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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東國) 강씨(姜氏)
동국(東國)은 예전부터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이다. 그 범위는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 옛 고구려 영역과 한반도 지역인 백제와 신라 영역이 이에 포함된다. 이 지역에 분포되어 있고, 강씨(姜氏)를 동국(東國) 강씨(姜氏)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지역적으로 중국 강씨들과 구별된다. 고대(古代) 중국 서북 지역에 있는 천수(天水)에서 비롯된 강성(姜姓)과는 뿌리는 같지만, 이들은 동으로 동으로 이동하여 중국 산동지역에서 제(齊)나라를 건국했다.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동국 강씨(姜氏)로 분파되었다. 제나라가 망하고 그들 일부가 요동을 거쳐 고구려에 들어왔다. 물론 산동지역에서 황해를 건너 한반도 서해안으로 건너왔을 수도 있다. 중국 삼국시대(222~280년) 동국(東國) 강씨와 직접 관련된 인물은 역사에 등장하지 않다가 6세기에 비로소 비조(鼻祖) 강이식 장군이 등장했다. 강이식 장군을 시조, 도시조로 지칭했으나 여기서는 문맥상 필요할 경우 비조로도 표기한다. ‘비조’는 국어사전에 ‘한 겨레나 가계의 맨 처음이 되는 조상’을 일컫는다고 했다. 천관우(千寬宇)의 『인물로 본 한국고대사』에 수(隋)와 당(唐)은 진(秦)・한(漢) 제국에 이어 중국사에 나타난 두 번째의 대제국이다. 고구려와 수・당(隋・唐)간 70년 전쟁(589~668년)이 계속되고 당의 세력을 업은 신라(新羅)가 3국을 통일하게 된다.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유민 일부가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와 오늘날의 진주(晉州)・금천(衿川) 강씨(姜氏)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 비조(鼻祖)와 임유관 전쟁
21세기를 살아가게 될 우리에게 고구려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동아시아의 대제국(大帝國),
외침에 맞선 불굴의 민족 혼,
한민족의 긍지요, 자존심"
또 어떠한 말로 고구려를 설명할 수 있을까? 위대한 고구려, 고구려에 처음 뿌리를 내렸던 강씨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수(隋) 제국의 출현으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가운데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물론 고구려이다. 수(隋)는 고구려의 독자적인 세력권을 인정하지 않고 수(隋)에 복속할 것을 강요했다. 수(隋) 문제(文帝)는 남북조 통일에 성공한 후, 수 문제가 597년 국서(國書)를 고구려 영양왕 8년에 보내 위협했다.
“짐(수나라 문제)이 하늘의 명을 받아 온 천하를 다스리면서 고구려왕에게 바다 한 귀퉁이를 맡긴 것은 백성을 잘 다스려서 사람으로서 그 천성을 다하게 함이라, 왕이 매양 사절(使節)을 보내 조공했으나 비록 번부(藩附 : 황국의 울타리 노릇을 하는 속국)라 일컫기는 하지만 성의가 부족하다. 고구려왕은 이미 짐의 신하로 짐의 덕을 배워야 함에도 말갈족을 핍박하고 거란족을 굴복시켜 휘하에 두어 신첩으로 만들고 짐에게 조공하는 일을 막다니 이 어찌도 해가 심한가, 작년에는 몰래 병사를 늘리고 병기를 수리하니 이것은 무엇을 뜻함인가? 고구려가 영토가 좁고 백성이 소수이니 고구려왕을 내쫓고 반드시 다른 속관(屬官)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씻고 행동을 바르게 하면 짐의 충신이니 어찌 속관을 두랴. 고구려왕은 다시 한 번 생각하라, 요수(고구려 영토 안에 있는 강)가 넓다한들 장강(양자강)과 비교할 것이며, 고구려 병사가 많다한들 진(陳)나라 병사만도 못하다. 짐이 마음만 먹으면 한 명의 장군을 보내어 힘들이지 않고 고구려를 멸할 수 있지만 순순히 타이르니 고구려왕이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다.” 다음 글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하(下) p.370에 나오는 글이다. 영양왕이 이 모욕적인 글을 받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회답할 글을 보내려 하니 강이식(姜以式)이 가로되,
“이 같은 오만 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답변할 글이오.”
하고 개전(開戰)을 주장했다.
