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오리산, 신선대 산행결과
ㅇ 목 적 산 : 신선대
ㅇ 소 재 지 : 부산시 남구 용호동/ 용당동
ㅇ 산행일자 : 2020년 6월 27일(토요일)
ㅇ 산행시간 : 3시간 30분
ㅇ 산행 중 기상 : 대체로 맑음
ㅇ 산행인원 : 단독산행
ㅇ 교 통 편 : 도보
ㅇ 산행코스 : 우암동 일신보라아파트 출발(09:55)→부산문화회관/유엔기념공원(10:20)→용당5거리(10:35)→동명불원(10:45)→봉오리산(11:10)→무제등 소공원(11:45)→신선대(12:05)→무제등 소공원(12:35~12:50)→동명5거리 버스 정류장 도착(13:25)산행종료
ㅇ 목요일까지 내리던 장맛비가 어제부터 그쳤다. 어젠 는 햇볕이 쨍쨍했으나 오늘은 얇은 구름이 조금 끼었다. 아무 준비 없이 맨몸에 스틱만 하나 달랑 들고 집을 나섰다. 유엔공원 앞쯤 가니 등허리가 젖어오기 시작한다.
<유엔공원은 한국전쟁당시 유엔군 수만명이 전사 했으나 부산남구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전사자는 2309명에 불과하다.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온 미국보다 영국, 터키 등 다른 국가의 안장자가 훨씬 더 많다.
한국전쟁에는 병력을 지원한 국가 16개국, 의료지원국 6개국 등 총 22개국이 참전했다.
1951년 1월 유엔기념공원이 현재위치에 처음으로 조성됐다. 당시에는 1만 1000여명의 유해가 안장되었지만 전쟁이후 벨기에,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그리스, 필리핀, 태국 등 6개국은 자국 장병들의 유해를 모두 본국으로 이장했다.
유엔군 사망자 4만 896명 중 89%인 3만 6492명이 미군 사망자이지만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갔다.
참전국 중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는 전사자를 전사지에 안장하는 관례가 있다.
터키 역시 이슬람고 문화를 따라 전사자를 숨진곳에 안장하고 았다. 그래야 영혼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머지 덴마크, 인도, 이탈리아, 스웨덴, 독일등 5개국에서는 전사자가 한명도 없었다.>
동명불원 앞에는 봉오리산으로 오르는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30여년 전 용호동에 살때에 자주 올랐던 산인데 지금은 울창한 나무숲으로 뎦혀 세월의 빠름을 실감케 한다.
봉오리산을 넘어 안부로 녀려가면 해경 통신기지가 있고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면 체육공원이 있다. 옛날 군 복무시절 통신중계소 설치를 검토했던 곳이다. 다시 신선대 방향으로 산길을 내려간다. 길가에 아름드리 소나무 들이 숲길의 상쾌함을 느끼게 해 준다.
나무토막 계단길을 내러가면 신선대 산복도로를건너 무제등 소공원/신선대 주차장이다. 오른쪽 도로를 따라가면 신선대에 도착한다.
[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황령산에서 뻗어나온 산등성이가 부산만에 몰입하여 이루어진 우암반도의 남단에 해당하며, 용당동 해변 좌안의 바닷가 절벽과 산정(山頂)을 총칭한다. 화산암질로 된 해안이 파도의 침식을 받아 발달된 해식절벽과 해식동굴로 절경을 이루는 곳으로, 면적은 412만 1707㎡에 이른다.신선대 주변의 산세는 못을 둘러싼 용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이 일대를 용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서려 있는데, 신선대를 절단하여 도랑을 만들 때 사토에서 혈흔이 나왔다고 전하며, 가야진이라는 사람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도 하며, 신라 말기에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유람한 곳이라고도 한다. 또 신선대라는 명칭도 산봉우리에 있는 무제등이라는 큰 바위에서 신선의 발자국과 신선이 탄 백마의 발자취가 있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옛날에는 이곳에 가까이 가면 신선들이 노는 풍악소리가 들려왔다고도 한다. 신선대 [神仙臺] (두산백과) ]
정상에서 부산항을 한눈에 바라보고 아래쪽의 기념비가 서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기념비는 영국의 앤드류 왕자의 방문과 한국과 영국의 역사적 첫 만남의 장소를 기념하는 내용이 적혀있는 명승지이다.
신선대는 부산광역시 남구 용당동 산 170번지 일원에 자리한다. 1797년 (정조21년) 10월 14일 영국의 탐사선 영국 해군소속인 프로비던스호 일행이 부산항 입구 용당동 신선대를 방문하여 한국 주민들과 최초 접촉을 한 곳이다.
<이른 아침 우리 배를 보기 위해 호기심에 가득한 남자, 여자, 어린아이들을 가득 실은 작은 배들이 우리 배를 둘러쌓다. 그들은 누볐거나 겹 천으로 된 흰 무명천으로 헐렁한 상의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크고 헐렁한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여자들은 속바지위에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남녀 모두가 흰 무명 버선과 볏짚으로 만든 짚신을 신고 있었다.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정수리에 묶어 상투를 틀었고,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꼬고 땋아서 머리위에 올려놓았다.>
영국 해군 함장이 쓴 일기에 당시 우리조상들의 생활상이 잘 표현되어 있었다.
<우리 배에서 가까운 남쪽에 있는 산(신선대)으로 올라가 방위각을 재기 위해 뭍으로 나갔다. 정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시야는 매우 넓었고, 항구의 모든 부분을 명확히 볼 수 있었다. 이 산의 강한 자력으로 인해 나침반의 바늘이 정확한 방향을 알리지 못하고 항상 북쪽이 아닌 동쪽을 알리므로 방위각 측정은 소용이 없었다. 나는 가파르고 높고 튀어나온 이 산이 우리 나침반 바늘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지도상에 이산의 이름을 ‘자석의 머리’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 비문에 적혀있는 문구
한편 신선대는 1797년 10월 윌리엄 브로우턴 함장의 부산방문 200주년을 기념하여 그가 부산항을 정밀하게 측량관측 했던 지점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함장의 일기에 기록된 당시 우리선조님들의 생활상을 잘 표현한 일기 일부분을 비문에 조각했다.
신선대를 다시 돌아와 무제등 소공원을 한바퀴 돌고 도로의 인도를 걸어 내려와서 용당 5거리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여 집으로 가는 버스에 탑승하여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