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조선이 대량살상무기(Weapons of Mass Destruction)를 개발해 안보환경을 훼손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핵무기는 2차대전 종전 이래 그 어떤 평화조약과 외교협상보다도 많은 전쟁을 억제했고, 가장 많은 인명을 구제했습니다. 오히려 ‘대량구원무기(Weapons of Mass Salvation)’라고 부르는 편이 적절하지 않겠습니까?”
- 이행규 국무장관, 1984년 조미정상회담에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1985년 1월 28일, 미국의 감마선 탐지위성 피스브릿지(Peacebridge)-5는 남인도양 프랑스령 케르겔렌 제도로부터 동쪽으로 약 950km 떨어진 지역에서 섬광과 함께 뿜어나오는 감마선을 포착했다. 조선인민공화국과 이란 제국이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는 순간이었다. 이행규 국무장관은 “공화국은 국가안보환경 향상을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해왔다”는 평만 남긴 채 더 이상의 논평을 거부했지만, 곧바로 조선과 이란이 NPT 제3부속의정서상 특별협정 가입국이 되면서 모두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선의 핵개발 역사는 독립 직후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1965년 조선원자력에너지연구소(KAERI)가 설립되었고, 조선핵연료유한회사(NFC)가 사기업으로 설립되었다. 미국에서 원자력공학을 배우고 돌아온 많은 인재들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투입되었다. 1971년에는 캐나다와의 기술협력으로 함경남도 홍원군에 CANDU식 중수로가 건설되었다. 거국내각이 물러나고 이홍립 행정부가 출범하고 난 뒤에도 핵개발을 위한 사전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열정적으로 추진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원자력 에너지 개발사업과 병행해 제한적으로 진행되던 핵개발 사업은 1977년 중국이 핵실험을 성공시키면서 완전히 본색을 드러내게 되었다. 조선과 미국 간의 원자력협정에는 특이한 조문이 있었는데, 바로 제1부속서이다. “본 조약은 조선반도 주변 지역의 핵 확산 위협이 해소되었다는 전제 하에서만 유효하며, 해당 조건이 무력화되었을 경우 일방 당사국은 타방에게 최소 6개월 이전 통보를 조건으로 본 조약을 파기할 수 있다”는 조항으로, 중국 또는 일본이 핵무기 통제권을 가지거나 미국이 조선에 핵무기를 불법반입하는 경우를 상정한 것이다. 조선이 NPT에 가입할 때에도 “조선인민공화국은 조미원자력협정 제1부속서 상의 조건이 만족될 때에만 상기 조문에 구속된다”는 유보(reservation)를 선언한 바 있다.
이홍립 국무장관과 이행규 당시 조공 위원장 등의 지원으로 1977년 곧장 설립된 무기개발위원회와 군수산업진흥확대회의는 조선의 의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미국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조선은 프랑스 정부와 비밀협정을 체결해우라늄 농축 및 폐연료 재처리 기술을 이전받았다. 1978년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바트당 쿠데타로 하심 왕가가 축출되고 아랍연합공화국(UAR)이 출범하자 극심한 안보위협을 느낀 이란 역시 핵개발 사업을 본격화했고, 프랑스-조선-이란 간의 삼각협력이 이루어졌다. 소련의 공공연한 위협과 미국의 방해공작 속에서도 조공의 이행규는 작업을 밀어붙였으며, 1983년에는 영변 재처리공장이 완공되어 연 330kg의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1984년, 8년 임기를 마무리하던 레이건 행정부는 임기 내 조선에 이전보다 강력한 제재를 부여하여 핵개발을 막아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조선을 정식으로 제재한다면 이란 역시 제재해야 했으며, 이는 중동에서의 참패와 냉전에서의 매우 불리한 조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미국은 1) 핵 보유를 공식화하지 않고, 2) 평시에 실전용 핵탄두를 생산하지 않으며, 3) 타국에 핵무기 기술 및 연료를 공급하지 않는다는 3대 조건으로 조선의 핵개발을 묵인하였다.
현재 조선은 공식적으로 “핵 동결”을 선언, 이란과 함께 NPT 특별협정에 가입한 유이한 국가이다. 그러나 조선을 비핵국가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방에서 안보위협을 받던 조선이 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도 무자비한 전략이었던 셈이다.
