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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여름집회
하나님의 신성한 건축
4.하나님의 건축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찌니라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털과 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혹 물돼지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출25:1~9)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냥 허공에 계시는 분이 아니고, 성막과 함께 우리에게 오신 분이고 예수와 함께 오시는 분이며 지금은 교회와 함께 오시는 분이고 장차는 신부와 함께 오시는 분이라는 말씀을 드렸다. 이 원칙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방법대로 당신이 지정한 법칙을 따라서 우리에게로 찾아오신다는 뜻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노력은 모두 헛되다.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열심히 찾을수록 더 왜곡되고 간절히 기다릴수록 더욱더 왜곡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다.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이 지시한 땅에서 이루어지지 우리가 좋은 것을 만들어 놓는다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지금 인간의 기준으로, 인간의 생각으로 최선의 궁을 만들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처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이 지정하신 것만 하나님의 거처가 될 수 있다. 교회가 비록 세상에서 볼 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것은 하나님이 거하시기로 지정한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정한 곳에 계시는 분이라는 원칙을 우리는 깊이 인식해야 한다.
왜 예수와 함께 오셨던가? 그것이 지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과 함께 오신다는 뜻이다. 그냥 아무데서나 오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늘 우리는 건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 드렸다. 건축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우리는 어떻게 그 건축 안으로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다.
하나님의 건축은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의 중심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더라도 건축을 통해서 건축 안에 임재하시고, 활동하실 때도 건축을 통해서 활동한다는 뜻이다. 출애굽기에 읽으면 하나님께서 성막에 임재 했다는 것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활동하실 때, 말씀하실 때 언제든지 성막을 통해서 그것을 중심으로 말씀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 시대로 오면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말씀했다는 것을 또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칙으로 오늘은 교회에 임재하고 계실 뿐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또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앞으로는 그 신부와 함께 계실 것이고 신부를 통해서 말씀 하실 것이기 때문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하는도다 값없이 와서 생명수를 받으라 하더라”, 이렇게 함께 말씀하시는, 그 신부의 말이 곧 신랑의 말이고, 신랑의 말이 곧 신부의 말인, 이 때를 향해서 교회는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건축이 있는 곳에 임재하시고 당신의 건축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그럼 이 건축은 도대체 무엇인가? 구약에서 보면 물질로 만들어진 집이였다. 집의 실제, 물질로 만들어진 집의 실제는 바로 인격이다. 성막 전체는 한 인격을 묘사한 것인데 그 인격을 건축화 해놓은 것이다. 인격을 어떤 모양으로 형상화 해놓았다는 말이다. 성막을 보면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인격이 이러한 인격이구나 하고 알게 되는데 그것을 알고 있었던 바울이나 사도들은 바로 예수가 이 성막과 꼭 같은 사람이구나, 바로 성막의 실제구나로 알게 됐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고 거기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예수님 시대에는 예수님 한 분이였지만 예수님 한 분으로서 오고 오는 세대를 다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단체적인 예수, 단체적인 인격, 한 무리가 되는 하나의 인격과 함께 하나님이 활동하시고 또 하나님은 임재하신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는 성막 외에 임재하시고 성막과 함께 활동하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이스라엘 외에 임재하셨고 이스라엘과 함께 활동했던 것이다.
같은 원칙으로 예수에게 임재하시고, 예수와 함께 활동하셨던 하나님은 오늘은 교회에 임재하시고, 교회와 함께 활동하신다. 오늘날 땅위에서 하나님의 주권의 행세는 교회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세상에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함께 주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보면 교회가 어떤 일을 행하느냐, 교회가 어떤 권세를 갖고 있느냐, 교회가 어떤 권세를 주관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은 현실적으로 땅위에서 자신의 행사를,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게 된다.
옛날에는 임금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임금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됐다. 그리고 그 나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됐다. 임금이 잘하면 하나님의 주권이 넉넉하게 행사되고 권세 있게 행사되고, 임금이 잘못하면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지 못해서 다른 나라에 오히려 잡혀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주권은 행사될 수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의 주권은 행사되지 못 했다. 마찬가지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 하나님의 주권은 행사 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총을 잘 쏘는 일등 사수가 있다 하더라도 총이 없으면 그 주권은 행사 할 수 없다. 기수를 행사할 수 없다. 꼭 그와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사용하는, 예를 들어 하나님을 특별한 사수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그 특별한 사격의 기술을 행사할 수 있는 총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오늘 교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바로 교회이다. 우리가 만일에 좋은 무기가 되면 하나님의 주권은 더욱 잘 행사될 수 있지만, 우리가 좋은 무기가 되지 못 면 하나님의 주권은 잘 행사될 수가 없다. 아무리 좋은 사수라고 하더라도 총이 나쁘면 그 실력이 다 발휘 될 수가 없다.
오늘 대진 형제가 피아노를 쳤다. 많이 연습을 해왔지만 지금 피아노가 좋은 피아노가 아니다. 피아노 때문에 대진 형제의 실력이 100% 발휘 될 수가 없다. 수천만원짜리 그랜드 피아노를 갖다 놓고 실내를 음악을 하기 좋게 만들어 놓고 우리가 조용하게 기침 소리도 내지 않고 듣고 있다면, 훨씬 더 효과 있는 주권이 행사될 것이다. 이와 똑같은 원칙이다.
오늘 하나님의 주권은 백성과 함께 행사되기 때문에 백성이 없는 하나님의 주권은 행사 될 수가 없다. 그 분은 존재하신다 하더라도 행사 될 수 없다. 어제 저녁에 말씀 드린 것 가운데 성막과 함께, 예수와 함께, 교회와 함께, 신부와 함께 라고 말 할 때 사람들은 이런 의문이 생긴다. 성막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있을 때는 하늘에는 하나님이 없었느냐 하는 질문도 생기고, 예수와 함께 있을 때는 그럼 하늘의 하나님은 없느냐 하는 질문이 생긴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할 때가 있고,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까 하나님께로 간다고 할 때가 있다. “하나님 나를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할 때가 있다. 도대체 예수와 함께 성육신 하신 하나님은 누구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누구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절대 타자로서 존재하시는 분을 의미하고, 성막과 함께, 예수와 함께, 교회와 함께, 신부와 함께 오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그 주권을 의미한다. 그 주권이 행사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구나를 아는 것이지, 하늘에 계신 분을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 누구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볼 수 없다. 자고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 나타내신 하나님을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타내신 하나님이다. 나타내신 하나님은 성막과 함께, 예수와 함께, 교회와 함께, 신부와 함께 나타내신다는 말이다.
