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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및 도서 자료 스크랩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얼라 추천 0 조회 73 09.01.27 01: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Ordering Your Private World

고든 맥도날드

목차

서문 : 벽에 부딪치다

1. 함몰 웅덩이 증후군

2. 조종실에서 보는 시각

1부 동기 부여

3. 황금 새장에 갇힌 인생

4. 어느 성공한 못난이 이야기

5. 부름받은 사람의 삶

2부 시간사용

6. 누구 내 시간 본 사람 없소?

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부 지혜와 지식

8. 더 뛰어난 사람이 패한 경기

9. 한 번도 읽힌 적이 없는 책

4부 영적인 힘

10. 마음의 정원을 가꾸는 사람

11. 믿음으로만 버티는 인생

12.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입력하라

13. 하나님의 시각에 맞춰진 눈

5부 회복

14. 여가 이상의 쉼

0. 삼 십 세의 경험

삼십이 되던 해 어느 토요일,

끝없는 일, 암울한 기분, 불안정한 생각으로 인해 나는 완전히 고갈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 날 토요일, 식탁에 앉아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수많은 일거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순간 아내 게일의 말 “당신 최근에 아이들과 보낸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나는 이 소리에 울기 시작했다. 오전 내내 울었다. 이것이 바로 망가지는 순간이 아닐까?

그 토요일은 섬뜩하고도 힘겨운 체험을 통해 큰 교훈을 배운 날이었다. 내가 기존의 생활방식으로 계속 살면서 사람들의 영적 지도자가가 되기를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아침을 벽에 부딪친 날이라 부르곤 한다.

개인적인 카리스마, 정신적인 총명함, 정서적인 힘, 조직적인 능력 등과 같은 천부적인 재능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어떤 때는 그것이 영적인 생명력과 깊이로 오인될 수도 있다. 애석하게도 오늘날 기독교 문화는 영적인 깊이를 가진 사람과 재능이 많은 사람을 쉽게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굉장한 조직을 세울 수 있는 지도자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른 말을 하고 똑똑한 만큼 옳은 일을 하고, 통찰력이 있어서 좋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등 그들은 자신의 내명 세계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남이 알아채기도 전에 성공의 길로 한참을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내가 그 토요일 아침에 처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재능은 풍부하게 타고 났으나 내면세계는 초라하기 그지없고 영혼이 거의 비어 있는 한 젊은이. 지혜의 샘과 영적인 능력, 그리스도인다운 깊이가 흘러나와야 할 내면이 빈곤에 처한 성공적인 목회자.

자신의 삶에서 훈련에 힘쓰는 이들 혹은 의도성을 가지고 노력하는 이들은 장기적으로 열매 맺는 인생을 살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들 인생의 황금기는 그런 훈련과 깊이의 보상을 받는 후반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천부적인 재능에 크게 의존하는 이들은 인생 초기에는 어느 정도 높은 지점에 도달했다가 후반기에는 평균수준으로 떨어질 확률이 높으리라. 전자의 경우는 풍부한 영적 자질을 지닌 사람으로 일컬어질 것이다. 당시의 내 모습은 “글쎄요. 그는 분명 용두사미격인 인물이었죠.”라고 평가될 것이다.

나는 의도적으로 삶을 재 정돈하리라고 결심했고 최선을 다해 천부적인 재능에 기초한 삶과 사역의 길에서 뛰쳐나와 훈련과 의도성에 기반을 둔 길로 바꾸겠다고 마음먹었다. 내면세계의 질서를 바로잡기로 다짐한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뀐 것으로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 매우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내면세계의 질서는 속마음으로부터 변화되는 문제이지 외부가 바뀌는 문제가 아니다. 어떤 도구(pda 등)를 사용하면 깔끔하게 정리되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런 장비들은 잊어버리고 속마음, 곧 당신의 내면세계로부터 시작하라.

우리가 추구하는 질서는 삶의 내면을 철저하게 정련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응답할 수 있는 까다로운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중독성이 강하고 파괴적인 신념과 원리들에 정면으로 도전함으로써 우리에게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임으로써 말이다.

1. 함몰웅덩이 증후군

함몰웅덩이: 가뭄으로 지하수가 고갈되어 지표를 지탱할 힘을 일을 때 생기는 현상

수많은 사람들이 플로리다의 함몰웅덩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피곤으로 무감각해진 정서, 실패감, 목표에 대한 환멸감 등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감지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한참 숙고해보면 이전에 몰랐던 우리 안의 영역 즉 내면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리는 두 개의 아주 다른 세계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우리의 외부 세계 혹은 공적인 세계는 다루기가 더 쉽다. 그것은 측정할 수 있고, 더 늘려갈 수 있는 세계이다. 일 놀이, 성공, 인기, 부, 미모 등이다.

2) 그러나 우리 내면세계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영역이다. 이 세계는 선택과 가치가 결정되는 중심부이며 고독과 성찰이 추구되는 곳이다. 예배와 신앙고백이 행해지는 장소이며 세상의 도덕적 영적 공해가 침투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 곳이다.

오스카 와일드 “나는 더 이상 내 영혼의 선장이 아니었다.”

나는 이 시대 가장 격렬한 전쟁터 중 하나는 개인의 내면세계라고 믿는다.

웨인 뮬러 “우리는 바쁘면 바쁠수록 그만큼 더 중요한 인물인 양 스스로 생각하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미칠 것이라고 추측한다.”

서구문화의 가치관은 이런 성향을 향해 우리를 눈멀게 했다. 우리는 공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는 사람이 내적으로도 아주 영적인 사람이라고 순진하게 믿는 경향이 있다. 또한 교회가 크면 클수록 하늘로부터 오는 복이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지식이 많을수록 그만큼 하나님과 더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 때문에 내면세계를 희생해서라도 공적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불균형적인 삶의 유혹을 받는 것이다. 더 많은 프로그램, 더 많은 모임, 학력, 더 넓은 대인 관계, 더 바쁜 일정 등. 삶의 표피를 이루는 이 모든 것이 너무 무거워져 도무지 감당할 수 없게 되면 결국 삶 전체가 무너져 내린다.