교육천하지대본
조선의 교육열은 동아시아의 지역적 경향을 고려해봐도 매우 높은 축에 속한다. 부존자원이 부족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환경을 고려한다면 조선이 인적자본 형성에 집중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나, 아동, 청소년, 대학생, 관료, 교사, 심지어 사교육에 종사하는 강사들에게까지 매우 높은 학습성취를 요구하는 체제는 매우 특이하다. 조선은 총 12년의 의무교육을 규정하고 있고(1966년 9년 의무교육령이 발표, 1980년 의무교육법 개정 후 12년으로 확장), 마치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를 연상시키는 논술형의 “학력검정”을 고등학교 졸업시험으로 채택하고 있다. 학력검정은 총 일주일간 치러지며, 해마다 난해한 주제들이 채택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가령 2007년 인문학 문제로는 “존재론적 위기 속에서 개인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라는 문항이 출제되어 전국민을 토론의 바다에 빠뜨린 바 있다.
학력검정의 악명과 별개로, 통과기준 자체는 그리 높지 않다. 관료와 외교관, 기업가 등을 비롯한 엘리트의 양성은 별개의 특별교육기관에서 이루어지며, 그 외 고등교육기관은 (모든 고등교육기관의 국립화를 규정한)대학법의 규율을 받아 평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출제된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고민했다는 것이 인정되면 최소기준을 만족할 수 있으며, 오직 평균적으로 11-14%의 응시자만이 유급판정을 받아 교육을 재이수하게 된다. 다만 학생들을 유급시킨다는 결정은 교육체계 수립 초기 격심한 논쟁을 불러왔는데, 초대 교육부장관 최교수의 단호한 결정으로 관철된 것이다.
최교수는 입각 당시 30세로 행정부에서 가장 젊은 장관이었으나, 가장 유교적이고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진 이였다. “스스로 배우고자 학교에 찾아와 이 정도의 성취도 거두지 못한다면 그것은 스승에 대한 무례요, 이런 학생을 그냥 내보는 것은 사회의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라는 발언이 기록되었을 정도이다. 어찌되었든 그는 교육부 장관 임기 내내 새로운 교육과정을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고, 국어와 역사, 윤리와 같이 가장 많이 왜곡된 과목들을 거의 바로잡아 새로운 교육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업적을 인정받았다.
이홍립 행정부가 들어선 뒤, 호사가들은 명망있는 교육행정가인 최가 공화민주당 주도 정부에서 요직에 중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유당의 영강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최의 입각을 반대했고, 이홍립 역시 최를 중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1973년 제3대 중앙인사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중앙인사위원회는 공무원의 선발과 양성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그 위원장은 대체로 명예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최는 인사위원장 직책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겼고, 공직후보연수소를 2년제 고등행정학교와 고등외무학교로 개편하여 ‘지옥훈련’이라 불리는 교육과정을 손수 만들고 개혁했다. 또한 ‘한국판 그랑제콜’이라 불리는 특수교육기관 체계를 정비했던 경험을 살려 5년간의 임기를 이어나갔다.
1978년, 43세의 나이로 공직생활을 마무리한 최교수는 사단법인 ‘아고라’를 개원하여 ‘무료 평생교육’을 모토로 고등교육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 학원의 대표적인 출신자로는 최서준의 자식들인 최민기, 최유진 남매, 홍준표, 호사카 유지 등이 있다. 만년에는 조선독립사의 집필과 함께 자신이 ‘호남 제정복고 파동’의 주동자임을 밝혔으며, 그 책임을 담담히 인정함으로써 역사적 짐을 지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하였다.
최는 조선의 교육제도를 정비한 공을 여전히 인정받지만, 한편으로는 특수교육기관으로 대표되는 과도한 엘리트교육 체제를 고착화시켰다는 비판을 듣곤 한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도 그것이 국가와 사회를 위한 최선의 길이었다는 의견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몇몇 교육감들과 끊임없는 토론을 벌이며 현 체계를 지켜나가고 있다.
@dear0904 아뇨. 전직 아가리 파이터로 맨날 잘 모르는거 가지고 싸우다 지지부진한 병림픽도 많이 하고 제 잘못을 제 손으로 대놓고 합리화 하려는 걸 제 눈으로 보기도 한 경험의 산물입니다(..)
이거 알아내는데 나이 먹었다라고 쓸까 했는데 지금도 이렇게 쓰는걸 보면 아직도 헛먹은거 같기도 하고 혼란스럽네요(?)