대진 형제의 피아노 실력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피아노가 없다면 그 피아노 실력은 전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아무리 귀가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대진 형제 속에 들어있는 그 기술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피아노가 있을 때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섹스폰을 부는 형제가 있다. 문상필 형제가 좋은 섹스폰 기술을 갖고 있지만 좋은 악기가 없으면 부를 수 없다. 소리를 우리가 들을 수 없다. 아무리 그런 형제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손나팔을 불어서는 그 소리가 절대고 안나오기 때문에 좋은 악기가 필요하다.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악기가 필요하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도 200킬로, 300킬로를 달릴 수 있는 실력이 있다. 하지만 포니를 타고 2,300 킬로를 달릴 수 있겠는가. 200킬로로 올려버리면 굴러 버릴 것이다. 차가 좋아야 실력도 나오게 된다.
오늘 교회가 좋아야 하나님의 주권도 행사 될 수 있다.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주권을 어떻게 행사하게 할 것이냐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택된 백성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잘못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건축은 중요하다. 건축이 얼마나 좋으냐에 따라서, 잘 되냐에 따라서 하나님 주권이 그만큼 올바르게 정당하게 권세 있게 아름답게 행사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볼 때는 우리 한 사람의 인격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주권을 이렇게 행사할 수도 있고 저렇게 행사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건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무엇이나 다 그렇지만 건축은 준비가 필요하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첫 번째는 건축의 준비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건축의 기초가 있었다. 그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아브라함의 장막에 거한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물론 노아의 방주로부터 시작됐지만 하나님의 장막이라고 말 할 때는 아브라함이 거했던 장막과 연관이 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장막에 거한 사람들이다. 어떤 의미로는 장막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광야에 나왔을 때 역시 장막에 거하는 백성들이었다.
이 장막은 이동식 천막이나 마찬가지다. 언제든지 옮겨서 왔다갔다할 수 있는 것인데, 왜 이런 이동식 천막이 필요했는가? 하나님이 이동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분이니까 장막도 같이 움직여야 하지 장막이 고정되어 있으면 하나님이 움직이지 못한다. 아직은 광야를 통괄하는 동안에 하나님은 움직여야 했다. 왜냐하면 가나안까지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장막을 짓고 광야 40년의 생활을 하게 되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아직 그 백성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장막에 거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됐었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처럼 하나님의 장막의 기초가 되게 되었다. 장막에 사는 사람들이 장막을 지을 수 있다. 남쪽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온돌이나 히터나 난로 같은 개념이 전혀 없다. 하와이에 가 보면 우리와 너무 다른 것은 거기는 난방 시설 자체가 아예 없다. 에어컨은 있어도 난방 기구는 전혀 없다. 더운 지방이기 때문이다. 창문을 보고 놀랬는데, 우리는 창문이 어떻게 하면 밀폐되어서 바람이 안들어오게 되느냐, 그것도 안되서 2중 유리, 이중창을 해야 하느냐에 신경을 쓰고 있다. 하지만 가보니까 유리조각 가지고 엉성하게 해놓았다. 우리 생각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다. 더운 지방 사람들은 그렇게 평생 살아왔고 조상 대대로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난방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추운 지방에 살아 왔기 때문에 집을 지으면 난방부터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국 사람들은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봄도 있고 여름도 있고 가을도 있고 겨울도 있어서 우리는 농이 대단히 크다. 사철 이불, 사철 의복이 다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농 문화가 발달 된 것 같다. 우리나라처럼 농에 대해 장식을 많이 한 나라가 없고, 농 값 많이 들인 나라가 없다. 그냥 옷만 걸어두면 될텐데 농문화가 하도 발달 하다보니까 농에 온갖 장식을 다 해서 농 하나에 몇천만원 하게 된다. 이것을 또 끌고 이사를 다니려다 보니 얼마나 복잡한가. 그래서 우리나라는 이사짐 센터라는 것이 있다. 다른 나라에 가면 이사짐 센터라는 것이 없다. 주섬주섬 싸서 가면 된다. 문화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 무엇인가 시작이 되어서, 그것이 기초가 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장막에 거했다는 것은 장막에 노선으로 가는 사람들의 기초가 되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도 하루아침에 공부를 잘 하게 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아이들을 갑자기 고등학교 가서 공부를 잘 하게 하려고 족쳐봐야 안된다. 어렸을 때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거나 공부가 재미있게 하거나 해야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지, 공부하는 노선에 있지 않다가 공부하는 노선으로 아이들을 갑자기 바꾸면 아이들이 공부를 하겠는가. 할 수가 없다.
건축도 건축의 노선이 있다. 장막의 노선에서 장막이 나왔다. 장막의 노선과 바벨의 노선은 크게 다른 것이었다. 바벨의 노선은 흙을 이겨서 벽돌을 찧어서 그것을 불에 구워서 단단하게 만들어서 벽돌을 해서 그것으로 성을 쌓은 그런 문화였다. 그런 문화 속에서 아브라함은 부름 받았다. 바벨에서 부름 받았다. 여기서 부름 받았으니까 장막에 살았다는 것은 가난해서도 살았겠지만, 가난하기 때문에 거기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가난이 복이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장막을 건축하는 하나의 노선이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장막의 사람으로서 이 사람은 최초의 사람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일 같지만 어쩌면 그것이 먼 장래를 볼 때 굉장히 중요한 어떤 것을 시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일 학교에서 아이들이 주일 학교를 왔다갔다 하는데 별거 하겠느냐, 놀다 오겠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노선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다. 갑자기 어느 날 이렇게 된다고 생각할 일이 아니고, 어떤 노선에서 무엇이 나온다는 것이다. 웅덩이에서는 미꾸라지가 나온다. 노선이 미꾸라지 노선이니까 웅덩이에서 나온다. 붕어새끼나 그런 것이 나올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느 노선에 있냐에 따라서 장래가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시골에 있을 때 우연히 이웃집에 어떤 전도자가 들어왔다. 이웃집에서 오라고 해서 갔는데 다 어른들만 있고 어린 학생은 나 혼자뿐이었다. 장님이 오셔서 쭉 둘러앉아서 성경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 생전에 처음으로 들어봤다. 장님이 성경을 다 외웠다. 몇 장 몇 절 펴라고 하면 사람들이 읽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경을 다 외우고 있는 것이 참 신기했다. 동자 하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통역을 한다. 그것도 신기했다. 그 양반이 부르는 노래가 아주 흥미 있었다. 지금은 잘 안부르는데, ‘예수 사랑하심은’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를 아주 힘차게 불렀다. 그것이 어린 마음에 무엇을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큰 감동을 받아서 눈물을 흘리고 회개한 것도 아니고 단지 그것이 내게 좋은 인상을 남겨줬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나는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시골의 어느 집에서 모이는 교회를 가게 되었다. 거기서 주일 학교부터 시작해서 다니게 됐는데, 그 다음에 다른 전도사님이 오셨다. 와서 찬송도 가르쳐 주고 동화도 하고 성경 이야기도 하는 것이 재미가 있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오는 애들이 별로 없었고, 마지막에 남은 건 나 혼자 남았다. 그것도 이상하다. 다른 애들은 다 흥미가 없는데 왜 나만 흥미가 있었던가. 그것도 이상하다. 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이 그것이 하나의 노선이 됐다.
