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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책임표시사항 | 壁瘟新方 / 安景昌(朝鮮)...等撰 | |||
판사항 | 金屬活字本 | |||
발행사항 | [刊寫地未詳] : [刊寫者未詳], [刊寫年未詳] | |||
형태사항 | 1冊 : 四周單邊 半郭 25.0 x 18.0 cm, 有界, 10行17字 註雙行, 上下內向2葉花紋魚尾 ; 33.0 x 22.0 cm | |||
주기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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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책임표시사항 | 壁瘟新方 / 安景昌(朝鮮) 等受命撰 | |||
판사항 | 木板本 | |||
발행사항 | [刊寫地未詳] : [刊寫者未詳], [孝宗 4(1653)] | |||
형태사항 | 1冊(20張) : 四周雙邊 半郭 21.6 ×16.0 cm, 有界, 10行20字, 上下花紋魚尾 ; 30.6 ×20.6 cm | |||
주기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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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책임표시사항
壁瘟新房[諺解] / 安景昌(朝鮮) 等撰
판사항
金屬活子本(壬辰字)
발행사항
[刊寫地未詳] : 校書館, [孝宗 4(1653)]
형태사항
1冊(22張) : 四周單邊 半郭 24.0 ×16.6 cm, 10行17字, 上下內向2葉花紋魚尾 ; 33.0 ×21.4 cm
주기사항
序: 癸巳(1653)春...歲秋七月旣望...蔡裕後拜手稽首謹序
표제/책임표시사항
壁瘟新方 / 安景昌(朝鮮)...等編
판사항
金屬活字本(戊申字)
발행사항
[刊寫地未詳] : [刊寫者未詳], [肅宗 20(1700)頃]
형태사항
1冊 : 四周雙邊 半郭 24.1 x 16.7 cm, 有界, 10行17字 小字雙行, 內向2葉花紋魚尾 ; 34.3 x 21.2 cm
주기사항
序: 是歲(1653)秋七月旣望尙瑞院臣蔡裕後拜手稽首謹序
國漢文混用임
원서명
辟瘟新房
현대어서명
벽온신방
청구기호
가람古 615.135-An1b
편저자(한자)
安景昌(朝鮮) 等撰
판본사항
壬辰字
간행지
[刊地未詳]
책권수
1冊(22張)
편저자(한글)
안경창(조선) 등찬
간행연도
[刊年未詳]
간행자
[校書館]
책크기
33×21.4cm
匡郭
四周單邊, 半葉匡郭:24×16.6cm, 有界, 10行 17字
版心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표기문자
諺解本
表紙,版心,卷頭書名
序,跋,卷首,卷末
序:癸巳(1653)…蔡裕後
表題紙,內題紙
附
藏書記,內賜記
刊記
자료소개
孝宗代에 海西地方에 발생한 전염병을 계기로 기존의 ≪辟疫神方≫, ≪簡易辟瘟方≫을 토대로 하여 당시 실정에 알맞게 편찬한 刊行年度 未詳의 전염병퇴치에 관한 醫書
목차
瘟疫病源, 瘟疫半表半裏宜和解, 瘟疫裡症宜下, 瘟疫禳法, 瘟疫辟法, 不傳染法, 禁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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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현대어서명
청구기호
辟瘟新方諺解
벽온신방언해
가람 古 615.135-An1b
瘟疫에 관한 方文을 싣고 언해를 붙인 책이다. 蔡裕後의 서문에 따르면 1653년(효종 4)에 이전에 있었던 ‘辟瘟舊方’의 내용을 增減하여 언해를 붙여 간행한 것이라 한다.현재 이 책의 異本은 목판본과 활자본 두 가지가 전하는데‚ 규장각 소장의 <奎 11570>은 목판본이고‚ <가람 古 615.135-An1b>는 활자본이다. 두 이본은 내용상의 차이는 없으나 版式 등 형태면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목판본은 四周雙邊이고‚ 10行 20字(서문은 19字)인 반면 활자본은 四周單邊이고 10行 17字로 되어 있다. 자수의 차이로 말미암아 전체 장수도 달라져 목판본은 20장‚ 활자본은 22장이다.이 책이 원래 간행된 시기는 서문과 ≪효종실록≫1653년(효종 4) 3월 甲子條의 기사로 미루어 볼 때 1653년이라 할 수 있으나‚ 현전 목판본과 활자본은 후대의 중간본으로 보인다. 특히 활자본은 戊申字(1668년 주조)로 인쇄된 것이다.목판본과 활자본의 내용은 대부분 일치하지만 약간의 차이도 보인다. 목판본의 ‘먹으라’(4b)가 활자본에는 ‘먹이라’(5a)로 되어 있고(다른 곳은 모두 ‘먹으라’임)‚ 목판본의 ‘엿쇄 닐웬만의’(6b)가 활자본에는 ‘엿쇄 닐헨만의’(7a)로 되어 있다. 또 활자본에는 ‘슌마다 냥식 이 달혀’(5b)로 되어 있는 부분이 목판본에서는 ‘슌마다 냥식 이 달혀’(5a)로 한 글자가 빠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외에는 ‘만히 어터(목3a‚ 활3a)‚ 덥게 여 며그라(목4a‚ 활4b)‚ 대기 반 잔과 우믈믈 반 잔을 머그라(목8b‚ 활9b)’와 같이 오각과 오식이 일치하는 부분도 있다.