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전역의 초기, 당나라 군대는 압도적인 군사적 역량을 과시하며 고구려를 사정없이 몰아쳤다. 고구려는 이에 쩔절 매었으며, 마침내 주필산 전투라는 비극이 닥쳐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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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군의 주력 병종인 기병, 궁병 등의 이미지 |
이렇게 당군은 승승장구 하였으나 신성을 공격했을때는 계속 실패하였고 건안성과 오골성 역시 공격에 실패하였다. 이후 안시성을 공격하기 전에 안시성이 잘 방어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당태종은 안시성 대신 두 성중에 어느 성을 먼저 공격할지 물었는데 이때 이적이 두 성 모두 당군에게 큰 위협이긴 하지만 안시성을 미리 쳐서 함락시키지 못할 경우에는 보급이 어려워지고 후에 배후 기습을 당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곧 여러 신하들이 안시성을 칠 것을 건의하니 당태종은 이에 따르기로 하였다.당나라 군대가 요동에 침입하여 이미 여러 성을 함락시켰다는 급보를 전해 들은 연개소문은 곧 북부욕살(褥薩)이었던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으로 하여금 당군을 치도록 하였다. 명을 받은 고연수와 고혜진은 말갈에 까지 병력을 얻어와 사실상 고구려 전 병력에 해당하는 15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루었다. 이때 이들과 함께 전세를 살피던 백전노장 고정의는 당태종의 지략이 뛰어나니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권하였다. "진왕(秦王 = 이세민)은 안으로 여러 영웅을 제거하고, 밖으로 오랑캐를 복속시켜 독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한 시대에 뛰어난 인재이다. 지금 나라 안의 무리를 거느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 없다. 나의 계책으로는 병력을 멈추고 싸우지 않고 세월을 허송하며 오래 버티어 견디며 기습 병력을 나누어 보내어 그 식량을 보급하는 길을 끊는 것만 같지 못하다. 양식이 이윽고 떨어지면 싸우려고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곧 이길 수 있다." ─ 三國史記 卷第二十一 髙句麗本紀 第九 |
고정의가 주장한 지구전은 실제로 당태종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이기도 했다. 당태종은 신하들에게 고구려군의 고연수가 취할 계책은 세가지인데 가장 상책으로 바로 고정의가 주장한 바와 똑같은 말을 하였다. 중책은 안시성의 병력과 함께 달아나는것이고 하책은 일단 싸우자는 식인데, 당태종은 고연수가 소위 그 하책을 선택할 것이라 예상했다.과연 두 사람은 이 충고를 묵살하고 곧바로 당군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고구려군의 운명은 정해졌다. 당서와 삼국사기에는 당태종이 고연수가 하책을 택할지 어떻게 알았는지는 나와있지 않다. 특히 상책은 고구려-수 전쟁 때 이미 고구려가 써먹어 엄청난 효과를 본 전략인데도 그렇다. 하지만 고연수로서는 안시성이 연개소문에게 적대했던 적이 있으므로 안시성과의 연계가 필수적인 상책과 중책을 택하기 껄끄러웠을 것이다. 여기에 15만이나 되는 대군이 오랫동안 발이 묶여 있다면 연개소문 반대파가 쿠데타를 시도하거나, 최소한 정치적으로 압박을 넣을 수 있다. 특히 연개소문의 집권 과정에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었으니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은 고구려-수 전쟁때보다 훨씬 높았다. 즉 고정의가 제의한 지구전은 고구려로서도 껄끄러운 전략이었다.
당태종은 아사나사이(阿史那社尒)의 돌궐 기병 1천여 명으로 일부러 짐짓 패하는 장면을 연출하여 고연수를 방심하게 했고, 고연수는 "상대하기 쉽구나."라는 드립을 치면서 자신감을 얻어 계속 당군에 접근하였다. 마침내 고구려군은 안시성 동남쪽 8리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안시성 내의 고구려 군과 협력한 듯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때 당태종은 일부러 15만 군사의 위용에 겁을 먹은척하여 두 욕살에게 선뜻 사신을 보낸다. 당태종은 고연수에게 연락을 취해, 자신은 연개소문을 문죄하러 왔을뿐, 교전은 바라지 않고 다만 신하의 예만 취해준다면 철수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보였다. 뻔히 보이는 기만책이지만, 고연수는 이에 속아넘었던지, 혹은 은연중에 경계를 늦추고 자만했던지 진군을 멈추고 방비를 게을리 하는 실수를 보였다.
