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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0]_이동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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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2019. 11. 4.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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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강좌
동학혁명기념사업추진단은 9월 24일 충남 당진문화원에서 ‘의암성사 손병희와 당진대도소 복원 재조명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학술대회는 윤석산 한양대명예교구가 좌장맡아 ▲기조강연 ‘의암 손병희의 사상과 당진대도소’를 발표하였고, 주제발표로 ▲당진의 손병희 고택 발견과 의의(이동초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토론: 윤성의 당나루 향토문화 연구소), ▲당진 대도소 이전복원과 활용계획(남광현 당진문화관광과 문화재팀장, 토론: 남연호 최보따리인문포럼연구원), ▲천도교 당진교구의 설립과 당진의 사회운동(김학로 당진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토론: 박성묵 예산역사연구소장), ▲당진 승전곡 전투와 문화콘텐츠 활용방안(채길순 명지전문대 교수, 토론: 김시형 성남녹색시민연대 이사, 천도교종학대학원 강사)이 이어졌다. 이동초 선생과 김학로 선생의 글을 소개한다.
당진의 손병희 고택 발견과 의의
심암 이동초_서울교구
동학이 내포 지역에 처음 들어온 시기에 대한 기록은 춘암 박인호가 1883년 3월 18일 (음력 2월) 「동경대전」 계미중춘판 간행소를 설치한 목천군 구내리 김은경의 집으로 최시형을 찾아가 입교한 것이 최초로 보인다. 그리고 서산 태안 당진지방은 서산군 지곡면 장현리 독주골 출신의 원암元菴 최형순이 종사 관계로 관향인 경주에 왕래하면서 경주최씨 문중에서 동학의 1, 2대 교주가 출현하자 1890년 3월에 최시형을 찾아가 입도함으로써 당진과 서산지역에 동학이 처음으로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당진지방의 동학 유입이 최형순에 의해 유입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1894년 10월 동학혁명 때 승전곡 전투를 위해 여미평에 집결한 접주 가운데 면천의 이창구 한명순 이화삼, 당진의 박용태 김현구 등이 포함되어 있어 동학혁명 이전에 이미 동학이 유입되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동학시대 당진지역의 동학에 관한 기록은 동학혁명에서 유일하게 일본군에 승리한 승전곡 전투를 들 수가 있다. 당진지역에서 기포를 통해 승전곡 전투에 참가한 기록은 발견할 수 없으나 여미벌에 모인 2만여 명의 동학군은 서산 태안 당진 등지에서 참가한 교인들이기 때문에 다수의 당진지역 교인들이 참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 후 1905년 동학이 천도교로 선포되어 중앙총부가 설립되고 전국에 280여 개의 지방 교구와 73개의 대교구가 설립되었다. 손병희가 1년 4개월간 이곳에 살았던 까닭으로 수청리와 대덕리를 중심으로 당진지역에 포덕이 일어나는 되는 계기가 되어 1910년 10월 15일 대덕리 무암无菴 차동로의 집에 최초로 천도교전교실을 설치되었고, 1911년 1월에는 당진교구가 설립되어 수백여 명에 달하는 교세로 천도교회 활동과 함께 삼일독립운동, 육십만세운동, 신간회운동, 청우당운동 등의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동학혁명 이후 해월 최시형은 1898년 4월 6일 새벽 원주군 호저면 고사리(송골)에서 세찰사 송경인에게 체포되어 한성 경무청으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고 서소문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4월 20일부터 10여 차례에 걸쳐 공평동(종로 네거리)에 있는 고등재판소를 오가면서 재판을 받은 후 5월 29일(양력 7월 18일)고등재판소 재판장 조병직으로부터 대명률 제사편 금지사무사술조(大明律 祭祀編 禁止師巫邪術條)의 죄목으로 교형에 처한다는 평결을 받고 2일 후인 6월 2일(양력 7월 20일)에 고등재판소 형장에서 순도하였다. 이때 손병희는 광희문(시구문)밖에 버려진 시신을 이종훈 등의 제자에게 은밀히 수습하도록 하여 송파 이상하의 산에 성분을 하였다.