어느 형제와의 대화

“요즘 영적 생활이 어떠십니까?” “내면생활을 정돈하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갖고 계십니까?”

“내면세계라는 것이 도대체 뭡니까?”

이 질문이야말로 무언가를 뚜렷이 보여주는 본보기다 한번 생각해보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을 고백하고 오랫동안 교회 일도 열심히 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 사역으로 상당한 평판까지 얻은 사람이 그 모든 활동과 뜻 깊은 종교적 아우성 저변에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생각한 적이 없다니.

세계 선교지도자 프레드 미첼 “너무 바빠서 삶이 황무지로 변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존 퀸시 아담스 “다른 어떤 위대함보다 영혼의 위대함을, 다른 어떤 부요보다 마음의 부요를 숙고해라.”

2 조종실에서 보는 시각

미 해군 핵 잠수함 장교인 친구의 경험.

잠수함 위로 많은 배가 지나가고 있어서 잠수함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여러 차례 요동쳤다. 비정상적인 움직임이 있자 함장이 급하게 조종실에 왔다. “이상 없나?” “네 이상 없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괜찮아 보이는군.”하면서 떠났다.

명령을 수령하는 중심부인 조종실에는 공포의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직 고도로 숙련된 승무원들이 차분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을 뿐이다.

인간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내면세계의 조종실에 이상이 생기면 화를 당하게 된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사고 탈진, 신경쇠약, 폭발 등과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실례:

월스트리트 저널 ‘경영자의 위기’ 제럴드 맥스웰의 이야기(41쪽)

잠수함 이야기로 돌아가자 함장의 행동을 다시금 상기해보라. 사방에 격렬한 소동이 일고 있는 것을 느꼈을 때 모든 것이 질서 있게 돌아가고 있는 지를 알아보기 위해 곧바로 조종실로 갔다. 그 밖에 어디에서도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종실에 아무 이상이 없는 배는 아무리 거친 환경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오후 갈릴리 바다에서 큰 폭풍을 만난 제자들.

그리스도께서 폭풍에게 잠잠하라고 명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는데 그것은 영적 지도자로서 성장하고 성숙하는 데 필요한 핵심적인 질문이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눅 8:25). 내 방식대로 하자면 “왜 너희 내면세계의 조종실이 질서정연하지 못한 것이냐?”

삶에 긴장과 압력이 가중될 때, 왜 우리는 삶의 조종실로 내려가는 대신 더 빨리 뛰고 더 강력하게 저항하고 더 많이 쌓고 더 많은 정보를 모으고 더 나은 전문가가 되려하려는가?

성경기자들은 조종실의 원칙을 믿었다. 그들은 내면세계를 가꾸는 것이 최우선임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업적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전수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기록한 것은 창조주로부터 받은 것인데 그분은 우리를 내면세계로부터 외부 세계를 지향할 때 가장 잘 살 수 있도록 만드셨다.

잠언의 한 기자는 내면세계의 원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 무엇보다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잠 4:23)

이 간단한 문장하나로 기자는 아주 놀라운 통찰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내가 조종실이라 부르는 곳을 그는 마음이라 부른다. 그는 마음을 근원으로 비유했고 거기서부터 에너지와 통찰과 힘이 흘러나와 외부의 격변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암시한다.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1) 마음의 순점함을 위협하는 외부의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함을 생각하고 있다. 2) 삶에 질서를 주는 마음의 역량증대를 위해 마음을 강하게 하고 계발하는데도 관심이 있다.

3)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의도적으로 절제력을 발휘하여 선택해야 할 사안이라는 것이다. 반드시 우리는 마음을 지키기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의 말 “여러분은 이 시대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조종실이라고 부르든지, 마음이라고 부르든지 요점은 같다. 즉 모든 것이 질서정연한 고요한 장소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거기로부터 외부의 격동을 극복하고 그에 위축되지 않는 힘이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3. 황금 새장에 갇힌 인생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구하려면 부름 받은 사람과 쫓겨 다니는 사람의 구별에서 출발해야한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이유도 모른 채 어떤 목표와 목적을 향해 쫓기고 있으며 이러한 삶이 정신과 몸, 마음에까지 폐혜를 주고 만다.

쫓겨 다니는 사람의 증상

1) 오직 무엇인가를 성취했을 때에만 만족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람은 삶을 오직 결과의 측면에서 보기 때문에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2) 성취를 표시하는 상징에 집착한다.

권력이라는 개념을 늘 의식하고 그것을 소유하여 행사하기 우해 애쓴다. 작함, 사무실의 크기와 위치, 직위, 특권 등과 같이 신분을 상징하는 것에 민감하며 자신의 평판에 상당한 관심을 갖게 된다.

3) 보통 고삐 풀린 팽창욕에 사로잡혀 있다.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성취를 음미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이 육신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끊임없는 발전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요구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게 된다. 자신의 현재상태나 종교적 성취에 대해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서 이웃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더 능률적인 방법, 더 좋은 결과, 더 깊은 영적체험을 찾으면서 끊임없이 긴장하고 조바심 가운데 산다.

4) 온전한 인격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경향이 있다.

성공과 성취에 골몰해 있기 때문에 잠간 멈추어서 내면의 인격이 외적인 활동과 보조를 맞추고 있는지 자문해 볼 시간조차 없기에 간격이 점차 벌어져 인격의 붕괴가 따르게 되며 갈수록 기만적으로 되어 간다.

목표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가치관과 도덕의 영역에서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여 윤리적 타락도 감수하는 실용주의적인 사람이 되어 버린다.

5) 대인관계기술을 닦는데 신경 쓰지 않는다.

목적과 목표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사람보다 프로그램, 과업, 업무가 더 중요하게 여기므로 타인이 기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잘 만들지 못하며, 목표를 달성하는데 쓸모가 없다면 주위사람들에게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과업완수에 방해되는 장애물이나 경쟁상대로 여긴다.

6) 보통 경쟁심이 강하다

모든 일을 승패를 가르는 게임으로 보기에 당연히 이겨야 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멋있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7) 화산처럼 격렬한 분노를 품고 있다.

