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을 뵙고 그 속내 깊은 가르침을 받아 깨어 있는 부처님 참 생명으로서의 부처님을 만나 뵐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큰 불은이었다.
어느 날인가 스님은 주지실문 위에 붙어 있는 육화경(六和敬)을 가리키면서 그 뜻을 음미하라고 하셨다. 계화동준(戒和同遵), 견화동해(見和同解), 이화동균(利和同均), 신화동주(身和同住), 구화무쟁(口和無諍), 의화동존(意和同尊)이다. 이 세상에는 세가지 종류의 모임이 있다. 권력에 의한 모임, 금력에 의한 모임, 동신동지의 모임이다. 권력과 금력은 무상한 것이다. 오직 동신동지의 모임만이 영원한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이와 함께 계율을 존중하고 지키고 의견을 서로 잘 맞추고, 이익을 똑같이 수용하고, 몸으로 일을 함께 하며, 입으로 다투지 않고, 서로 인격을 존중해 준다면 승가는 화합하고 영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도 스님들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노스님은 항상 초연하셨고, 정화는 필요하지만 폭력적 싸움은 있어서도 안된다고 강조하시며 정법 수호는 그 방법도 정당해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노스님을 시봉하면서 목욕하고 청소하며 마음을 관하고 때묻은 마음을 닦아내는 법을 배웠다. 뿐만 아니라 교단이 화합하는 법도 배웠다.
이후 나는 대학에 가서 학문적인 불교체계를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불교 종립학교에서 교법사의 역할과 일반 교사의 책임을 다해야 했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포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했다. 교내에서 불교를 가르치는 것은 인연의 이치를 이해시키려 애썼고, 선생님들에겐 종립학교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자고 권했다. 중고등부 학생회를 조직하고, 밖으로 대학생회·청년회·일반불교 신도의 연합적 조직 거사림 등에 참여하고 지도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학생들과 매일 교문 앞을 쓸기도 하고 일요일 새벽이면 역전으로, 영렬탑으로, 보문산 공원으로 빗자루를 들고 나섰다. 농사철이면 모내기 등 할 일이 많았다. 토요일이면 중고등법회, 일요일이면 일반 신도법회, 청년회 대학생회 등 빠지는 적이 없었다. 부처님 오신날의 행사를 비롯 지역내 모든 불교관련 행사가 종립학교 중심으로 치러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도소의 법회및 위문, 양로원 고아원 등의 위문, 각종 기념일에 종교방송이나 지방신문 기고까지도 교법사의 몫이었다. 그 때는 그런걸 해줄 사람이 없었다. 잘하고 못하고 간에 능력 껏 할 수 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학교 조직의 변화로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되서도 그 책임과 역할 못지 않게 교법사로서 즉 포교사로서의 생각을 저버리지 않았다. 교장실에서 매일 생일 맞은 학생들을 초청, 보은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또 명상을 통해 인연의 소중함을 알고 착한 마음을 갖도록 했다. <부모은중경>을 사경하여 부처님의 공덕을 알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을 열어 보기도 했다. 또한 ‘자기 찾아 나서기’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자기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고 연꽃 음악제 등을 통하여 직원과 학부모들과 종교적 이해를 높여보고자 노력했다.
지난해 나는 정년퇴임했다. 지난 30여 년의 세월을 돌이켜 보면 부끄러운 일도 많았다. 이제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한다. 밖으로만 뛰어가던 내 신행이 보다 안으로 여물어 갈꽃처럼 피어나야 한다.
노스님으로 부터 시작하여 많은 선지식들로부터 배운 불법의 큰 바다속에서 이제는 더 자주 목욕하며 살아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