한편 당태종은 이 기간동안 병력을 밀집시켜 포진을 완료하고 고구려군을 기다린다. 고구려군이 안시성과 연계할 것을 우려하여 고구려군을 당 태종 본대가 포진한 지역으로 끌어들인 후 장손무기로 하여금 고구려군 배후로 돌아 공격하게끔 한 것이었다.
다음 날, 고연수는 1만 5천여 병력을 이끌고 서쪽 고개에서 진을 치고 있는 이세적의 군대를 보고, 그 숫자가 적다고 여겨 공격을 가하였다. 고구려군이 당군에 집중하여 돌격한 사이 장손무기가 이끄는 부대가 고구려군을 기습적으로 강타하였고, 전면의 이세적은 1만 장창병을 전면에 배치함으로서 고구려 기병의 돌진을 저지했다. 고구려군은 앞으로 돌진하자니 이세적의 부대에 막히고, 뒤로는 장손무기의 병력에 막혀 크게 당황하였다.(퇴로는 이미 장손무기가 다리를 끊어 봉쇄된 상황.) 즉, 고구려군이 너무 성급한 나머지 유인 - 반전 - 포위 전술에 말려버린 것. 삼국사기에선 여기에 덧붙여 천둥과 번개가 치는데다, 전면에서 용문 출신의 용병 설인귀가 기이한 옷을 입고 크게 소리를 치며 돌진하며 고구려 군의 전열을 흩어지게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고구려군은 큰 피해를 입어 3만 명이 전사하였다. 고연수 등을 비롯한 고구려 수뇌부 3만 7천여 명은 자그마한 구릉에 올라가 방어책을 강구하려 하였지만, 당군이 이를 포위하자 결국 항복하였다. 항복한 고구려 장교만 3천 5백여 명이었고, 말갈 병사 3천 3백여 명은 모두 땅에 파묻어버렸다. 또 이 전투에서 당군이 거둔 말만 5만여 필이나 되었으며, 항복한 고연수는 홍려경(鴻臚卿)으로, 고혜진을 사농경(司農卿)으로 봉해졌다.
하지만 여기에는 의문점도 있는데, 당나라로 끌고간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포로 3만은 석방하여 평양으로 되돌러보낸 점, 고연수(남부욕살)나 고혜진(북부욕살)보다 고정의(대로 혹은 대대로)의 직책이 더 높은 점 등을 들어 정말로 주필산 전투가 고구려의 패배였는지 의문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대로가 태대형과 동급의 직책인지는 불명이다. 오히려 대로가 위서 이후 당서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관등을 기록한 중국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점(위서를 인용한 양서는 제외), 특히 고려기에서 대대로는 등장하는데도 대로라는 직책은 기록에 없고, 태대형은 막리지와 동일시 하는 점,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대로 제우, 고이만년, 재증걸루를 동일한 관등으로 보기 어렵다는 사유로 볼 때, 대로는 태대형이라는 특정 직책명보다는. 위두대형 이상의 귀족회의 구성원을 지칭하는 말로 보기도 한다. 즉 고연수나 고혜진도 대로에 해당하며, 고정의의 직책을 대로로 전제할 때 고정의가 고연수나 고혜진보다 상위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포로를 풀어주는 건에 있어서도 주필산 전투에서 포로를 풀어주기는 했지만 장교급에 해당하는 3,500명, 즉 부대를 구성할 중핵은 전부 빼갔으니 나머지 포로는 풀어줘도 당장 위협이 될 여지는 적었다. 거기다 사병들을 포로로 데리고 있으면 반란 위험성도 있고 무엇보다 군량만 축낼테니...
이제는 정말로 고구려는 바람앞의 촛불과도 같았다. 평양성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안시성만이 남아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