오늘 우리는 조그마한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을 교육을 할 때 이렇게 하면 어디로 갈 것인가를 멀리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을 생각할 것이 아니고, 멀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말에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처음 시작이 뭔가를 보고 결과를 안다는 것이 중요하다. 전혀 그것을 모르고 덤벙대는 것 보다 이것을 하면 이것이 어디로 가겠구나하는 것을 계산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은 장막의 노선에 서게 됐다. 이것이 장막 건축의 기초가 되게 됐다. 바벨론과 갈대와 우르를 떠나왔다. 바벨론은 거역을 상징하고, 갈대와 우르는 우상숭배를 상징한다. 우상숭배는 허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헛것을 숭배하는 것이다. 자기들이 잘 되기 위해서 헛것을 숭배하는 것이다.
바벨은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거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떠나 왔으니까 당연히 장막의 노선으로 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 문화를 배경으로 살고 있던 사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하나님도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부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도 벽돌 찍고 있는 사람이고 우상숭배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면 아브라함을 불렀겠느냐하는 것이다. 분명히 다른 사람이 벽돌 찍고 있을 때 이 사람은 천막을 치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신약에 오면 또 재미있는 일이 있는데, 베드로를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 하셨다. 베드로는 논 갈고 밭 갈다 부름 받은 것이 아니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 부름 받았다. 고기를 잡다 부름 받은 사람이니까 네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했지 밭을 가는 사람보고 네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면 왔겠는가. 안왔을 것이다. 바울은 천막을 치는 사람이었다. 장막쟁이, 장막을 만들어서 업을 삼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바울을 불렀는데 그 바울은 일생동안 교회를 건축하는 일을 했다. 사도 요한은 그물을 깁고 있다가 예수를 만났다. 그물을 깁는다는 말은 어장에서 일을 하다 보면 찢어지고 뚫어지고 흠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을 시간이 날 때 꼬매는 것이다. 그때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사도 요한은 보수하는 사역을 했다. 예수님 이후 사도의 시대가 지나가면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 어떤 문제점이 생겼다. 누수가 생겼다. 그것을 꼬매는 역할을 했다. 그 사람들의 직업과 무관하지 않았다. 하나는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는 사람이라서 하루에 3천명을 회개시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게 되었고, 한 사람은 장막 치던 사람이라서 교회를 건축하는 이상을 받게 되었다. 한 사람은 그물을 깁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누수가 된 것을 보수하는 사역을 하게 됐다.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노선에 살고 있느냐 하는 것도 부름과 아주 중요한 관계가 있다. 내가 술집을 하고 있다가 부름 받았다면 어찌될까. 잘되면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충만을 받으라 했으니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성령을 완전히 먹여서 술에 취하도록 만들거나 한 이런 사람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일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을 명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소돔과 롯으로부터 분리된 사람이니까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고 그랬는데, 본토는 바벨론과 갈대와 우르였다. 그리고 친척은 마지막 남은 친척이 롯이었다. 이것은 혈육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어찌 하던지 롯과 함께 살고 싶었지만 롯이 세상의 욕심에 끌려서 롯과 분리하게 됐다. 그것이 결국 소돔으로 내려가는 결과가 됐다.
롯과 분리되는 장면을 보면 두 노선이 거기서 갈라진다. 롯의 가축도 많아지고 아브라함의 가축도 많아져서 서로 분쟁이 생겼다. 분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갈라서 하자고 했다. 아브라함이 네가 좌를 하면 내가 우를 하고, 네가 우를 하면 내가 좌를 하리라, 네가 선택하라 하니까 롯은 소돔을 선택했다. 소돔은 그때 당시에 아주 비옥하고 농사가 잘되는 곳이고 목축하기 좋은 곳이었다. 단지 그것만을 보고 롯은 소돔을 선택했다. 그 결과 소돔은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됐다. 결국은 멸망하는 하나님의 족보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되었다.
아브라함은 롯이 선택하고 남은 나머지를 갖게 되었다. 그 나머지가 어디인가? 바로 가나안 땅인데 그것은 산지이다. 좋은 땅이 아니고 메마른 땅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위로하고 있다. 너 봐라, 네가 있는 땅이 메마르고 형편없지만 동서남북을 바라봐라, 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내가 너에게 주리라, 이렇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위로하고 있다. 그 위로한 것을 보면 그 땅이 형편없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땅은 형편없었는데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세상에 어떤 것을 보고 따라간다 해서 그것이 결코 잘 된 일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일부러 자갈밭을 택하라는 말은 아니지만 세상의 부요를 쫒아간다 해서 결코 그것이 장래가 좋은 것이라고만 볼 수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꼭 생각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이탈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에서 벗어나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헛일이 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서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난 사람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리고 장막의 노선에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러해서 장막을 건축하는 기초를 갖게 되었는데, 이스라엘이 후에 야곱 시대에 내려와서 양식이 없어서 애굽으로 내려가게 됐다. 애굽은 요셉이 있는 곳이고 물자가 풍부한 곳이고 사람이 살기가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그냥 거기서 눌러 붙어 산 것 같다. 그 당시 흉년만 피하고 올라왔으면 되는데 가나안 땅에 비해서 애굽 땅은 너무나 좋은 땅이기 때문에 거기서 대대로 물려 살다가 400년을 갇히게 됐다. 400년이면 적어도 19대, 18대 정도가 지나가야 한다. 성경에는 4대라고 되어 있지만, 그때는 오래 살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지금으로 생각하면 조선 왕조 500년이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에 보통 18대, 17대가 지나가게 된다.
