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회:아시아스포츠 무대에서의 외로운 싸움

[김재현]

  아시아스포츠 무대에서의 외로운 싸움

필승고지를 향한 대한체육회의 방침

제8회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리는 1978년이 밝았다. 아시아경기대회(아시안게임)는 아시아인의 영원한 전진을 다짐하며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아시아의 종합 스포츠제전으로 그해에는 12월 9일부터 20일까지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다.

한국에게 이 대회가 특히 의미 깊었던 것은 한국 스포츠가 조국 분단의 비운을 되새기며 남북 스포츠 전면전을 맞아야 함은 물론 당시 아시아 전반에 몰아닥친 친 중국의 물결 속에서 자유 민주주의의 기수로 외로운 스포츠 전쟁을 치러야 하는 대회였기 때문이었다.

정초부터 한국 스포츠계는 타도 북한의 열기 속에 맹렬한 투지를 불태워 가고 있었다. 12월의 방콕 아시안게임은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 이어 두 번째 남북 스포츠 전면전이 벌어지는 대회였다. 한국으로서는 이 대회에서 북한을 이기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대비한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야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한국 스포츠는 어느 때보다도 어렵고 불리한 상황에서 방콕 아시안게임을 맞고 있었다. 테헤란 아시안게임에 중국이 첫 등장한 이후 북한의 그것과 함께 아시아 스포츠계에 휘몰아치기 시작한 거센 정치바람으로 한국 스포츠에 대한 압력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다. 한국 스포츠는 중국, 파키스탄, 이란 등의 친북한 정치와 스포츠를 정치에 이용하는 작태를 막아야 하는 부담 속에서 북한과 싸워 이겨야 하는 이중고를 극복해야만 했던 것이다.

당시 김택수 대한체육회장(작고)은 “방콕 아시안게임은 한국이 아시아 대륙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펼치는 격전장이며, 오늘의 국제 스포츠 무대는 총칼 없는 전쟁터”라고 표현했던 것만 보더라도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

대한체육회는 그 1년 전인 1977년 1월부터 이미 아시안게임 체제에 들어가 각 종목 우수선수 강화 훈련을 계속해 왔다. 그해 신정 연휴가 끝나고 1월 9일부터 탁구를 비롯한 16개 종목에서 선발한 200여 명의 선수들이 태릉선수촌에서 「 선체력 후기술 」이라는 목표를 두고 3백일 작정 강화 훈련에 들어갔다.

대한체육회는 국제대회 때마다의 시행착오를 예로 들면서 낙후된 기술의 보완에만 급급하다가 너무나 뒤진 체력의 열세 때문에 참패했던 쓰라린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선체력(先體力)이 역점을 들것을 각 종목 지도자들에게 강력히 지시했다.

또한 북한과 가장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는 탁구, 축구, 배구, 복싱, 레슬링 등은 해외 전지훈련 및 우수국가 선수들을 한국에 초청, 선수들의 사기저하를 막고 참신한 분위기 속에서 전력을 키우는 방안도 마련했다. 그 해 5월, 본부를 태릉선수촌으로 옮겨 모든 행정력을 우수 선수 훈련에 초점을 맞춰 총력을 기울인 대한체육회는 9월까지 대표선수의 조기선발을 끝내고 아시안게임 작점에 물샐틈없는 준비 작업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4년 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남북한 스포츠는 첫 전면전을 벌였다. 당시까지 각종 대회에서 한국은 사격, 빙상에서만 약간 열세를 보였을 뿐 탁구, 배구, 농구, 복싱, 레슬링에서는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과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의 종합성적에서도 물론 우위를 차지해 국력과 체력에서 북한을 압도했다. 특히 그때까지만 해도 탁구는 단 한 번도 북한에지지 않는 연승을 기록하고 있었다.

김택수 대한체육회장은 신년 입촌식에서 “남북 스포츠대결에서 이기는 길은 기술, 체력, 정신력을 승화시킨 강화훈련에서 최대 성과를 거두는 길 뿐”이라고 못박고 “국민과 선수들의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자”고 강조했다.

방콕을 겨냥한 필승작전

탁구선수단의 표정은 자못 비장했다. 아시아경기대회도 문제려니와 이듬해 4월의 제3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도 심한 압박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로선 이듬해의 평양세계선수권대회 참가 여부가 관심의 초점이었지만 이에 앞서 아시아경기대회에 대비하는 것이 더욱 시급한 문제였다.

