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 시대에 태어남과 동시에 그 시대에 삶을 마감한다. 그 어떤 인간이라도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 함과 동시에 그 죽음을 피하기를 또는 늦게 찾아오기를 소망 하며 살아간다.
옛 중국의 진시황을 좋은 예시로 들을 수 있을 것 이다. 그는 죽음에서 초월하고자 불로초를 찾은 것으로 유명하며 그의 무덤인 진시황릉 에는 수은으로 이루어진 강이 있다고 전해내려 오고 있다.(당시는 수은이 장수의 비결로 보았다.)
하지만 그 또한 무덤에 묻혀있고 우리들 또한 그 뒤를 따를 것이다. 이 죽음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많이 나와있다. 표면 상 죽음이라는 것은 육체 활동이 정지 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것은 생물학적인 죽음이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여러 곳에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정신적인 죽음이 좋은 예시가 될 것 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되어야 진정으로 죽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나는 이것에 대한 대답으로 한 만화의 유명한 대사를 이용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에게
잊혀질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코코' 라는 영화 또한 이 이야기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내용을 간략히 말하자면 사후 세계 영혼이 현실 세계 사람들이 그들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때 소멸 되는 것을
주제로 영화가 전개 된다. 그렇다면 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언젠가 그들을 우리가 잊게 된다면 그 사람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죽은 것이 되고, 만약 그를
기억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잊게 된다면 그는 비로소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사성어 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호사유피 인사유명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이 말을 깊게 들어가면 사람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살아야 하며 후세에 어떻게 이름을 남겨야 하는지 고민을 해볼 수 있게 해주는 고사성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단순히 생각해 보면 결국 후세에 이름을 남겨 본인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고 싶어하는
사람의 욕망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고사성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잊었으며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남과 그 사람을 언제 잊을지 살아가는 것일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