반대나 불충성을 감지할 경우 언제든지 폭발한다.

이러한 분노는 인격을 모독하거나 수치스러운 모욕감을 주는 것과 같은 잔인한 언어 폭력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

8) 대개 비정상적으로 바쁘고, 노는 것을 싫어하고 영적인 예배를 피한다.

보통 너무 바빠서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부부, 가족, 친구와의 일상적인 관계, 자신과의 관계마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늘 바쁜 사람이라는 평판이야말로 성공의 상징이자 중요 인사임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생각하기에 빈틈없이 짜인 스케줄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려고 한다.

바쁘다고 투정하면서 동정받기를 즐기면서도 변화되기를 원치 않으므로 잘못된 점을 지적하게 되면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분노를 표출한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첫 왕인 사울이 쫓겨 다니는 자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수많은 사물들, 즉 축재하고 인정받고 성취하기 위해 쫓겨 다니다가 황금새장에 갇힌 사람들로 가득 차 있으며, 불행하게도 교회마저 이처럼 쫓겨 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사람들을 성장케 하고 하나님의 도를 기뻐하게 하는 생명의 샘이 되기는커녕 스트레스의 원천이 되어버렸다.

이와 같이 쫓겨 다니는 자의 내면세계는 무질서하다 그의 새장은 번쩍거리는 황금으로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덫에 불과하며, 그 덫 안에서는 아무것도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런 성향은 날마다 깨끗이 성화되어야 하며 가까운 사람들에게 귀 기울여 내게 통제 불능의 쫓기는 성향이 나타나는지 보아야 한다.

또한 정기적으로 자기 점검을 하면서 내가 세우는 계획 발휘하는 리더십, 설정하는 목표 등이 쫓겨 다니는 자보다는 부름 받은 자의모습을 반영하도록 애써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임으로써 나 중심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4. 어느 성공한 못난이 이야기

어렸을 때 아버지가 극단적으로 비꼬아 말하고 조소를 하며 항상 "못난 놈, 결코 나아지지 않을 거야."하며 빈정대는 아버지를 둔 그리스도인이면서 부인이 이혼하자고 하는 이가 저자에게 찾아 왔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못난이가 아니라는 것, 곧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라며 생각하며 그의 아버지께 칭찬과 인정받는 게 그의 인생 목표였다. 이미 수년 전 아버지는 돌아가셨으나 고칠 수 없는 생활습관이 되어버린 지금 과도한 성취욕 때문에 결혼 생활과 가족 그리고 본인의 건강까지 희생되고 있었다. 모든 일은 외적인 것뿐이었고, 내면세계에 질서라곤 도무지 없는 사람이었다. 바로 쫓겨 다니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의 목표는 모두 외적인 것-관계보다 이기는 것, 영적 건강보다 육체적 건강, 휴식보다 일할 시간만 필요, 지식, 지혜보다는 판매, 생산 - 때문에 내면세계를 가꿀 필요가 없었다.

왜 쫓겨 다니는가?

1) 잘했다는 말해 주지 않는 환경에서 자랐다.

지도자 위치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성장배경과 불안정감을 갖고 있다.

2) 어린 시철 체험한 심각한 상실감이 수치감 때문

<상실과 고통 너무> 폴 투르니에 저,

에서 세계적인 정치 지도자들이 고아였음을 지적, 그들이 군중의 포옹에서 보상적인 경험을 추구. 권력 배후에 사랑의 욕구 충족대신 외적 욕구를 추구, 극도의 수치감과 불안정한 정서 속에서 성장.

예 챨스 블레어 목사 저 <완벽한 사람>

블레어가 우유배달하며 다닐 때 또래 아이들에게 창피 당했던 그 시절, 그가 좋아했던 한 소녀와 걸어가던 중, 갑자기 새 자전거를 타고 가던 소년이 그 소녀를 태워 가 버렸다. 그 순가의 모멸감으로 다른 사람의 관심과 충성을 받을 만한 인물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 결심이 모든 의욕의 권원이 되어 항상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무언가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그의 역구는 영적으로나 사역 모두 놀랄 만큼 성공했다. 그러나 치유 안 된 과거의 상처로 그의 내면세계는 무질서의 응어리로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인생초기에 도망쳤던 쫓겨 다니던 챨스 블레어가 이제 부름 받은 사람이 되어 존경받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3) 쫓기는 것이 아예 생활 방식이 된 환경에서 자라남

쫓겨 다니는 자는 정돈된 내면세계의 평온함을 누릴 수 없다. 그리스도인도 탁월한 명성을 얻기 위해 극적인 영적체험을 위해 섬기는 자보다 군림하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 쫓겨 다니고 있을 수 있다.

쫓겨 다니는 사람의 희망

자신이 부르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충동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 ㄹ대 예수님 말씀을 들은 제자들처럼. 변화될 수 있다.

쫓겨 다니는 삶을 해결하려면

1) 자신의 동기와 가치관을 파헤쳐야 함.

2) 그리스도인들 중 성숙한 이들의 조언과 비판을 들어야.

3) 지금까지 추구했던 것을 포기하는 겸손한 자기 훈련 자세

4) 과거에 애정과 칭찬 안 해준 사람들을 용서해야.

사도바울이 쫓겨 다니는 삶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무릎 꿇었을 때 "모든 것이 내게 무익했노라."라고 고백하며 부름 받은 사람으로 변화 "주여 제가 어찌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게 됨.

5. 부름 받은 사람의 삶

부름 받은 사람

쫓겨 다니는 사람과 부름 받은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우리가 찾는 자질 - 내면 지향적인 사람의 자질- 이 바로 이것이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성취 중심의 인생 계획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며 허세를 부리고 자신 만만해 한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장애물에 부딪치면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부름 받은 사람은 내공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외부로부터 어떠한 타격에도 굴하지 않는 인내와 함이다.