여자 탁구의 아시아 판도는 지금도 그렇지만 세계대회나 다름없었다. 전해 버밍엄 세계대회 여자단체전에서 4강에 오른 중국(우승), 한국(준우승), 북한(3위), 일본(4위)이 한데 어울려 싸우는 아시아경기의 승자는 바로 세계 최강이었다. 은퇴한 이에리사, 정현숙 선수도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한 번도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

따라서 아시아경기대회의 대비는 곧 세계선수권대회 대비의 한 과정이었다. 아시아경기대회 성적의 결과는 앞으로 세계 패권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점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었다. 그렇지만 당시의 여자 탁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불안했다.

천영석 총감독(당시 협회 전무이사)은 2위는 고수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하지만 탁구 전문가들과 보도진 등 밖에서 보는 당시 대표팀의 전력이 근 10년 사이에 가장 약하다는 세평을 부정할 길은 없었다.

대스타가 사라지고 난 다음 큰 공백이 생기게 되는 것은 누구나 부정할 수는 없었다. 어느 종목, 어느 팀이건 선수 교체의 과도기엔 일시적인 후퇴나 침체를 감수해야 했다. 한국 여자 탁구는 당시 바로 그런 시점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 공백이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 탁구의 선수층이 너무 얇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수준차가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담 없이 도전하는 신인들이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이야기였다.

처음 여자대표팀을 맡은 이재화(당시 대한항공) 코치도 “선수들의 협동정신이 예전에는 없었던 무기다. 그동안 정현숙, 이에리사 선수에게만 너누 의존하여 그 외의 선수들이 무기력한 상태였다. 두 선수의 은퇴 이후 다른 신인 선수들 사이에 새로운 의욕이 생겼다.”고 평하며 남다른 자신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당시 여자대표팀은 김순옥(대한항공), 이기원(산업은행), 박홍자(신탁은행), 이수자(시온여고) 중 김순옥과 이기원을 에리스로 선정, 집중적으로 훈련시켰다.

전해 10월 태릉선수촌에 입촌한 탁구상비군은 그 해(1978년) 5월 대표선수를 최종 선발할 때까지 체육회 방침에 의거 주로 체력훈련에만 집중했다. 그 결과 체력은 두드러지게 좋아졌지만 전문 기술의 큰 진전은 없었다. 탁구의 본격적인 훈련은 그 해 5월 10일부터 시작되었다. 그전에는 종별선수권대회를 위해 소속팀으로 복귀시켜 연습하게 했다.

대회까지 꼭 5개월을 남겨놓은 시점에서 재소집된 대표팀은 그동안 다져온 체력을 바탕으로 기술을 완성하고 선수의 개성을 살린 작전을 짜는 본격적인 단계에 접어들었다.

왼손잡이 김순옥은 역시 왼손잡이인 북한의 박영순과 만날 경우를 대비해서 왼손잡이를 상대로 연습시켰다. 또 변칙 러버로 국내에서 성공한 이기원은 이번에는 러버 뿐만 아니라 라켓도 바꾸어 전혀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내는 작업을 서둘렀다. 커트스트로크인 박홍자는 수비전용으로, 최연소 이수자는 장기계획으로 양성하기 위한 선발이었다.

탁구의 강적은 두말할 것 없이 중국, 북한, 일본이며 개인으로는 중국의 장덕영, 장립, 양영, 황석평 그리고 북한의 박영순, 막영옥 등을 꼽을 수 있었다. 이들의 주무기는 대부분 드라이브, 한국은 드라이브형에 강한 김순옥과 변칙의 이기원을 내세워 이들을 깨뜨릴 계획이었다. 한국이 74년에 이어 2위를 지키자면 적어도 북한과 일본을 꺾어야 하는데 남북대결의 전망은 당시로선 불투명했다.

남자탁구의 목표는 상위진출과 남북대결에서의 승리, 두 가지였다. 74년 제7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한국 남자팀이 A조 3위, 북한은 B조 2위를 기록했다.