영양왕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강이식을 병마원수로 삼고, 정병 5만 명을 뽑아 임유관으로 가게했다. 먼저 예(濊)─『수서』에는 고구려는 598년 수나라와의 전초전에서 말갈군 1만 여명을 동원하여 전략적 요충지인 요서 지방을 공격했지만 패했다. 그러나 다른 역사서에는 고구려가 말갈병 1만으로써 요서를 침요하여 수나라 군대를 유인한 다음에 거란병 수 천 명으로 바다를 건너 지금의 산동을 치게 하여 양국의 제1차전이 개시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강이식 장군은 597년 이전부터 고구려 장수로 활약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는 한때 수(隋)와의 수교를 계속하면서 자중했으나, 598년 마침내 영양왕이 고구려에 복속하고 있던 말갈병 1만 남짓을 이끌고 요서(遼西) 지방 임유관(臨渝關)에 설치된 수(隋)의 전진 기지에 대한 고구려가 선제공격을 개시했다. 이는 고구려가 중국을 선제 공격한 것은 한국사에 획기적인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 고구려는 신흥 큰 세력인 수(隋)에게 선제(先制) 공격(攻擊)을 퍼부은 경위는 자세치 않지만, 고구려가 생명선으로 생각하는 요하(遼河) 방면이 위협을 받는 어떤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전쟁의 원인은 수(隋)의 대외적인 팽창 정책에 있었다. 581년(평원왕 23)에 건국된 수나라는 돌궐(突厥)을 격파하고, 이어 589년에 남중국의 진(陳)을 멸망시킴으로써 300여 년간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했다, 수나라는 동아시아 대륙 전체를 지배하여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국제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러한 의도 아래 돌궐을 격파하고 진(陳)을 멸망시킨 수나라의 차기 침공 대상은 당연히 고구려였다. 진(陳)이 멸망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고구려가 곧바로 전쟁 준비에 착수했던 것은 이러한 상황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수(隋)의 세력이 점차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뻗치자, 고구려 휘하에 복속되어 있던 거란족과 말갈족의 일부가 그 영향력에 끌려 수(隋) 쪽으로 이탈해갔다. 이런 양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속화되었고 고구려 제국의 해체를 몰고 올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고구려는 위기일발의 국면으로 돌입하게 된 것이다.
이에 고구려는 수나라에 복속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독자적인 세력권을 지키기 위하여 전쟁의 길을 택하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고, 고구려는 서슴치 않고 후자를 택했다. 고구려도 만일에 대비하여 “병(兵)을 이(理)하고 곡(穀)을 쌓아” 거수(拒守)의 강구책을 세운 것은 당연하다. 550년대와 580년대에 2차에 걸친 돌궐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한 바 있었던 고구려는 자신감으로 수나라에 항복이 아닌 무력으로 맞서기로 했던 것이다. 고구려는 군사력의 열세를 보완하기 위해 성(城)을 중심으로 방어하고, 적의 약점인 군수물자 보급에 타격을 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전략을 세웠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의하면 강이식(姜以式)은 수군(水軍)을 보내 바다에서 수나라의 양곡 선박을 격파하도록 하는 한편, 전군에 명령을 내려 요새를 지키고 출전하지 말도록 했다. 수나라 군대는 양식이 없는 상태에서 6월 장마를 만났다. 이로 인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자가 속출하자 수나라 군은 결국 퇴각을 결정했다. 추격에 나선 강이식(姜以式)은 유수(渝水)에서 그들 대부분을 섬멸하고, 수많은 군수물자와 장비를 획득한 채로 개선했다.
중국 사서(史書) 『수서(隋書)』, 「고조기(高祖紀)」와 『자치통감(資治通鑑)』, 「수기(隋紀) 二」 등에서 598년 고구려에서 수나라를 먼저 공격한 기록이 있다. 우리나에서도 『삼국사기(三國史記)』 「영양기(嬰陽紀)」에서도 같은 내용이 있으나 아쉽게도 중국이나 우리나라 사서(史書)에 고구려 측 군 최고 지휘관 이름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비조 강이식 장군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으므로 족보나 비문, 행장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박사공파 최초 족보는 1685년 발간된 『을측보』(일명 『남한보』)이다. 그 이전에 지어놓은 비문, 행장을 먼저 살펴보겠다.
