되는
연성미와 상계하여 모두 반환하여야 하였다.
(노헌용3.1독립헌병대조서2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왜경 감시의 눈을 피해
거짓으로 성금을 돌려받는 것처럼 하면서도
실제 각 교구에서는 영수증을 보내오는 등의 방법으로
계속 모금 운동을 하였다.
중앙총부는
오백여 만원을 모금하여 [신인간(1969.3),
‘독립선언 반세기의 회고(하)’:
“평북 선천·의주 일대에서만
그때 돈 150만원을 걷었다”,
“천도교에서 각출한 독립자금은 5백만 원이 넘었다.”]
대교당 건축비 22만 원
(사무실까지 27만 원)이 소요되었고
나머지는 3·1운동과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윤치오 소유인 대지를 2만 원에 매입하여
1918년 12월 1일 경운동에서 교일기념일을 맞아
개기식(開基式)을 거행하였다.
[천도교회월보(1918.12) ] 처음 의암성사는
400평 규모의 대교당 건립을 계획하고
당국에 건축 허가를 신청하였으나
조선총독부에서 교당이 지나치게 거창하고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구실을 내세워
허가를 내주지 않아
규모가 절반 정도로 축소되었다.
원래 대교당 건축계획은
1920년 4월에 낙성할 계획이었으나,
1919년 삼일운동으로 공사가 지체되었다가
1920년 2월에서야 겨우 공사를 시작할 수가 있었다.
3.1운동 때에는
대교당의 건축설계만 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오영창이 공사를 지휘하여 완공을 하였다.
[천도교회월보(1919.3)]
오영창이 공사를 맡아 지휘한 것은
의암성사가 3.1독립운동 때 오영창에게
독립운동에 참가하지 말고
대교당 공사만 맡으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권동진, ‘2백만 교도의 통솔자 손병희(회고)’,
삼천리 제7권 1935.6]
대교당의 공사는
대교당의 설계자는 나까무라 요시헤이(中村興佐平),
시공자는 중국화상총회장인 장시영(張時英)이었다.
[나까무라 요시헤이(1880-1963).
조선은행(본점-지금의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군산,
중국다롄, 중국선양), 예산호서은행본점, 숙명여고,
서울중앙고 서관·동관, 덕수궁미술관 등을 건축. ]
붉은 벽돌과 화강석으로 이루어진
지상 2층, 중앙 탑부 4층의 구조로
외형이 견고하고 이색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건물은 연면적 280.68평으로
1층은 212평, 2층 45.6평, 3층 14.44평,
4층 7.84평 규모이며, 정면 좌우대칭으로
뒷면에 강당을 연결한 T자형이다.
건물 내외부에 한민족을 상징하는
박달나무 꽃과 무궁화 등을 조각하였다.
2층으로 건축된 사무실(총부본관)은 88평이며,
그 외 10간의 조선식 숙직실이 있었다.
대교당과 중앙총부본관은
1919년 12월말에 준공되었고
내부 장식 등 기타 공사는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조선일보(1920.12.18.),
‘천도교회당 공사경과 상황’]
대교당과 총부본관 건축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는데
특히 3.1운동으로 총부 간부들 대부분이 투옥되고
교회가 마비된 상황에서 공사를 했기 때문이다.
1920년 9월에는 건축 공사장에 도둑이 들어
송판을 훔쳐가기도 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1920.9.25.)]
석재는 창신동 석산에서 채취하였고
붉은 벽돌 구입에 애로가 있었고,
천장 앵글철재는 미국에서 수입하였다.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대교당과 총부본관의 건축은
진행이 되어 결국 1920년 12월에 준공되어
1921년 2월 28일에는
송현동에 있던 중앙총부를 비롯한 천도교회월보사,
천도교청년회, 개벽사 등이
신축 총부본관 건물로 이전하였다.
안타깝게도 의암성사는 대교당 건축을 염원하셨지만,
생전에 이곳에 들르지 못하고
사후인 1922년 6월 5일
영결식을 대교당에서 거행했다.
그 후 1924년 10월
‘대신사출세백세기념관’을 건축하여
명실상부한 천도교중앙총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천도교에서는
1천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백세기념관을
일반에게 무료로
어떤 단체에게도 제한 없이 제공하기도 하였다.
[대신사백세출세기념관은
대신사 탄신 백년을 기념하여
일반사회에 공헌하고 건축하였다.
건축비 3만5천원은 성금을 모았고, 건물 앞쪽은 2층,
뒤쪽으로 1층의 연면적 160평이었다.
1968년 철거되었고 현재
기념관의 궁을장만 수운회관 앞에 놓여있다.]
건축 당시 천도교중앙대교당은
당시 명동성당, 조선총독부 청사와 함께
서울의 3대 건물의 하나로 평가되었다.
대교당과 백세기념관에서는
시일식이나 교회행사 외에도
민족운동 단체들의 수많은 집회공간으로서
수난의 근대를 엮어가는 산실이 되었다.
이렇듯 어려운 여건 속에서
중앙대교당이 탄생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의암성사의 결단과
수많은 교인들의 정성으로 모아진 성금으로 만들어져
오늘까지도 천도교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었고,
1978년 12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로 지정되었다.
대교당은 문화재로써의 가치보다는
교회의 역사적 유산으로 영구보존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대교당 환경을 더 정리하였으면 한다.
즉 현재의 서울교구 철거하여 수운회관으로 이전하고,
수운회관 1층은 전시실로 사용하는 등
교회활동 공간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
대교당 보전을 위해 중요한 것은
우리 천도교인 모두가 주인이기 때문에
모두가 관리자가 되어 보존하는 동시에
대교당 홍보원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