@931117 그러니까요... 물론 국정 교과서 논란보단 낫지만.
+ 그것도 다 돈이니까요. 용두사미같아도 뭐...
+ 아. 저거 올라 오고 나서, 결과를 보기 전까진 고민 했었습니다... 지금은 아니고.
+ 해석의 경우 사람마다 다 다른지라 ㅋㅋ... 이견이 갈릴만한 분야를 꽈서 말해야겠는데... "군인의 의무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만일 국체 보전의 위기가 있다면, 군대는 제일 먼저 나서서 국체를 지켜야만 한다." 자... 이것의 속 뜻을 해석 하면 ㅋㅋㅋ...
+ 많이 쓰면 나아지긴 하는데... 근데, 저도 요즘 계산이 잘 안되긴 합니다... 음... 수학 문제집이라도 구해서 풀어야 하나.
+ 그렇긴 하죠. 저정도 삽질은...
@통장 앗(...) 저도 그렇게 바뀔 날이 오려나요? ㅋㅋㅋ...
@dear0904 기성세대로 바뀌는 과정이기 때문에 안바뀌는게 좋습니다(..) 이렇게 쓰니 나이 많이 먹은것 같지만 사실 아직 젊으니 지금 제 방식이 잘못된 걸수도 있죠. 더 나이 먹으면 다시 파이터로 진화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대신 회사에서 차장님과 파이팅 중입니다(...)
@dear0904 아마 곧있으면 그에 준하는 교과서 문제가 나올걸요?
+ 그렇기야 한데...좀 아쉽달까요...서울역사박물관에 좀더 있다고 하니 가볼까 생각중인.
+ 뭐 근데 우리 얘기였음 운영진이 쪽지 보냈겠죠.
+ ...제가 변경한것보단 온건하네요?독재는 마냥 부패무능하지 않다는 말의 영향을 받아 그런 사람들이 사례로든 나치나 일제를 본받아서...힌트는 여기까지
+ 전 수학과 과학 지지리 못해서,저기 체험전시실에 시험문제 체험하는게 있는데 수학과 과학 다틀림.ㅋㅋㅋ참고로 무즙파동 문제도 있더라고요
+ 개판 벌일거면 안하는게 낫다...
@931117 전 수학은 못했지만 과학은 잘했는데. ㅋㅋㅋ
@돈이 곧 진리 전 역사쪽에선 반내 원탑(뭐 모의고사에서 한번 세계사 만점 받으며 1등 찍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문학은 소설,시나리오쪽으로 그나마 나쁘지 않았던 수준으로 기억.
영어는 듣기는 좀 되는데 문법과 단어에 너무 취약하고 수학,과학은 개판이었던.
@통장 (...) 바뀐건 아닌거 같은데요 ㅋㅋㅋ... 사실 근데 직장에서 안 싸우는건 어려우니까...
@931117 영어는 저랑 같으셨네요.
@돈이 곧 진리 일일이 세부적으로 암기하는건 취약한가 싶기도
실제로 역사분야도 정확한 년도 암기는 힘드니까
@931117 전 걍 빡세게 암기하니 어느정도 되덥니다.
@931117 ... 설마요... 아니 하긴 100일동안 5년치 악재를 터트린 곳이라...
+ 하긴 전문 분야 박물관이 제일 좋긴 하죠. "관리만 잘되면" 안되면 진짜... ㅋㅋㅋ...
+ ... 잠깐. 저게 온건하다... 고 읽으신걸 보면... 속내가 안 읽힌것 같습니다. 저 말을 꽈서 했다고 했었죠...
+ 아. 디아스타제... 그 문제는 있을만 하죠 ㅋㅋㅋ...
+ 그건 맞습니다... 솔직히 개판 벌일거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아. 근데...
@돈이 곧 진리 부럽네요.전 1시간동안 2,30개 해도 몇개 될까말까하던데
@dear0904 얼마나 다이나믹하면 저조차 충분히 가능하다 하겠어요...
+ 봐야죠.그나마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엔 87년 대선 홍보물 같은게 있다는걸로 만족을...?
