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아침 7시에 울리는 알람 소리에 유리가 침대에서 일어나 나간다. 부모님은 이미 출근한 건지 집 안이 적적하다. 유리는 부엌으로 가 국에 밥을 말아먹는 것으로 아침을 때우고 학교로 간다.
학교에 도착하니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 얘기를 들어보니 오늘이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라는 내용이었다.
유리는 교실에 민지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노트 하나를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지가 교실로 들어왔고, 유리의 앞자리에 뒤돌아 앉았다.
“유리~ 오늘도 그리고 있어?”
“아, 언제 왔어?”
“방금. 오늘은 뭐 그리고 있어?”
“그냥, 아무거나 그리는 거지 뭐.”
민지는 유리의 노트를 한 번 훑어봤다. 노트 곳곳에는 귀여운 동물이나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멋진 그림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면 잘 그렸다고 칭찬할 만한 그림이었다.
“너 진짜 미술 쪽으로 갈 생각 없어? 진짜 잘 그리는데.”
“난 그냥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그리는 거야. 잘 그리지도 못하고. 그리고 부모님이 별로 안 좋아하셔서.”
“진짜? 보통 자식이 원하는 걸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다들 자리에 앉아라!”
담임 선생님이 앞문을 열고 들어왔다. 민지는 ‘부모님이랑 잘 얘기 해봐!’ 라고 말하며 자기 자리에 앉았다. 교탁 위에 놓여 있는 모의고사 성적표에 학생들은 탄식을 내뱉었다.
“한숨 쉬지 말고. 오늘 모의고사 성적표 나왔다. 성적표를 보면서 반성들 하도록.”
선생님이 출석번호 순으로 성적표를 나누어줬다. 어느새 자신의 차례가 된 유리가 교탁 앞으로 성적표를 받아왔다. 유리도 자신의 차례에 성적표를 받아 확인하였다. 2등급과 3등급이 적혀있었지만 영어만 5등급이었다. 등급이 두 개나 떨어졌다.
‘이 성적표를 부모님께 보여드리면 분명 화를 내실거야.’
그렇게 생각한 유리는 성적표를 그림노트에 대충 쑤셔 넣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5시에 학교가 마치고 학원까지 다녀오니 벌써 밤 12시였다. 오랜 시간 밖에 있던 탓인지 유리는 매우 피곤한 모습이었다. 유리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유리의 어머니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오늘이 모의고사 성적표 나오는 날이지?”
“네.”
“옷 갈아입고 성적표 가지고 오렴.”
“아…그, 친구랑 성적 비교하다가 학교에 두고 왔어요….”
유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의 질문에 답했다. 어머니는 딱딱한 표정으로 유리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두고 온 거야?”
“네, 두고 왔어요.”
유리를 계속 쳐다보던 어머니는 스터디큐브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들어가서 공부하고 자렴."
스터디큐브는 책상과 책장이 있고, 문을 닫아 개인 공간으로 만들 수 있어서 개인 독서실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유리는 저 공간에 들어가면 감금되는 것 같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으면 어머니가 더 화낼 것임을 알기에 방으로 들어갔다. 가방에서 문제집을 꺼냈다가 ‘탁’ 소리를 내며 무언가 떨어졌다. 바닥을 보니 그림노트였다. 방 밖에서는 어머니가 서 있었다.
“니가 저기로 들어가는 거 보고 잘 거야.”
이대로 노트를 들고 나갔다가는 들킬 것이라 생각한 유리는 책상 위에 대충 올려놓고 스터디큐브로 들어가 앉았다. 문제집을 펼쳐 열심히 풀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함이 몰려왔다. 유리는 잠시 눈이라도 붙이려고 의자에 기대 잠을 청했다.
“이유리! 얼른 일어나!”
스터디큐브의 문을 쾅쾅 두드리며 소리치는 어머니의 유리는 헐레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의 손에는 모의고사 성적표와 그림노트가 들려 있었다.
“영어 성적이 왜 이러니? 왜 등급이 두 개나 떨어졌어?”
“그게 시험보다가 코피가 나서….”
“시험 보다가 코피가 나? 그래. 밤새 이딴 거나 끄적이고 있으니까 그렇겠지!”
“아니예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노트도 엄청 많이 썼으면서.”
“진짜 아니예요, 요즘 잠을 잘 못 자서….”
“그래? 그러면 이 노트 찢어서 직접 증명해. 그림 밤새 그려서 그런 게 아니라고.”
“네?”
어머니의 말에 유리의 눈이 흔들리고 몸이 굳었다. 어머니는 유리에게 그림노트를 쥐어주었다.
“얼른 찢어!”
유리는 덜덜 떨며 노트를 들고 있었다. 어머니의 윽박이 점점 커지자 유리는 덜덜 떨면서 제 손으로 그림노트를 찢었다. 어머니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방을 나서며 말했다.
“종잇조각 버리고 학원가라. 앞으로 그런 거 끄적이지 말고.”
어머니가 문을 닫고 나가자 유리는 종잇조각을 주우며 조용히 흐느꼈다. 유리의 마음이 유리처럼 산산조각 부서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