2.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사료(史料)
1) 행장(行狀)과 비문(碑文)
비조 강이식 장군의 이름이 처음 기록된 것은 박사공 7세 대사간공<열(烈 1400~1465)>의 행록(行錄)이다. 이 행록은 사인 벼슬을 한 최산두(崔山斗)가 지었다.
“遠祖姜以式爲隋元帥伐高句麗因留東國‧‧‧‧‧‧”
“원조(遠祖) 姜以式은 수나라 원수로 고구려를 정벌하려다 동국에 머물렀다.”
다음은 참판공<징(澂 1466~1536)> 신도비명에 강이식 장군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신도비명은 1536년 홍문관 대제학 정사룡(鄭士龍 1491년~1570년)이 지었다.
명왈(銘曰)=명에 말하기를
①姜自晉出=강성은 진주에서 나왔는데
②啓慶太傅=태부께서 경사를 열었네.
③蕩掃遼氛=요동의 재앙을 쓸어내고
④以紓國步=나라의 운명을 풀었네.
1761년에 발간된 『신미보』 행장 편에 나오는 「예조참판 강공 신도비명」 주석에 보면 비를 세울 때(1647년) ②啓慶太傅(태부께서 경사를 열었네)를 ②啓慶元帥(원수가 경사를 열었네)로 고쳤다. 선조(先祖) 중에 太傅(태부)가 요동을 정벌한 적이 없고, 원수(元帥)가 정벌한 적이 있기 때문에 내용을 고쳐서 비를 세웠다고 주석에 달아놓았다.
이런 사료에서 볼 수 있듯이 16세기 중엽 이전부터 이미 강이식 원수(元帥)를 비조라고 인지하고 있었던 같았다. 그러다가 1685년 을축보와 1761년 신사보 서문에서 비조(鼻祖) 원수공(元帥公)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한편 원수공이 고구려 귀화 인물인가 아닌가에 대한 엇갈린 주장도 있지만, 강씨의 원뿌리가 중국 섬서성(陝西省) 천수(天水)인 만큼 고구려인으로 수군을 물리쳤다 해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중국에 닿기 때문에 이러한 논란은 무의미하다 하겠다.
2) 사서(辭書)
『조선명인전(朝鮮名人典)』은 화산(華山) 윤갑식(尹甲植)의 편저로 1965년 서울 명문당에서 발간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인명사전으로서 맨 먼저 편찬, 출판된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를 토대로 정사에 의하여 편벽됨이 없이 공정하게 수록했다는 편저자의 변(辯)이 있다.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는 1916년 일본총독부가 편찬하기 시작하여 1937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출판되었다.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에는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와 함께 『인물고(人物考)』가 가장 많이 인용되었다. 『조선명인전(朝鮮名人典)』에 강이식 장군에 대한 사적이 간략하게 실려 있다.
“강이식은 중국 제(齊)나라 강공(康公)의 후손으로 예부랑(禮部郞) 문성(文星)의 아들이다. 그는 수나라 대장군병마사로서 수문제를 도와 589년 1월 진(陳)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 591년(문제 11) 그는 시랑(侍郞) 배구(裵矩) 참소와 수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바다로 탈출하여 고구려에 귀화했다. 그는 현토도(玄菟道)의 우어위부장군(右禦衛副將軍)으로서 수병(隋兵)의 침입(侵入)을 쳐부수고 그 용맹(勇猛)을 떨쳤다.”
3) 보책(譜冊)
그림9> 강석로(姜碩老), 『乙丑譜』, 晉山姜氏族譜 南漢天柱寺藏, 1685. p.天
한국이나 중국의 정사(正史)에는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사료(史料)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한국에서의 ①숙종 을축년보(肅宗 乙丑年譜, 1685)와 신채호의 ②『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하권에 등장한다. 중국에서의 자료는 ③광동 강씨보(廣東姜氏譜)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①, ②, ③에 실려 있는 강이식 장군의 사료는 각기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①숙종 을축년보(肅宗 乙丑年譜)에는 두 가지 사료를 제시하고 있다. (가)“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병마원수가 되어 수나라 군대를 막아냈다.” (나)“수나라 원수로 장차 수나라에 난이 일어날 것을 알고 돌아가지 않고 (고구려에) 머물렀다.)”, ②『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하권에는 강이식 장군이 “수나라 문제의 서찰에 대한 답서를 문서가 아닌 칼(무력)로 대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순진리회가 증산교 창시자 강증산(姜甑山)의 행적을 기록한 ③『전경(典經)』 「행록」1장 1절에 『광동 강씨보(廣東姜氏譜)』에 강(姜)씨는 상고 신농씨(神農氏)로부터 시작되고 성(姓)으로서는 원시(元始) 성(姓)이로다. 우리나라에 건너온 시조(始祖)는 이식(以式)이며 “公佐太祖 以定天下後 煬帝簒位 公以退野(공좌태조 이정천하후 양제찬위 공이퇴야)”라고 기록되어 있다는데, “공(강이식 장군)이 태조를 도와 전하를 평정한 후 양제가 황위를 찬탈하자 조정에서 물러 나 재야로 돌아갔다.”로 기록되어 있다. 그 전거(典據) 여부는 살피지 못했다. (가) 내용은 신채호의 ②『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와 일치한다.
