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앉아 있어도 등줄기에 땀이 나고 길거리를 한 발자국만 걸어도 숨이 막히는 한증막 같은 여름날, 8월 2일 낮 2시에 나는 한글학회 김승곤 부회장과 함께 국회의원 회관으로 정청래(열린우리당 서울 마포을)의원을 만나러 갔다.
수십 년만에 찾아온 찜통 같은 더위에 국민은 말할 거 없고 정치인들도 많이 휴가를 떠난 한 여름이다. 한글날 국경일 제정을 바라는 국민의 소리를 알리려고 숨을 헐떡이며 정청래 의원실 앞에 서니 문에 “국민의 소리를 열심히 듣겠습니다.”라고 써 있고 비서와 보좌관들이 모두 바쁘게 일하고 있다. 비어있던가 한 두 사람만 자리를 지키는, 더위에 지치고 썰렁한 다른 의원실 분위기와 사뭇 다르고 진짜 열심히 일하는 국회의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정 의원이 나보다 먼저 온 방문객과 이야기를 하고 있어 비서실에 잠시 기다리게 되어 방을 둘러보니 비서실 벽에 “의정활동 중장기 10대 기획테마”라는 제목으로 열 가지 중점 과제를 써 붙인 것이 눈에 띄었다. 조금 열려있는 의원 방에도 비서들 책상을 놓인 것과 함께 다른 의원실에서 볼 수 없는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정 의원이 먼저 만난 손님을 배웅하러 나왔는데 양복에 넥타이를 맨 근엄한 모습이 아니라 반 팔 티셔츠에 간편한 생활 복 차림이다. 보통 의원들의 방에 가면 묵직한 안락의자나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큼직한 탁자와 의자만 있어 위압감을 주기도 하는 데 그렇지 않았다. 정 의원을 만나니 태도와 말소리가 순박한 농촌 청년 느낌이고 고향친구처럼 따뜻하다.

사진 가운데 정청래의원, 오른쪽이 김승곤 한글학회 부회장이고 왼쪽이 글쓴이인데 글쓴이 뒤쪽에 보좌관과 비서의 책상이 있고 의원과 함께 일하고 있는 게 남다르다.
나는 14대 국회 때부터 13년 째 많은 국회의원을 만나러 다녔지만 비서실에 자리가 모자라 의원 방에까지 보좌관과 비서의 자리를 만들어 놓고 함께 마주보며 일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권위를 무시한 열린 마음이 보이고 비서와 국민과 한마음이 되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어서 칭찬을 하니, 16대국회 때 김홍신의원이 그렇게 방을 꾸미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배웠다고 겸손해했다.
그리고 우리가 한글날 국경일 제정을 부탁하기도 전에 처음 국회에 들어오니 문서나 법률문장이 불필요하게 한자를 많이 쓰고 있어 운영위원회에서 “어쩔 수 없는 건 가로 안에 한자를 함께 쓰더라도 될 수 있으면 우리 글자인 한글을 쓰자. 본회의장에 국회의장 자리에 한자로 議長이라고 쓴 것도 눈에 거슬린다. 한글로 바꿔 쓰자고 주장했는데 사무처 직원들 반응이 좋지 않다.”고 아쉬워했다.
또 정 의원은 운영위에서 함께 활동하는 박영선 의원이 국회의원 보람(배지)의 或(혹)자로 보이는 한자 國자를 한글 ‘국회’로 바꾸자는 활동을 하고 있는데 본래 자신이 먼저 나서고 싶었던 일이라고 말한다. 박병석의원이 국회 배지 글자를 한글로 쓰자는 국회운영규칙 개정안을 내고, 박영선 의원이 국회의원 서명을 받아 그 일을 추진하면서 국회의원회관의 국회의원 전용 승강기를 없애자고 발언했다는 보도를 봤는데 정청래 의원 또한 열린 국회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국회 담장을 헐면 어떠냐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모두 국회를 참된 모습으로 바꾸려고 힘쓰는 모습이어서 흐뭇했다.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도 쉬지 않고 국민의 소리를 들으려 하고, 국민과 가까워지려는 정 의원 같은 정치인이 있지만 8월말까지는 해외 출장과 지역구에 가게 되어 국회에 한번도 들르지 않기에 국민을 만날 시간이 없다는 국회의원도 있다. 새롭게 변하려는 의원과 권위나 지키고 바뀌지 않으려는 의원, 두 가지 국회 모습이지만 열린 국회로 새롭게 바꾸기 위해 애쓰는 의원들이 많기에 희망을 갖게 된다.
