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특집 단상>
빨치산의 최후, 변산반도의 마지막 총성
국립공원 변산반도
67년 전인 1953년 7월 27일, 3년간의 동족상잔에 종지부를 찍는 정전협정이 발효되지만, 이 땅의 전쟁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괴뢰군이 퇴각할 때 북으로 돌아가지 못한 잔류 인민군과 지리산 일대에 남아있던 옛 빨치산 등 2만여 명의 공비는 李鉉相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남부군’을 조직하여 지리산 덕유산 태백산 일대를 중심으로 게릴라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에 국군은 군경합동으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한다. 戰史에는 1. 2. 3차에 걸친 3년여의 토벌작전으로 은신 공비들을 거의 궤멸시킨 끝에 1956년 12월31일 작전을 종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녘땅 곳곳으로 흩어진 빨치산 잔당
51년부터 시작된 토벌작전으로 1만9,000여명이 제거되고 남부군을 이끌던 이현상 총사령관마저 53년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사살되자 잔당 1,000여명은 소부대로 나뉘어 지리산을 벗어났다.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이 이끈 200여명은 광양 백운산으로, 전남 총사령관 김선우는 영광 불감산으로, 충남도당 위원장 남충렬은 200여명과 함께 대둔산으로,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 등 300여명은 회문산으로, 그리고 경남도당 부위원장 김의창 등 200여명은 신불산으로 흩어졌다.
전사에는 특이한 빨치산이 하나 기록돼있다. 임실을 중심으로 남원과 회문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외팔이’ 이상윤이다. 그는 중국 팔로군 출신으로 북한군 대위였다. 판단력도 있고 리더십도 갖춘 간부였다. 어느 날 사제 수류탄을 실험하다 부상을 입고 한쪽 팔을 잘라냈다. 그는 한쪽 팔을 가지고도 백발백중할 만큼 사격술이 뛰어났다고 한다.
이상윤이 이끄는 잔당 ‘외팔이 부대’는 낙동강전투에서 밀려 퇴각하던 인민군 중 일부가 더 이상의 북상을 포기하며 활동한 부대로 누구도 토벌하지 못할 만큼 악랄하다고 소문나 있었다. 그도 53년 12월 25일 임실군 금당리 부근에서 보급투쟁을 하다 토벌대에 의해 사살됐다. <이상 네이버지식백과 자료 참조>
또 하나의 외팔이
잔사나 여타 기록에 나오지 않는 외팔이 빨치산이 또 하나 있다. 56년 5월 전북 부안군 변산의 구렁이골에서 사살된 장윤형이다. 이현상의 신임을 받던 장윤형은 이현상이 빗점골에서 사살되자 수하 20여명을 데리고 지리산을 벗어났다. 그때 왼팔에 총상을 입었는데 적절한 치료를 하지 못해 총상부위가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자 급기야 붕대로 동여매고 마취도 없이 톱으로 어깨 밑에서부터 잘라냈다고 한다.
그도 사격명수였다. 사격술이 워낙 뛰어나 토벌군은 그의 은신처를 짐작하면서도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한다. 장윤형이 야간이동으로 장성 정읍을 지나 숨어든 곳은 그가 낳고 자란 부안의 변산이었다. 변산은 산이 높지는 않지만 여기저기 골이 깊은데다 산자락에 민가가 많아 낮엔 은신하고 밤엔 약탈하기에 좋은 지형이다.
그는 내소사에서 가까운 구렁이골에 비트(은거지)를 만들고 밤이 깊어지면 석포리 원암리 진서리를 휘저으며 보급투쟁을 벌였다. 그 일대는 그의 홀어머니가 당시도 살고 있던 터라 손바닥처럼 잘 아는 곳이어서 군경의 추적을 교묘히 따돌릴 수 있었다.
그가 밤이면 우리 집에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왔다. 제는 사립문 밖에서 망을 보고 수하만 들여보내 마루 밑, 장독대를 샅샅이 뒤져 짊어지고 갈만큼만 가지고 갔다. 수하를 인솔하고 온 장윤형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우리 집의 밭뙈기를 경작해 먹고살던 도지였다. 아비 없이 홀어머니와 살며 고생한다며 도와줬던 것인데 손에 총칼 쥐었다고 찾아와 협박하는 빨갱이가 된 것이다.
그러다 그의 수하들은 하나 둘 사살되거나 도주하거나 자수해 남은 숫자가 6~7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던 오월 어느 날, 산 너머에서 총소리가 콩 볶듯 들려왔다. 그리고 그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운동장에 가마니로 덮어놓은 죽음들이 누워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외팔이 장윤형이었다.
빨치산의 신분증 숟가락
1956년 5월 5일이다.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그 연월일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어린이 날이었고 해공 신익희 선생이 호남선 익산역(당시 이리역)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운명한 해였다.
그보다는 꼭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달리 있다. 전 날, 그러니까 어린이 날 전날인 5월4일, 경찰서에서 어머니를 연행해 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휴전 이후 경찰은 공비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숱한 양민을 붙잡아다 학대하고 괴롭혔다. 외팔이의 자수한 수하 하나가 어느 집에서 가장 많이 얻어왔느냐는 심문에 우리 집이라고 토설한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형언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시고 1주일 만에 풀려나셨지만 이후 비만 오면 온 뼈마디가 쑤시고 결려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아버지께서는 지폐를 궤짝에 담아가지고 가서 건네고 어머니를 빼내 오셨다 한다.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필자가 장성한 후에 그 고문 경찰을 이리저리 수배했더니 오래 전에 병들어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와 시쳇말로 원한을 갚지 못했다.
외팔이 장윤형의 노모가 아들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울부짖다가 너덜너덜해진 상의 주머니에서 숟가락 하나를 발견하고는 까무러쳤다고 한다. 숟가락은 빨치산임을 증명하는 증표였다. ‘총 맞아 죽거나, 얼어 죽거나, 굶어죽거나’ 세 가지 죽음밖에 없다는 빨치산의 세계에서 숟가락은 먹고 사는 유일한 도구였기에 신분증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그 이후 빨치산의 준동이나 행패가 없어진 것을 보면 필자가 기억하는 1956년 5월5일은 이 땅에서 총성이 멎은 마지막 날, 평화의 첫날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곳은 擇里志에 나오는 死居長城生居扶安의 변산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