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침실의 신경전
"우린 출발부터 따로따로였지만, 솔직이 말해 걔들 거기 온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고봉식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설희주씨와 둘만의 호젓한 여행이었는데. 재미 깨나 보았겠구먼."
"여보슈."
강형사의 빈정거림에 고사장은 불쑥 화를 냈다.
"그런데 왜 부인과 따로따로 돌아왔습니까?"
추경감의 질문이었다. 고사장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싸웠습니다. 만나면 싸우게 되었으니까요."
"그럼 새벽에 부인이 먼저 출발하고, 고사장은 언제 떠났나요?"
추경감이 지포를 철거덕거렸다. 좀체 불이 켜지지 않았다.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기도 싫어
나는 땅바닥에서 자고 희주는 침대 아닌 딴 곳에서 잤는데 눈을떠보니까 그 원수는 없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시계를 보니까 7시도 안 되었더군요. 나는 침대에 올라
가서 잠을 더 자다가 식당으로 내려가 더덕구이로 아침을
먹었죠. 그리고는 자동차에 기름을 가득 넣은 뒤 출발했죠, 이거 다 확인해 본 것 아니오?"
"그때가 몇시쯤이었나요?"
"10시반? 11시? 잘 모르겠는데요."
"아무튼 부인은 그 길로 서울에 돌아온 뒤 몇 시간만에 피살되었습니다.
누가 뒤쫓아와서 죽였는지도 모르죠." 강형사가 다시 고사장의 약을 올렸다.
"이거 보십시오, 형사 나리들. 직업상으로 남을 의심하는 버릇이 몸에 배었는지는
모르시만 분명히 당신들은 헛짚은 거요.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난 아닙니다.
아까 나보고 뒤쫓아와 죽이지 않았느냐고 아이큐 한 자리수 같은 말씀 하셨는데,
그래 가지고 범인 잡겠수?
여보슈, 나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마누라와 좀 다퉜다고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일
것 같습니까? 내가 그렇게 멍청한 놈으로 보입니까? 자,
나 일 좀 보게 이만 끝낼까요?
그 와이셔츠는 내 것이 분명하지만 난 아녜요! 아시겠어요들."
"한 가지만 더 묻고 끝내겠습니다." 추경감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대관령에서 왜 다투었습니까?"
"그야."
고사장은 말을 하려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나요?" 강형사가 다시 빈정거렸다.
"치사하게 남의 침실 이야기까지 듣겠다 이거죠. 뭐 이야기하라면 못한 것도 없어요. 그 여자는."
고봉식 사장은 이 지경까지 와서 못할 이야기가 뭐 있느냐는 듯 말을 계속했다.
"그 여자는 고집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습
니다. 그 알량한 자존심은 남편과 함께 이불 속에 들어가서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날 대관령에 도착한 날 밤
."
설희주와 고사장은 별로 다정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함께 여행을 나서 휴양지에
왔다는 기분으로 다소 마음이 풀려있었다.
호텔 라운지에서 포도주와 함께 저녁을 먹은 두 사람은
적당히 피곤한 기분으로 호텔 침실로 들어갔다.
"먼저 샤워하세요."
설희주가 고봉식의 점퍼를 받아 걸면서 말했다.
"아냐, 희주가 먼저 해. 난 한잔 더 마실 거야."
고봉식은 들고 온 가방에서 작은 양주병을 꺼내더니 옆방에 있는 간이 바아로 갔다.
호텔의 스위트 룸이나 딜럭스룸 스타일로 된 이곳에는 부속실이나 바아 응접실 같은 것도
붙어 있었다.
고봉식이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너댓 잔 마신 뒤에 설희주가 욕실에서 나왔다.
욕실에서 갓나오는 여자는 언제나 그렇듯이 상기된 뺨과 신선한 피부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타올만 걸치고 나온 설희주가 대형 거울 앞에서 하늘하늘
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있는 모습을 고봉식은 옆방에서 열린 문으로 곁눈질하고 있었다.
허리에 감고 있던 대형 타올을 스르르 발목으로 풀어 내리자 눈부신 그녀의 나신이 전개되었다.
고봉식은 숨을 멈추고 그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 여자들의 단점인 짧은 다리와 처진 히프란 설희주의 나신에서는 흔적을 볼 수 없었다.
가늘고 나긋한 목과 작은 어깨, 약간 굽은 듯한 등의 곡선이 허리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는가
하면 육중한 히프가 흐르는 선을 받치고 있었다.
뒷모습을 보이며 옷을 갈아입고 있는 설희주가 처음 보는
매혹의 여자 같다고 고봉식은 느끼고 있있다.
