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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첫날 아른헴으로 향하던 영국 제1공수여단 3대대는 독일군과 우연히 조우하여
교전을 벌이게 되는데 적은 방어 태세를 점검하기 위해 시찰 중이던 아른헴 지역 독일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쿠신 장군과 그의 부하들이었습니다. 전투 당시에 영국군은 그들이
소탕한 적들 중에 이런 "거물"이 포함되어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만
뜻밖에 전공이었습니다. 사진은 집중 사격으로 사망한 쿠신 장군의 모습)
(아른헴 지역에 영국군 공수부대를 소탕하기 위해 출동한 독일군 슈트름게슈츠 3호 돌격포 전차)
앞에서 말했듯이 영국군 공수부대는 무전기 문제로 부대 간에 통신 두절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게다가 여기 저기에서 독일군들과 맞닥뜨려서 혼란스러운 총격전을 벌이다 보니 오스테르빅이라는 작은 마을에 마치 병목 현상으로 발이 묶여버린 귀성차량 행렬들처럼 영국 공수부대들이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독일군들과 크지도 않은 마을에서 엄청난 인원들이 민간인 주택과 상용 건물들을 들락거리며 마치 숨박꼭질을 하든 시가전을 벌이며 혼전을 치루게 되는데 그런 와중에 영국 제1 공수사단을 지휘하는 우르크하트 소장이 행방불명이 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그는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오스테르빅 마을에서 통신이 두절된 상태로 발이 묶여버린 것입니다.
Day 2 (1944년 9월 18일)
마켓 가든 작전의 둘째 날이 밝았습니다. 밤새 영국 공수사단의 진격은 어느 정도 진행되는 듯 하였지만 이미 상황 파악이 끝난 독일군은 적의 대열의 중간을 공격하고 고립된 공수부대들을 차근 차근 소탕하는 방법으로 효과를 보기 시작합니다.
독일의 제2 무장 친위대 기갑군단의 명석한 지휘관 비트리히는 전날 남쪽 네이메흔으로 급파했던 제 9 기갑 사단 정찰대대가 주어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연합군의 교량 점령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후에 더 이상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들을 다시 아른헴으로 돌아오도록 명령합니다. 여기서 지난 번 글을 읽어보셨겠지만 작전 지역 내에 있는 세곳의 의미있는 마을들의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이거 무슨 시험 공부 하는 것 아니잖아 하면서 대충 읽어가다 보면 꼭 필요한 개념 잡는 것을 놓치는 경우에 이야기 줄기를 이해하는 것을 놓쳐버릴 수 있거든요.)
(작전 첫날 역전의 용사들 독일 9 기갑사단 정찰대대가 급파되어 영국군 공수부대가
교량 점령을 실패한 네이메흔은 북쪽에 위치한 아른헴과 남쪽에 에인트호벤의 사이에
중간에 위치해있습니다. 자! 이제 위치 다시 확인하셨죠? 그럼 얘기 계속 진행합니다.)
하지만 아른헴의 상황은 전날 네이메흔과는 좀 달랐습니다. 도리어 아른헴 교량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상황에서 영국군 공수부대의 공격으로 독일 9 기갑사단 지휘관 파울 그리브너 대령이 전사를 하는 등 많은 숫자의 독일군들이 타격을 입게 됩니다.
(1944년 9월 18일 아른헴 교량 전투 당시에 공중 촬영 사진. 교량 위에 파괴된
독일군 장갑차들이 보입니다. 원 안에 독일군 장교는 전사한 무장 친위대 제9
기갑사단 지휘관 그리브너 대령)
영국군 제1,3 대대는 그날 늦게서야 아른헴에 도착하게 되는데 낙하 지점에서 점령 목표인 아른헴 교량 앞에 까지 도착하고 보니 애초 병력의 1/6만이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특히 장교와 하사관들의 태반이 전사한 상황에서 추가로 이날 강하하기로 했던 후속 부대 영국군 제4 공수여단은 안개 때문에 예정보다 늦게 강하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그들의 낙하 지역에는 이미 독일군들의 대공포와 기관총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상에 무사히 착륙한 글라이더도 기다리고 있던 독일군의 집중 사격으로
불덩어리가 되어버리곤 하였습니다. 낙하산 대신에 글라이더 탑승으로 현지
투입되었던 상당수의 장교들은 미쳐 흙에 발을 디뎌 보지도 못하고 글라이더
속에서 숮덩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비록 이미 지상에 있던 제1여단의 일부 병력들이 독일군들을 공격하여 아군의 낙하를 도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숫자의 병력은 낙하 중에 또는 지상에 착지하자마자 기다리던 독일군들에게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버리는 끔찍한 상황이 전개됩니다. 게다가 대공포의 사격으로 겁에 질린 수송기에서 성급하게 줄을 끊어버린 글라이더들이 공중에서 서로 충돌하고는 추락하여버리는 끔찍한 사고까지 벌어졌습니다.