해월 최시형의 장례를 마친 후 손병희는 1898년 7월 20일 풍기현(경북 영주)에서 법대도주의 의식을 거행하였으나 관군의 지목을 피해 한곳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곳에 은신처를 물색하게 되었는데 이때 덕산군 출신의 박인호가 당진 모동(띠울마을)에 은신처를 주선하였다. 이때 가옥을 어떻게 마련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손병희와 가족들, 그리고 최시형의 가족들까지도 함께 이곳에서 거주하였다면 대가족이라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박인호와 박명배를 비롯한 다수의 제자까지 함께 옮겨 왔다면 이곳 마을 주변에 다른 거처도 함께 마련하였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래서 이곳 출신인 김현구와 박명배가 큰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박인호는 해월 최시형이 체포되어 경성감옥을 있을 때 내포 지역으로 김명배를 보내어 홍주의 김봉렬의 논 40두락 팔아 최시형의 감옥비용을 마련도록 한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당진군 수청리 출신의 김현구와 김명배에게 손병희의 거처를 물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산군 지곡면 장현리의 동학접주 최재순으로 하여금 논 3마지기를 팔아 벼 20석을 사서 손병희의 식량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이곳 띠울마을은 본래 마을 앞 냇가에 맑은 물이 흐른다고 해서 수청골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당진군 동면 동고곡리, 서고곡리, 모동 등과 남면 토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이루진 마을이라고 한다.
천도교회사를 보면, 손병희는 이곳으로 오던 날 천동지정天動地靜의 이치를 이회理會하여 초저녁부터 새벽에 이르기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대지자전(大地自轉-地動說)함을 각득하였다. 그리고 손병희가 이곳 띠울마을에 와서 보니 집 앞에는 샘이 있었으나 물이 말라 버린 채로 낙엽이 덮여 있어 마땅히 사용할 물이 없었다. 그래서 손병희는 샘 밑에 쌓여 있는 낙엽을 치우고 바닥을 깊이 파자 물이 솟아 나와 청수를 사용할 수가 있을 뿐 아니라 물이 부족한 모동의 30여 호가 물을 흡족하게 사용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2월 손병희가 청양군 정산면 말티(斗峙-마치리)로 떠나자 샘물은 다시 말라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손병희는 이곳에 머물면서 이듬해 1899년 3월 10일 박인호에게 춘암春菴의 도호를 주었다. 4월에는 어육주초魚肉酒草를 금하는 글을 반포하고 한울님의 명이라 하자 사람들이 이를 믿지 않자 생선으로 천령天靈을 체험하도록 하였다. 4월에 「화개문답가」(無何詞), 7월에 「각세진경」, 8월에는 「명심장」 「우음」(心爲古今囊 天地囊中輕 囊中一片物 囊外遍法界 天地爲一囊 世事輕一塵……) 등을 지었으며 9월에는 통유문(천고만물이 각각 性이 有하고…중략…창생을 濟할 성경신에 재하고 장생불사의 藥이 또한 각자의 흉중에 재하니라)을 전국 도인들에게 발하였다.
발견 무렵 안채 모습
필자는 오래전부터 천도교회사에 기록되어 있는 손병희가 살았다는 ‘당진군 모동’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면서 찾기를 계속하였다. 한번은 밀양 손씨가 많이 살고 있다는 모동(茅洞)과 한자가 비슷한 저동(苧洞)이 고대면 진관리의 옛 이름이 ‘당진군 상대면 저동’으로 이곳을 지목하기도 하였으나 집 앞에 있는 우물 터를 찾을 수가 없었고, 또는 순성면에 모시골이 있다고 해서 확인하였으나 역시 찾지 못하고 말았다.