1978년 9월 이대섭 코치의 개인사정에 의한 사임으로 그 뒤를 이은 이소광(시온고 감독) 코치는 그동안 침체된 남자 탁구가 한번 기세를 떨쳐 볼 때라고 의욕을 보였으나, 남자팀의 이상국(대우중공업), 윤길중(삼양식품), 박이희(공군), 김완(신진공고) 등이 모두 아시아경기대회 첫 출전이었을 만큼 경험부족이 큰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직전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한 북한보다 약세에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으나 남자팀은 제5회 대회 개인전에서 우승한 김충용과 같이 이외의 성과도 있을 수 있다는 심정으로 기대감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대표팀은 그 해 6월 1개월간의 부산 전지훈련을 시작으로, 8,9월에 제주도에서, 10월에는 경기고 하남에 있는 산업은행 연수원에서 뼈를 깎는 연습으로 아시아 제패의 힘을 키워갔다. 또한 기온 30도를 웃도는 현지에 적응하기 위해 서울신탁은행 체육관에서 난로를 피워놓고 마지막 작전을 가다듬기도 했다.

미국, 서독 여자대표팀 초청 3개국 친선대회 실시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대한체육회가 내세운 국제경험 축적의 일환책으로 협회는 서독, 미국 여자대표팀을 한국에 초청하여 3개국 친선경기를 실시하도록 했다. 이 초청대회는 또한 그 이듬해 평양에서 개최되는 세계대회에 대비한 경기력 향상과, 특히 국제탁구연맹 부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서독의 유제프 슈라프 씨와의 세계대회 참가에 대한 사전협의 등을 논의하기 위한 의미도 곁들여져 있었다.

그리고 지난 회에서도 언급했듯이 미국팀의 평양 세계대회 참가에 따른 한국계 이달준 코치, 나인숙, 박혜자 선수 등 미국팀 내한에 따른 협의 또한 그 의미가 컸다.

그 해 6월 국제탁구연맹 로이 에반스 회장의 방한에 이어 미국, 서독 초청 친선탁구대회에 서독팀 단장으로 처음 서울에 온 슈라프 부회장은 한국이 다음 평양 세계대회에 참가할 수 있으며 당연히 참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유럽탁구연맹 회장이기도 했던 국제 탁구계의 거물 슈라프 씨는 법을 중요시하는 독일인이어서인지 “북한이 국제탁구연맹의 헌장을 무시하고 한국을 초청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2.5g 미만의 조그만 탁구공을 다루는 탁구인 답지 않게 1백 20kg의 거구인 슈라프 씨는 그 해 5월 도쿄에서 개최한 국제탁구연맹 이사회에서 자신이 직접 북한의 세계대회 조직위원회 사무총장으로부터 한국팀 초청을 보장받았다고도 밝혔다.

초청대회는 9월 12, 13일 이틀간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거행되었는데, 한국은 국가대표 A, B팀과 주니어대표 A, B팀으로 구분해서 출전시켰다. 국가대표 A팀은 김순옥, 이기원, 박홍자, B팀은 이수자, 이유경, 최태옥 등 신진들로 구성했고, 주니어 역시 베스트별로 A, B팀으로 나누었다. 경기결과는 서독이나 미국 양 팀 모두 우리보다는 물론 실력이 한 수 아래임이 입증됐다.

서울에서의 일정은 앰버서더 호텔에서의 화려한 만찬과 서울의 고궁 관광, 그리고 판문점 관광 등으로 마치고 부산으로 이동, 3,4차전의 친선경기를 실시했다.

부산에서의 팀 구성은 계성여상 A, B팀과 부산여상과 선화여상 선수를 혼성한 부산선발 A, B팀으로 구성, 2일에 걸쳐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경기를 실시했다. 부산경기에서는 서독 A팀이 부산선발 A팀을 5대 1로 대파하여 방한전적 2승 2패를 기록했고, 미국 A팀은 계성여상 A팀에게 4대 5로 패한 뒤 부산선발 팀에도 2대 5로 패해 4전 4패를 기록했다.

◆ 한국. 미국. 서독 3개국 친선대회 전적  

▽ 1차전(서울) - 한국대표A 6:1 서독A - 한국대표B 5:2 미국A - 한국주니어A 5:0 서독B - 한국주니어B 5:0 미국B	▽ 3차전(부산) - 계성여상A 5:4 서독A - 부산선발A 5:2 미국A - 계성여상B 3:1 서독B - 부산선발B 3:0 미국B
▽ 2차전(서울) - 한국대표A 9:0 미국A - 한국대표B 4:5 서독A - 한국주니어A 5:0 미국B - 한국주니어B 5:0 서독B	▽ 4차전(부산) - 계성여상A 5:4 미국A - 부산선발A 1:5 서독A - 계성여상B 3:0 미국A - 부산선발B 기권승 서독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