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서 본 ‘상윳따니까야(Saṃyutta Nikāya)’ 20강
히리숫땅
Hirisuttaṃ
양심 경(S1:18)
사왓티양
Sāvatthiyaṃ.~~ (생략)
데와따(Devatā)
천신
1. 히리니세도 뿌리소 꼬 찌 로까스밍 웃자띠
Hirīnisedho puriso ko ci lokasmiṃ vjjati
요 닌당 압빠보다띠 앗소 바드로 까사미와띠
Yo nindaṃ appabodhati asso bhadro kasāmivāti
1. 세상에 어떤 자라도 양심으로 악을 억제한다면
잘 달리는 말에게 채찍의 그림자처럼 비난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바가와(Bhagavā)
세존
2. 히리니세다 따누야 예 짜란띠 사다 사따
Hirīnisedhā tanuyā ye caranti sadā satā
안땅 둑캇사 빱뿌야 짜란띠 위사메 사만띠
Antaṃ dukkhassa pappuyya caranti visame samanti
2. 양심으로 악을 억제하고 그들이 항상 알아차림을 행한다면
괴로움의 끝에 도달하여 험난한 길을 평탄하게 걷는다.
천신이 부처님께 여쭌 게송의 내용은 잘 달리는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봐도 알아서 달리기 때문에 말이 똑똑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길들여지고 똑똑한 말처럼 악행이라는 것을 미리 알아서 벗어나고, 양심이 있기 때문에 악행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과연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본문 게송의 첫 문장은 ‘히리니세도 뿌리소 꼬 찌 로까스밍 웃자띠(Hirīnisedho puriso ko ci lokasmiṃ vjjati)’입니다. 히리니세도(Hirīnisedho)는 합성어인데 히리(Hiri)는 ’부끄러움‘, 수치심’, ‘참’, ‘양심’입니다. 니세도(nisedho)는 ‘억제하는’, ‘금지하는’, ‘방지’입니다. 뿌리소(puriso)는 ‘인간의’, ‘인간에게 적합한’, ‘고용인’입니다. 꼬(ko)는 ‘누가’, ‘누구든지’이고, ci(찌)는 ‘어떤’, ‘~이라도’, ‘누구든지’입니다. 로까스밍(lokasmiṃ)은 ‘세상에’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어떤 자라도 양심으로 악을 억제한다면’입니다.
히리(Hiri)라고 할 때는 참된 것을 말하는데 양심을 의미하기도 하고 부끄러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양심이 있으면 당연히 부끄러워할 줄 압니다. 니세도(Nisedho)는 ‘막아주다’는 뜻도 있고, ‘굽히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양심이 중요한데 양심이 있는 사람들은 악행을 막아줍니다. 보통 히리(Hiri)라고 말할 때는 웃땁빠(ottappa)를 함께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웃땁빠(ottappa)는 ‘수치심’입니다. ‘양심’과 ‘수치심’은 깨끗한 마음의 작용으로 선행에 속합니다. 그래서 히리니세도(Hirīnisedho)는 양심이나 부끄러움 때문에 억제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양심이 있어서 악을 억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 문장은 ‘요 닌당 압빠보다띠 앗소 바드로 까사미와띠(Yo nindaṃ appabodhati asso bhadro kasāmivāti)’입니다. 요 닌당(Yo nindaṃ)은 ‘비난 받다’입니다. 다음에 압빠보다띠(
appabodhati)는 ‘깨닫지 못하다’입니다. 그래서 이해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비난받는 것을 막아주는 방법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압빠보다띠(appabodhati)는 아(a)와 빠보다띠(pabodhati)로 나누어서 봐야 합니다. 아(a)는 ‘없음’이나 ‘아님’을 뜻합니다. 빠보다띠(pabodhati)는 ‘깨다’, ‘자각하다’, ‘각성하다’입니다. 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깨어서 지켜보는 알아차림과 같은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때의 알아차림이 사띠(sati)입니다. 그래서 압빠보다띠(appabodhati)는 ‘깨닫지 못하다’입니다. 깨닫지 못하다는 뜻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의 뜻은 ‘매우 잘 달리는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아주 잘 달리므로 애써 채찍질을 할 필요가 없듯이, 양심으로 악을 억제하는 자는 하등에 비난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천신의 질문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양심과 부끄러움이 있으면 해로운 법인 불선법(不善法)을 행하지 않습니다. 이때의 불선법이 아꾸살라 담마(akusalā dhammā)로 10가지가 있습니다. 천신은 부처님께 과연 이 세상에 이와 같은 자가 있는지 여쭙고 있습니다. 잘 달리는 뛰어난 말이 마부가 휘두르는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마부의 의중을 꿰뚫어 보고, 그 채찍이 자신에게 떨어지지 않게 잘 달린다는 것입니다. 천신은 이와 같이 채찍을 맞지 않는 말처럼 과연 불선행을 하지 않아서 비난받지 않는 비구가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출가자들은 깨닫지 못하는 압빠보다띠(appabodhati)에서 벗어나려면 10가지 해로운 법들을 알아서 열심히 실천해야 합니다. 10가지 해로운 법들은 앙굿따라니까야의 욕설경에서 청정범행을 닦는 이에게 욕설과 비방을 하고 성인을 헐뜯는 자는 10가지 재앙을 받는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10가지 재앙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얻지 못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2. 얻은 것에서 퇴보한다.