박사공파 최초 족보인 『숙종 을축년보』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강이식 장군의 수 나라와의 관계에서 두 가지로 기록되고 있다는 것과 (가)와 (나) 중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이어 옛날 족보가 병화 등으로 소실되어 원수공부터 검교공(檢校公 : 雲紀)까지 몇 대가 끊겼는지를 알 수 없다는 기록도 아울러 병기되어 있다. (가)와 (나)에서 알 수 있듯이 한 사안을 두고 두 기록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가)에는 애시 당초 고구려 장군으로 수나라 군사를 물리쳤다와 (나)에서 수나라 장수로서 참전했다가 수나라가 머지않아 망할 것을 알고 고구려에 귀화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문중에서 대체로 (가)를 취하고 있다.
『을축보』에 실려 있는 비조(鼻祖) 사적의 전거(典據)는 알 수 없지만, 1000여 년 전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언급했다는 것은 굉장히 신빙성이 있는 팩트(Fact)다. 다만, 전술한 기록 중 어느 것이 옳은지를 모른다고 했지만, (가), (나)의 기록의 순서를 바꾸고 둘 다 올바른 기록이라고 가정하고 (나)→(가)로 다시 해석한다면, 비조님은 “수나라 원수로 장차 수나라에 난이 일어날 것을 알고 돌아가지 않고 (고구려에) 머물렀다”가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병마원수가 되어 수나라 군대를 막아냈다.”로 한다면 논리적으로 통하는 기록이 된다. 이렇게 되면 비조님이 중국 남북조 시대에 출생하여 수나라에서 장수로 활동한 것으로 되기 때문에 강이식 장군이 중국인이라는 추정(推定)에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나)“수나라 원수로 장차 수나라에 난이 일어날 것을 알고 돌아가지 않고 (고구려에) 머물렀다.)”는 신채호의 『주석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하』, pp.365~371.의 기록과는 상치된다.
3. 삼국사기(三國史記)
영양왕 9년(서기 598)
임금이 말갈의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를 침공했으나, 영주총관(營州摠管) 위충(韋冲)이 우리 군사를 물리쳤다. 수나라 문제가 고구려가 먼저 침공한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면서,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積) 등을 모두 원수(元帥)로 임명하여 수륙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했다.
여름 6월, 문제(文帝)가 조서를 내려 임금의 관작을 박탈했다. 한왕(漢王) 양양(楊諒)의 군대가 유관(渝關)에 도착했을 때, 장마로 인하여 군량미의 수송이 이어지지 못했다. 이로 말미암아 군중(軍中)에 식량이 떨어지고 또한 전염병이 돌았다. 주라후(周羅睺)의 수군은 동래(東萊)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平壤城)으로 오다가 풍파를 만나서 그의 선박이 거의 모두 유실되거나 침몰되었다.
가을 9월, 이들이 돌아갔으나 그들 대부분이 죽었다. 임금은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표문을 올렸다. 표문에서 자신을 ‘요동 미천한 곳의 신하 아무개’라고 자칭했다. 문제(文帝)가 그때서야 군대를 철수하고 처음과 같이 대우했다. 백제(百濟)의 왕 창(昌, 위덕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고, 고구려로 향하는 수나라 군사의 길을 안내하겠다고 자청했다. 문제(文帝)가 백제의 왕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고구려가 죄를 자복하여 내가 이미 용서했으므로 그들을 칠 수가 없다.”
그리고 문제가 백제의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임금(고구려 영양왕)이 이 사실을 알고 백제의 국경을 침공했다.