얇은 잠옷으로 갈아입은 설희주가 뒤로 돌아섰다.
뒷모습 못지않게 잠옷 모습의 설희주는 매력적이었다.
물에 젖은 채 풀어 늘어뜨린 긴 머리칼이 관능적이었다.
풍부한 앞가슴이 걸을 때마다 얇은 잠옷 섶을 헤치고 나올듯이 출렁거렸다.
고봉식은 먹던 잔을 내려놓고 침실로 들어섰다.
눈이 게슴치레하게 풀렸다. 탐욕의 시선을 설희주의 전신에 뜨겁게 퍼부었다.
고봉식이 슬그머니 다가가 희주의 허리를 껴안았다.
"갑자기 왜 이래요. 아유, 술 냄새. 샤워 좀 해요."
설희주는 감겨오는 고봉식의 팔을 풀어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알았어. 샤워하고 올 테니까."
고봉식은 어린아이처럼 말을 잘 들었다. 그는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라도 하듯 욕실로 들어가 옷을 훌훌 벗어던진
뒤 폭포같은 물줄기를 머리에 퍼부었다.
전신에 물벼락을 맞듯 하고는 타올로 대강 전신을 훔치고 침실로 급히 나왔다.
그 동안에 설희주는 트윈 침대의 한 곳에 얌전히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고봉식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벌거벗은 채 뜨거운 몸으로 설희주의 침대로 뛰어들었다.
그는 시트를 걷어내고 우악스럽게 설희주의 잠옷을 벗겨냈다
"이거 왜 이래요?"
그러나 고봉식의 서두는 몸짓에 비해 설희주는 너무나 싸늘했다.
그녀는 몸을 움츠린 채 고봉식을 받아들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몇 달 동안 같이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신혼 1년을 어영부영 보낸 뒤에 그들의 마음은 멀어지고 따라서 육체도 멀어지고 있었다.
매일처럼 대화를 나누던 육체는 1주일에 한번으로 뜸해지다가 다음엔 한 달에 한번,
그 다음엔 거의 끊어지고 말았다.
그들의 육체는 그들의 마음처럼 차차 무관심과 때로는 증오로까지 변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참지 못한 고봉식이 이성을 잃고 덤벼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싸늘하게 얼어붙은 설희주의 육체는 좀체 고봉식
의 뜨거운 몸을 받아들일 태세를 갖추지 않았다.
고봉식은 일방적으로 설희주의 잠옷을 뜯어내다시피 벗기고는 그녀 위에 올라갔다.
"설희주, 넌 아직도 내 아내야. 아내는 남편의 몸을 받아들일 의무가 있어!"
고봉식이 식어 있는 설희주의 몸을 깔아뭉개며 말했다.
"이거."
꼭 붙이고 있는 설희주의 허벅지를 억지로 헤집으며 고봉식이 신음처럼 말했다.
설희주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가만히 있었다.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겨 두었다. 고봉식은 열심히 그녀의 몸 위에서 땀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무기력한 상
대를 공격하는 배고픈 사자에 불과했다.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는,
생명 없는 물체와 사랑을 하는것 같았다.
"더럽고 비겁한 남자."
고봉식이 절정에 이르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몸을 팽
개쳐두었던 설희주가 냉소와 함께 던진 말이었다.
"뭐야?"
설희주는 고봉식의 밑에 깔린 채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동물적인 포만감으로 차 있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 역겹고
치사해보였다. 욕설을 뱉은 설희주는 그것만으로는 참을수 없었다.
그녀는 느글느글하고 더러운 사나이의 얼굴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여자의 감정은 손톱만치도 생각치 않고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제멋대로 동물적 욕심을
채우고 만족해 하는 모습을 도저히 참을 길이 없었다.
처음부터 고봉식을 사랑하거나 존경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
다.
설희주는 고봉식에게 접근해 그의 관심을 끌어들이고사랑 놀음을 하고 결혼에까지 이른
것이 완전한 자의적인 일로만 생각지는 않았다. 목적이 있는 사랑, 목적을 달성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냐고 오민수가 타이를
때,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강력하게 부인하지 못했다.
결혼한 뒤 그녀는 한번도 고봉식을 인격적인 파트너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와 섹스를 하면서도 더러운 일을 참는다는 기분만 가지고 있있다.
그러한 감정이 마침내 폭발점에 이른 것이다.
"퉤!"
설희주는 아직 덮쳐 누르고 있는 고봉식의 얼굴에 침을 뱉고는 얼굴을 돌려 버렸다.