3. 정법이 깨끗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4. 정법에 대해 오만해진다.
5. 청정범행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6. 오염된 범계를 저지른다.
7. 혹독한 병에 걸린다.
8. 미치고 마음이 혼미해진다. 정신적인 조울병에 걸린다는 뜻이다.
9. 몽매한 채로 죽는다.
10. 지옥에 태어난다.
그러므로 이상의 10가지 재앙을 당하기 때문에 입을 잘 단속하라는 뜻입니다.
10가지 해로운 법들을 미리 아는 비구는 눈치를 채고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경전을 보면 암바빨리(Ambapālī)라는 아라한이 된 몸을 파는 창녀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원래 매우 예쁘고 아름다운 분이었습니다. 암바(amba)는 망고라는 뜻으로 이분이 태어나서 망고 숲에 버려진 아이여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왕에게 데려가서 왕이 키웠습니다. 그러나 점점 예뻐지고 아름다운 몸을 가지게 되어 왕자들이 이 여인 때문에 서로 달라고 싸웠습니다. 그러자 꼬살라(Kosala) 왕이 왕자들에게 몸을 파는 기생이 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암바빨리(Ambapālī)는 빔비사라(Bimbisāra) 왕과 사랑한 사이였습니다. 빔비사라(Bimbisāra) 왕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부처님의 의사인 지와카(Jīvaka)입니다.
빔비사라(Bimbisāra) 왕의 아들인 아자따삿뚜(Ajātasattu)도 이 암바빨리(Ambapālī)를 좋아했습니다. 빔비사라(Bimbisāra) 왕은 아이가 태어나면 나중에 아자따사뚜(Ajātasattu)에게 뺏길 것이라고 생각해서 지와카(Jīvaka)를 의사로 키워 부처님께 맡겼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지와카(Jīvaka)는 부처님만 치료해드린 것이 아니고 스님들의 병도 많이 고쳐준 분입니다.
암바빨리(Ambapālī)는 태어날 때마다 몸을 파는 여자로 태어났습니다. 과거 생의 어느 날 어떤 탑을 지나는데 아라한스님이 침을 뱉는 것을 보고 심하게 나쁜 말을 한 과보로 지옥에도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태어날 때마다 몸을 파는 여자로 태어났습니다. 누구나 남에 대해 비난을 많이 하면 결국에는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꼬깔리까경에 보면 암바빨리(Ambapālī)가 어느 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고 했는데 같은 날에 꼬살라(Kosala) 왕도 공양을 올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암바빨리(Ambapālī)에게 갔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처님이 암바빨리(Ambapālī)에게 반해서 공양 받으러 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부처님은 공양을 청한 한 순서대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부처님께는 올리는 최고의 공양과 최악의 공양이 있습니다. 꼬살라(Kosala) 왕의 최고의 공양행사는 다른 어떤 행사와 비교할 수 없는 공양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하인이 쌀을 구하는데 20년 걸려서 얻은 쌀과 물로 밥을 했습니다. 이때의 쌀도 하인이 먹는 좋지 않은 쌀이었지만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꼬살라(Kosala) 왕의 공양과 가난한 하인의 공양의 공덕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은 오직 부처님만이 할 수 있는 말씀이셨습니다. 부처님은 정말 알아차림을 잘 하시고 사신 것입니다.
