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江陵 鶴山 金光坪) 이야기
11. 마을의 농악대(農樂隊)
강릉농악 벅구(法鼓) 쟁이 / 무동(舞童)춤 / 열두 발 상모돌리기
우리 동네는 가난한 마을이었지만 언제부터였는지 농악기(風物)를 사들여 농낙대(農樂隊)를 만들었는데 내 어릴 적에도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고 이웃 동네에서도 구경하러 올 정도였다.
풍물 연습은 마을의 가운데이며 비교적 마당이 넓은 우리 집 마당에서 했는데 각각의 장면에 따른 가락을 맞추는 연습을 하였다. 농악대를 이끌어가는 상쇠(上釗)는 눈치도 빠르고 쇠도 잘 쳐야 하는데 재명이 아버님이 10여 년간 하시다가 젊은이한테 넘겼는데 이어받은 것이 만복이형이었다. 만복이형은 어린 나이에 이어받았지만, 워낙 재치가 있어서 지켜보신 어른들이 썩 잘한다고 칭찬을 하였다.
강릉농악은 길을 갈 때 치는 질꼬내기(길군악)에서부터 모판에 씨 뿌리기, 김매기, 벼 베기, 마지막으로 뱃놀이까지의 연희는 장면마다 가락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수없이 반복연습을 하였다.
다른 지방의 농악(경기농악, 영-호남 농악 등)은 주로 개개인의 연기와 농악기 연주자들의 독특한 풍물 춤, 그리고 진(陣)풀이가 주된 연기내용이지만, 강릉농악은 농촌 벼농사와 밭농사의 단계별 과정을 차례에 따라 보여주는 것이 다르다.
그리고 연주하는 쇠의 가락도 다른 지역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후일 알았다.
북과 징은 비교적 쉬워서 박자만 잘 짚으면 상쇠와 눈짓을 주고받으며 쉽게 맞출 수 있지만, 장구는 북편과 채편의 연주기술이 쉽지 않아서 장구재비들은 따로 남아 일대일로 전수(傳授)를 했다.
가락이 대충 맞는다 싶으면 각 과정으로 넘어갈 때 모이고 흩어지고 둥글게 진을 만들었다가 풀어내는 등의 동작과 형태를 수없이 의논하며 맞추어나갔고, 어른들을 모셔다가 보이고 자문(諮問)을 구하기도 했다. 보통 저녁을 먹고 장작을 한 단씩 챙겨서 모이는데 연습을 하다가 어두워지면 마당 한쪽에 화톳불을 피우고 밤이 이슥할 때까지 연습하곤 했다.
풍물단의 구성은 기수(旗手), 날라리(태평소), 꽹과리를 치는 상쇠와 부쇠, 장고 2명, 고수(북) 2~3명, 징잽이 1명, 노인 가면을 쓰고 장죽을 입에 문 잡패 하나가 있고, 전문적인 연희집단으로는 상모를 돌리는 벅구(法鼓) 쟁이와 여성 복색인 무동(舞童)들인데 상모를 돌리는 벅구 쟁이는 손에 소고(小鼓)를 들고 작은 채로 치고, 무동은 붉은 치마에 남색이나 노랑 저고리 차림에 머리에는 색색의 물감으로 물들인 꽃을 단 고깔을 쓰는데 춤사위를 익히고 진풀이 모양과 순서만 이해하면 된다.
상모꾼과 무동은 짝을 맞추어야 하므로 각각 8명씩이니 보통 전체 농악대는 30여 명인데 무동은 직접 여자들이 서기도 하지만 우리 마을은 모두 남자들이 맡았으며, 12발 길이의 상모를 돌리는 12발 상모꾼도 있다. 무동(舞童) 중에서 맨 끝에 서는 애기 무동은 예닐곱 살의 꼬맹이로 세워서 뭇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는 했다.
음력 정월 보름께가 되면 우리 마을의 농악대는 집집 마다 다니면서 지신(地神)밟기를 하였다.
정식 농악경연이 아니니 가벼운 마음으로 신나게 풍물을 울리며 흥을 돋우다가 집집 마다 도는 지신밟기로 이어진다.