"이년이 미쳤구나!"
갑자기 최대의 모욕을 당한 고봉식은 금방 얼굴에 핏줄이
섰다. 눈이 사납게 치껴 떠지면서 손으로 설희주의 뺨을 때렸다.
"이게 남편 얼굴에 침을 뱉어? 하늘 같은 남편을 뭘로 생
각하는 거야? 운동권 출신 계집년들이 독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너 같은 년 첨 보겠다. 이년이 내가 더러우면 아
예 벌리고 드러눕지를 말지! 더러운 년! 퉤퉤!"
고봉식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닥치는 대로 욕을 퍼붓고 얼굴을 때리며 날뛰었다.
수십 차례 따귀를 얻어맞은 설희주는 벌떡 일어나 벗은 채로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문을 잠근 뒤 혼자 거울 앞에 섰다 얼굴과 목에 매서운 고봉식의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제 갓 서른. 발랄한 육체와 꽃 같은 나이가 서러웠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의 나신을 바라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그 자리에 털석 주저앉았다.
그녀는 그날 밤을 뜬눈으로 새우 다시피 하고 날이 밝자마자 혼자 서울로 돌아와
버렸던 것이다.
고사장의 그날 밤 이야기는 거의 틀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곳을 출발한 시간도 강형사가 조사한 것과 일치되었다.
"하지만 이 피묻은 와이셔츠의 수수께끼는 아직 풀린 것이 아닙니다."
강형사가 다시 못을 박아두려는 듯이 말했다
"도대체 그 와이셔츠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고봉식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피살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곳 침대 밑에 말입니다." 추경감이 느릿하게 대답해 주었다.
"좀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와이셔츠 바람으로 희주를 찔러 죽인 뒤 피묻은 그 옷을 벗어
침대 밑에 넣어두는 멍청한 짓을 할 것 같습니까? 당신들이 정말 형사는 형사요?"
고봉식의 말이 그럴 듯하게 들렸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누군가가 고봉식 사장이 범인이라고
꾸민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죠. 그러면 자신은 혐의권에서 벗어나니까요."
"뮈요?"
강형사의 억측에 그는 정말 화를 벌컥 냈다.
그러나 강형사의 말이 꼭 억측이라고만 볼 수 없다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사람을 죽인 뒤 피묻은 자기 옷을 현장에 감추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강형사 말처럼 자기를 범인으로 몰려는 진짜 범인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방법일 수 있다.
추경감과 강형사는 별수 없이 고봉식의 사무실을 나오고 말았다.
추경감은 시경으로 돌아가고 강형사는 그냥 돌아갈 수 없다고 고집하며 혼자 고봉식의
막내동생인 고봉길을 찾아나섰다.
고봉길은 밤에만 여는 영동 서초동의 어느 살롱에서 찾아 냈다.
침침하고 텅빈 좁은 무대 위에서 기타 연습을 하고 있었다.
밤이면 휘황한 각종 조명이 날뛰고 술 냄새, 담배 냄새,
여자의 화장품 냄새와 육욕이 얼룩져 광란의 무대가 되던 살롱 안도 대낮에는 박쥐가
나올 듯 음산하고 침침했다.
"이거 강형사가 여기를 다 찾아오고. 역시 형사는 형사시 군요."
고봉길이 강형사에게 딱딱한 연주용 의자를 권하며 인사 말을 이렇게 했다.
"재벌가의 막내 도련님이 왜 이렇게 구차한 아르바이트를 하는 거죠?"
강형사가 담배를 꺼내 물고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흥! 재벌가라구요? 하하하, 그래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어디에서 태어났다면
그것으로 그 사람의 운명이 정해지는 그런 게 난 제일 싫습니다.
아니, 그보다 명왕성 그룹인가 뭔가 하는 그 거추장스런 형용사가 나한테는 안
맞는단 말입니다.
형수, 불쌍한 우리 형수 설희주씨도 안 맞는 집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비극이 일어난 겁니다.
근데 범인은 어떻게 되었나요? 잡았나요? 아니지. 대한민국 형사들이 범인 잡는 것 못봤으니까.
누가 제보나 해준다면 모를까."
강형사는 고봉길이 대낮에 취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환각제 같은 것을 먹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의 말꼬리를 문제삼지 않았다.
"한 가지만 물어보겠어요. 사건 당시 혹시 비명 소리 들은 시간을 착각한 것 아닐까요?"
"누가 말입니까?"
"당신 말이요."