또 다른 비난과 관련된 경이 상윳타니까야의 꼬칼리까 경인데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이 경에 나오는 꼬깔리까 비구는 꼬깔리까라는 나라의 부자의 아들로 태어나 부처님께 출가하였는데 아버지가 사찰을 만들어줘서 그곳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비구가 목련 존자를 비난했습니다.
어느 날 목련존자와 사리불존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때 고깔리까 스님은 그 지역의 대표 비구 격으로 큰 스님들이 오셨는데도 사람들에게 알려주지도 않고 신도들에게 당신들은 사리불과 목련존자가 와있는지 모르느냐고 말했습니다. 두 분의 비구가 오셨는데도 공양을 올리지 못하도록 말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제일 잘 났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도들은 뒤 늦게 부처님의 지혜제일 제자와 신통제일 제자가 와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신도들이 공양도 올리고 여러 가지 보시물을 올렸습니다. 그러자 두 분 비구는 그것을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줬습니다.
꼬깔리까는 옛날에는 하루 한 끼만 먹고 수행하던 사람들이 여기서는 공양을 다 받아먹는다는 불만이 생겨서 부처님께 일렀습니다.
그 때 꼬깔리까 비구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꼬깔리까 비구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그릇된 원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그릇된 원의 희생양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자 세존께서는 꼬깔리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꼬깔리까여.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꼬깔리카여.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 대해 마음을 청정히 하라.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온후한 사람들이니라.”
두 번째로 꼬깔리카 비구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그릇된 원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그릇된 원의 희생양이 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꼬깔리까 비구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꼬깔리까여.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꼬깔리카여.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 대해 마음을 청정히 하라.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온후한 사람들이니라.”
부처님께서 3번씩이나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계속 비난한 과보로 고깔리까는 바로 암이 걸렸습니다. 온 몸에 겨자씨 크기만 한 종기가 나고, 그 다음에 녹두 콩 크기에서 완두콩 크기가 되고, 대추씨 크기가 되고 대추크기에서 아말라까 열매 크기가 되고, 익지 않은 빌바 열매 크기가 되고, 익은 빌바 열매가 되어서 결국 터져서 고름과 피가 나서 까달리 파초에 누워 있다가 그 병으로 죽었습니다. 이때 범천에 있던 사함빠띠 천신이 이것을 보고 있다가 세존께 와서 고깔리까 비구가 죽어서 지옥에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사함빠띠는 니그로다 나무아래서 처음에 부처님께 법륜을 간청한 바로 그 대범천입니다. 이런계 범천은 경전에 뚜두, 나라다, 가띠까라, 바까, 사닝꾸마라, 사함빠띠 등이 나옵니다.
그것을 들은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다시 말해줍니다. 그 때 어떤 비구가 부처님께 홍련지옥의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봅니다. 아비지 지옥의 한 부분이 무간지옥인데 여기는 참으로 길어서 몇 년이나, 몇 백 년이라거나, 몇 천 년이라고 숫자로 헤아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부처님은 홍련지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비구여, 꼬살라에 있는 20카라 분량의 참깨를 실은 수레가 있는데 사람이 백년에 한 번씩 지날 때 한 알의 참깨를 주워간다고 할 때 꼬살라에 있는 20카리 분량의 참깨가 이런 방법으로 다 멸진되고 다 없어지는 것이 하나의 압부다 지옥의 기간보다 더 빠를 것이다.
비구여, 20압부다 지옥이 1니랍부다 지옥의 기간과 같고, 20 아바바 지옥은 1아하하 지옥의 [기간]과 같고 … ”
찬나도 사리불과 목련존자를 비난했지만 지옥에 가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서로의 의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찬나는 사람을 죽이려는 의도가 아니었고, 꼬깔리까 비구는 악의적인 비난이었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계율에 따라서 과보도 다르고 공덕도 다릅니다. 사미에게 올리는 공덕과 비구에게 올리는 공덕이 다릅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부처님께 올리는 공덕과 승가에 올리는 공덕과 과보가 모두 다릅니다. 이는 마치 개미를 죽이는 것과 사람을 죽이는 것의 과보가 다른 것과 같습니다. 좋은 과보를 갖고 있는 사람을 죽이면 더 큰 나쁜 과보를 받습니다. 그래서 아라한을 죽이면 바로 지옥 간다고 하는데 일반 스님을 죽이면 바로 지옥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를 죽이면 바로 지옥 간다고 했고 일반 사람을 죽이면 지옥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이 바로 지옥에 간다고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의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자기감정으로 한다는 것 자체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의도가 있는 행위가 바로 업입니다. 그러므로 의도에 따라서 업의 과보도 다릅니다. 그래서 양심경(hirisutta)에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천신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에 어떤 자라도 양심으로 악을 억제한다면 잘 달리는 말에게 채찍의 그림자처럼 비난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천신의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습니다.
