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의 추억
1. 낮선 세상으로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인천으로 나와 공장 생활을 하는 한편,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면서 혹독한 사회를 몸으로 체험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모든 게 낯설고 힘들었지만, 특유의 끈기와 성실함으로 버티어내면서 견디고 있었다. 늘 공부에 목말라하던 나는 틈새를 이용해 동인천 근처에 있는 영, 수 학원에 등록하고 틈틈이 공부하면서 언젠가는 학업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직장을 구한 형님 덕분에 인천 생활을 접고 서울로 오게 되었다. 아무려면 인천보다는 서울이 좀 더 내 꿈을 펼치는 데 낫지 않을까 하는 형님의 권유와 막연한 나의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서울역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물밀 듯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과 자동차의 질주에 놀라고 얼떨떨해졌다. 넓은 서울역 앞 도로 위를 달리는 시발택시와 삼륜 용달차, 그리고 버스들이 줄을 이었다. 아마도 서울의 모든 버스는 서울역을 경유하는 듯했다.
1960년대 이후 서울은 공간적으로도 확장되었지만, 인구도 크게 늘었다.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시골 사람들이 대거 서울로 몰려들었다. 지방의 여유 있는 집안의 자녀들도 주로 교육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 무렵 신문에는 '무작정 상경'이란 말이 등장했는데, 아무런 계획 없이 상경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서울역 광장에는 무작정 상경한 시골 젊은이들이 많이 등장하였으며, 이들은 음식점 종업원, 가정부, 버스 차장 등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였다. 막연한 생각으로 시골에서 짐을 꾸려 상경한 세상 물정 모르는 이들을 반갑게 기다리던 이들은 다름 아닌 소매치기와 인신매매범이었다.
이후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경제개발로 생긴 제조업 일자리에 종사하면서 가족을 이루고 서울에 정착하여 이른바 '한강의 기적'에 밑거름이 되었다.
2. 64번 서울승합 버스를 찾아라
형님이 알려준 대로 서울역에서 뚝섬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사람멀미 차멀미, 어디에서 차를 타는지조차 어리둥절한 나는 물어물어 겨우 버스를 타게 되었다. 뚝섬까지 가는 버스는 64번 입석 버스와 신길동에서 서울역을 경유 뚝섬까지 가는 62번 버스가 있었는데, 무조건 일러준 대로 64번 버스를 타게 되었다.
3. 드디어 만난 뚝섬
64번 서울 시내버스를 타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도시 풍경을 구경하면서 한참 달리다 보니 드디어 성동구 왕십리 쪽으로 접어들었다. 좌측에 한양대학교를 지나니 한강이 나타났고 한강을 이어주는 다리 밑으로 작은 다리가 보였는데, 이곳이 바로 ‘살곶이 다리’였다.
살곶이는 청계천이 한강으로 흘러드는 지금의 성동구 왕십리, 한양대학교에서 내려다보이는 개울 부근이다. 즉 사근동 남쪽에서 성수동으로 건너가는 곳을 말한다. 이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서울 최고(最古)의 다리일 뿐 아니라 세종대에 유명한 건축가인 박자청(朴子靑)과 유연현(柳延顯)의 감독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당시의 뚝섬은 아주 시골스러웠다. 문득 나타난 드넓은 밭, 그리고 우후죽순 공장들과 서민주택, 마치 도시에 홀로 떠있는 외로운 섬처럼 고독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다리를 건너 또 한참을 달리니 구종점 정류장이 나타났다. 주소에 적어준 대로 구종점에서 내려 골목골목을 지나 노룬 산이라는 곳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4. 단칸 5만 원짜리 살고 있던 형님들과 누님이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성수동 노룬산이라는 동네에 5만 원짜리 단칸 셋방에 형님 두 분과 누님, 그리고 내가 살게 되었다. 물론 서울에 와서도 우선 직장을 구해야 했는데, 그 시절에 뚝섬은 완전 공장지대였다. 크고 작은 공장들이 즐비하여 직장을 구하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학업의 꿈을 간직한 채, 열심히 공장 생활을 하면서 나름 의미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형들도 모두 시골에서 꿈을 키우기 위해 올라온 분들이었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무척이나 거칠었지만 나름대로 정도 있었다. 성실하게 일하는 나에게는 늘 친절하게 대해 주었지만 가끔은 일상의 일탈(?)도 함께 하기를 권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그런 것들은 아예 의중에 없었으니 유혹에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 시절, 흔히 있는 일로 시골에서 상경한 공돌이 공순이들이 연애하거나 아니면 진도가 나가면 화양리 뚝방아래 판자촌 방 한 칸을 얻어 동거를 하곤 했다.