정청래 의원이 의원 비서실 벽에 써 붙인 '의정활동 10대 과제'는 정 의원이 자신의 누리집에 쓴 "저 정청래는 초심을 잊지 않고 중심을 잡고 낮은 자세로 열린 마음으로 늘 열심히 일하는 정청래가 되겠습니다.”라는 말을 실천하는 모습이고 다짐으로 보여 믿음직스러웠다.
그 날 함께 정 의원을 만나러 간 한글학회 김승곤 부회장은 정 의원이 다닌 대학에서 정년퇴임한 70대 노인인데 “열심히 일하는 정 의원 모습을 보니 마음 든든하고 흐뭇하다. 더위에 지친 늙은 몸이 젊어지는 거 같다."시며 기뻐하셨다. 모든 국회의원이 정 의원처럼 성실하다면 국회는 일하는 국회로 바뀔 것이고 국민들이 ”국회의원은 놀고 먹는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성실한 일꾼 정청래 의원을 뽑은 서울 마포 을’ 지역구민이 부럽고 복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청래 의원실 벽에 붙여있는 의정활동 중장기 10대 기획테마
(문화관광위원회 활동)
1. 문화주권 회복을 위해 앞장서겠습니다.
2. 문화 소외계층의 문화 향수권 확대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3. 문화 분야 낙후된 제도, 잘못된 관행 개선을 위해 앞장서겠습니다.
4.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남북문화교류 활성화를 위해 앞장서겠습니다.
5. 왜곡된 언론시장의 정상화를 위해 앞장서겠습니다.
6. 방송 공영성 확보와 시청자 주권확립을 위해 노력하고 방송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겠습니다.
(국회운영위원회 활동)
7.국회 운영의 민주성과 투명성을 위해 앞장서겠습니다.
8. 국가 재정과 인사체제의 효율적 합리적 운영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기타)
9. 국가 균형발전, 서울 균형발전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10. 역사를 바로세우고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활동에 앞장서겠습니다.
[참고 자료: 1992년 14대 국회 때 한글 이름패 쓰기 운동을 하면서 국회의원에게 보낸 편지]
우리는 영웅주의자나 혁명주의자가 아닙니다.
국회의원님께
안녕하십니까? 무더운 날씨에 나라를 위해 좋은 일 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실 줄 압니다. 가정에서도 어버이와 아들 딸 들이 서로 대화가 있어야 하듯이 정치 지도자와 국민들 사이에도 많은 대화가 있어야 좋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이 정치 지도자를 잘 알지도 못하며 비난하던가, 따르기도 하고, 정치인이 국민 마음을 모르고 정치를 하는 데, 서로를 위해 또 나라를 위해 불행한 일입니다. 국민도 정치인도 반성해야 될 줄 압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의 생각을 글로 써 보내 드리오니 눈여겨보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먼저 바쁘신 중에도 우리들을 만나 주시고 우리 한글학회의 말에 귀 기울여 주신 의원님들께 머리 숙여 고마운 인사 올립니다. 따뜻한 격려의 말씀도 호된 비난도 모두 우리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직 못 만난 의원님들께서도 만나 뵐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그런데 일부 국민과 의원님들이 우리 한글학회에 대해 잘못 알고 있어 몇 말씀드릴까 합니다.
먼저 우리말과 한글을 쓰고 빛내자는 우리의 주장을 국수주의자로 보는 일입니다. 국수주의란 자기 나라 문화 문명만 좋고 자기 겨레만 잘났다고 하며 남의 나라 문화 문명은 무조건 나쁜 것으로 알고 업신여기며 받아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말과 한글을 쓰자고 하는 것은 한글이 우리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글은 일본글자인 가나나 중국글자인 한자보다 좋은 글자이고 로마자보다도 우리말을 적고 배우는데 좋기 때문입니다.