이 책은 국어사 자료로서 대체로 17세기의 언어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표기면에서 ‘(목9b)‚ (목4a)‚ 디오고(목17b); 라(목13a)‚ 로(목5b)‚ 니(목3b)‚ (목10a)’ 등 어두된소리의 표기에 ㅅ계 합용병서와 ㅂ계 합용병서가 모두 쓰였는데 ‘밧(목2a)∕밧긔(목5a)‚ 맛이(목2a)∕맛당이(목5a)∕맛당히(목5b)‚ 라(목13a)∕고(목15a)∕기면(목15a)’과 같은 혼란을 보인다. 어간말 유기음 종성 역시 ‘닙흔(목3a)‚ 닙플(목8a)’과 같이 혼기되어 나타난다. 이전 시기의 자료에서도 물론 나타나는 사실이지만 ‘됸니라(목3a)‚ 시병 열라(목8a)‚ 소게 드런(목6a)’처럼 자음동화가 반영된 표기도 다수 눈에 띈다.형태면에서는 ‘’(小豆)이 ‘’(목15a)으로‚ ‘봇가’가 ‘복가’(목11a)로 표기된 예들이 보이는데‚ 이들은 각각 어간이 ‘’‚ ‘볶-’으로 재구조화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용언 ‘만-’(多)의 경우에는 재구조화된 모습과 재구조화되기 이전의 모습이 공존하여 ‘열이 만하’(목5b)‚ ‘열이 만여’(목8b)와 같이 나타난다.격조사의 경우 ‘그 내가 병긔운을 헤티니’(목15b)에서 주격조사 ‘-가’가 나타나고‚ 처격조사는 ‘-에‚ -‚ -의’가 쓰였으나 ‘-의‚ -에’가 우세하고 ‘-애’는 쓰이지 않았다. 주제 보조사는 자음 아래에서 ‘-은’이‚ 모음 아래에서 ‘-’이 우세하게 나타난다.목판본인 <奎 11570>을 저본으로 한 영인본이 홍문각에서 간행된 바 있다. (김진형)
영조 11권, 3년(1727 정미 / 청 옹정(雍正) 5년) 윤3월 12일(기사) 2번째기사
《벽온신방》 1책을 계하하여 등서한 후 내외 백성에게 나누어 주게 하다
특별히 《벽온신방(辟瘟新方)》 1책을 계하(啓下)하며 오부(五部)로 하여금 등서(謄書)하여 도성(都城) 백성에게 두루 나누어 주도록 하고, 이어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인출(印出)하여 보내도록 명하였다.
○特下《辟瘟新方》一冊, 令五部謄書, 遍給都民, 仍命印送于八道、兩都。
영조실록 > 영조 3년(1727년) > 영조 3년 윤3월 > 영조 3년 윤3월 12일
<순흥안씨 집성촌 충주 금가면 잠병리 축동.금병>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 축동·금병에 있는 순흥안씨 집성촌
<명칭유래>
안의순(安義順)ㅡㅡ>안련옥(安連玉)ㅡㅡ>안효남(安孝男),안예남(安禮男)ㅡㅡ>안경창(安景昌)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의 중국에서 가져온 지팡이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 태고산에서 초당마을로 가다보면 순흥안씨 산소에는 고사한 향나무 세그루가 있다. 흰색의 향나무로서 대개 나무는 고사하면 썩어 버리는데 100여년을 서 있으면서도 썩지 않는다고 한다.
내력은 조선 고종 17년 순흥 안씨 문중으로 전관 좌의정을 지낸 안대감이 청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동정호에서 만난 기인으로부터 기념으로 세개의 지팡이를 받아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선인은 선조들의 산소에 꽂아 두라고 했고 가운이 융성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의 자리 선조들 묘 에 지팡이를 꽂아 두었더니 잎이 없는 무엽수가 가지를 치면서 자랐고 자손이 번성하고 인재가 속출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촌노들에 따르면 구한말까지는 잎이 무성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일본인이 들어오면서 성장이 멈춘 것으로 보인다.
이 고개를 노가지고개(수풍말에서 하소로 통하는 고개)라고 하는데 향나무와 노가지 나무의 형태가 비슷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세 그루의 나무 줄기가 만병통치약이라는 민간의 잘 된 소문으로 깎아간 흔적도 보인다.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전설과 유래가 많이 남아 있어 미소를 지게 하는데 고향의 정취와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우리의 유산이라고 본다. 우리의 소중한 유산을 가꾸고 아껴 보존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충흥사(忠興祠)
소재지 :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 777번지(축동길 14-10)
순흥안씨 17세 용양위부사과를 지낸 안경창(安景昌)을 배향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운 재실로 솟을대문을 설치하고 일자 건물의 맞배지붕으로 건축되었다.