히리니세다 딴누야 예 짜란띠 사다 사따
Hirīnisedhā tanuyā ye caranti sadā satā
안땅 둑캇사 빱뿌야 짜란띠 위사메 사만띠
Antaṃ dukkhassa pappuyya caranti visame samanti.
‘양심으로 악을 억제하고 그들이 항상 알아차림을 행한다면
괴로움의 끝에 도달하여 험난한 길을 평탄하게 걷는다.’
이 문장은 ‘히리니세다 딴누야 예 짜란띠 사다 사따(Hirīnisedhā tanuyā ye caranti sadā satā)입니다.
히리니세다(Hirīnisedhā)는 ‘양심으로 악을 억제하면’이고, 딴누야(tanuyā)는 ‘가는’, ‘몸’이고 예(ye)는 ‘그들은’이고, 짜란띠(caranti)는 ‘가다’, ‘걷다’, ‘행하다’입니다. 사다 사따(Sadā satā)에서 사다(sadā)는 ‘늘’, ‘항상’이고, 사따(satā)는 ‘알아차림’입니다. 그래서 사다 사띠(Sadā satā)는 ‘항상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사따(satā)는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띠(sati)와 같은 뜻입니다. 원래 사띠(sati)의 첫 번째 뜻은 ‘기억’이고 두 번째 뜻이 ‘알아차림’입니다. 그러나 이때의 기억은 과거를 회상하는 기억이 아닙니다. 단지 알아차리는 것을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온의 상온에 해당하는 기능이 아니고 행온에 해당하는 기억입니다.
오근 중에서 다른 근기에 비해 알아차림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깨어서 대상을 지켜보기 위해서는 항상 알아차리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현전하는 기억이라고 하는데 항상 현재로 와서 알아차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항상 알아차리면 집중이 되고 지혜가 나서 괴로움의 끝에 도달합니다. 이는 괴로움을 없애려면 늘 알아차림을 해야 한다는 것이며,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언제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 첫 문장은 ‘양심으로 악을 억제하고 그들이 항상 알아차림을 행한다면’입니다.
다음은 ‘아땅 둑캇사 빱뿌야 짜란띠 위사메 사만띠(Antaṃ dukkhassa pappuyya caranti visame samanti)입니다.
안땅(Antaṃ)은 ‘끝’, ‘궁극’, ‘종말’이고, 둑캇사(dukkhassa)는 ‘괴로움’이고, 빱뿌야( pappuyya)는 ‘도달한다’입니다. 짜란띠(caranti)는 ‘가다’, ‘걷다’, ‘행하다’입니다. 위사메 사만띠(visame samanti)는 ‘일체가 불평등하다’는 뜻입니다. 위사메(visame)는 ‘불평등한’, ‘부조화한’, ‘평탄하지 않은’, ‘역경’이란 뜻입니다. 사만띠(samanti)는 ‘일체의’, ‘모든’, ‘전체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끝에 도달하여 험난한 길을 평탄하게 걷는다.’는 말입니다.
두 문장을 종합하면 ‘양심으로 악을 억제하고 그들이 항상 알아차림을 행한다면 괴로움의 끝에 도달하여 험난한 길을 평탄하게 걷는다.’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위사메 사만띠(visame samanti)는 모든 것이 불평등하다는 뜻인데 이는 세상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쪽은 어둡고 한쪽은 밝고, 한쪽은 즐겁고 불행하고, 어둠도 있고 밝음도 있고, 비도 있고 햇빛도 있고. 비올 때는 기분 나쁘고 햇빛은 기분 좋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알아차림이 없는 마음입니다. 아라한은 비가 오나 햇빛이 있으나 마음에 움직임이 없습니다. 이처럼 다른 상황에서도 똑같이 반응하는 것은 알아차림이 있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사띠(sati)의 마음, 아라한의 마음, 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사실 이러한 불평등은 모두가 원인과 결과이고 업이 달라서 과보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양심을 가지고 악을 억제하면 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항상 잊지 않고 알아차리면 집중과 지혜를 얻어 윤회의 괴로움이 끝나는 열반에 이릅니다. 여기서 깨달음이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나면 집착이 끊어져서 해탈의 자유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즐거움과 괴로움이 양극화된 불평한 세상에서 오직 괴로움이 없는 평탄한 아라한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비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율장에 나오는데 32가지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슨 말을 하거나, 무슨 행동을 할 때 의도를 잘 살펴서 해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천신의 질문은 부처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에 어떤 자라도 양심으로 악을 억제한다면
잘 달리는 말에게 채찍의 그림자처럼 비난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양심으로 악을 억제하고 그들이 항상 알아차림을 행한다면
괴로움의 끝에 도달하여 험난한 길을 평탄하게 걷는다.’