2012년 1일 1일 당진군이 당진시로 승격되면서 2011년에 펴낸 『당진읍지』에 필자는 <당진지역의 천도교 활동>을 집필하게 되었는데 이때 손병희가 은거한 모동과 천도교 당진교구의 위치를 찾는데 계기가 되었다. 『당진읍지』 필진으로 함께 참여한 향토사학자 윤성의와 함께 모동(茅洞)이 ‘띠울골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수청리 일대에서 옛 우물을 수소문하여 마침내 이곳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3년 3월 천도교 서울교구에서 이곳을 답사한 후 당진시청 문화체육과 문화재 남광현 팀장을 찾아 조사 경위를 말하고 손병희의 고택을 확인하게 되었다.
2013년 당시 서울 종로에서 이곳까지는 106㎞의 거리로 지동차로 가면 1시간 50분이 소요 되었다. 당진시청 앞에서 순성으로 가는 2차선 도로(615번)를 따라 100m 거리 왼쪽에 길목에 [당진1동 띠울마을]이란 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안내판을 따라 좁은 길에 들어서자 서쪽에 마을회관이 있고 300m 정도를 더 가면 좌측 언덕에 가옥 두 채가 있다. 집 주위에 잘 다듬어진 수목이 어우러진 동쪽 집은 차윤화씨의 집이고, 서쪽에 있는 빈집이 바로 손병희가 120년 전에 살았던 집이었다. 150여 년에 지어진 손병희가 살았던 집은 20년 전까지 사람이 살았으나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상태로 보였다. 평지보다 높은 터에 자리한 집을 밖에서 올려다보니 자물쇠를 채운 대문과 허물어진 동쪽 벽이 보이고 뒷산은 큰 소나무가 무성하고 집 뒤에는 왕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때 고택 옆집에 살고 있는 차윤영이 고택의 잠긴 대문을 열어주어 집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습기가 많은 뜰에는 잡초가 깔려있고 본채에는 서쪽으로부터 장독을 묻을 수 있는 광, 2개의 큰 가마솥과 벽에 붙어있는 시렁이 있는 부엌, 천정이 낮은 안방, 뒤쪽으로 쪽문이 나 있는 윗방, 바닥이 바둑판 조각으로 된 대청, 안방과 윗방 앞은 마루로 되어있고, 동편 맨 끝에 달린 작은 방은 증축을 하여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대청에는 대나무가 바닥을 뚫고 나와 나무판 한 장을 밀어 올라와 있을 뿐 아니라 뜰과 사랑채 문간에도 솟아나 있었다. 본채보다 약간 작은 넓이의 아래채는 사랑방과 대문, 헛간으로 된 구조로 곧 쓰러질 것 같은 상태로 몇 개의 버팀목으로 지탱시키고 있었다. 집안의 가구는 그대로 방치된 상태로 어수선하였지만 건축 구조를 보니 비전문가가 보아도 오래된 조선시대에 지어진 고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윤영씨는 백부 차상윤과 차운회로부터 어린 시절에 손병희가 1년 남짓 살았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으며 또 밀양 손씨가 많이 있는 고대면 대촌리와 진관리를 한번 왕래하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집 앞 아래 5m쯤 되는 곳에 우물이 있었는데 20여 년 전에 우물을 그대로 메워버리고 그 위에 향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설명이 없이는 전연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당시에 이곳은 국토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따른 계획관리 지역(개발행위 허가제한 지역)으로 지정되었다고 하였다.
