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한국인 비판 [이케하라 마모루]
입으로만 찾는 의리
일본 공무원 사회에서는 뇌물을 받았다가 발각되는 사태가 생기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고리를 끊어 버리는 일이 흔히 나타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굴비 두름처럼 줄줄이 엮여 올라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의리 있는 것일까.
흔히 한국 사람들은 인정 많고 의리 있다는 말을 한다. 사실 나도 그렇게 느낄 때가 많다. 조금 친해지면 '의형제'를 맺자고 제의하는 친구들도 있다. 그래서 국적은 다르지만 나를 깎듯이 '형님'이라고 부른 '동생'이 셋이나 있다. 여담이지만 '형님'이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사람도 있다. 그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배우다. 나 또한 그를 좋아하고 아끼지만 그 친구만큼은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는 한국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록 나이가 들어서 활동이 뜸하지만, 한때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그 친구를 모르면 한국 사람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 그가 일본인, 이른바 '쪽발이'인 나를 형님이라고 부른다면 한국 사람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힐지도 모를 '사건'인 것이다.
물론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내가 전부 동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는 꼬박꼬박 형님, 형님 하다가도 자기 상사 앞에 가면 갑자기 '이케하라 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필요할 때에만 '형님'일 뿐 그렇지 않으면 쳐다보지도 않는다.
일본 사람이 한국에 대해 쓴 책에서 한국 사람들이 유난히 고향을 사랑하고 인정이 많아 지역감정이라는 부작용이 나타난 거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이 유난히 고향을 사랑하고 인정이 많은 듯이 보이는 것은 위험이 닥쳤을 때 빠져 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기 위해서, 비빌 언덕을 미리 준비해 두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까마귀도 손 잡고 같이 가자'는 내용의 일본 동요를 소개했지만, 한국 사람들에겐 그런 정신이 부족하다. 가능하다면 손을 잡고 같이 가는 게 아니라 나 혼자 먼저 뛰쳐나가야 속이 시원하다. 뒤에서 총을 들고 쫓아오는데 나부터 살고 봐야지 다 같이 가려고 우물거리다간 총 맞아 죽기 십상이다.
한국 사회에 유난히 형님 동생이 많고 입만 열면 의리 운운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바꿔 말해서 '가능하면 의리를 지킬 수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일 뿐, 현실에서는 그게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입으로나마 자꾸 의리를 찾는 것이다.
기업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재벌 구조에 대해서는 한국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비판이 많아서 현재 구조조정이니 빅 딜이니 하는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한국 재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뭐니뭐니 해도 '의리'가 없다는 점이다. 잡아먹지 않으면 먹히고 마는 치열한 경쟁 시대에는 의리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렇지는 않다. 한국 재벌이 지금처럼 성장한 것은 순전히 국민의 도움, 정부의 도움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경쟁이 치열하다 해도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 준 은인을 배신한다면 경쟁 때문이 아니라 제풀에 못 이겨 스스로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다.
한번은 어느 가전제품 회사에서 나를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일본에서 다급하게 부품을 수입해야겠으니 도와 달라는 이야기였다. 하도 시일이 촉박하다고 성화를 부려서 왜 그렇게 서두르냐고 물었더니 미국에 수출을 해야 하는데 한국산 부품을 썼다가 클레임이 걸렸다는 것이다. 하자가 있는 부분을 보완해서 납기를 맞추려면 일본 부품을 들여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하루아침에 거래처를 바꿔 버리면 원래 그 회사에 부품을 납품하던 한국 회사는 어떻게 되는가. 조그만 하청업체가 중요한 거래선을 잃었으니 자칫하면 회사가 망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이번 수출 건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청업체를 지원해서 한국 기술을 키워 나갈 생각을 해야지, 미국에서 클레임이 걸렸다고 파트너를 버리고 일본 회사에서 부품을 수입한다면 한국에서는 도대체 누가 기술을 개발한단 말인가.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할 뿐 이후의 먼 미래는 아예 안중에 없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조그만 협력업체를 키워 주는 데 너무 인색하다. 키워 주기는커녕 혹시라도 저놈들이 힘이 세져서 우리를 위협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견제하고 방해하기에 여념이 없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튼튼한 협력업체를 키우는 것이 자기들에게도 더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 정도 안목도 없는 사람들이 한 나라의 경제를 이끌어 간다고 생각하면 실로 한심스럽고 걱정스럽다.
직장인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평생직장의 개념이 무너진다고 하지만 한국의 회사와 일 관계로 접촉하다 보면 5, 6년 이상 한 회사에 진득하게 붙어 있는 직원이 거의 없는 느낌이다. 노동시장 구조가 평생직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는 미국식으로 정착된다면 또 모를까, 아직 그렇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리저리 직장을 옮겨 다니는 것은 개인을 위해서나 회사를 위해서나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없다. 직장을 옮기는 것은 그나마 낫다. 직업 자체를 이것저것 바꾸는 사람을 보면 더욱 불안하다.
한국에서 일을 하다 보면 정말 황당할 때가 있다. 어느 회사에서 줄곧 상대해 온 중견 간부 한 사람이 어느 날 느닷없이 없어져 버린다. 그 사람 왜 안 보이냐고 물어 보면 '퇴사'하였단다. 회사를 그만두려면 자기가 하던 업무를 후임자에게 철저하게 인수인계해 주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그런 과정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몸만 달랑 빠져나가 버린다. 관련 업무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새 파트너를 상대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고충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나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황당한 일이 있다. 어느 날 한 회사에서 사라졌던 사람이 다른 회사 이름이 찍힌 명함을 들고 불쑥 나타나는 것이다. 알고 보면 그는 먼저 다니던 회사에서 몸만 빠져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가 관계를 맺어 온 거래처 명단과 관련 기술, 정보 자료 등을 모조리 가지고 나온 모양이다. 그래 놓고는 회사는 바뀌었지만 사람도 똑같고 하는 일도 똑같으니 예전에 하던 일을 계속하자고 제의한다. 그렇게 회사를 옮기면서 월급과 직위가 얼마나 더 올라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은 두 번 다시 상대하지 않는다. 나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이 그런 인간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면 정신이 나가지 않은 다음에야 어느 누가 그를 상대하려 하겠는가. 결국은 제 손으로 무덤을 파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월급을 10만 원 더 받느냐 덜 받느냐, 부장이라는 직함을 1년 빨리 다느냐 늦게 다느냐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지극히 사소한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태어나 한평생 살아가면서 그렇게 사소한 일에 인간성까지 걸어서야 되겠는가. 개인이든 기업이든 당장의 실리만 생각한다면 의리를 지키는 것이 불리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의리야말로 가장 소중한 재산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