솟을대문 앞쪽으로 관리사를 지어 여기서 재물을 준비하고 타지에서 온 후손들이 하루 숙식을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축동마을 중앙 윗쪽에 위치하고 있다. 매년 음력 10월 8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 순흥안씨 집성촌(축동마을)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의 순흥안씨 입향선조는 1파 10세 서파공 안리(安理)의 후손 용양위부사과를 지낸 17세 안경창(安景昌)으로 1600년경 경기도 양주에서 정착하면서 세거하기 시작했다.
안경창의 세 아들 중 안명원(安命遠)의 후손이 잠병리 금병에 주로 세거하고, 안복원(安福遠)의 후손은 주로 잠병리 축동에 세거하고 있다.
잠병리(岑屛里)는 본래 충주군 가차산면 지역으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하여 명명되었다. 법정리인 잠병리는 3개의 행정동(축동·금병·초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순흥안씨 잠병리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는 곳은 축동(일명 싸리골)과 금병마을이다.
축동마을안에는 안경창(安景昌)을 배향한 충흥사(忠興祠)가 있다.
축동마을에서 남쪽 400여m지점의 낮은 산 구릉에 안명원(安命遠) 묘, 안복원(安福遠) 묘가 있는데, 잠병리 묘역은 충원대로 금가삼거리에서 금가면사무소로 가는 강수로길을 1.7km 가면 잠병리길로 가는 삼거리가 나오고 잠병리길을 계속가면 우측 초당경로당(태고사 방향)과 좌측 씨름터길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수풍말구렁이라는 시름터길 104번지 앞에서 우측으로 60여m 가다가 좌측으로 200여m 들어가면 묘역이다. 묘역앞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다.
잠병리길 금병노인정 앞에서 좌측으로 500여m 들어가면 축동마을 중앙에 충흥사가 있다.
이곳 금병노인정 앞에서는 축동마을 충흥사와 좌측 남쪽 산 기슭에 회색빛의 커다란 싸리나무 3개가 서있는 묘역이 보인다.
금병노인정 앞에서 잠병리길로 400여m 가면 우측에 서파공 후손 기적비가 서 있다.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 축동(杻洞)마을 자랑비
소재지 :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 758번지 축동회관 옆
마을 자랑비
우리마을은 싸리나무 축자 마을동자를 써서 축동(杻洞)이라 한다. 이 유래는
조선 선조2년 순흥안씨 17대손 경창이 8도를 암행하던중 태고산 아래를 지날 때 산세가 좋고 경관이 수려하여 이곳에 정착 자손이 번창하여 씨족 촌락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 마을 중앙에는 아름드리 싸리나무가 많이 있어 붙어진 이름으로 지금도 인근마을에서는 싸리골안씨라 할 정도로 순흥안씨 태성촌을 이루게 되었고 마을 뒷산 순흥안씨 선영묘 앞에는 수백년된 묵은 향나무 3그루가 있는데 이 향나무는 경창의 아들 복원이 국명으로 중국 사신을 갖다가 지팡이 3개를 가져와 이곳에 꽂은 것이 싹이나고 자랐는데 지금은 죽은지 오래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썩지 않고 있으며 옛날에는 3년만큼 싹이 나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후에 싸리나무가 많았던 곳에 선조의 위패를 모시기 위햐여 사당을 신축하여 충흥사라 칭하고 매년 음력 10월 8일에 사당제를 지내고 있다. 지금은 13개 성씨 76세대 350여명이 상겸하애 정신을 바탕으로 한가족 같이 오손도손 정답게 살아가고 있으며 이 정겹고 아름다운 복지 축동마을을 후손들에게 기리기리 전하고자 이비를 세운다.
1992년 7월 1일
축동마을 주민일동
잠병리 축동 향나무 3그루
이 향나무는 가선대부 한성부윤 안명원(安命遠:初諱 大成)과 통정대부 안복원(安福遠:初諱 大信) 묘역 앞에 서 있는 나무로 내력은 조선 고종 17년 안복원이 청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동정호에서 만난 기인으로부터 기념으로 세개의 지팡이를 받아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산소에 꽂아 두면 가운이 융성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의 자리에 지팡이를 꽂아 두었더니 잎이 없는 무엽수가 가지를 치면서 자랐고 자손이 번성하고 인재가 속출했다고 전한다. 내려오는 구전(口傳)에 따르면 옛 구한말까지는 잎이 무성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일본인이 들어오면서 성장이 멈춘 것으로 보인다.
죽은 향나무가 심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단단히 박혀 있는 것이. 썩지도 않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묘역앞에서 바라보며는 저멀리 금병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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