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벨벳혁명의 중심자, 하벨 대통령
1989년 가을, 체코 프라하. 여기저기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 21년 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추구한 ‘프라하의 봄’은 소련군의 무력에 진압됐다. 이후 활동이 금지된 어려운 상황에서 육체노동을 해온 예술가들이 이제 다시 일어선 것이다.
‘노래하는 혁명’이 시작됐다. 한 여가수가 무대에 올랐다. 1968년 그때 가장 인기 높던 가수다. 군중은 열광했다.
하지만 그는 가슴이 벅차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느 소녀가 다가갔다. 꽃다발을 건넸다. ‘잃어버린 햇수만큼’의 꽃이었다.
“고마워요.” 그는 잠긴 목소리로 간신히 말하고는 조용히 노래하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자유롭게 노래하자. 두 번 다시 침묵은 없다.
그보다 10년 전인 1979년 여름, 마흔두 살의 한 극작가가 체코의 교도소 문을 나왔다. 훗날의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이다.
그는 세 차례 체포됐다. 늘 당국의 감시를 받고, 가택수색을 당하고,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공장에서 강제노동도 했다. 어떤 작품도 발표할 수 없었다.
그는 늘 면도기와 칫솔과 치약을 지니고 다녔다. 언제 붙잡혀 가더라도 쓸 수 있기 위해서다.
권력이 그를 노리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진실을 ‘지나치게’ 말하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똘똘 뭉친 체제에 누구나 다 공포를 느끼고 침묵하고 있을 때 그는 말로, 펜으로 ‘왕은 벌거숭이다’라고 계속 진실을 말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일파에서 만파로, 소프트 파워의 위력을 보여 준 하벨 대통령(좌)과 이케다 다이사쿠 SGI 회장.
#
1992년 4월 일본을 방문한 하벨 대통령이 연설했다. 그의 주장은 억압을 받을 때 외치던 말과 똑같았다.
“정치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또 정신적인 것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정치가는 자신의 정치적 운명보다도 세계의 운명을 더욱 깊이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권력을 계속 유지하고자 여러 파벌과 이익을 도모하거나 압력을 행사하기에 급급하기보다는 오히려 시인들처럼 유일한, 게다가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 ‘양심의 소리’ 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주장 때문에 그는 투옥됐고, 이러한 주장 때문에 그는 역사를 움직여 시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끝에 ‘비(非)전문가 대통령’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강연 다음 날, 나는 영빈관에서 그를 만나 뵙고 말했다.
“연설 내용에 전면적으로 찬동합니다. 민중의 행복을 생각하지 않고 보신이나 금전에 얽매이는 ‘프로정치가’ 보다 시민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아마추어 정치가’인 편이 얼마나 좋습니까, 얼마나 청신합니까?”
내가 대통령을 만나게 된 것은 미국 경제학자 갤브레이스 박사의 권유 때문이었다.
대통령은 수줍어하는 듯한 소박한 웃음을 띠었다. 그리고 시종일관 말을 고르듯 정중히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연설은 인간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휴머니즘이라는 그런 나의 사상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지식인이 지구와 세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려고 했습니다.”
지금 사회에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 과 ‘배려’를 무시하고 있다. 특히 자신을 ‘현인’이라고 자부하는 정치가들은 그런 말을 업신여기며 마음속으로 비웃는다.
정신의 수호자인 지식인이 바로 그러한 권력과 싸워야 한다. 거짓 언론, 거짓 정치와 싸워야 한다.
그래서 그는 ‘반정치적인 정치’를 말한다.
“그것은 ‘아래서부터’ 실천하는 정치다. 기계적인 정치가 아니라 인간적인 정치, 강령에 따라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와 발전하는 정치다.”
‘사람의 얼굴’을 한 혁명
옥중생활은 4년에 이르렀다. 자유롭게 쓸 수도 없고 읽을 수도 없었다.
함석의 녹을 벗기고 용접하는 일, 두꺼운 금속판을 달궈 자르는 일, 빨래터에서 시트를 빠는 일, 강추위 속에서 전기공사를 하는 일 등의 강제노역이 할당됐다.