다음 경전을 공부하시겠습니다.
꾸띠까숫땅
Kuṭikāsuttaṃ
오두막 경(S1:19)
사왓티양Sāvatthiyaṃ. ~~ (생략)
데와따(Devatā)천신
1. 깟찌 떼 꾸띠까 낫티 깟찌 낫티 꾸라와까,
Kacci te kuṭikā natthi kacci natthi kulāvakā,
깟찌 산따나까 낫티 깟찌 뭇또시 반다나띠.
Kacci santānakā natthi kacci muttosi bandhanāti.
1. 당신은 오두막도 없고 당신은 보금자리도 없고
당신은 상속도 없고 당신은 속박에서 벗어났습니까?
바가와(Bhagavā)
세존
2. 딱가 메 꾸띠까 낫티 딱가 낫티 꾸라와까,
Taggha me kuṭikā natthi taggha natthi kulāvakā,
딱가 산따나까 낫티 딱가 뭇또스미 반다나띠.
Taggha santānakā natthi taggha mutto'smi bandhanāti.
2. 내게는 분명히 토굴도 없고 내게는 분명히 보금자리도 없고
내게는 분명히 상속도 없고 내게는 분명히 속박도 없다.
데와따(Devatā)
천신
3. 낀따항 꾸띠깡 브루미 낀떼 브루미 꾸라와깡,
Kintāhaṃ kuṭikaṃ brūmi kinte brūmi kulāvakaṃ,
낀떼 산따나 깡 브루미 낀따항 브루미 반다난띠
Kinte santāna kaṃ brūmi kintāhaṃ brūmi bandhananti.
3. 무엇을 오두막이라 말하고 무엇을 보금자리라 말하고
무엇을 상속이라 말하고 무엇을 당신께 속박이라 말했습니까?
바가와(Bhagavā)
세존
4. 마다랑 꾸띠깡 브루시 바리양 브루시 꾸라와깡,
Mātaraṃ kuṭikaṃ brūsi bhariyaṃ brūsi kulāvakaṃ,
뿟떼 산따나께 브루시 탕하 메 브루시 반다난띠.
Putte santānake brūsi taṇhaṃ me brūsi bandhananti.
4. 어머니를 오두막이라 말했고 아내를 보금자리라 말했고
아들을 상속이라 말했고 갈애를 내게 속박이라 말했다.
데와따(Devatā)
천신
5. 사후 떼 꾸띠까 낫티 사후 낫티 꾸라와까,
Sāhu te kuṭikā natthi sāhu natthi kulāvakā,
사후 산따나까 낫티 사후 뭇또시 반다나띠.
Sāhu santānakā natthi sāhu mutto'si bandhanā'ti.
5. 당신께서 오두막이 없다니 훌륭하십니다. 당신께서 보금자리가 없다니 훌륭하십니다.
당신께서 상속이 없다니 훌륭하십니다. 당신께서 속박이 없다니 훌륭하십니다.
이상이 오두막 경의 본문입니다.
오두막 경은 아주 재미있는 경인데 천신이 부처님께 와서 마치 지식을 시험하는 듯이 질문을 합니다. 마지막에는 부처님의 답변에 천신이 매우 만족했습니다. 천신이 부처님을 점검해보러 온 것인데 답변이 만족해서 천신이 마지막에는 부처님을 훌륭하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주석서에 보면, 새들은 집을 집착한다고 합니다. 새는 집이 없으면 못 삽니다. 꾸띠(Kuṭi)는 원래 새집이라는 뜻인데 새는 꼭 집을 만들고 집을 집착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여러 곳에서 살다가 아내를 만나러 간다고 합니다. 옛날에 집에 간다는 뜻은 아내한테 간다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천신이 질문한 첫 번째 게송은 ‘깟찌 떼 꾸띠까 낫티 깟찌 낫티 꾸라와까(Kacci te kuṭikā natthi kacci natthi kulāvakā,)입니다.