이 사람들은 부와 향락의 세상에 흘러 들어가서 결국 노예가 되게 되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잘 보면 더 편리하고 더 풍부하고 더 좋은 것 때문에 결국은 자기의 일생을 그걸 위해서 산다. 안그렇게 살기도 어렵게 됐지만 지금 자본주의 하의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어야 된다. 왜? 쓸 곳이 너무너무 많다. 쓸 곳이 많아서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더 많이 버니까 또 더 쓰게 되고, 계속 이런 순환이 흘러가고 있다. 아무리 벌어도 벌어도 끝이 없도록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여기 사람들은 모두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안 흘러 들어갈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누구라도 그 속에 흘러 들어가서 거기서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우리 일생에 잠자는 시간이 8시간, 먹는 시간이 8시간, 일 하는 시간이 8시간이라고 하는데 그 일하는 시간이 최소한 8시간이니까 3분의 1은 완전히 먹기 위해서 활동하고 있다. 그렇게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도 부족해서, 8시간으로는 부족하고 10시간 씩 일해야 하고, 더 일해야 하고, 집에 와서까지 일해야 한다. 이런 세상으로 사람들이 흘러 들어가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에게 교회 나오라고 하면 시간이 없다는 말을 제일 많이 한다. 왜 시간이 없는가? 너무나 살기가 바쁘다는 것이다. 좀 살만큼 해놓고 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살 만큼 해 놓고 나올 시간은 일생 동안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계속 악순환이 되기 때문이다. 벌면 더 써야 되고, 쓰면 또 더 벌어야 한다.
몸이 비만한 사람들이 다이어트 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남은 것 필요 없는 것이니까 그냥 쫒아내면 안되겠는가 싶은데, 덜먹으면 안되겠는가 생각되는데 덜 먹을 수가 없는 것이 비만했다는 것은 내가 먹여 살릴 식구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구가 많기 때문에 많이 먹어야 한다. 나는 빼빼해서 뚱뚱한 사람은 같이 굶으면 훨씬 오래 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사흘을 산다면 나보다 배나 뚱뚱한 사람은 육일을 살 것 같았다. 뚱뚱한 사람은 자본이 많아서 더 오래 살 거라고 생각했다. 배고플 것도 덜 배고플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축적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축적된 것이 아니고 식구가 그만큼 더 많아서 더 많이 먹어야 된다고 한다. 뚱뚱한 사람에게 적게 먹으라는 것처럼 고역이 없다. 식구가 전부 입을 벌리고 있는데 적게 먹으라고 하니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온 식구를 다 먹여 살려야 한다.
지금 자본주의 사회가 그렇게 되고 있다. 식구가 점점 많아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더 벌지 않으면 안 되는, 벌어 놓으면 식구가 또 늘어나고, 식구가 늘어나니까 또 벌어야 한다. 먹으니까 살찌고, 살찌니까 먹어야 한다는 것과 똑같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흘러 들어갔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래서 바로에게 노예가 되고 말았다.
오늘 우리도 이 문제는 항상 경각심을 갖고 생각해 봐야 할 그런 일이다. 잘못 하면 흘러 들어가는 구나,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되겠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내가 잘못하면 콘베어 벨트에 들어가서 소세지가 된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살아야 한다.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지 안그러면 그냥 그 물결에 흘러 들어가 버리고 만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더 어려울 것이고, 한국도 더 어려울 것이다. 문명이 더 발전할수록, 경제가 발전할수록 더 그렇다. 경제가 더 발전된 나라일수록 시간이 많은 것이 아니고 시간이 더 없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시간이 더 많다고 한다. 아이러니컬한 이야기이다. 더 많이 일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오늘 우리는 건축의 기초를 위한 어떤 노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요점이다. 어떤 노선을 가져야 된다. 하나님의 건축으로 가려면 거기에 맞는 노선을 잡아야 되는구나, 장막의 노선을 잡아야 되는구나, 바벨론의 노선, 갈대와 우르의 노선, 소돔의 노선, 애굽의 노선으로 가면 안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해방이 됐다. 이 해방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 얼른 육신적으로 보면 그들이 너무 바로에게 시달리니까 하나님이 불쌍해서 해방을 시켜줬다고도 볼 수 있지만,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의 건축을 위해서 이 노예들은 해방 되게 되었다.
모세는 바로에 가서 왜 이 백성을 데리고 가려 하냐고 물으니까 우리는 여호와를 섬기는 백성인데 사흘 길쯤 광야로 나가서 우리가 여호와에게 제사를 드려야겠다고 말했다.
목표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우리는 가야 된다고 했다. 바로가 왜 보내주지 않았는가? 그래서 보내주지 않았다. 그냥 여름휴가 갔다 온다고 했으면 보내주었을텐데,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을 해방시켜서, 결국 건축을 하도록 해방 시켰다.
그들은 어린 양의 구속으로 해방이 된 사람들이다. 우리가 해방되려면 구속을 받아야 한다. 세상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바벨론과 우르와 소돔과 애굽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우리는 구속 받아야 한다. 그 구속은 어린양의 죽음을 통한 것이었다. 어린양의 죽음을 통해서 구속 받는다는 말은 어린양의 죽음 안에서 우리가 구속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내가 바벨론에 대해서, 우르에 대해서, 소돔에 대해서, 애굽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어야 된다는 뜻이다. 거기서 산 자가 되려고 하면 나는 노예가 되고, 나는 거기서 죽은 자가 되려고 해야 해방이 된다는 뜻이다.
거기서 다른 사람과 똑같이 영광을 받아야 되겠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나도 뭔가 자랑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면 자연히 노예가 되는 것이고,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그 땅이 필요하지만 내가 할 일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로 여겨야 된다는 말이다.
