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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내사산 우백호 인왕산 서쪽 안산 정상이다.
개경에서 천도를 거론할 때 꼭 도읍지 후보지로 등장하는 안산이다.
태종의 1급 참모 하륜은 논산 계룡산 일대에서 조선의 도읍지 신도안 공사를 중지시킨다.
이곳 안산 정상에 올라 서쪽의 넓은 벌판을 풍수상의 이점을 내세워 도읍지 최적지로 주장한다.
하륜은 정도전과 무학대사 등의 한양 정도 주장에 밀려 뜻을 접어야 했다.
2차 왕자의 난으로 왕위에 오른 태종이 한양 재천도를 추진할 때 그는 안산 자락 서쪽 벌판(서교)을
또다시 1급 도읍지 후보지로 거듭 주장하나 또다시 실패한다.
안산 정상에서 바라 본 도성 서쪽 밖으로 전개된 한강변 큰 도시이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펼처진 오늘날 한양보다는 한강을 가깝게 두고 드넓게 전개된 도시는 시원해 보였다.
강남 쪽에서 바라 본 안산 자락 밑으로 전개된 서쪽 벌판의 한강변 도시의 모습이다.
하륜이 목숨 걸고 주장한 안산 밑의 서쪽 벌판(서교)이 지니고 있는 다양함과 이점이 눈에 들었다.
양화진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 양화진은 한양에서 목구멍(인후)에 해당하는 주요 길목에 해당한다.
"내가 준용이를 만나 볼 것이다!
이 놈들이 준용이를 죽이는 일을 음모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이냐?"
1895년 서울 마포나루 배 앞에서 흥선대원군이 군줄과 실랑이를 하고 있다.
종손 이준용이 강화도의 교동부에 유배 가기 위해 배를 탈때 마포나루로 달려 간 것이다.
공덕리 별장 아소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한걸음에 달려 간 마포나루였다.
이 때 군졸들은 대원군을 강제로 연행하여 공덕리 별장 아소정에 감금시킨다.
"이 놈들아! 이 못된 놈들아!
대원군은 땅을 치고 통곡을 하였다.
강화 교동으로 귀양가는 이준용을 살리기 위해 마포항까지 달려간 대원군의 모습이다.
"가리다.내 몸소 준용이를 만나러 강화섬으로 가리다!"
대원군의 피눈물나는 몸부림은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그는 천하장안의 인도를 받으며 운현궁을 떠났다.
이들이 마포나루에서 강화섬으로 떠나는 배에 오를 때였다.
"멈추어라!"
순검들이 달려와 대원군을 강제로 끌어내렸다.
애손을 만나고자 했던 대원군의 꿈도 이렇게 물거품이 되고만다.
뿐만아니었다.이날 이후 대원군은 마포에 있는 공덕리 별장에 연금된다.
그를 감시하는 순검들이 배치된 것은 말할 나위없다.
그러나 이 무슨 소용이더냐.
별장에 걸려있는 현판은 아소정(我笑亭).
그런데도 여든을 바라보는 노정치가 흥선대원군은 웃을 수 없었다.
-소설 <조선왕조 500년>에서-
대원군이 세력을 잃고 갑오개혁과 동학혁명이 나는 등 뒤숭숭할 때 고종을 죽이고 대원군의 손자(큰아들의 아들)
이준용을 받들자는 역적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역적, 역모사건으로 다섯 명이 사형으로 죽임을 당했다.
열 명은 종신형이었다. 이준용은 고종의 조카가 된다고 해서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가서 평생 살게 되었다.
대원군은 그 손자와 함께 강화도로 가겠다고 나섰다. 실제로 마포에 나가서 한강에 배를 띄워 떠날 작정이었다.
강화도까지 말이다. 그날 마포나루에서 대원군은 배에 타려고 하고 순검들은 못 타게 말리다
그만 떼밀리어 한강에 빠지고 말았다고 한다.
4월에 이르러 국태공(國太公)의 처소에는 커다란 불운(不運)이 닥쳐왔다.
국태공의 손자이자 왕의 조카인 이준용(李埈鎔)이 동학(東學)과 관련하여 왕을 폐위하고
다른 정권을 세우려고 하였다는 죄목(罪目)으로 기소되었다.