깟찌(Kacci)는 ‘~일까’, ‘어떨까’, ‘~만 한가’, ‘바라 건데’라는 뜻입니다. ‘~만 한가’는 의심이나 불안을 나타내는 부정의문사입니다. 떼(te)는 ‘그’, ‘너’, ‘당신’입니다. 다음에 꾸띠까(kuṭikā)의 꾸띠(kuṭi)는 ‘방 하나뿐인 거처’, ‘오두막’입니다. 이러한 오두막을 한국에서는 수행자가 혼자 거처하는 작은 움막이라는 뜻으로 토굴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낫띠(natthi)는 ‘없음’, ‘무’, ‘비존재’, ‘부재’입니다. 꾸라와까(kulāvakā)는 ‘보금자리’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오두막도 없고 당신은 보금자리도 없고’입니다.
여기서 부처님께 말씀드린 천신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중생이 열 달 동안 어머니의 뱃속에서 머문다는 뜻에서 어머니를 오두막이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새들이 낮에는 먹이를 찾아 자유롭게 하늘을 날며 다니지만 밤이 되면 보금자리를 찾아 쉬듯이 이처럼 남자도 이곳과 저곳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밤이 되면 집에 있는 아내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아내를 보금자리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상속한다는 것은 아들에게 대를 있는 계보를 만드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갈애는 내가 감각적 욕망의 속박에 묶여있는 상황을 말한 것입니다. 천신은 이런 것들을 모아서 부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다음 게송은 ‘깟찌 산짜나까 낫티 깟찌 뭇또시 반다나띠(Kacci santānakā natthi kacci muttosi bandhanāti.)’입니다.
산따나(santāna)는 ‘상속’, ‘연속’, ‘계속’, ‘자손’, ‘사속’이라고도 하는데 사람과 사람이 대를 잇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계보를 잇는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낫티(natthi)는 ‘없다’는 뜻입니다. 비구들은 출가하여 가정을 살피지 않기 때문에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실 비구들은 출가를 해서 이런 것들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구는 오두막도 없고 보금자리고 없고 상속도 없고 속박도 없어서 모두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상속도 없고 당신은 속박에서 벗어났습니까?’입니다.
두 문장을 합치면 ‘당신은 오두막도 없고 당신은 보금자리도 없고 당신은 상속도 없고 당신은 속박에서 벗어났습니까?’입니다.
천신의 질문에 부처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딱가 메 꾸띠까 낫티 딱가 낫티 꾸라와까,
Taggha me kuṭikā natthi taggha natthi kulāvakā,
딱가 산따나까 낫티 딱가 뭇도스미 반다나띠.
Taggha santānakā natthi taggha mutto'smi bandhanāti.
내게는 분명히 오두막도 없고 내게는 분명히 보금자리도 없고
내게는 분명히 상속도 없고 내게는 분명히 속박도 없다.
부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이때 딱가(Taggha)는 ‘확실히’, ‘분명히’입니다. 메(me)는 ‘나’, ‘우리’인데 아항(ahaṃ)과 같은 뜻으로 ‘내게는’, ‘나에게는’입니다. 그래서 ‘내게는 분명히 오두막도 없고, 내게는 분명히 보금자리도 없고, 내게는 분명히 상속도 없고, 내게는 분명히 속박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없다는 것은 세속을 버리고 출가했기 때문에 이런 것을 소유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또 부처님께서는 윤회를 해서 어머니의 뱃속에 머물거나 아내를 부양하거나 아들을 낳는 일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속박이 없다는 것은 감각적 욕망을 집착하는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의 자유를 얻어 윤회를 끝냈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천신이 다시 질문을 합니다.
낀따항 꾸띠깡 브루미 낀떼 브루미 꾸라와깡,
Kintāhaṃ kuṭikaṃ brūmi kinte brūmi kulāvakaṃ,
낀떼 산따나 깡 브루미 낀따항 브루미 반다난띠.
Kinte santāna kaṃ brūmi kintāhaṃ brūmi bandhananti.