오늘 내가 여기서 집회를 하고 있는데 젊은 형제들의 경우 어떤 친구들은 동해안으로 바캉스를 가자고 했을 것이다. 놀러 갈 곳이 많은데 속리산으로 왔다. 친구들이 말하기를 답답하게 무엇 하러 속리산으로 가느냐, 여름에는 바다가 좋다는 친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올 수가 있는가? 내가 여름 바캉스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 되고, 여름 집회에 대해서는 산 사람이 되어야 여기를 올 수 있다. 둘 다 다 살고는 올 수가 없다. 갈등이 나서 올 수가 없다. 동해안으로 갈까, 속리산으로 갈까 방황하다가 못 간다. 어느 한 쪽에 대해서는 죽어야 된다. 어느 한 쪽에 대해서 죽은 사람이 되어야 된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 우리는 두 군데 다 살 수가 없다. 어딘가 한 군데만 살아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이 나갈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선택해야 한다. 구속이 곧 해방이다. 어린양의 죽음 안에서 우리는 해방된다. 바로에 대해서 내가 살고, 바로와 같은 것을 누리고, 그렇게 하려고생각하면 해방 될 수가 없다. 바로의 영광과 바로의 세계에 대해서 나는 죽은 자요, 하나님의 제방을 쌓는데 대해서는 나는 산자가 되어야 하겠다고 할 때만 해방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 거하게 된 것이다. 애굽하고 광야는 천지 차이이다. 애굽에서는 농사가 잘되는 곳이다. 비록 노예 신세라고 하지만 먹는 것이 풍부하고 걱정이 전혀 없는 그런 땅이었기 때문에 400년을 살았다. 하지만 광야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풀 한포기도 나지 않는 메마른 곳이다. 거기서는 오직 하나님만 쳐다봐야 된다. 하늘만 쳐다봐야 된다. 만나가 내려오는지 안내려오는지 그것만 쳐다봐야 되고, 햇빛이 얼마나 뜨거운지 그것만 쳐다봐야 되고, 그늘이 언제 오는지 그것만 쳐다봐야 되는 곳이 광야라는 곳이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면 대단히 무미건조하고, 아주 삭막한 곳이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너무 삭막한 곳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오직 하나님만 앙망하기에는 적당한 곳이기도 하다. 애굽을 떠나서 하나님의 산에 이르렀다고 한다. 얼른 보면 아주 근사한데 도착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산이라는 것이 시내산인데 사진으로 보니 나무 한 포기 없는 돌산이다. 그 돌산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산에 이르렀다. 광야에 거한다.
우리가 해방되어서 나오려면 광야에 거할 것을 각오해야 된다. 내가 광야에서 산 자요, 애굽에서는 죽은 자로 여겨야 광야에 살 수가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 나와서 왜 불평이 생겼는가? 살다 보니 너무너무 불편했다. 너무 불편하니까 애굽 생각을 계속 하게 된다. 애굽에서는 부추도 먹고 마늘도 먹고 참외도 먹고 수박도 먹었는데, 광야에서는 맨날 만나만 먹고 메추라기만 먹고 질려서 못먹겠다는 것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맨날 똑같은 것만 어떻게 먹고사느냐 하는 생각을 하게 됐던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광야에 대해서는 산 사람이고, 애굽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여야 한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사람이고, 바로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어야 된다.
처음에도 말씀 드린 대로 왜 내가 천당 가려는 사람들을 막고 있는가 하면 천당도 가고 세상도 살려고 생각하니까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는 것이다. 땅위에서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라고 불러 놨으니까 건축하는 데서는 내가 산 자가 되고, 천당 가서 데는 죽은 자가 되라는 말이다. 한 가지만 생각해야 뭘 할 수 있지 두 가지를 생각하고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건축을 다 하고 나서 가면 된다. 건축을 하라고 땅에 보냈으니까, 땅에 불러놨으니까 땅에서 건축을 하고 그것이 끝나면 가면 된다. 그것도 안하고 천당으로 가려고 생각하니까 문제가 된다. 나이 많으신 분들은 특별히 오래오래 사셔서 건축을 충분하게 하시고 가길 바란다. 일찍 가실 생각하지 마시고 오래오래 사시면서 건축을 튼튼하게 하고 충분하게 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건축이 되어서 가시길 바란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오래오래 살아서 내가 건축을 온전하게 하고, 내가 건축이 되어서 하늘로든 어디론가 가고 싶다. 절대로 나이 드신 분들까지라도 빨리 갈 생각하지 마시고, 오래오래 사실 생각하시기 바란다. 오래 살아야 건축을 한다.
광야에 나온 이 사람들에게 주어진 일은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 애굽에서는 할 일이 많았었다. 할 일이 많은 그 사람들을 바로의 국고성을 쌓는 데 모아 놓았다. 오늘도 우리가 젊은 사람들은 특별히 할 일은 많고, 세상은 좁다고 생각한다. 해 보고 싶은 일도 너무 많고, 할 일도 너무 많아 교회를 오라고 하면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이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교회 가겠느냐는 생각을 한다. 할 일이 많은데 실컷 해 보고 마지막에 할 일 없을 때 간다는 생각을 한다.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할 일은 너무나 많다. 해보고 싶은 일은 너무 많다. 힘이 없어 못해서 그렇지 해보고 싶은 일은 너무나 많다. 해보고 싶은 것은 끝이 없다.
이런 사람들을 세상은 모아서 바로의 국고성을 쌓게 만든다. 그냥 놔두지 않는다. 마음대로 놀라고 놔두지 아니하고, 바로가 다 잡아다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 광야에 나온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한 곳에 나와서, 참 외로운 곳에 나온 사람들이지만 다른 한면으로는 아주 좋은 곳에 나왔다. 왜냐하면 장막을 건축할 일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일은 할 일이 없으니까 이것이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일 밖에 없으면, 얼른 생각하면 너무 단조롭다, 인생이 얼마나 풍부하고, 얼마나 다양하고 얼마나 좋은 것인데 하나님만 섬긴다면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만 섬기도록 딱 지정되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힘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 자처럼, 마치 무덤에서 튀어나온 사람처럼 살게 된다. 그 전에 많이 하고 싶었던 많은 일들이 모두 시시하게 된다. 자세히 보면 그렇게 산 사람들을 우리 교회 안에서도 볼 수 있다. 그것 한 가지 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
우리나라 속담에 백공이 먹을거리가 없다는 말이 있다. 전기도 고칠 수도 있고 나무 목수도 하고 수도도 고칠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데 집에 가 보면 항상 끼니 꺼리가 없다고 한다. 한 가지만 잘 하는 사람은 먹을 것이 있다. 전기만 잘하거나 목수만 잘하거나 한 가지만 잘하는 사람 집에 가면 끼니 꺼리가 풍부한데, 여러 가지 많이 하는 사람은 빚 좋은 개살구이다. 보기는 좋고 저 사람 돈 많이 벌겠다 싶은데 그 사람은 돈을 못번다. 왜냐하면 전기 조금 하다가 힘들면 목수하고, 목수 좀 하다가 힘들면 수도 고치고, 그러니 돈이 안 된다. 한가지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돈을 번다. 한 우물만 파는 사람이 돈을 번다.