영양왕 11년(서기 600)
봄 정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다.
우리나라 최고(最古) 관찬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서 임유관 전역(戰役)의 전개과정을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결과적으로 수나라의 군대가 철수하고, 그 뒤 여(麗)・수(隋)간 국교가 재개되었다. 고구려는 승전(勝戰)하고도 형식상 항복을 한 셈이다.
다음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등장하는 『서곽잡록(西廓雜錄)』, 『대동운해(大東韻海)』에 대해 필자의 견해를 밝힌 『晉山會報』 창간호, 2002년판에 실려 있는 것을 전재(全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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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강이식 시조님에 대한 사료로 휘가 처음 기록된 것은
최산두가 지은 대사간공 강렬의 행장보다 앞선 사료로서
은렬공파의 강익선이란 분이 1932년 편집한 은어보(은렬공파와 어사공파의 합보)에 실린
강희안 선조께서 1451년 3월에 지으신 연원보가 있지요
이는 안동권씨 성화보(1476년)보다 25년 빠른 족보인데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서문만 전해져 온다고
최근에 본 카페에도 서문 전문이 이미 게시되어 있음을 잘 알고 계실텐데...
그리고 그동안 휘가 나오는 부분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중략, 하략 등 생략시키고 감춰져 온 사연이
시조님께서 고구려인이 아닌 수나라인이셨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 했었습니다
그러나 더이상 상고해 볼 사료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하여 안타깝기 그지없었는데
최근에 이와같은 동일한 맥락으로
영의정 강맹경의 후손이신 강린이란 분께서 1928년 지으신 국로추사(菊露秋寫)라는 책이 발견되었고 어떻게 믿을 수 있나?라는 관점에서
이 책에 역사적 사실로서 인용된 다양한 서적등 사료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현재 사료 소장 여부를 그의 아들되시는 노인과 상담중에 있음도 상기시켜 드립니다
본 카페에 제가 올린 국로추사는 믿을 수 없는 야사라고 빨리 내리라는 강권을 제가 수용하지 못해 더이상 운영자 역할도 내려 놓은 상태인데
우리 시조님에 대한 단재 신채호선생의 임유관전투도 서곽잡록이라는 것에서 인용하고 서곽잡록만을 좇는다 했는데
현재의 우리 시조님의 사적은 서곽잡록과 대동운해등 섞어서
국적은 고구려 관함은 병마원수도 아닌 병마도원수로 을지문덕과 고건무(후 영류왕)의 상사로써 총사령관이라
서곽잡록의 저자 이문흥도
우리의 최초족보 남한보의 편자이신 석로,석구 형제분들의 조부이신 강홍중의 친외손이 아닙니까?
서곽잡록도 어쩌면 우리 강문의 가장을 보고 쓰신 내용이 아닐까? 봅니다
아니면 외람되지만 신채호선생의 창작품이 아닐런지? 추정되는 것이 선생은 일제시절에 민중계몽을 위해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최영장군 구국의 영웅들을 소설을 쓰신 전례로 보듯이 임유관전투의 승장이 누구라는 기록도 없음에 강이식 선조님을 인용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조차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강문의 명석한 두뇌들이 합심하여 고증할 방법을 찾는 것이 시급한 시기에 섣부른 단정적 발표는 삼가함이 옳지 않겠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오니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1761 신사보가 신미보라 오타 발견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우리 강씨 종중 역사에 매진하시는 그 열정에 찬사를 보냅니다.
오타가 아닌가요?
1) 고수간 70년전쟁(589~668)에서 가로속 589는 598임유관전투가 맞지요?
2) 앞서 지적한 1761<신미보>는 <신사보>인데 아직까지 수정이 안된 상태 그대로 군요
족보 서문기준 1761년 <신미보>는 <신사보>의 오타가 아니신지요?
앞서도 계속 지적하였지만 아직도 수정이 안되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발간기준으로 말하면 1762년 <임오보>라고도 하나
후대 족보들이 서문 작성년대를 기준으로 <신사보>라 통상 칭하며 굳어져 왔기에
굳이 <임오보>라 하지 않고 <신사보>라 칭해도 무탈하다는 생각입니다
유투브를 보다보니 그 유투브댓글로 위와 같은 댓글이 있어 참조해 보시라 올렸으니
아니시면 그냥 삭제하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