집안의 안택(安宅)을 기원하는 지신밟기는 동네에서 제일 먼저 우리 집부터 시작했는데 농악기가 우리 집에 보관되어 있었고 항상 우리 집 마당에서 농악연습을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차례로 마을 집들을 돌고는 이어서 다른 마을로도 다녔는데 걸립(乞粒)을 한다고 했다.
제일 처음 시작하는 우리 집 마당은 이미 마을 사람들로 마당 구석은 물론 사립문 바깥까지 빼곡히 들어차 구경할 준비를 하는데 우리 어머니는 뜨럭에 상을 내다 놓고 쌀을 됫박에다 수북이 넘치게 담아 올려놓고 정한수(井華水) 한 그릇을 옆에다 놓은 다음 촛불도 켜 놓는다. 풍물꾼들은 삽짝 바깥에 모여 섰다가 쇠를 치면서 마당으로 들어와서는 한참 동안 신명나게 논 다음 비손이(축원을 비는 사람)가 소반 앞으로 나와 집안의 안택(安宅)을 빈다.
비손이 만복이형은 맑고 청승맞은 목소리로 고저장단을 맞춰 청산유수 같이 사설을 읊어 나갔다.
사이사이 꽹과리와 사물로 흥을 돋운 다음 사설을 읊고, 또 사물을 울린 다음 사설을 읊고 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는데 어디서 듣고 배웠는지 듣는 사람들마다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갠지갠지갠지 개갱, 개갱개갱 갠지 착.
<우선 큰 소리로 외친다.>
자~~ 이집 성주를 한번 모셔봅시다~~!
<그리고 목소리에 고저장단 가락을 넣어 신명나게 풀어나간다.>
에헤루 지신아, 지신아 밟아밟아 보자~~.
에헤라 지신아, 지신아 모셔모셔 보자~~.
♬ 갠지갠지갠지 개갱, 개갱개갱 갠지 착.
에헤라 지신아, 이 집에 성주를 모셔보자~~.
에헤라 지신아, 성주님네 본향이 어디던고~~.
마당에서 신명나게 놀고 난 다음 만복이형은 재비(도와주는 사람) 서너 명만 데리고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빌었다.
인간 세상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제석(帝釋)님’을 비롯하여 집안의 수호자인 ‘성주(成造)님’,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七星)님’, 부엌 신인 ‘조왕(竈王)님’에다 각종 터주신(地神)인 우물지신, 장독지신, 도장(곳간)지신, 마굿간지신, 정낭(뒷간)지신, 삽짝지신 등은 물론이려니와 객사한 귀신인 ‘객귀(客鬼)’, 억울한 귀신인 ‘영산(靈山)’, 처녀 귀신은 ‘손말명’, 총각 귀신인 ‘몽달’, 자손 없는 귀신인 ‘무사(無嗣)’, 사람 죽은 ‘상문(喪門)’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잡신(雜神)들을 주워섬기며 사설을 읊어대어 구경하는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고는 하였다.
한 집이 끝나고 나면 미리 연락되어있는 다음 집으로 풍물을 치며 가는데 가정 형편에 따라 쌀을 말(斗)에서부터 됫박 혹은 사발에 담아 내놓는 집도 있었고 떡이며 전 등 음식을 내놓는 집도 있었는데 신통찮으면 대충 짧게 놀고는 다음 집으로 가곤 했다. 우리 마을이 끝나면 어른들이 미리 연락하여 풍물단(風物團)이 없는 다른 마을에 가서 빌어주는 ‘걸립(乞粒)’을 다녔다. 어떤 해에는 우리 마을 풍물단이 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여러 마을에서 신청이 들어와 밤늦게까지 마을들을 돌아다니느라 아기 무동은 녹초가 되어 어른들이 업고 다니기도 했다.
한편, 마을 어른들은 지게를 지고 따라다니며 쌀을 거두어 져 날랐는데 어떤 해에는 모아진 쌀이 10여 가마니씩이나 되어서 그 쌀을 팔아 마을의 상여(喪輿)도 바꾸고 풍물 악기도 새것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때에도 타동(他洞)으로 밤길을 다니다 보니 이따금 불량끼가 있는 젊은 놈들이 시비를 걸고는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평안도에서 피란 나온 봉식이 아버지와 6.25때 왼쪽 손목을 잃고 손대신 갈고리를 단 순심이 아버지가 나설라치면 어마뜨거라 줄행랑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