(미니아트社 발매 1/35 마켓가든 당시 독일군과 영국군 공수부대 피규어 키트는 당시 상황을 제법
생생하게 표현해주는 키트입니다.그나마 포로로 잡힌 공수부대원들은 사살된 전우들에 비하면 운이
좋은 셈이었습니다.)
(이사진은 바로 작전 개시 둘째날인 9월 18일 후속 부대로써
투입된 미군 327 글라이더 부대가 추락하자 지상에 있던
병사들이 파괴된 기체 속에 갖힌 전우들을 구출해내는 장면입니다.)
비록 숫적으로 계획 대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의 영국군 공수부대는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하루 종일 독일군과 아른헴 교량 점령을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만 그날 밤까지 결국 교량 점령에는 실패하였습니다.
(아른헴 전투로 투입 중인 독일군 하노마그 하프 트랙 장갑차)
아른헴과 마찬가지로 네이메흔 쪽도 독일군의 강력한 공격으로 화기와 병력 모두 열세인 미군 공수부대였지만 의외의 선전을 하면서 하루 동안 독일군의 14문의 대공포를 빼앗고 무려 149명의 독일군 포로를 잡는 전공을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이메흔 교량의 점령은 실패하였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교량들인 아른헴과 네이메흔 교량의 점령은 실패한 상황이었지만 교량들이 계획대로 점령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고 강가에 도착한 미군 제30 군단은 남쪽에 위치한 아인트호벤에서 영국 공병부대가 가교를 만들기를 기다리며 밤을 새우게 됩니다. 이미 둘째날 밤까지 애초 작전 계획 대비 36시간이나 지연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Day 3 (1944년 9월 19일)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이른 아침 영국군 제1 공수여단 1대대는 아른헴을 다시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4개 대대로 나뉘어 공격을 하던 영국군은 독일군의 공격에 궤멸되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그들의 패배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낙하산과 글라이더로 투입된 그들에게 독일군이 보유한 전차와 장갑차량을 상대할 수 있는 대전차 화기가 변변히 갖춰졌을리 없었고 기관총과 소총, 그리고 기껏해야 박격포로 무장한 그들이 월등한 화력을 갖추고 게다가 방어하는 입장인 독일군을 밀어내고 교량을 점령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무모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아른헴 전투를 그린 역사화, 건물 옥상에서 교량을 넘어오는 독일군
탱크를 향해서 사격을 가하는 영국 제1 공수여단 제2대대)
특히 압도적인 화력으로 집중 포화를 쏟아붓는 독일군에게 영국군 공수부대들은 파멸의 끝으로 치달리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른헴 교량 바로 앞에 건물 속에서 수많은 부상자들을 방치한 채로 악전고투를 하던 제 2 대대였습니다. 독일군은 영국군이 들어가 있는 건물에 포격을 가하였습니다. 전날 독일군은 보병 중심으로 공격을 시도하다가 뜻밖의 타격을 입었으므로 이번에는 박격포와 야포를 집중 배치하여 무자비하게 건물을 부숴버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전날 비록 큰 타격을 입었지만 지상에 도착한 영국군 제4공수여단 병력은 아른헴에서 처참한 지경에 이른 제2대대를 구출하려고 아른헴쪽으로 진격을 시도하지만 독일군의 공격으로 도리어 부대가 뿔뿔이 흩어지면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됩니다. 결국 4 공수여단은 아른헴 구출을 포기하고 좀 더 북쪽에 위치한 우스터비크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교량 하나를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같은 날 추가로 낙하하기로 했던 폴란드 공수 여단은 계속되는 안개로 낙하가 연기되고 영국에서 대기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현지에서 긴급하게 필요하다고 판단한 대전차포와 차량이 적재된 글라이더들은 현지 강하를 강행합니다. 하지만 강하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제4 공수여단은 독일군의 공격으로 그 지점에서 퇴각한 뒤였습니다. 결국 글라이더들은 독일군의 대공포 사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었고 속수무책으로 격추되었습니다.
그날 아침에 흐라버 지역에서 드디어 제 30 군단과 미군 공수부대 제 504, 505 공수연대가 조우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후가 되어서 제30 군단의 대군 중에서 전위 부대가 네이메흔에 도착하게 됩니다. 특히 교량을 점령하지 못한 상황에서 보트로 도강을 하여 우회 공격을 계획했던 제 30 군단과 505 공수연대는 보트가 도착하지 못해서 계획했던 작전을 시도해보지도 못하고 강을 쳐다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켓 가든 작전 기간에 투입된 독일 판터 전차)
한편 남쪽에서는 손(지명) 부근에서 그 지역 교량을 점령하려다 실패한 101 공수사단이 다시 공격을 시도했는데 뒤늦게 도착한 영국군 기갑부대 덕분에 독일군을 밀어내고 교량 점령에 드디어 성공하게 됩니다.