이준용이 그와 같은 역모(逆謀)에 주동 인물이 되었는지 또는 그가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동조적(同調的)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증거도 제시되지 않았으나 어쨌든 그와 같은 사건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그는 강화도에서도 더 떨어진 교동도(喬桐島)로
귀양살이를 떠나기에 충분하였다. 후일 그는 고종이 친정에 나서서 자신과 대립하게 되자
고종을 폐하고 장남 재황을 옹립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그의 서장자인 재선은 역모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이준용은 국왕의 특사로 강화 교동부(喬桐府)에 10년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
그 해 8월에 특별 사면으로 풀려 나왔다. 1896년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그가 출국한 뒤 귀국이 허락되지 않자 1897년 일본을 떠나 유럽의 각지를 시찰하고
1899년에 일본으로 돌아와 지바현에서 한거(閑居)하고 있었다.
1907년 고종이 태자에게 양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였을 때에 귀국하였다.
1908년 상공근무사(商工勤務社)에 총 고문을 역임하였고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
이준공(李埈公)의 칭호를 받았다. 말년에 친일행각은 두드러졌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오른 뒤 육군참장이 되었다.
1899년 4월 장윤상 권형태 신현표 등이 황제를 폐하고 이준용을 초대 대통령으로
앉힌다는 음모사건도 벌이지는 등 이준용은 <고종 폐위 음모> 사건에 여러 번 거론된다.
1881년 8월 흥선대원군을 지지하는 인사들이 척사론자들과 제휴하여 고종을 폐위하고
대원군의 맏아들 이재선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를 기도하는 등
흥선대원군은 여러차례 정권재창출을 위한 '역모'를 꾀한다.
흥선대원군의 별서 아소정이 있는 이 근처에 함부로 드나들지 말라는 금표가 세워져있다.
서울 마포구 염리동 서울디자인고등학교이다.옛 동도공업고등학교가 그렇게 개명된 것이다.
동도중학교는 옛 이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한이 서린 곳이다.
1895년 손자 이준용(李埈鎔)이 역모사건으로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가게 되자 그 자신이 머물게 된 곳이다.
어느 날 이른 아침 대원군은 몰래 운현궁을 빠져 나와 준용을 따라가 고생을 같이 하고 싶은 마음에 마포나루로 나와
배를 탔으나 뒤늦게 나타난 호위원들에 의해 제지를 당한 후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대원군은 자신이 거처하는 집 이름을 아소당이라 짓고 스스로 자신의 무상한 삶을 비웃었다.
서울디자인고등학교 정문 옆에 있는 아소정(俄笑亭) 표석이다.
“나는 웃는다. 아소(俄笑)라. 과연 왜 웃는가?”
이런 생각을 일으키는 아소정(俄笑亭)이다.
대원군이 살던 운현궁에는 아재당(俄在堂)이 있었다.
“나는 있다. 아재(俄在)라! 과연 그의 있다는 말은 무엇인가?”
흥선대원군은 당당하게 아소(俄笑), 아재(俄在)라고 하였다.
지금 이 두 아소정과 아재당이 없는 것이 아쉽다.
아소정은 규모가 99간으로 1894년부터 이곳에 대원군이 거주하였으며,
1902년 2월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소정 울안에 산소를 썼으므로
이 일대를 한때 국태공원이라 하였다
봉원사 대방(큰방) 큰염불당이다.
봉원사(奉元寺)라는 한문 현판이 걸려 있다.
대개 절의 이름을 써넣은 큰 현판은 절의 입구, 주로 일주문 등에 걸어 놓는다.
봉원사에는 일주문이 없다.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한 대방(큰방) 건물에 봉원사라는 현판을 걸어 놓았다.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당(我笑堂)을 봉원사로 옮겨 대방(큰방)으로 쓰이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파란만장한 사연을 안고 있는 별장 아소정을 옮겨온 것이다.
아소정은 99칸의 대궐 같은 집이었으나 안채만 봉원사로 축소 이동하였다.
'청련시경(靑蓮詩境)'은 '산호벽루(珊湖碧樓)'와 함께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의 스승인 청나라 대학자 옹방강(翁方綱)의 행서체 현판 친필이다.
무량수각(無量壽閣)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산호벽루(珊湖碧樓)'도 흥선대원군이 그토록 사모하였던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그는 운현궁을 대궐처럼 크게 중창하였을 때 사랑채 노안당 현판도
스승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들어 달았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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