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기쁨
모 침대 제조사가 자사 상품을 홍보하면서 선보인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라는 광고 카피가 한때 화제를 모았다. 제품의 안정성이나 안전성에 대한 소비자의 욕구를 포착한 광고 문구가 꽤 인상적이었다. 지금도 간간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데 광고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세상에는 ‘흔들리는 불편함’을 자청하는 이들이 있다. MTB(산악용 자전거)에 올라 비탈진 산길을 거침없이 질주하는 X-스포츠 마니아들이 한 예다. 사륜바이크를 타고 산·들·해변을 누비는 신종 레포츠에 열광하는 체험객들도 마찬가지다. 극단의 흔들림조차 이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아닌 질주 본능을 자극하는 촉매제일 뿐이다.
거친 도전에서 얻은 자신감을 활기찬 삶의 원천으로 활용하는 것을 뉘라서 반대하겠는가. 오히려 짜릿한 스릴과 쾌감을 만끽하기 위해 웬만한 위험쯤은 기꺼이 감수하려는 열정적 태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 같은 역동적인 즐거움에도 한계는 있다. 그것은 바로 감각적이고 말초적이며 찰나적인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항시적이면서 영속성을 띠는 내면의 기쁨과 대비된다.
그러면 심신의 에너지를 과소비하지 않으면서도 오래도록 잔잔한 기쁨을 누릴 방법은 없을까.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깃들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몸의 긴장을 이완시키는 것이 중요한데, 경험상 음악의 선율에 몸을 내맡기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완화되는 효과가 있다. 빗소리·천둥소리·새소리·바람 소리·파도 소리·시냇물 소리·폭포 소리·풀벌레 소리·낙엽 밟는 소리·눈 밟는 소리 등 ‘백색소음’을 가까이하는 것 역시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된다.
칸딘스키나 파울 클레는 추상화의 대가답게 이전의 정형화된 화풍에서는 볼 수 없었던 기하학적 무늬나 상형문자를 즐겨 다루었다. 몬드리안 역시 원색과 직선만으로 간결미의 극치를 화폭에 담아내었다. 이처럼 강렬한 추상성을 추구하던 유럽 화가의 예술작품을 통해 시각적인 기쁨과 동시에 심리적 해방감을 음미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타국 땅에서 프랑스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의 진품을 눈앞에 마주하고 심장이 두방망이질하던 그 행복한 기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 밖에도 별빛이 스러져 가는 새벽 어스름에 홀로 깨어 명상에 잠겨 보거나, 한밤중 창문으로 스며드는 고요한 달빛에 오롯이 취해 볼 것을 제안한다. 내밀한 기쁨 안에서 삶의 고요한 진리를 깨닫는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한여름 붉은 태양빛으로 달궈진 푸른 바다에 반드시 몸을 담가야 할 이유는 없다. 모래톱에 앉아 먼 수평선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눈앞의 하얀 포말이 마음속 찌꺼기를 말끔히 씻겨 줄 테니 말이다. 물론 이승의 열락(悅樂)을 깨우치고자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독서삼매에 풍덩 빠지는 것은 얼마든지 강력히 추천하는 바이다.
‘당송 팔대가’는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때의 뛰어난 문장가를 일컫는다. 그중 한 사람인 소동파가 이르길, ‘천하지락무궁 이이적의위열(天下之樂無窮 而以適意爲悅)’이라 했다. 세상에 즐거움이 넘쳐나도 마음에 맞지 않으면 진정한 기쁨은 되지 못하는 법이다.
표피적 즐거움에 심취한 나머지 지혜 가운데 존재하는 기쁨의 참맛을 외면한다면 실로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진정한 기쁨은 바깥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육신은 날로 쇠잔해 갈지라도 영혼과 정신만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가급적 흔들리지 않는 기쁨 안에 머무르려는 노력이 필요할 듯하다. 2022. 8.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