제주에 박 형제님이 계신다. 한 가지 밖에 안한다. 일생 동안 한 가지만 한다. 옆에서 이것도 해봐라 저것도 해보라는 유혹이 많아도 전혀 말을 듣지 않고 딱 한 가지만 한다. 딱 한 가지만 했기 때문에 성공했다. 여러 가지 했으면 성공 못했을 것인데 딱 한 가지만 했다. 집회와도 여기 앉아서도 계속 돈을 벌고 있다. 이동식 사무실이 있어서 핸드폰만 들고 있으면 다 거래처에 전화가 온다. 그 사람은 제주인지 청주인지 속리산인지 모르고 전화가 온다. 미국에 가 있어도 전화가 온다. 쇳덩어리 사가라고 전화가 온다. 한 우물만 파다 보니까 그렇게 확실하게 되었다. 우리도 한 우물만 파는 사람이 성공한다. 이것도 좀 파보고 저것도 좀 파보는 사람은 생수를 얻을 수가 없다.
우리를 장막만을 건축하기 위해서 광야로 하나님이 불러 놓았다는 것은 너무도 지혜로운 일이다. 인간이 애굽에 놔두면 오만 것을 다 하고 싶을 것이니까 안되겠다하여 이 백성을 더 놔두면 평생 저러다 망하겠구나 싶어서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광야에다가 갖다 놓으셨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아무 할 일도 없는 곳에 갖다 놓았다. 죽으나 사나 이것 밖에 할 일이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 같다.
나도 죽으나 사나 하나님 일 밖에 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 놓았다. 그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다. 할 줄 모르지만 생각은 너무너무 많다. 내가 신체도 건강하고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었다면 온갖 것을 다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 줄 아시고 하나님께서 다른 것은 다 못하게 잘라 버렸다. 그래서 오직 한가지 밖에 못 하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종교 안에 들어와서도 할 것이 많다. 방언도 해야 하고 입신도 해야 하고 예언도 해야 하고 병 고치는 것도 해야 하고, 할 것이 너무너무 많다. 잘 나가는 사람들 보면 굉장히 많다. 그런 것이라도 내가 할 수 있었으면 내가 오직 그리스도만 할 수 없다. 나는 안 된다. 방언도 하려고 애를 써 봤는데 안되고, 안수해서 기도도 해보려고 해도 안되고, 다른 사람 하는 것은 다 안된다. 오로지 한 가지 밖에 안된다. 그리스도! 이 한가지 밖에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무것도 못 하게 하더니 왜 못 하게 하는지를 그때는 몰랐다. 다른 사람들은 한 번에 대박이 터져서 방언하니 입신하니 예언하니 난리를 치는데 나는 왜 이렇게 노력을 해도 안되는가 생각했는데 이제 생각하니까 그런 것을 했더라면 나는 여러 가지를 하다가 말았을 것이다. 오직 한가지 밖에 못 하도록, 한길만 가도록 몰아부쳤다. 이것이 나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아주 은혜로운 배려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장막 밖에 건축할 수 없는 백성, 광야에 나온 백성, 광야에 거한 백성, 이 사람들은 애굽을 떠나서 하나님의 산에 이르렀다. 할 일은 하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산에 왔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일 밖에는 없다. 여러분은 속리산에 왔으니까 비도 오고 할 일이 없다. 하나님 말씀 밖에 들을 일이 없게 되었다. 날씨가 좋았다면 법주사도 구경하고, 갈 곳도 많을텐데 비가 오니까 꼼짝 없이 여기 앉아 있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 올 때 마다 비가 오게 한 것이 그것 때문인 것 같다. 어제와 오늘 일기 예보를 들었는데 비가 엄청나게 온다고 한다. 100밀리에서 150밀리 정도 온다고 한다. 비 올 확률은 오전 오후 다 90%라고 한다. 억수 같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어제도 억수같이 오지 않고, 오늘도 억수 같이 오지 않는다. 꼭 놀러가지 못할 만큼만 온다. 이상하다. 아마 다른 데는 비가 많이 올 것 같다. 내가 일부러 보은 지방의 일기 예보를 들었는데 분명히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어제도 비가 안왔다.
우리를 한 곳으로만 몰아주신 것, 이것이 은혜고 축복이다. 하나님의 장막을 건축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길 원하고 있다. 어떻게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가? 바로의 국고성을 건축한데서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데로 구원하길 원하고 있다. 구속은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인 사람이 그 죄를 사함 받는 것을 말한다. 내가 죄인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내 운명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은 그러한 사람이 자기의 어떤 영역을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아무리 구속을 받았다 하더라도 바로의 국고성을 계속 쌓고 있으면 그 사람은 구속은 받았어도 구원은 못 받은 사람이다. 구속을 받고, 다시 구원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도록 구원 한 것이다. 우리의 용도가 죄의 병기에서 의의 병기로 바꿔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저 하늘로 올라간 것이 구원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바꿔진 것, 옮겨진 것이 바로 구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막을 건축하도록 구원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구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날의 하나님을 건축하는 것이, 세상 바로의 집을 건축하다가 오늘날의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것이 구원이다. 우리 인생은 할 일이 없다. 세상의 바로의 집을 건축하거나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거나 둘 중 하나 밖에 없다. 일이 여러 가지인 줄 알지만 여러 가지 일이 없다. 세상에서 우리 마음대로 사는 것은 바로의 집을 건축하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바로의 집을 건축하고 있는 것이다. 둘 밖에 없다. 건축은 둘 밖에 없다.