글자는 말을 적는 연모입니다. 글자는 그 말을 적고 쓰기가 편해야 됩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뜻이 통하지 않고 뜻이 통하지 않으면 답답하고 서로 어울려 살기가 불편합니다. 한자가 남의 글자라서 가 아니라 한자가 한글보다 훨씬 못한 글자이며 불편하기 때문에 한글을 쓰자는 것입니다. 지난번 중동 걸프전쟁에서 훌륭한 전쟁무기를 가진 미국이 이기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화경쟁 무기인 한글을 잘 이용할 때 우리가 빨리 발전하고 극심한 국제사회 문화경쟁에서 이기고 앞서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국수주의자가 아니라 합리주의자요 개선주의자입니다.
다음 한글만 쓰자는 우리들은 한자를 배우지도 말고 전혀 쓰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우리 조상들이 한자를 써왔고 우리말에 한자말이 많다는 것도 압니다. 다만 한자를 국어시간에 가르치지 말고 별도 과목으로 공부해 옛 한문책을 읽을 수 있는 기본을 갖추고 번역할 수 있는 한문 전문가를 키우자는 것입니다. 또 한자말이라도 우리말이 된 것은 꼭 한자로 적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버스나 라디오란 외래어를 한글로 적듯이 말입니다.
모든 국민이 한자와 중국 간체자나 일본글자나 영문이나 아라비아 글자 들, 남의 나라 글자와 말을 모두 다 배우고 잘 할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 의원님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재주가 있던가. 한자를 공부할 기회가 있어 한자를 좀 안다는 어떤 의원은 다른 국민도 자기와 같은 거처럼 생각하며 한자를 많이 쓰자고 했습니다.
일곱 살 때 한문 사서삼경을 읽었고, 옛날 책을 번역하신다는 어떤 의원님은 국민이 한자에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 국회의원 명패라도 한글로 써야 한다고 하시며 한글이 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요물인 것처럼 말하고 우리를 비난했습니다. 또 어떤 젊은 의원보좌관은 처음 국회에 들어와 공문서가 한자로 되어 있어 크게 불편했는데 수년 동안 공부하고 익숙해지니 이제 한글만 쓴 글은 글 같지 않다며 우리의 주장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 모두 지금도 모르는 글자가 더러 있어 계속 한자 공부를 하고 있다고 자랑처럼 말했습니다.
일할 시간에 한자 공부를 한다는 것도 그렇고, 국회의원 명패를 계속 한자로 써야 국민들이 그 명패를 읽기 위해 한자 공부를 할 것이라고 한글 이름패가 싫다는 건 한심하고 답답한 일입니다. 일반 국민들은 국회의원이나 보좌관처럼 일생동안 한자 공부나 하고 있을 정도로 한가하지 않고 밤낮으로 땀 흘리며 공장과 거리에서 일해야 살 수 있는 처지입니다.
자기는 한자를 조금 안다고 한자로 써야 읽기 쉽고 이해가 빠르기 때문에 한자를 자꾸 써야 좋다고 하는 것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요 자기 편의주의이며 반민중 행위라고 봅니다. 한국 국회에서 한국 국회의원이 한국의 글자인 한글 이름패를 쓰겠다는 원광호 의원을 소영웅주의자나 혁명주의자로 보면서 막는 몰상식한 국회 사무처 직원을 그대로 보고 있는 여러 의원님들께 실망했습니다. 우리들은 4.19혁명이나, 5.16혁명을 일으키고 국회의원을 하는 분들과 달리 수십 년 동안 평화롭고 공손한 말글로 우리 한글을 살리자고 주장했습니다.
한자를 섞어 쓴 신문을 읽기 위해서, 일본이 한자를 섞어 쓰니까, 옛 조상이 한문만 썼으니까, 또 한자로 이름을 써야 권위가 서보이고 체면이 서니까 계속 한자를 써야 한다는 의원님이 안 계시길 바라며 빨리 국회가 제 모습을 보여주고 국민을 기쁘게 할 일을 많이 하시기를 빕니다.
1992년 8월 25일
한말연구회 회장 문학박사 김승곤
한말글사랑겨레모임 공동대표 리대로 올림

필자 이대로 선생은 대학생때부터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지금은 우리말글 살리기 운동에 힘쓰고 있다.
1967년 동국대 국어운동학생회 창립 초대 회장
1990년 한말글사랑겨레모임 공동대표
1994년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 조직위윈장
1997년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2000년 한글세계화추진본부 상임이사(현)
2004년 한글날국경일 제정 범국민추진위원회 사무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