무엇을 오두막이라 말했고 무엇을 보금자리라 말했고
무엇을 상속이라 말했고 무엇을 당신께 속박이라 말했습니까?
여기서 천신이 이렇게 질문한 것은 세존께 여러 가지를 없다고 분명하게 대답하셨지만 천신의 입장에서는 부처님께서 자신이 질문한 내용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나서 없다고 하셨는가에 대해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신이 다시 질문을 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낀따항(Kintāhaṃ)은 ‘무엇을’이고 꾸띠깡(kuṭikaṃ)은 ‘오두막’이고, 브루미(brūmi)는 ‘말하다’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오두막이라 말했고 무엇을 보금자리라 말했고 무엇을 상속이라 말했고 무엇을 당신께 속박이라 말했습니까?’입니다.
이러한 천신의 질문에 다시 마지막으로 답변을 하셨습니다.
마따랑 꾸띠깡 브루시 바리양 브루시 꾸라와깡,
Mātaraṃ kuṭikaṃ brūsi bhariyaṃ brūsi kulāvakaṃ,
뿟떼 산따나께 브루시 탕항 메 브루시 반다난띠.
Putte santānake brūsi taṇhaṃ me brūsi bandhananti.
어머니를 오두막이라 말했고 아내를 보금자리라 말했고
아들을 상속이라 말했고 갈애를 내게 속박이라 말했다.
여기서 마따랑(Mātaraṃ)은 ‘어머니’이고, 바리양(bhariyaṃ)은 ‘아내’이고, 뿟떼(Putte)는 아들이고, 땅항(taṇhaṃ)은 ‘갈애’입니다. 갈애는 감각적 욕망을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오두막이라 말했고, 아내를 보금자리라 말했고, 아들을 상속이라 말했고, 갈애를 내게 속박이라 말했다.’입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듣고 천신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후 떼 꾸띠까 낫티 사후 낫티 꾸라와까,
Sāhu te kuṭikā natthi sāhu natthi kulāvakā,
사후 산따나까 낫티 사후 뭇또시 반다나띠.
Sāhu santānakā natthi sāhu mutto'si bandhanā'ti.
당신께서 오두막이 없다니 훌륭하십니다. 당신께서 보금자리가 없다니 훌륭하십니다.
당신께서 상속이 없다니 훌륭하십니다. 당신께서 속박이 없다니 훌륭하십니다.
여기서 사후(Sāhu)는 ‘좋다’, ‘충분한’, ‘잘’, ‘훌륭하다’입니다. 사후(Sāhu)와 비슷한 말이 사두(Sādhu)인데 ‘선한’, ‘선량한’, ‘유익한’, ‘좋다’, ‘훌륭하다’,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선재(善哉)’입니다. 그리고 떼(te)는 ‘그’, ‘너’, ‘당신’입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오두막이 없다니 훌륭하십니다. 당신께서 보금자리가 없다니 훌륭하십니다. 당신께서 상속이 없다니 훌륭하십니다. 당신께서 속박이 없다니 훌륭하십니다.’입니다.
이렇게 천신이 말을 마치자 다른 천신은 그냥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 질문한 이 천신은 매우 만족해서 부처님께 참배하고 꽃을 올리고 사라졌습니다. 항상 꽃 이야기가 나오는데 인도에서는 꽃 공양을 많이 합니다. 꽃은 두 가지 의미인데 하나는 천신들도 아름다운 몸을 가지기 위해 꽃 공양을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도 아름다운 몸을 가지기 위해 꽃 공양합니다. 향의 공덕은 건강한 몸을 가지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이고 꽃의 수행적인 의미는 무상을 상징합니다. 인도는 참배하는 순간 꽃이 시들어버리기 때문에 정리할 때 무상함을 느낍니다. 옛날에는 무상함을 체험할 수 없으니까 꽃 공양으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것이 꽃입니다. 더운 지방이라서 꽃을 올릴 때 항상 무상을 느낄 수 있게 올렸습니다.
스리랑카에 불치사(佛齒寺)라고 있는데 부처님 치아 사리를 모시는 곳입니다. 절을 사(寺)라고 해서 사찰인줄 아는데 사실은 스리랑카의 마지막 왕궁입니다. 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시고 있으니 불치궁(佛齒宮)이라고 하면 이상해서 불치사(佛齒寺)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곳이 한국의 경복궁과 비슷한 곳입니다.