성경에 건축의 노선은 둘 밖에 없다. 마지막에는 바벨론과 새 예루살렘으로 둘로 집약이 되는 것처럼 지금도 이 세상은 두 노선 밖에 없다. 내가 내 노선을 따로 택해서 내 길이 따로 있는지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자기 길은 따로 없다. 이 큰 노선에 포함 되어 있다. 바로의 국고성을 건축하는 노선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장막을 건축하는 노선이냐, 이 두 노선 가운데 한 노선 밖에는 선택 할 수 없다. 이것을 확실히 안다면 우리는 바로의 국고성을 쌓을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건축해야 한다. 내 뜻대로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큰 세력에 의해서 큰 흐름 속에 살고 있는 것이지 내 뜻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즐기도록 만들어놓았는가? 모든 것을 즐기도록 만들어 놓아야 자본주의가 되는 것이다. 왜 도박장을 만들어 놓았는가? 왜 카지노를 만들어 놓았는가? 나는 처음에 이상하게 생각했다. 술집도 없애 버리고, 그런 것은 없애 버리지 왜 저런 것을 만들어 놨는가 생각했더니 그런 것을 없애버리면 돈 쓸데가 없으니까 돈 벌 의미가 없어진다고 한다. 돈 쓸 곳을 만들어야 하므로 그런 것들이 다 필요한 것이다. 나는 카지노에 갈 때 돈 따려고 하지만 알고 보면 자본주의를 위해서 가는 것이다. 결과가 그렇다. 내가 증권을 하러 가는 것은 돈 벌려고 가는 것이지만 자본주의를 위해서 가는 것이다. 증권시장은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내가 거기서 얼쩡거리기만 해도 나는 자본주의를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본주의를 위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한다. 자기가 돈 벌러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길 밖에 없다. 바로의 국고성을 쌓든가, 아니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든가의 둘 중의 하나 밖에는 없다.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 밖에 없다. 자기 길이라는 것은 없다. 내 길이라는 것은 따로 없다. 있는 것 같지만 전혀 내 길이 아니다. 전쟁 통에 가면, 어떻게 사람이 오는데 총을 쏠 수 있는가 했더니 전쟁 현장에 갔다 온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까 보통 때 같은 정신으로는 전쟁을 못한다고 한다. 일단 딱 일선에 배치되어서 붙어 놓으면 총알이 날아와서 옆의 사람이 죽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총을 쏘게 된다고 한다. 피 흘리는 것을 보게 되면 자기도 막 총을 쏘게 된다고 한다. 백병전(白兵戰, hand-to-hand combat)을 하고 온 사람도 있다. 캄캄한 밤에 백마고지 같은 곳에서 그랬다고 하는데, 그냥 막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이다. 어찌 그걸 하겠느냐 하지만 그 장소에 가면은 그렇게 돼버린다고 한다. 안 하고는 안 된다고 한다.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어떤 큰 흐름 속에 자기는 살고 있는 것이다. 그 큰 흐름을 거슬러서 자기 혼자 살 수가 없다. 바로의 흐름이냐, 여호와의 흐름이냐, 이 흐름이 있다. 국고성을 쌓는 흐름이냐, 아니면 성막을 건축하는 흐름이냐, 그 흐름이 달라서 그렇다. 어느 흐름에 있는가가 중요하지 내가 어떤 정신을 차리느냐는 두 번째 문제이다. 전쟁하는 통에 들어가서는 내가 전쟁 안 할 수가 없다. 전쟁 통에 들어가서 나 혼자 염불하고 있겠는가, 아니면 내가 도를 닦고 있겠는가. 내가 거기서 자선 사업을 한다고 있겠는가, 양심을 닦고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전쟁 속에서는 총을 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큰 흐름의 물결에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큰 물결의 흐름 안에 들어갈 것이냐, 바로의 집을 건축하는 큰 물결에 휩싸여 갈 것이냐 하는 두 가지 문제에 있다. 우리는 건축에 대해서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 나와서 오직 한 가지 일만 하도록 정해졌다. 성막 건축은 어떻게 시작 되는가? 모세를 산으로 부르시고, 이러 이렇게 하라고 지시한데서부터 성막의 건축이 시작된다. 성막 건축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시작된다. 가장 중요한 증거는 증거판으로부터 건축이 시작된다고 하는 것이다. 두 개의 돌판에 하나님의 10가지 말씀을 기록했는데 그것이 성막의 중심이다. 쉽게 말하면 심장이다.
그것을 누가 주었는가? 하나님이 모세에게 줘서 그 돌판을 상자 안에 넣는다. 이 상자를 법궤라고 한다. 이 법궤를 넣어 놓는 장소가 지성소이다. 성막의 건축은, 하나님 집의 건축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 증거판으로부터 시작하니까 이 증거판이라는 말은 하나님 자신의 증거라는 뜻이다. 우리가 보통 10계명이라고 하여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이기 전에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의 증거이다. 그분 자신이 이런 성질을 가지고 있고, 이런 취미를 가지고 있고,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의 증거로서 10가지가 있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이분은 이런 분이구나 하고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의 증거이기 때문에 이것을 증거판이라고 한다. 10계명 판이라고 말 하지 않는다. 증거판이라고 말한다. 이 증거판을 중심에 두고 지어진 집이기 때문에 증거 장막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넣어 두는 궤짝을 증거궤라고 한다. 하나님 자신의 증거이다.
증거로부터 시작해서 바깥뜰까지 들어간다. 이 증거를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를 세우는 것이다. 건축화 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형체가 없을 것이다. 이것을 세움으로 인해서 형상화 시켜놓았다. 그래서 그 집을 보면 하나님 마음이 이런 마음이고, 하나님이 이런 성질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성막이다.
성막을 건축한다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 자신을 우리 자신으로 묘사한다는 말이다. 성막을 건축하는 일은 물질적으로 어떤 집을 짓는 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증거, 하나님 자신의 성품, 그 본질, 그 성질을 우리를 통해서 형상화시킨다는 뜻이다. 그래서 축복이 된다. 하나님을 형상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을 형상화시킨다. 바로의 국고성을 짓는다는 것은 바로를 형상화시킨다는 말이다. 우리를 사자를 형상화시키면 사자 같이 된다. 호랑이를 형상화시키면 호랑이 같이 된다. 매일 같이 아침마다 일어나서 호랑이 모습을 계속 연습하면 호랑이 인상이 된다. 그럼 호랑이 형상이 되게 된다. 이것은 호랑이 증거를 건축화시켜 놓은 것이 된다.
우리가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을 형상화한다면 우리의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로 변하게 될 것이다. 건축은 형상화이다. 어떤 성질, 어떤 모양, 어떤 본질을 형상화 시켜 놓은 것이 건축이다. 바로의 국고성을 쌓을 것이냐, 하나님의 집을 건축 할 것이냐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나는 바라의 모습이 될 것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모습이 될 것이다. 이 일에 종사한다면, 이 증거 장막을 건축하는 일에 일생을 종사한다면 우리는 그 분의 증거가 될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보면, 어린양과 하나님이 한 몸이 되어서 보좌가 있는데 하나님과 어린양이 한 보좌에 있다고 한다. 이것은 실제적으로는 어린양이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의 이마에다 하나님의 이름이 써 있다고 한다. 하나님을 계속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이마에 그 이름이 쓰여질 것이다. 돼지를 자꾸 형상화 시키면 어느 날 가면 사람들이 너 돼지 같다고 할 것이다. 개를 자꾸 형상화 시키면 다른 사람이 볼 때 우리 이마에 개라고 써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매일 형상화시킨다면 우리 이마에 하나님이라고 이름이 쓰여진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자체는 엄청난 축복이다. 증거를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증거 장막을 보면 거기 있는 모두가 하나님의 증거이다. 기물 하나하나, 판자, 안경 등 전체가 다 하나님의 증거로 만들어졌다. 그것 하나하나를 보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우리도 가능하다면, 돈이 있다면 물질적인 집이라도 모임 장소를 만들 때 이렇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있다. 과연 이런 예술가가 있을까 하는 것도 문제가 되고, 그것을 뒷받침할 돈이 있겠는가가 문제가 된다. 문짝 하나를 봐도 그리스도가 보이고, 유리창 하나를 봐도 그리스도가 보이고, 들어가서 바닥을 봐도 그리스도가 보이고, 이렇게 만들어 놓은 집이 성막이다. 우리가 집회 장소를 그렇게 만들어 놓는다면 말하지 않아도 들어오기만 해도 하나님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형상화 할 수 있는 기술이 없다. 돈도 없다.