성경에 나오는 부름 받은 이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여호수아, 갈렙, 스데반, 세례요한

부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청기임을 알고 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요한의 반응은 청지기적 원리를 시발점으로 삼고 있다. 애초부터 군중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께 가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얼마든지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것이 청기기 다운 사고방식으로서 부름 받은 자의 핵심 자질이다. 우리가 가진 것들은 우리의 소유물인가 아니면 그것들을 우리에게 주신 분의 이름으로 관리할 대상인가? 쫓겨 다니는 사람은 자신이 소유했다고 여기고 부름 받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유를 잃어도 크게 달리지지 않고 내면세계는 여전히 그대로 이거나 더욱 강해진다.

부름받은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이 알고 있다.

자신이 어떤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을 아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출발점이다. 요한은 내면세계가 잘 정돈 되어 있었기에 그릇된 자기인식이 초래할 무시무시한 결과를 꿰?어 볼 수 있었다. 일찍이 광야 시절에 내면세계의 질서를 정돈했기에 그분의 음성이 훨씬 더 확실하게 들렸을 것.,

부름 받은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목적 의식을 갖고 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존재로서의 목적의식을 갖고 있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역할을 신랑의 들러리에 비유했다. 들러리는 자신에게는 시선을 모으지 않는 대신 오직 신랑과 신부에게만 집중되도록 할 대 자기 소임을 가장 훌륭하게 감당하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들러리가 되기로 헌신했을 뿐이지 다른 어떤 존재도 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요한이 부름 받은 목적이었고 많은 양무리들이 그리스도께 향하는 것을 보는 것이야말로 요한이 받을 보상의 전부였다.

부름 받은 사람은 굳은 헌신을 몸소 실천한다.

요한은 부름 받은 사람으로서 자기 수중에 있는 것을 내보내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 3:30). 요한의 이 말은 계획된 내보냄의 원리를 보여준다. 부름 받은 자는 그는 청지기며 자기가 누구인지 알며 목적의식이 투철하기에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서 손을 놓아야 할 때를 미리 내다보면서 산다.

부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바로 이러한 속성들 요한의 청기기 의식, 정체성 인식, 자신의 역할에 대한 올바른 관점, 내보냄의 원리에 헌신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자질을 내면세게에 잘 계발하여 그로부터 생명의 샘이 흘러나오는 것을 경험한다.

부름 받은 사람이 되는 길

광야에 있던 미미한 존재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왜 하필 요한인가? 그것도 광야에서 우리가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위대한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곳이 광야이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우리는 메마름에 대해 배운다. 광야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 광야와 같은 고초를 겪어 본 사람만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광야에는 달리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부름 받은 사람은 내보냄의 원리를 실천하고 미미함, 숨겨짐, 무력함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이요. 부름 받은 자의 길이다.

6. 누구 내 시간 본 사람 없소?

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실패를 경험하면서 배운 것은 무엇인가?

인생 초기에 시간 관리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방치된 시관에 대한 맥도날드의 법칙

제1법칙: 방치된 시간은 내 약점을 향해 흐른다.

제2법칙: 방치된 시간은 자신의 세계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의 영향력에 의해지배된다.

제3법칙: 방치된 시간은 온갖 긴급한 일에 소모한다.

공인은 많은 경우 자리를 꼭 지켜야 하지만 숨는 법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가진 시간을 잘 사용해야만 한다. 최선을 다해서 쓴다 하더라도 결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제4법칙: 방치된 시간은 대중의 갈채를 받는 일에 쓰이게 마련이다. 방치된 시간에 관한 법칙은 타인이나 다른 행사에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하지 않으면 무질서한 사람에게 계속 붙어다니게 될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생산성이 최고로 높은 때를 비롯한 생활 리듬을 알아야 한다. 한주의 리듬, 하루의 리듬, 그리고 일련의 리듬이 있다.

당신이 곡 필요한 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힘을 분별없이 장비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은 것이다.

2) 시간 사용 방법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이 꼭 하지 않아도 될 온갖 일들을 전부하기를 원하신다고 너무 쉽게 확신하지 말라. 각자는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신 삶의 정황 속에서" 맡겨진 일을 해야 한다.

3) 우리는 무엇을 위해 부름 받았는가? 우리의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 것이 최선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필수적인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은 매일 같이 내 달력에 기록되어 있는 첫 번째 약속 상대이다. 그것은 타협해서는 안 될 약속이다. 사간을 붙잡아 통제할 수 있으려면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잘 정돈된 하루, 인생, 내면세계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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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선수시절 가장 큰 교훈을 얻는 경기

어느 봄 필라델피아 1600m 릴레이 경기

나의 상대자(대단한 100미터 스프린터)는 270미터쯤 되었을 때 사태가 돌변했다. 갑자기 느려지더니 조깅수준밖에…….

그날 나는 귀중한 교훈을 배웠다. 자신의 의도한바 는 아니었지만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힘을 가진 사람이라도 끝가지 경주를 마치기 전에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신적 무기력의 대가

내면세계의 질서를 잡는 일은 강한 정신적이 인내와 그러한 인내의 열매인 지적 성장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잘 무장되어 있지 않는 사람은 대개 인간의 영혼과 인간관계를 파괴시키는 사상 및 제도의 희생자가 되기 쉽니다. 스스로 사고하는 훈련을 쌓지 않고 또 평생 지속되어야 할 지적 성장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희생되고 마는 것이다.

버로우 “가장 서글픈 경험은 노년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이제까지 자아의 작은 부분밖에 사용하지 않았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빠른 출발이 지닌 위험.

뛰어난 재능으로 때 이른 성공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성공은 종종 도움이 되기보다 걸림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재능 있는 빠른 출발을 한 사람의 경우 30대 초반이 되면 어디에선가 문제의 소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남은 인생의 경기는 재능이 아니라 인내와 자기 훈련으로 경주해야 한다는 첫 번째 암시가 나타날 수 있다.

나는 상담경험을 통해 이러한 이유로 중년기에 갈등을 겪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탈진되고 성장이 정지된 채 그저 오락으로 소일하는 정신적으로 텅 빈 사람들을 무수히 보아왔다.

