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연가
-류자
"티비는 14인치가 좋아, 화면이 가장 선명한 크기 지."
내가 TV를 처음 가진 것은 결혼을 하던 1986년 혼수를 장만하면서부터다. 바야흐로 흐리멍덩하던 흑백 TV 시대를 벗어나 총천연색 칼라 TV가 등장하던 시절이니 지금의 크기에 비하면 턱도 없이 작아도 몸값이 꽤 나가던 시절이었다.
삼성과 골드스타 두 메이커를 놓고 사이즈와 가격 사이를 왔다 갔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다가 아마 좀 싸게 주었는지 어찌어찌하여 삼성을 구매했었다. 그 일은 나와 삼성의 인연이 시작된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된다. TV가 만족스러웠던지 그 뒤로 마치 삼성 가족이라도 된 양 냉장고도 삼성, 전자렌지도 삼성, 심지어 휴대폰은 지금까지 늘 삼성이다.
대청마루에 TV 한 대만 있으면 아래위 이웃집 식구들까지 밤샐 기세로 남의 집 TV 앞에 스스럼없이 모여, 함께 보던 시대를 살았다.
사생활 그런 게 무언지 옆집 숟가락이며 밥그릇 숫자까지도 훤히 알고 지내는 이웃들은 눈만 뜨면, 식전 댓바람부터 "아씨" 아침 연속극을 함께 보며 주인공에 몰입했다. 지금은 생사도 아련한 정인숙 아줌마처럼 그 시절 아씨에 빙의 되었던 수많은 아씨들은 또 해 질 녘에 모여 "여로"를 함께 보며 울었고, 착하고 예쁜 태현실 아줌마의 시집살이에 가슴을 쳤다. TV는 가족만 모아 놓는 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얘기겠으나, 그땐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라는 것을 하여, TV가 있느냐 없느냐를 묻던 시절이었고, TV가 있는 집을 손으로 꼽을 정도였으니, 텔레비전이 이웃과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컸다.
남의 집이 낯설지도, 남의 집을 차지한 것이 미안하지도, 남의 집에서 TV를 보는 일이 부끄럽지도 않았다
TV는 점점 커져서 벽 한 면을 거의 꽉 채워가고, 요즘은 전문급 영화관을 집 안에 꾸미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점점 처치 곤란해지는 TV도 생긴다.
오래된 TV 하나가 안방을 지키고 있다. 요즘은 얄팍한 게 대세인데 뒷배가 불룩 튀어나온 그 TV는 골동품이 되어 진즉부터 식구들의 눈 밖에 나 있었다. 아직 생생한 화면을 자랑하는데 버리기는 뭐 하고, 그냥 두 자니 떡하니 한자리를 차지하여 거치적거려 계륵이 따로 없다.
식구들은 주로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안방 TV는 몇 년이 흘러도 몇 번 켤 일이 없으니, 저걸 어째야 하나 하는 식구들 눈총이 많이도 따가웠을 것이다. 드디어 다 늙어 쇠약해진 비디오플레이어와 함께 정리 작업에 들어갔다.
양쪽에 손을 넣어 옮길 수 있도록 폭 들어간 손잡이가 있다. 손을 넣어 보니 품에 안은 것처럼 양팔 안에 쏙 들어온다. TV를 버리는 일은 생각이 길었지 막상 생각을 정리하니 일은 쉬웠다. 탁자 역할을 하고 있는 삼단 서랍장 위에서 내려놓기만 하면 된다. 물론 혼자서도 가능한 일이다.
너무 쉽게 보았던 탓일까 TV는 순순히 자리를 털고 그냥 내려오지 않았다. 한낱 고철덩이로 취급을 받는 게 억울했는지 갑자기 무게를 앞으로 확 쏟았다.
사람이 급하면 초능력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
떨어지는 물체가 바닥에서 박살이 났을 때 벌어질 일들이 번쩍하는 순간 다 파악되었다. 가진 것은 몸밖에 없으니 몸으로 막 게 되는 것도 순간에 발휘된 능력이라면 능력이었을까!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다. 놀란 가슴을 다독이며 휴 한숨을 내뱉는데
"아이쿠야"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만만히 본 대가는 컸다.
무지막지하게 쓰러진 29인치 덩치 큰 브라운관 TV는 거대한 바윗덩이가 되어 가냘픈? 허리를 훑어 종아리 살을 눌렀고 복숭아뼈를 밟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발목이 휘는 참사는 면했다.
숨이 멋을 듯한 아픔 속에서도 그만치 하고 떠나는 TV에 감사했다. 그제서야 오래된 연인을 떠나보내듯 함께 하지 못해 미안했고,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 하루 종일 씁쓸했다.
욱신욱신 미끄러진 손가락 마디에서 밟힌 발끝까지 아픔은 꽤 오래갔다. 바윗덩이 떠나보낸 자리도 오래 잊히지 않았다.
TV를 치운 자리에는 잘 어울리는 멋들어진 그림이나 사진 한 점 걸어야겠다 마음먹었는데, 막상 TV가 빠져나가고 보니 그 자리는 원래 그의 것이었던 듯 미친 존재감을 남겼다.
물체가 빠져나간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서 있던 식구를 잃어버린 듯 엄청 허전한 느낌이다.
해가 바뀌면 새로운 것으로 늘 다시 벽에 걸려 붙어 있는 달력처럼 공간을 차지하던 것이 갑자기 사라지니 빈 공간에 자꾸 눈길이 머물렀다.
허전함을 견디지 못하고 얄쌍한 모니터용 TV와 컴퓨터로 빈자리를 채운다.
안방 TV가 컴퓨터를 거느리고 들어서자 TV로 살던 세상은 컴퓨터 화면으로 채워졌다.
식구들이 분주해졌고 TV는 많은 일을 해내고 있다.
세월이 가면 모든 것이 변하기 마련이다.
돌덩이에 맞은 자리도 멀쩡해졌고 어마어마한 아픔도 벌써 잊은지 오래다
류자 (시인/ 수필)
강서뉴스' 총무기자, '강서까치뉴스' 명예기자
시ㆍ수필집 『치매도 시가 되는 여자』
공저 『7인 엄마의 병영 일기』
시집 『땅 한 평 없어도 나는 농부다』
•『코로나1박2일』(ARKO 2021 코로나19, 예술로기록 작가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