그때 몇대의 판터 전차가 강 건너편에 나타나서 영국 공병부대가 가설한 가교를 향해 포격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30군단이 보유한 대전차포를 사용하여 판터의 공격을 제압하게 됩니다.
Day 4 (1944년 9월 20일)
아른헴에서 강건너 독일군의 집중 포화로 만신창이 되어버린 존 프로스트 중령의 제2대대는 오후 무렵에 공중전화 회선을 사용한 통신 개통에 성공을 하게 되면서 바깥 상황을 파악하게 됩니다. 아른헴 뿐만 아니라 네이메흔도 교량 점령에 실패한 상황에서 제30 군단은 네이메흔에서 아른헴으로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오지 못하는 상황임을 알게 되었고, 이미 그때 쯤에 제2대대는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하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어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탄약,식량과 의약품은 바닥이 나기 시작하였고 부상자들의 상태는 매우 심각하였습니다.
결국 영국군은 2시간의 휴전을 요구하고 부상자들을 존 프로스트의 인솔하에 독일군에 항복하게 됩니다. 남은 병력들 역시 휴전 시간이 종료하자 마자 총공격을 가해오는 독일군에게 백병전을 감수하며 저항했지만 무력하게 제압당하게 됩니다. 결국 그들은 대부분 포로가 되어버렸고 이들이 제30군단 측과의 마지막 통신 내용은 "탄약이 떨어졌음. 하나님! 폐하를 보호하소서!"였습니다.
영국군 제1공수사단의 규모는 10,000명이 넘었지만 아른헴까지 다다라서 교량 공격을 진행했던 존 프로스트의 제2대대는 고작 740명 뿐이었고 독일군에 항복하게 되었을 때는 81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부상자로써 포로가 되었습니다.
(독일군에게 포로가 된 영국 공수부대 병사들)
미육군 82 공수사단의 전쟁 영웅 개빈 장군(마켓 가든 작전 투입)은 영국군 공수 제2대대와 지휘관 존 프로스트 중령이 마켓 가든 작전 초기에 아른헴 교량 앞에서 절대적인 숫적 열세와 빈약한 화력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숫자의 독일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것은 "독립적인 공수대대 단위의 전투 중에서 역사상 최고"라고 치하하였습니다.
이제 마켓 가든 작전의 종지부를 찍기 위한 마지막 회를 준비해야겠네요.
첫댓글 어젯밤에 케이블티비에서 '제네레이션 워'라는 독일측에서 본 2차대전을 다룬 드라마를 봤습니다.
첫 번째 사진에서와 같이 전쟁은 참혹 하기만 한 것 같습니다. 사방에 죽음과 파괴만이...
글을 읽으면서 곳곳에서 '머나먼 다리'의 주인공들의 얼굴이 계속 떠오르네요.
오늘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집에가서 영화 다시 한 번 봐야겠어요. ^^
항상 제글에 관심 갖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켓 가든 이후에는 바르샤바 봉기를 다뤄 볼까 합니다. 겨울에는 당연히 벌지 전투 차례일거구요.
2차 대전에서 바르샤바 봉기에 대한 관심이 약간은 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도 있습니다.
(뭐 제 착각일 수도 있겠지요. 훔~)
바르샤바 봉기에 대해서 글 올려주시면 저도 그 때 말씀 한번 더 드릴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용감한 폴란드인들의 외세침략 저항기와 처절한 벌지전투, 많이 많이 기대됩니다. ^o^
바르샤바 봉기는 정말 가슴 아픈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또 우리가 강한 나라가 되지 못하면 얼마나 말도 안되는 학대를 겪게 되는가 너무나 확실히 설명해주는 사건이지요. 그런 탓에 연합군의 진격과는 상관없지만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것 같네요.
정말 힘겨운 전투네요
도사님 말처럼 힘든 전투인데, 읽는사람은 재미있네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무리한 작전때문에 수많은 군인들이 희생되었군요.ㅠㅠ
이런 제글들을 읽으면서 지금 만들고 있는 탱크나 인형들이 실제 전쟁 속에서 어떤 끔찍한 악몽을 만들어냈었는지 다시 한번 느끼게 하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
오랜만에 이런 깊이있는 리뷰잘보고 갑니다. 첫번째 사진이 전쟁의 참상을 적나라게 보여주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