+ 군대만 쓰는게 아니라 쓸수 있는 친위세력(군,경호대,중정)을 총동원 해서 나치와 일제를 본받아 국내외와 집권세력내외 반대 인사들과 의심스러운 사람들과 가족들(윤보선,김수환,김대중,함석헌등 포함.걍 예외없이 몽땅으로 보면 됩니다.김종필은 일단 보류)을 전부...(말 안할까 했지만 어차피 한국 수정되면 안나올 상황이니까)
https://youtu.be/_sKJxyf8iDI
+ 문제 몇개 넣어놓은 정도인데 무즙 파동 문제가 나와서.ㅋㅋㅋㅋ공동 정답이 된 과정도 대충 나오더군요
+ 윗대가리들은 그걸 몰라요...
PLAY
@931117 아... 저 말은, 한국의 수정 상황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근데 참... 가관이군요. 속뜻... 을 말하자면, 쿠데타의 의사를 심각하게 내포하는 발언입니다. 일단 국체 보전의 위기... 를 군인이 해석하면 ㅋㅋㅋ...
+ 아하... 설명 잘해놨네요.
+ 근데 그건 그럴수밖에 없는것 같기도...
@dear0904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면 늘 개판이라니까요.독재는 무능부패하지 않다는 말 도저히 동의 못하는 이유.게다가 독재정권은 결국 폭주할수밖에 없는.
한국 설정 및 수정사유의 99%가 제 정치적 신념과 가치관 적극 반영이니 말 다한.오죽하면 수정 논의 필수사항이라 보며 설정 다 공개중이겠습니까.
지금 로비 합법화,박정희 여당 종신총재 추대등도...
+ 조각칼 쓰는 방법도 똑같이 나왔습니다.공동 정답 처리 되서.
+ 그렇긴 한데 보는 사람들 입장에선...
@931117 김상덕은 정치에 개입하고도 개판이 아니었는데.(퍽)
@돈이 곧 진리 그런류의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고작 몇명의 예외 사례로 독재정치는 발전을 거듭해 마냥 부패무능하지 않다라고 주장하면서 나치랑 일제도 나름의 강점이 있고 유능한점이 있었다고 해대면 누가 납득을 합니까?
@돈이 곧 진리 창작 인물 + 저런거 안 하려고 만들었을 인물... 하고 비교하면 안되죠 ㅋㅋㅋ...
[킹메이커]
1972년 3월 16일, 청구동 이홍립 서울 자택.
이홍립:
“…그래서, 엄 선생… 본론이 뭐요?”
엄창록:
“장군님께서리 큰 맘을 먹었시문, 그 수단도 강구해야 한다, 이말이우다. 안그렇습데까?”
이홍립:
“선생이 말하는 그 수단이라는 게, 결국에는 장기적으로 역효과를 불러오는 ‘협잡질’이라는 거요. 그래서 선생께서 하는 말을 다 들어주지 못하는 거고.”
엄창록:
“어채피 세상이란 건 너와 나, 적과 동무의 싸움입네다. 조선과 일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그런 거 말입네다.”
이홍립:
“이보시오. 난 20년동안 군에 몸담았던 사람이에요. 그런 걸로 잔소리를 하려거든-“
엄창록:
“개헌. 개헌으로 기세를 잡소.”
이홍립:
“개헌?”
엄창록:
“옳습네다.”
이홍립:
“엄 선생, 개헌이 어디 쉬운 일이오? 조공, 사민당… 심지어 자유당의 동의를 얻어내기도 쉽지 않을 거요.”
엄창록:
“기러니까네, 더 좋은 생각이라는 겁네다. 선거 분위기가 호헌 대 개헌으로 몰아지면 찬성파 쪽 지분을 공민당이 다 먹는 거 아이겠슴둥? 날래 판을 짜셔야지, 이래 허슨하게 계시면 안됩네다.”
윤보선:
“이봐, 엄 선생! 무슨 무례인가? 이 장군, 고민하실 것 없소. 우리는 우리 길을 가면 되는 거 아니겠소?”
이홍립:
“…꼭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윤 의장님, 방응모 사장이 오늘내일 한다고 했죠?”
윤보선:
“그렇소.”
이홍립:
“소성에게 연락해주십시오. 조선일보 타격에 동의한다고. 여기서 나눈 이야기는 의장님, 저, 그리고 여기 있는 엄 선생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윤보선:
“…알겠소.”
엄창록:
“기카믄… 그 전략대로 하시는 겁네까?”
이홍립:
“선거까지는 2달밖에 남지 않았소. 빨리들 움직입시다!”