"천만에요. 틀림없이 그 시간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설희주씨는 당신이 발견한 그 순간, 즉 비명을
듣고 2층서 뛰어내려온 그 시간보다 두 시간 전에 죽은 걸로 판명이 되었거든."
"내가 착오가 있어도 2, 3분이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뭘 잘못 알고 계시군요. 2시간 전에 죽었느니 어쩌느니,
시체의 경직도로 봐서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리 너무 들어
귀가 따가워요. 당신네들 그 과학수사라는 것 믿을 수 있는 거요?"
고봉길이 다시 빗나가기 시작했다.
"고봉길씨는 비명을 들은 시간에 대해 틀림없다고 확신하는 근거가 있나요?"
"노래 연습 하다가 방송국 쇼프로 피디한데 전화 걸기로 되어있었거든요.
솔직이 피디한데 아쉬운 부탁 하는 무명 가수가 시간 약속을 어떻게 어기겠습니가?
노래 연습을 하면서도 나의 모든 신경은 전화기와 시계에 가 있있거든요."
그럴 때는 고봉길의 말에 조리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그날 방송국 피디한데 전화했나요?" 강형사가 물었다.
"전화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마슈. 집안에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쓰러진 사람이 있는데
전화할 경황이 어디 있어요. 아니, 전화를 하기는 했지. 경찰서에 말이요.
당신 혹시 아이큐 두 자리 수 아니오?"
고봉길이 손가락으로 강형사의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의 웃음 띤 얼굴은 바보스러웠고 눈은 촛점을 잃고 있었다.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러는데 모르는 것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강형사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말해 봐요."
고봉길은 기타의 둔탁한 음을 크게 한번 퉁기면서 대답했다.
"설희주씨가 죽음으로써 명왕성 그룹 안에서 가장 득을
보는사람은 누굽니까? 뭐 꼭 대답 안 해도 됩니다."
"하하하, 득을 볼 사람? 하하하, 많지요, 많아."
고봉길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득을 볼 사람이라기보다는 좋아할 사람이란 말이 옳아요. 좋아할 사람, 그렇지 그렇고말고."
고봉길은 아주 그럴 듯하다는 듯이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몇번이나 감탄스러워했다.
"그래 좋아할 사람이라도 좋아요. 그게 누굽니까?" 강형사가 긴장하며 물었다.
"우선 우리 형이 좋아하겠지요. 그 지긋지긋한 마누라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오매불망하는 애인 경숙이와 결혼할 수도있고."
"경숙이 누구요?"
"명왕성 자동차 사장 비서지요. 꼭 걔가 아니더라도 몸매 잘 생기고 잘 길들인
치와와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아 즐길 수도 있겠지요.
그 다음 틈만 나면 응얼거리는 우리 큰누나.
눈에 가시 같은 올케가 없어지면 얼마나 속 시원하겠소.
다음 우리 알량한 매형 정정필 비서실장님.
또 늘 껄끄럽게 생각하는 젊은 시어머니 최화정 여사, 며느리라기보다는 같은 또래의 여자로서,
명왕성가에 들어온 여자로서 라이벌이 하나 없어지는 셈이니까. 또, 또 있지요.
명왕성 그룹의 총수 우리 아버님. 툭하면 재벌 그룹의 정의를 내세우는 설익은 며느리의
충고를 듣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뿐 아닙니다.
촌스럽고 천한 행동으로 상류 집안의 체신을 망가뜨린다고 늘 걱정을 하는우리 둘째 누나 영혜.
그 촌닭이 없어지면 집안 망신시킬 일 없으니 마음 편 하겠지요."
"고봉길씨는 어떻소?"
듣고 있던 강형사가 불쑥 질문을 했다.
"나요? 하하하."
그는 기타를 퉁겨 요란한 웃음 소리 같은 걸 냈다.
"내 마음은 강형사님이 알아맞혀 보기로 하지요."
"그러고 보면 온 식구가 설희주를 좋아하지 않았군요."
"그 외에도 또 있을 겁니다. 하지만 슬퍼할 사람도 있을걸요."
"그게 누구요? 고봉길씨?"
"오민수!"
고봉길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민수? 그가 누구요?"
"오민수만은 슬퍼할 겁니다. 이 집에 시집 온 것부터 인정 않으려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한번 찾아보시지요. 그도 명왕성 그룹의 당당한 식구니까요. 자, 그럼 자리 좀 비켜 줄까요?
나도 이제 밥벌이 연습 좀 해야겠으니까."
고봉길은 강형사의 존재를 그때부터 무시하고 노래 연습을시작했다.
강형사는 하는 수 없이 그 침침하고 기분나쁜 살롱을 나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