스리랑카 전통으로는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모셔야 왕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결국, 비구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왕이 될 수 없는 전통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올리는데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7세기에 치아사리가 4개가 있는데 인간세계에는 하나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천상에 있고, 하나는 나가(용왕)에 있고, 하나는 인간세계에 있다고 합니다. 스리랑카에 내려오는 사리에 대한 유래로 7세기부터 계속해서 스리랑카의 왕이 등극할 때마다 불치사를 만들어서 모셨지만 영국 식민지 때는 사리 참배를 못하게 했습니다. 스리랑카 국민들은 다른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아침저녁으로 하는 사리참배를 못하게 하니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영국 관리는 사리탑을 부수려고 했는데 부처님 신통력으로 부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결과는 영국 사람의 기록이 있습니다.
참배를 못하게 한 순간부터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또 관리하는 직원이 아파서 사리참배 공양을 올리게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참배를 허용하게 되었는데 이후 엄청난 비가 내려 궁까지 물이 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몇 십 년간 참배하지 못했는데 그 이후에는 참배를 하게 했습니다. 참배하는 것까지 없었으면 스리랑카의 불교전통이 없어질 수도 있었는데 그 전통이 있어서 지금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천신의 질문과 부처님의 답변을 들으면서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에는 지식이 다르고 지혜가 다르기 때문에 누구나 아는 것이 다릅니다. 그래서 말을 하는 사람의 수준도 다르고 이를 듣는 사람도 수준도 달라서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경전을 배울 때 반드시 주석서를 참고하는 것이 필요하며 가르침을 주시는 스승도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내가 수행을 해서 이런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도 필요하고 스승도 필요하고 도반도 필요하고 나의 수행도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천신의 질문과 부처님의 답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천신)
“당신은 오두막도 없고 당신은 보금자리도 없고
당신은 상속도 없고 당신은 속박에서 벗어났습니까?”
(세존)
“내게는 분명히 오두막도 없고 내게는 분명히 보금자리도 없고
내게는 분명히 상속도 없고 내게는 분명히 속박도 없다.”
(천신)
“무엇을 오두막이라 말하고 무엇을 보금자리라 말하고
무엇을 상속이라 말하고 무엇을 당신께 속박이라 말했습니까?”
(세존)
“어머니를 오두막이라 말했고 아내를 보금자리라 말했고
아들을 상속이라 말했고 갈애를 내게 속박이라 말했다.”
(천신)
“당신께서 오두막이 없다니 훌륭하십니다. 당신께서 보금자리가 없다니 훌륭하십니다.
당신께서 상속이 없다니 훌륭하십니다. 당신께서 속박이 없다니 훌륭하십니다.”
이상의 내용이 오두막 경이었습니다.
< 묻고 답하기 >
(질문 1) 부처님의 진신 사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답변 1) 사리는 아무에게서나 나올 수는 없는 것이고 신심의 문제입니다. 열반경에 보면 사리가 작은 씨처럼 나온 것도 있고, 큰 것도 있고 해서 부처님 온몸에서 잘게 부서져서 8항아리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 사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사리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니까 아난다 존자는 돌아가실 때 큰 강의 한가운데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이 강 쪽에 있으면 이 사람들이 저 강 쪽에 있으면 저쪽에서 사리를 가져가려고 할 것이고 해서 한가운데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그만큼 인기가 많았고 120살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부처님 진신 사리는 전 세계에 있다고 합니다. 어릴 때 부처님 치아사리를 봤을 때 정말 길어서 궁금했었는데 통역하시는 큰 스님께 물어보니 다른 분도 이가 길었다고 합니다. 풍치가 좋은 사람은 양쪽에 길다고 합니다. 스리랑카의 마하위하라 사원에서도 진신 사리를 받아서 모시고 있는데 전설과 기록이 있습니다. 기원전 1세기까지는 부처님 발바닥이나 연꽃을 부처님의 상징으로 모셨습니다. 다음에 사리탑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불상이 생겼습니다. 중요한 것은 불상이 부처님은 아닙니다. 마음에 따라 불상이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스리랑카에서는 첫 번째로 보리수에 참배하고 다음으로 사리탑에 참배하고, 마지막으로 불상에 참배합니다. 보리수는 한 절에 1그루씩 주고 국가에서 관리를 합니다. 보리수를 받기 위해서는 어떤 의식을 행합니다. 보리수라는 나무를 모셔 오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접촉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핵심인데 상징적인 의미를 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