1906년 1월 손병희가 일본에서 귀국하여 살았던 곳은 천도교회 관련 상춘원을 제외하고는 서울 다옥정(현재 다동), 대사동(현재 인사동), 가회동(현재 재동)이 있으나 그 중 어느 곳에도 원형이 남아 있는 가옥은 없다. 다만 출생지인 청원에 고택 유허지가 있지만 원형이 아닌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손병희가 살던 곳으로 원형이 남아 있는 곳은 이곳 고택이 유일하다. 이곳은 의암 손병희가 동학혁명 이후 잠시 은거하였던 곳이지만 전국 동학도인들에게 통문을 발하고 법설을 강론하는 등 동학지도부가 재기를 도모하였던 대도소 역할을 한 곳이기 때문에 동학유적지로써의 가치 뿐 아니라 고택은 한말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문화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한편 천도교당진교구(1910년부터 당진교구, 1923년부터 당진종리원, 1933년부터 당진교회, 1940년부터 당진교구)에 관해서는 “1921년 6월 29일에는 당진 읍내에 교구 건물을 신축하여 당진면장 이춘세(李春世)가 내빈으로 참석한 가운데 낙성식을 가졌으며 이날 신축된 교당에서는 이기정의 사회로 일본 동경유학생 순강단의 강연회가 개최되어 6백여 명의 청중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으며 저녁에는 이문구락부(以文俱樂部 : 1920년대 초기 당진지역의 청년단체 중 가장 먼저 등장한 단체로 주민교육을 위한 야학의 설립, 보통학교 수준의 강습소 설립, 각종 재난구제 활동, 강연과 계몽을 통한 근대 의식의 고취 등을 설립 목적으로 내세워 당진지역 민족운동의 근원을 제공한 단체)에서 주최한 유학생 연사를 위한 환영회가 있었다.”라는 신문기록이 있으나 아직 교구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 고택이 확인된 후 교구 위치(당진시 서문2길 19-48)를 찾았다는 뉴스를 접하여 다행으로 생각한다. 특히 전국 140여 개소의 신간회지회 중에는 천도교의 지방교구를 사무실로 두는 곳이 많았는데 당진지회 역시 사무실을 당진교구에 두고 활동하였기 때문에 위치가 확인되면 목포교구와 서산교구처럼 <천도교당진교구 터>와 <신간회당진지회 표지석> <청우당당진지부 터>를 건립하여 사적지로 남겨야 할 것이다.
특히 1927년 12월 6일 창립된 신간회당진지회는 1931년 3월 해소할 때까지 만 3년 4개월간 활동을 하였는데 1928년 1월의 정기대회에서는 ①군내사정을 조사하여 일람표를 작성할 것 ②소비조합을 창설하여 기성조합과의 연합을 권유 알선할 것 ③공사립보통학교 부형회 사업을 확충하여 전군적 연합을 권유 알선할 것 ④각 지방 배치 공의(公醫)는 조선인으로 주장하고 일반여론을 환기할 것 등의 사항을 토의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①의무교육을 실시를 주장하자! ②교육용어를 조선어로 주장하자! ③문맹 퇴치에 노력하자! ④모든 권리취득은 조선인의 선취권을 주장하자! ⑤조선인 본위의 산업정책 수립을 주장하자! ⑥이민정책의 철저를 주장하자! ⑦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주장하자! ⑧조선에 대한 특수적 법령의 개폐를 주장하자! 등을 표어로 결의하였다.
이와 같은 강경한 결의와 투쟁적인 표어를 보면 당시 일제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식민정책에 저항하여 비타협적이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대처했던 당진지역은 항일 역사의식이 어느 지역보다도 대단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충남 지역에서 동학과 관련된 유적지는 1883년 3월에 <동경대전> 계미중춘판을 간행한 목천군 구내리(천원시 병천면 도원리 면실마을), 목천 세성산 전적지, 공주 우금티 전적지, 공주 용못(송장배미) 등 수십 곳에 달하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12곳에 불과하다고 한다. 내포지역은 호남지역에 못지않게 동학군의 활동이 활발했고 격전지가 많을 뿐 아니라 피해도 큰 지역이다. 특히 이곳 당진지역에는 사기소리의 승전곡 전적지, 수청리 동학대도소(손병희 고택)가 있다. 또한 삼일운동 때 면천공립보통학교 3·10학생독립만세운동과 천도교인이 다수 참여한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을 비롯하여 1920년대 육십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및 1930년대 청우당 운동을 펼쳤던 천도교당진교구 등을 들 수가 있다.
따라서 당진지역의 동학혁명과 삼일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에 관한 학술연구는 물론 내포동학혁명기념관 건립, 천안 공주 서산 당진 태안 예산 등을 연결하는 답사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문화재로 지정하는 등 체계적으로 당진지역 역사로 정리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