나는 일부러 문자적인 의미로 오락amusement란 단어를 사용했다. 이 말은 생각 없는 활동을 의미한다. 타고난 재능은 어느 정도까지는 끌고가지만 경주가 끝나기 훨씬 전에 주저 않고 만다.

지성의 훈련

지성은 사고하고 분석하고 혁신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내면세계의 질서가 온전히 잡힌 사람은 사고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연구한다. 그들은 정신은 늘 깨어있고 활발하게 활동하며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고 정규적으로 새로운 발견과 결론을 창출한다. 그들은 매일같이 정신을 단련시키기로 다짐한다.

롬12장 2절은 바울은 우리가 갈 수 있는 두 가지를 분명히 알았다. 사고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주변의 지배적인 문화에 영향을 받아 그 모양으로 빚어질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의 토대에서 우리는 이 시대에 가장 강력한 사상과 가장 예리한 분석과 가장 획기적인 혁신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이 뿌리 깊은 게으름과 내적인 무질서의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항상 그렇게 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커다란 선물 하나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놀라운 능력으로서 피조물을 발견하고 관찰하며 그 각 부분을 비교하고 대조해보고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그것들을 적절히 사용하게끔 해준다. 생각하는 사람은 묵은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가설을 분석해서 거짓으로부터 참을 가려낼 줄 안다. 생각하는 사람은 오래된 진리를 새로운 언어와 형식으로 기술하고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삶에 적용하도록 도와준다. 그들은 또한 대담한 결정을 내리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비전을 보게 하며, 이전에 알지 못했던 방법으로 장애를 극복해낸다. 이것은 건전한 정신을 지닌 모든 사람의 과제다.

생각한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마치 잘 단련되고 다듬어진 신체가 경주에 잘 달릴 수 잇듯이 잘 훈련되고 온전히 형성된 지성이 가장 잘 생각할 수 있다. 최선의 사고는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시는 왕 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생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위험하게도 주변 문화에 흡수되어 버린다. 그의 정신은 내실이 없고 훈련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을 도전할 만한 어려운 질문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다.

헤리 블레마이어즈 “기독교는 지적인 적실성이 거세되어 버렸다……. 공동체적 차원에서 감상주의에 젖은 끼리끼리의 집단에 불과하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일기

“내 마음속에는 하나의 큰 두려움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여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드셨다. 수 년 전 나는 한 남자 곧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을 알았었다. 이제 10년이 흘러 다시 그를 만났는데 수다스럽고 기운 빠지게 하는 얄팍하고 피상적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40세가 넘으면 그렇게 되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게으름과 방종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무섭게 엄습하여 나를 하나님께 끌고 가서 내가 그분께 빚진 것을 다시는 잊지 않게 했다.”

9. 한 번도 읽힌 적이 없는 책.

육체의 노동이나 힘든 운동을 하지 않으면 몸이 약해지는 것과 같이 지성 또한 적절한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약해지고 좋지 않는 상태가 된다. 솔로몬은 그의 전성기에 이러한 특징을 보였다. 그는 현상을 볼 때 그 의미를 찾는 사람이었다. 그는 생각을 통합하고 분별있게 결론 내릴 줄 알았다. 그는 창조 세계의 사물을 사랑했고 창조 세계를 탐구하여 지식을 얻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성장모드에 맞추기

1) 우리의 지성은 기독교적으로 사고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이 세계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그분의 소유라는 것, 우리는 창조 세계에 대해 우리가 한 행위에 대해 장차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청지기직이라 한다.

2) 우리의 지성은 하나님이 창조 세계 안에 기록해두신 메시지를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사람을 비롯하여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의 가장 주된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것이다.

3) 우리의 지성은 공적 세계에 속한 사람들을 섬길 목적으로 정보와 아이디어와 통찰을 추구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지적인 성장을 위한 사고 체계 확립

1) 경청하는 사람이 됨으로써 성장한다.

경청방법: 질문하는 법 배우기, 일터 방문, 멘토의 말에 귀 기울임. 비판자의 말에 귀기울임.

2) 독서를 통해 성장한다.

독서는 최소한 하루 1시간을 배정하는 것을 훈련지침으로 삼고 지키려고 애써왔다.

3) 공부 훈련을 통해서 성장한다.

방어적 공부: 몸에 배이지 않았을 때 하는 공부--> 쫓기듯이 하는 공부. 바람직하지 못함.

공격적 공부: 공부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하는 공부.

창조 당시의 본래의 의도대로 우리는 우리의 예리해진 지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기 시작할 것이다.

10 마음의 정원을 가꾸는 사람

내면세계에 중심이 존재한다. 그 중심을 영이라고도 하고 혼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영원한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가장 친밀하게 교통하는 지점이다. 영은 그 속성인 영원성을 결코 잃을 수 없지만 하나님과의 교통이 거의 단절된 무질서한 상태에서도 존재할수는 있다. 그 무질서는 내면세계의 다른 부분까지 혼돈에 빠트리게 한다. 영적으로 무질서하다는 것은 내적 평온함의 결여를 의미한다.

문제는 영적 추진력을 유지못하고 일관성있는 태도와 열망을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한주를 시작할 때 의욕이 넘치지만 수요일쯤 되면 흥미가 없고 만족할만한 영적생활유지가 안된다.

즉각적 처방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더 생생하게 또 가깝게 느끼게 해 줄 일종의 즉각적인 처방을 찾으려 한다. 모세의 기시나무체험, 이사야의 환상, 바울의 다메섹 체험같은.. 그러나 그런 체험을 할 가능성은 없고 또한 타인에게 일어나는 극적인 체험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만족할만한 영적 삶을 개발하려면 훈련이란 각도에서 영적 생활을 접근해야 한다. 만일 그런 훈련을 쌓기로 결심하지 않는다면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정원가꾸기

내면의 영적 중심부를 표현한 은유중에 정원이 좋다. 정원은 평화와 고요함이 깃든 장소로 하나님의 영이 오셔서 거니시도록 잘 정된되고 가꾸어야 한다. 내면 세계의 영적 차원의 질서를 잡는 것은 영적 정원을 가꾸는 작업이다.