5. 뚝섬유원지
뚝섬은 1960년대 한강에서도 여름철에 피서지로 성황을 이루었던 곳이기도 하다.
서울시민들이 피서를 바닷가로 떠날 수 없었던 그 시절, 뚝섬유원지를 찾아 물놀이를 하고 백사장에서 피서를 즐겼다. 1960~1970년대 한강에서 수영할 수 있었던 뚝섬은 여름철에 서울시민들이 갈 수 있는 가장 가깝고 넓은 피서지였다.
뚝섬유원지에서 보트를 대여해 주는 직업이 있었다. 일정액을 지불하면 보트 1대를 빌려주는데, 2~3명이 몇 시간을 타고 놀 수 있었다. 보트를 타고 노를 젓다 보면 강 건너편에 도달할 수 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강남이다.
가톨릭 신자인 나는 일요일이면 가까운 성수동 천주교회에 나갔다. 물론 초등학교 4학년 시절에 고향인 인천 영종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미사 제전때에 신부님 옆에서 시중을 드는 복사를 서게 되었는데, 당시 미국인 사제인 진 야고보 신부님을 보좌하면서 신앙을 키웠다.
성수동 성당에서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그나마 타향의 외로움을 달래곤 했는데, 학생회 회원 중에는 뚝섬유원지에서 보트 대여 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둔 중학교 2학년생이 있었다. 성당 행사가 모두 끝나면 그 친구가 “형, 오늘 유원지 놀러 가지 않으실래요?” 하고 조른다. 물론 유원지에 가면 그 학생의 아버지가 무조건 보트 한 척을 무료로 대여해 주셨다. 우리는 신이 나서 유원지로 갔고 그 학생과 친구, 그리고 나까지 3명이 보트를 타고 유유자적 한강을 노닐었던 추억이 떠오른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보송보송하게 생긴 그 녀석이 나를 무척이나 따르니 나 역시 늘 챙겨주곤 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우리는 성당 교리실에 모여 성탄 카드를 직접 그리고 만들었다. 제법 그림 솜씨가 좋은 나와 몇 명의 학생들이 며칠간의 수고 끝에 만들어진 카드는 성수동 성당 옆 상점들을 돌며 팔았다. 당시 성당에서 구종점으로 가는 도로 양쪽으로는 각종 상점이 늘어서 있었다. 양품점, 구두점, 양장점, 양복점, 음식점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우리가 카드를 내밀면 두 말없이 사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고마우신 분들이다.
서울역은 나에게도 많은 애환을 가져다준 곳이기도 하다. 명절이 되면 수많은 사람이 그곳을 거치면서 고향을 찾았고 나 역시 서울 생활의 첫발을 내딛게 해준 곳이다. 서울 생활은 비록 어렵사리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나에게 꿈을 이루게 해주었고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었다.
금년도 어느 날, 문득 서울역 사진을 찍으러 간 적이 있었다. 서울역사의 모습은 그대로인 듯했으나 주위의 풍경은 많이 바뀌었다. 역사(驛舍) 앞에는 노숙인들의 천국이 되었다. 물론 누가 노숙인이 되고 싶어, 되는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그들의 흐트러진 모습이 외국인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추일까 하는 나만의 씁쓸한 생각을 하면서 돌아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