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왕씨 족보
개성 왕씨(開城王氏)는 고려의 왕족으로 시조는 고려 왕건의 증조인 왕국조(王國祖)이다.
후에 그는 원덕대왕(元德大王)에 추존되었다. 개성 왕씨는 송악(松嶽)의 호족 집안으로서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면서 왕씨 성을 개창했다고 볼 수 있다.
개성 왕씨는 왕건의 4대조를 시조로 삼고 있으나, 세대를 헤아릴 때는 태조 왕건을 1세로 간주하고 있다.
이는 제왕은 만백성의 어버이이기 때문에 한 씨족의 시조가 될 수 없다는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라는 개념에서 유래된다.
이러한 관념은 개성 왕씨 파조들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백과사전에서...
개성왕씨 세보에 유일하게 나주출신 장화왕후 유적비가 등재되어 있어
놀라면서도 자랑스러웠다.
고려 태조의 2번째 부인이면서 장태자를 낳은 여인이 아닌가!!!
순간! 나도 모르게 족보를 가슴에 안으니 후손께서 빙그시 웃는다..
위의 자료는 나주시청 입구에 최초에 세워진 유적비이며 지금은 새롭게 조성된 공원을
(본메뉴 14번 왕건과 장화왕후 로맨스가 배어있는 羅州 (완사천) 크릭하면
유적비문 해설 볼 수있습니다..
개성 왕씨(開城 王氏)는 모두 고려 태조 왕건의 후손으로 개성 왕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분파의 파조는 다음과 같다.
- 동양군파(東陽君派)의 파조는 제1대 고려 태조(太祖)의 제15왕자 원(垣)이며,
- 평양공파(平壤公派)의 파조는 제8대 고려 현종(顯宗)의 제4왕자 기(基)이며,
- 양양공파(襄陽公派)의 파조는 제20대 고려 신종(神宗)의 제2왕자 서(恕)이며,
- 안경공파(安慶公派)의 파조는 제23대 고려 고종(高宗)의 제2왕자 창(滄)이며,
- 시중공파(侍中公派)의 파조는 제30대 충정왕(忠定王)의 제1왕자 제(濟)이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개성왕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동양군파 파조인 효은태자 왕원(王垣)은 고려 태조의 15번째 아들로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시중공파의 파조인 시중공 왕제(王濟)도 고려 태조로부터 16세손인 충정왕의 맏아들로 역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인물이다.
안경공파의 안경공 왕창(王滄)도 10세손 고려 고종의 둘째아들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양양공파의 왕서(王恕)도 8세 고려 신종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평양공파 평양공 왕기(王基)는 3세손인 고려 현종의 넷째 아들로 역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익히 알려진 대로 고려 태조는 결혼정책으로 지방 호족들과 연대감을 유지하며 중앙집권적 권력 기반을 다졌다.
부인이 29명이었고, 성원록에 이름이 오른 아들이 모두 20명에 이른다.
이 20명의 아들들로부터 고려 왕조 476년 동안 왕씨 후손이 생산됐다면 그 인구가 얼마나 불어났을 지 짐작할만하다.
무신정권이 들어서는 과정에서의 격변과 원나라의 내정간섭 과정에서 권력의 부침이 있었다
(백과사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