땅을 갈고 잡초를 뽑고 정원꾸밀 계획을 세우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비료를 주어 그 열매로 추수를 맛보는 영적훈련이라고 불린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항상 교회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 마음을 예배처소로 삼고 때로 하나님과 겸손하고 사랑스런 교통을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좀 더 많이 어떤 이는 적게 하나님은 우리 능력을 아시니 전심을 다해 결단하기를 기다리신다.

영적훈련을 시작하지 않으면 다섯 가지 특권을 잃는다.

1) 창조시 하나님의 의도하신대로 영원하고 무한한 관점으로 실제를 보고 누리를 법을 배울 수 없다.

2) 살아있고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와 교제가 끊어진다.

3) 하나님께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두려움이 없어진다. 그 결과로 교만해져서 무참하게 몰락한다.

4)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의 신분과 권세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는다.

5) 위기의 순간에 대처할 저력이나 투지가 없어진다.

영적훈련의 계기

내면의 정원을 계속 돌보고 하나님의 영이 그것에 거하시면 꾸준히 수확을 거두게 되는데, 용기, 희망, 사랑, 인내, 기쁨 평안과 같은 것들이다. 진리를 찾아내는 능력도 추수하게 된다. 예수님도 영적 훈련을 추구하시고 다윗도, 모세도 사도들도... 바울은 자신이 목표없이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허공을 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쳐서 굴복시키는 것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도리어 버림받는 신세가 되지 않으려고 영적 훈련을 추구했다고 한다. 영적 훈련은 철저히 개인적인 영역이다. 하나님과 단둘이 교제하는 영역이기에 그것을 시스템으로 전란하고 다른 이의 경험으로 인용되거나 그대로 유입될 수 없다. 내면의 영적 세계를 훈련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하실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11 믿음으로만 버티는 인생

인도에서 감리교 선교사로 일했던 스탠리 존스는 노년기에 전신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지만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는 내 믿음을 받쳐줄 외부의 버팀목이 필요없다. 왜냐하면 믿음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저자는 승리하는 삶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하는 은퇴한 주교에게 그것은 자기 포기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가장 속 깊은 자아를 예수님께 내어 놓는데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이 흔히 무시하는 매우 중요한

영적 훈련 네 가지는

1) 침묵과 고독의 추구

2)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음성 듣기

3) 사색과 묵상의 경험

4) 예배하고 중보하는 기도이다.

1) 침목과 고독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외부 세계의 방해 소리를 차단하는 마음의 방음장치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침묵의 친구이시다. 사람들의 영혼을 만지기 위해 우리는 침묵이 필요하다(테레사). 고독의 체험도 필요하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물러나서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내면의 정원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일상생활과 대인관계 그리고 외부세계의 요구로부터 벗어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2) 하나님께 귀 기울이기

내면세계의 정원을 가꾸려면 침묵과 고독의 시간을 따로 확보해야할 뿐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의직적으로 듣는 훈련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 귀 기울이는 한 가지 방법으로 일기 쓰기를 소개하고 있다. 일기를 어떻게 쓸 것인지 다른 분들이 쓴 일기와 자신의 일기를 예로 들고 있다. 저자는 일기를 쓰면서 하나님의 성령이 생각과 통찰의 많은 부분을 지도하고 계심을 조금씩 의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말로하는 기도가 느슨해질 대 일기는 글로 쓰는 기도의 수단이 된다. 기도의 내용이 좀 더 확실해지고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사람으로 자라가는 자신의 모습을 즐겨 기록하게 되었다고한다.

12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입력하라.

스탠리 존스도 사역초기에 일시적인 함몰 웅덩이 현상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영적 침체가 육적 침체로 1년 이상 시달렸다. 내면의 경험이 외부 세계를 지탱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훌륭한 삶속에서도 내부의 줄은 시험받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영적인 삶으로 마감하려면 영적훈련이 최우선 과제라는 것이다.

영적훈련은 그리스도인이 고독과 침묵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속삭임을 듣고자 하는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영적훈련

3) 성찰과 묵상.

성경은 성찰과 묵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우리 마음 문을 열라 하신다.

묵상은 우리의 영을 천국 주파수에 맞추는 것과 같다.

말씀이 자아의 기장 깊숙한 곳에 들어가게 하는 것

묵상의 결과; 속죄 확신 찬양과 감사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깨닫고 새로운 방향 감각 갖게 됨.

묵상의 환경:

적당한 시간, 침묵, 혼자만의 시간

준비시간 필요

성경과 기독교 고전이 필수

상상력(말씀속에 비유하는 의미)

기도: 하나님과 대화로 주님 음성 듣기.

결론: 하나님의 말씀 듣기 - 메시지가 마음 속에 입력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의지하던 외부 버팀목 필요성이 줄어듬 내면의 정원 잘 가꾸어지고 있기 때문. 영적 훈련받은 사람은 내면 세계가 좀더 강건해진다.

13 하나님의 시각에 맞춰진 눈

내면세계의 정원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풍성하게 하는 넷째 방법은 예배와 중보기도이다.

그런데 매일의 기도훈련은 그리스도인이 가장 하기 힘든 것 중 하나이다.

왜 기도하는 것이 어려운가?

1) 예배와 중보기도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갈망하도록 창조되었지만 죄의 결과로 본래의 신체적 욕구는 거의 감퇴하지 않은 반면 영적 차원이 가장 심하게 손상되어 하나님과 교제하고 싶은 욕구가 무디어져 버려 부자연스러운 행위로 바뀌어 예배와 중보기도가 아주어려운 일이 된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자연적인 본성에 거슬리는 일이며 우리 문화가 가르치는 삶의 방식과도 전혀 이질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어릴 때부터 오직 행동으로만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다고 은연중에 배워왔기에 기도는 일종의 행동부재로 보이고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고 여기며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기도야말로 아주 용요한 실질적 활동이며 실로 시공을 초월하여 실존하시는 하나님께 이르는 통로이다.그러므로 기도는 자연스러운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의식적으로 극복하여 예배와 중보기도의 습관을 익혀야 한다.