방씨 일가가 부정축재 및 언론대상 불법후원금 착복, 그리고 식민부역행위로 줄줄이 구속되어 조선일보의 경영권이 국유로 넘어간 지 1주일만에, 모든 언론이 개헌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엄창록의 말대로 조공-사민-자유 3당은 호헌파에 가담했으며, 민간 기업가들의 막대한 후원과 배후지원을 몰아받은 공화민주당은 하원 총 300석 중 141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홍립은 마치 ‘통크게 양보한다는 듯’ 자유당에 “현행헌법 틀 내에서의 구조개혁”을 제안했고, 연립내각은 곧바로 수립되었다. 공화민주당 10년 정권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행규, 이철수, 그리고 “4인방”]
조선공산당의 당권이 김철수 초대 위원장을 거쳐 곧바로 이행규에게 넘어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1960년대 중후반 조공을 주도하던 것은 오히려 “대구 코뮌파” 내지 “4인방”이라고 불리는 당권파들이었기 때문이다. 4인방이라 함은 이규광, 박창암, 김성곤, 황태성을 일컫는다. 박상희 부위원장이 친동생 박정희의 반역수괴행위에 책임을 지고 위원장 출마를 고사하자, 주요 당직을 독점하다시피 한 이들 4인방의 전횡은 더욱 심해졌다. 당내 균형을 도모하던 이현상이 1967년 지병으로 사망한 뒤 군 내 좌익세력과의 커넥션은 이규광이 독점했고, 박창암은 조직국장으로서 당직자들을 직접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섰다. 쌍용양회의 사장이자 당의 돈줄을 쥐던 김성곤, 그리고 박상희의 후임 부위원장으로서 당의 좌경화를 부추긴 황태성의 권력 역시 강고했다.
문제는 이들로 인해 촉발된 당의 좌경화가 거국내각의 존립을 위협하고 조공의 지지기반을 크게 약화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립의 위기에 놓인 이행규는 4인방 쪽과도 연줄을 유지하던 측근 김종필을 통해 이들의 방심을 유도하는 한편,
반대쪽 손으로는 이철수의 노농파와 손을 잡았다. 총비서의 권한으로 이철수를 기율국장 자리에 앉힌 것이다. 바로 얼마 전 민중민족혁명위 사건(소위 ‘NLPDR 사건’)의 처리 문제로 크게 다툰 적이 있었던 만큼 이 결합은 매우 의외였다. (당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둘은 7시간동안 소주 한 궤짝을 비웠다고 전해지며, 대화내용은 기록되지 않는다.)
기율국장 이철수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살롱 이스탄불’에 모인 이규광 원내총무, 박창암 조직국장, 김성곤 재정국장, 황태성 부위원장은 조공 당직자들에 의해 연금당했고, 부정행위 심사 이후 긴급처분으로 당직정지 처리가 이루어졌다. 1970년 8월의 이 사건에 대해, ‘살롱 이스탄불’의 전 대표이사였던 정예림 문화예술부 장관은 극구 연관성을 부정했으나, 호사가들은 ‘긴밀한 협조’가 있었다는 소문을 뿌려대곤 했다.
1달 뒤 개최된 제3차 당대회에서 김철수 위원장은 이행규 총비서에 대한 전폭 지지연설을 했고, 그는 압도적인 득표로 차기 위원장직에 오를 수 있었다. 이철수는 총비서직을 가져가 그의 암살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재건위파-노농파의 동맹이 유지되었다.
물론 이 사건으로 인해 이규광 계파가 사실상 숙청됨으로써 조공이 가지고 있던 군과의 연관성은 증발에 가깝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1970년 이후 조공의 ‘신중도마르크시즘’ 당론은 혁명주의와 개량주의라는 고전적인 이분법을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타 정당과의 정책협조를 통한 노동권리 신장을 지향했으므로, 군과의 연계를 끊는 것은 오히려 이후의 행보에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여겨진다. 만일 4인방과 코뮌파가 조공을 완전히 장악했다면 조선 의회민주주의의 근간을 심각히 훼손했을 것이며, 이는 1982년과 같은 사건을 더 일찍, 더욱 비극적인 형태로 불러왔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판단된다.
- 김문수, “21세기, 다시 마르크스주의를 말한다” 발췌.
@E.E.샤츠슈나이더 누... 누가 썻다고요...? 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