자기 나라에서는 박해와 중상을 받았지만 외국에서는 문학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다. 이 ‘수감자’에게 캐나다와 프랑스의 대학들이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당국도 무시할 수 없게 됐다. 외국의 비판이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석방하고 싶지도 않았다.
‘특별 사면을 청원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회유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에게 스스로 머리를 숙이게 하고 싶었다.
그는 거부했다.
“긍지를 버리느니 살지 않는 게 낫다.”
그는 ‘희망의 힘’을 믿었다.
“희망은 틀림없이 모든 게 잘될 것이라는 낙관이 아닙니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정당한 것은 어디까지나 정당하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이 곧 희망입니다.”
언뜻 보기에 아무리 무력하게 보일지라도 한 인간이 전인격(全人格)을 걸고 진실을 계속 주장하면, 이는 거짓말을 끊임없이 하는 몇 천 명의 말보다도 강하다.
이 진실을 믿는 것이 그의 ‘희망’ 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도 피를 흘리지 않은 ‘조용한 혁명’인 1989년의 ‘벨벳혁명’이 그의 정당함을 증명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일파에서 만파로, 이것이 바로 소프트 파워의 위력이었다.
나는 ‘프라하의 봄’이 일어나기 4년 전(1964년), 이 아름다운 ‘백탑(百塔)의 도시’에서 만난 한 청년을 떠올려 본다.
마침 도쿄올림픽이 열리는 때였다. 쌀쌀한 아침, 프라하 거리를 걸었다. 길 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표정이 거의 없고 무언지 가면을 쓴 것처럼 보였다.
길모퉁이에 올림픽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키가 큰 한 청년이 왔다. 흰 얼굴에 눈동자가 쓸쓸해 보였다.
나는 호주머니에 있는 올림픽 기념주화를 선사했다.
“얼마죠?”
“아니, 선물이니 받아 두세요.”
청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나의 작은 우정이 통했는지 청년의 얼굴이 금세 바뀌었다. 가면 아래에서 소년처럼 천진무구하게 웃는 얼굴이 빛났다.
나는 놀랐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랑에 이토록 굶주렸던가.
‘프라하의 봄’이 ‘인간의 얼굴’을 요구한 것은 당연했다. 밀어붙이는 소련군에게 사람들이 말했다.
“그대의 어머니는 아들인 그대가 무기가 없는 사람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그때 ‘인간의 얼굴’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희망에만 ‘인간의 얼굴’이 있었다. 그 상징으로서 하벨 대통령이 있었다.
‘우익이냐 좌익이냐가 아니라
거짓이냐 진실이냐’ 다
내가 청년을 위해 조언해 달라고 하자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먼저 ‘인간과 인간이 서로 존경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인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인간이라면 함께 이 공통의 세계에서 ‘평화와 조화를 소중히 여기는 것’ 이지요.”
한 말씀 한 말씀이 되새기는 듯한 어조였다. 일본의 정치가에게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인간주의를 우직하게, 성실하게 실천하려다 투옥됐다.
1989년 동유럽혁명을 가리켜 사람들은 대부분 서유럽 자본주의가 동유럽 사회주의를 이긴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본질은 사람들의 삶의 혁명이었다. 인권이 억압받는 사회에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일어선, 사람들의 정신에서 ‘두려움을 몰아낸’ 혁명이었다.
그는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하고 논하는 것 자체가 이전 세기의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문제는 ‘정당하냐 부당하냐? 진실이냐 거짓이냐? 인간이냐 비인간이냐?’라고 말한다.
전 지구적으로 ‘의식혁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번영하는 일본 등의 자본주의가 과연 배려심이 있는 ‘인간의 얼굴’ 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체코 사람들에 비해 지금 어떠한 숭고한 ‘희망’을 가슴에 안고 있는지 말이다.
#
※ 용서와 화해의 철인 지도자 하벨 대통령은 인간다운 사회 건설을 위해 한평생을 헌신해 오다 2011년 12월18일 향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2012. 04) 마이더스 ‘명사칼럼’ 에서
하벨 대통령 (2012.4).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