2) 예배와 중보기도는 우리의 나약함을 암묵적으로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로는 우리가 연약한 존재이고 우리 생존자체를 하나님께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그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즉 우리는 본성적으로 우리의 의존성을 강력하게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는 우리가 연약하고 하나님께 의존된 존재라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대 우리에게 없는 그 모든 미덕을 하나님 안에서 찾게 되며 영적 성장을 이루게 된다.

3) 기도가 때대로 실제적인 결과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리라는 확고한 믿음으로 기도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경우도 많고 일어났다 하더라도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응답된 적도 있으므로 기도에 실망하게 되어 더 이상 기도를 유효한 방편으로보지 않고 직접나서서 원하는 결과를 얻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된다. 문제는 우리의 잘못된 기대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청취력이나 능력 부재에 있지 않다. 결국 하나님보다 내가 더 잘알고 있듯이 내 생각이 최선의 결과라 여기고 하나님께 강요하는 기도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배와 중보기도는 나 자신의 목적에 하나님을 맞추려고 구하는 것보다 그분의 목적에 나를 맞추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의 모든 정신 활동에서 하나의 급진적인 전환이라 할 수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 자신과 근심거리, 집착과 자기 만족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이다."(헨리 나우웬)

그러면 어떻게 내면의 정원 안에서 예배와 중보기도를 훈련할 수 있겠는가?

1. 시간- 언제 기도할 것인가

영적훈련을 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며 성찰이 가능한 수준까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을 정한다.

2. 자세 -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기도에 가장 적합한 자세는 없다. 자기에 맞는 다양한 자세로 할 수 있다.

기도 목록을 작성한다. 기도목록을 보면서 기도할 때 내 주된 관심이 무엇인지를 점검할 수 있고 내가 마음에 부답을 느끼는 이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의 표현으로써 책임감을 품고 그들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유일한 방법이다.

3. 내용 - 무엇을 말씀드릴 것인가?

1)경배: 기도 가운데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분의 일하심과 그분 자신에 관해 하신 말씀을 우리 영이 기뻐하는 것이다.

2)고백:

우리의 진면목을 정기적으로 시인하고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시는데도 그분을 기쁘게 해들지 못한 최근의 행동과 태로를 인정하는 것이다.

"죄인인 저에게 바지를 베푸소서."(고백기도의 축소판)

우리의 자신의 불완전함과 악한 길을 가려는 성향을직시하면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깨어져야 하며 예전에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죄를 계속해서 인식해야 한다.

분노, 원망, 두려움, 걱정, 지배욕, 자기 집착, 죄책감, 성적부도덕, 시기, 창조적 활동의 결여, 열등감, 사랑의 결핍등 그런 죄성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예수께 내어놓고 "주님 이것을 가져가 주소서."라고 말씀드리는 것이다.

20세기 초 구세군 지도자 사무엘 로건 브랭글의 기도문

"주님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둔감하고어리석게 되지 않도록 저를 지키소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는 사람, 곧 경주자의 정신적, 영적, 신체적 자질을 지닐 수 있도록 저를 도우소서. 제가 하는 일이 형통하게 하시되 교만하지는 않게 하소서. 성공과 번영에 따르기 쉬운 안일함으로부터 저를 구하소서. 육체적인 무기력과 쇠약함이 밀려올 대라도 나태와 자기탐닉의 영에 빠지지 않도록 저를 도우소서."

중보기도의 사역

1)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고나면 중보기도를 시작할 수 있다.

2) 중보기도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드리는 기도를 의미하며 그리스도인이 가진 특권이며 가장 위대한 사역이다.

3) 또한 기도없이 장시간일하는 것보다 중보기도 훨씬 더 효과적인 사역이다.

4) 중보기도의 범우는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포함한다.

5) 우리 자신을 위해 간구할 필요도 있다. 내기인적인 삶의 영역을 두고 주님께 지헤와 도움을 구해야하는데 주로 다른이들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도록 자원과 능력을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6) 결국 내 믿음이 자랄수록 나 자신을 위해서는 점점 적게 기도하게 되고 타인을 위해서는 더 많이 기도하게 된다.

14 여가 이상의 쉼

윌리엄 윌버포스 19세기 초 영국하원 의원. 노예제도를 불법화하는 역사적인 법률안을 통과시킨 위대한 업적. 그는 20년 동안 끈기 있게 노력하여 성취하였다. 그 힘과 용기의 근원은 어디였을까?

그의 당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새 내각을 구성하게 되었는데, 윌버포스가 각료로 지명될 가능성이 있었고, 그도 각료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야심이 솟구쳐서 영혼이 불구가 될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일요일이 되자 치유를 얻었다. 일요일에 쉬면서 내면세계의 질서를 되찾았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쉬면서 신앙에 전념할 수 있는 날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나이다. 이 날에 이 땅의 것들은 그 본래의 크기를 드러내고 내 야심은 수그러들었나이다."

분주한 생활속에서 윌버포스에게 견제와 균현을 준 것은 안식일이었다.

일상 생활에서 참된 쉼-윌버포스가 멈춤cessation이라고 부른-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추구하는 자세가 없다면 내면세계의 질서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쉼이 필요하다.

스트레스 관리, 회복은 현대의 유행어가 되었다. 일중독은 아주 심각한 중독의 하나로 여겨진다. 우리 사회가 여가 지향적인 사회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세대의 피로는 참 이상한 현상이다. 우리는 호화 유람선, 낭만적인 리조트, 북극은 물론 세계 어디든지 가는 해외 여행 등 거대한 여가 산업이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과거 어느 대보다 더 많은 여가 시간을 갖고 있다. 주5일 근무제는 역사사상 비교적 최근의 고안물이다. 그런데도 왜 극도의 피로에 찌들어 살고 있는 것일까?

먼저 우리는 쉼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이해하고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실로 성경은 하나님을 최초의 안식자로 보여준다(창 2:2, 출 31:17)

하나님은 쉼이 필요없으신데도 왜 쉬셨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쉼과 일의 리듬을 창조세계에 심어두셨기 때문에 그것을 계시하기 위해 그분 자신이 그 리듬을 지킴으로써 다른 모든 이에게 선례를 보여주신 것이다.

이 쉼은 사치가 아니라 성장과 성숙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우리는 쉼이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왜곡시켜 버렸고 하나님이 맨 처음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쉼을 여가나 오락 같은 것으로 대체시키고 말았다. 이런 것은 내면세계를 정동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재미있는 순간이나 기분 전환, 웃음, 레크리에이션 자체를 비판하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것들로는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지 못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안식일의 쉼의 의미

1. 회로닫기

하나님은 쉬실 때 완성된 것을 보고 즐기시며 묵상하셨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창 1:10) 일곱째 날에 하나님은 그 성취된 것을 돌아보시고 쉬심으로 그 일을 마감하셨다.

우리는 쉴 때 이런 질문을 한다. "내 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누구를 위해 했는가? 얼마나 잘 되었는가? 왜 이일을 했는가?"등등. 그러나 하나님의 쉼은 의도는 먼저 우리의 일을 해석하고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일을 누구에게 올려드려야 마땅한지를 확실하게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좋은 예) 로렌스 수사 오믈렛을 만들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

저자의 한 친구) 실직하고 오랫동안 직업없는 채 살면서 깨달은 것 "이 모든 상황 속에서 나는 골똘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네. 수십 년 동안 이 일에 투신해 왔지만 결국 내가 얻은 게 무엇인지 보라구. 도대체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여보게 그래서 나는 새로 눈을 뜨게 되었지."

그가 눈을 떴다는 말은 과거 오랜 세월 일을 하면서 그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결과는 어떠할지 등에 한 번도 질문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는 활동에 대해 정기적으로 회로를 닫는 것이 중요하다.

2. 영원한 진리로 돌아가기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정기적으로 멈춰 서서 우리 삶의 근거가 되는 진리와 헌신을 되새길 때 진정한 쉼이 가능하다.

예레미야가 말한 대로 우리 마음이 거짓되다는 사실을 유념한다면 우리 삶에 핵심이 되는 진리를 가려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찬송가 28장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의 말 "안식일의 의미는 공간보다는 시간을 기념하는 것이다. 일주일에 엿세 동안 우리는 공간에 속한 일의 횡포에 살고 있다. 그러나 안식일에는 시간 속에서 거룩함에 주파수를 맞추려고 애쓴다. 그 날은 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을 나누고 창조의 결과로부터 창조의 신비로, 창조된 세계로부터 세계의 창조로 시선을 돌리도록 부름받은 날이다."

돈 스티븐슨은 일요인은 그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바른 길로 되돌아와서 삶의 진흙탕속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격려받는 바로 그날이라고 말했다.

3. 우리의 사명을 규정하기

이것은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의미의 쉼을 가진다면 우리 생각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내일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는 다음 주, 다음 달, 혹는 내년에 어느 방향으로 향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의 생각을 분명히 가다듬고 그에 따라 헌신을 다짐하게 된다.

나는 내 사명을 아주 열심히 고찰한다. 그래서 매일 아침 영적훈련을 하는 시간에 잠간 틈을 내어 '오늘 나의 사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예수님은 한곳으로 물러가셔서 홀로 시간을 보내셨다. 예수님은 다음 단계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힘과 방향을 얻기 위한 쉼으로 나아가셨던 것이다.

쉬기로 결심하는 삶

IVF운동 개척자인 홀리 트리니티 교회 사역했던 찰스 시므온, 그는 매우 바쁘게 사역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내면세계에 필요한 쉼을 취하려고 시간을 확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의 내면을 전기 작가 휴 홉킨스가 이렇게 기록했다. "찰스 시므온의 낮아짐은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과소평가하거나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인것처럼 가장하거나 혹은 자신이 충분히 자각하고 있는 죄를 과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서 그분의 위엄과 영광 가운데 거하고 그분의 자비로운 용서와 놀라운 사랑을 극대화함으로써 스스로 낮아지는 느낌을 가졌던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그를 낮아지게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이었다."

어느 유대 랍비의 안식일에 관한 글 "일곱째 날은 그대의 주 하나님의 안식일이다. 그러므로 그 옛날의 창조주는 오늘날 살아 계신 하나님이며 그분은 인간에게 맡겨진 이 세계와 인간에게 부여된 힘을 선용하는지 혹은 남용하는지를 보시기 위해 각 사람과 각자의 수고를 살피시는 분이심을 도한 각자 일주일 간 수고한 것을 보고해야 하는 유일한 건축가이심을 알게하라."

목사인 나는 안식일이 쉬는 날이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 교회는 4개월간의 안식 휴가를 주었다. 그때 나는 넉달 동안 '평화의 오두막'을 짓기로 했다. 그 4개월 동안 우리는 놀라운 정도로 깊은 안식을 경험하였다. 안식휴가를 끝내고 돌아왔을 대만 해도 완전히 매료 된 상태였다. 그러나 갑자기 설교가 닥치자 되돌아갔다. 그래서 우리의 안식을 목요일로 정했다. 할 수 있는 한 우리는 내면이 쉼을 취할 수 있도록 그날의 시간 계획을 세웠다.

우리가 목요일을 안식일로 규칙적으로 노력했을 때 그 결과는 엄청났다. 우리의 내면 세계는 실로 확실하게 질서를 되찾았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내가 그날 충분한 쉼을 취하게 되었을 뿐아니라 다른 날들의 시간도 훨씬 능률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안식일을 잘 지킴으로써 내면 세계에 편안한 진서를 세우게 되었고 그 결과 이어지는 다른 날에 훨씬 더 큰 지혜와 훌륭한 판단력을 가지고 공적 세계에 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대부분 쉼이란 일을 끝마친 후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 우리의 안식일에 부탁하면 "미안합니다만 저희는 그날 약속이 있습니다. 저희 안식일이거든요."라고 대답한다.

세상과 교회는 참된 쉼을 누릴 줄 아는 그리스도인을 필요로 한다. 그런 그리스도인은 그저 일에서 손을 놓거나 여가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안식일의 쉼을 통하여 정기적으로 새롭게 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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