성막은 일체가 하나님의 증거이다. 이 증거는 하나님 자신의 증거지만 이 증거는 무엇을 통해서 세워지는가? 우리의 인성을 통해서 세워진다. 안에 들어가면 전부 다 금이다. 벽이 전부 금이고, 거기 있는 기물들이 전부 금이다. 그것이 형상화 될 때는 조각목을 통해서 형상화되어 있다. 조각목으로 궤를 짜고(만들고), 그 위에 금을 붙인다, 입힌다고 되어 있다, 겉으로 보기는 금이지만 그 금이 그런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안에 있는 조각목 때문이다. 조각목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 우리에 의해서, 사람에 의해서, 인생에 의해서 하나님은 증거로서 세워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따로 자기 혼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조각목에 의존하는 금, 인성에 의존하는 하나님이다. 이것을 예수님 안에서 보면, 하나님은 예수님의 인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분의 신성은 예수의 인성에 의존하고 있었다. 금은 조각목으로 짠 궤짝 위에 입혀졌다. 조각목으로 짠 판자 위에 입혀졌다. 이것은 금이 인성을 상징하는 조각목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상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해야 될 것인데, 성막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의존하고 있다.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는 이렇게 하려고 만들어 놨는데 우리가 잘못되어서 지금은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 원래는 하나님이 우리를 의존하려고 만들어 놓았다.
우리의 위치가 얼마나 존귀한 위치였는가. 하나님이 자기가 섰는데 우리를 의존해서 설려고 만들어 놓은 존재니까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이것은 그 형상에 자기가 의존하겠다는 뜻이다. 조각목에 의존하는 금, 인성에 의존하는 하나님이다. 베실로 짜여진 앙장도 역시 인성을 상징한다. 인성으로 덮어준다는 뜻이다. 그 안에 있는 그 황금들은 모두 인성으로 덮어진다, 보호된다는 뜻이다. 천막이니까 보호가 된다.
사람의 위치를 잘 생각해 보면 너무너무 귀중한 위치에 있다. 아무렇게나 살 위치에 있지 않다. 바로의 국고성을 쌓을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세워줘야 할 그런 위치에 있다. 이 존귀한 자리를 버리고, 존귀한 직분을 버리고 헛된 곳에 우리 인생을 바쳤다. 존귀한 위치를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깨달아야 하고,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 성막은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다. 돌판과 말씀, 돌판은 인성이다. 베드로가 너는 돌이다 그랬다. 너는 게바라 하리라. 사람은 돌이다. 처음에는 흙이었는데 그 흙이 연단의 과정을 거치면 돌이 된다. 그래서 돌판, 이럴 때는 연단을 거친 인성을 말한다. 여기다가 하나님 말씀을 새겼다. 그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증거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디에 새겨야 되는가? 처음에는 흙에 새겨 봤다. 흙에 새기니까 금방 지워져 버린다.
아담에게 너는 이걸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써놓았다. 비가 오니까 지워져 버렸다. 그래서 사탄이 와서 그것 먹으면 죽는다 하더냐, 아니다, 네가 이걸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알고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하니 싹 지워져 버렸다. 그리고 아담의 흙에는 선악을 알면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고 다시 새겨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를 때 흙에 기록하지 않고 돌판에 기록했다. 돌판에 새겨 놓으면 안 지워진다. 돌판은 인성을 말한다.
돌판에 새겨진 하나님 말씀! 이것은 인성에 새겨진 하나님 증거라는 뜻이다. 조각목에 입혀진 궤, 조각목 위에 입혀진 금, 이것은 조각목은 인성을 말하고, 금은 신성을 의미한다.
성막 전체가 하나님과 사람, 신성과 인성의 결합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만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나타날 수가 없다. 혼자 나타날 수가 없고 항상 사람을 의존해서 나타나신다. 반대로 우리 인생은 스스로 영광스러울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의 입혀짐으로 인해서 우리는 영광스러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생 배필이다. 천생배필인데 이혼을 했다. 그래서 안된다. 더 이상의 배필이 없는데 이혼을 했다. 그래서 안된다.
성막은 신성과 인성의 결합체이다. 이것을 어디에 와서 보았는가? 구약시대 사람들은 물질로만 봤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물질이 아닌 한 인격 안에서 이것을 봤다. 이것이 놀라운 발견이다. 물질에서 인격으로 옮겨왔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왔다는 말은 물질적이고,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세계에서 인격적인 세계로 옮겨 왔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는 것이다. 조각목에 금을 입혀 놓은 실제가 인성 위에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이 입혀졌음을 봤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소원이었다. 나무 위에 금을 입히는 것이 소원이 아니고, 사람에게 자기의 신성을 입히는 것이 소원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한 사람이다. 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바깥뜰을 보면 조각목과 놋으로 되어 있다. 기둥과 번제단과 물두멍이 다 놋으로 되어 있는데 그 속은 다 똑같이 조각목이다. 왜 안에는 조각목에 금을 입혔는데, 밖에는 왜 조각목에 놋을 입혀 놓았는가? 이 놋은 심판을 상징한다. 심판 받은 인성을 의미한다. 우리가 성막에 먼저 들어가려면 맨 먼저 바깥뜰을 통과해야 하는데 바깥뜰은 조각목의 놋이 입혀진 상황이다. 심판의 상황이라는 말이다. 금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심판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다. 조각목으로 짠 놋 재단, 조각목으로 만든 놋 기둥, 인생을 상징하는 세마포, 이것으로 모두 바깥뜰이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타락한 인간은 화염검을 뚫고 들어가려면 심판을 받아야 하는구나, 선악과를 먹은 우리는 동산을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염검을 두어서 들어가지 못 하게 했다. 마찬가지로 성막도 처음에 들어가면 화염검이 있다. 그 화염검이 바로 재단이다. 이 재단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통과해서 들어갈 때 비로소 금이 있는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의 건축! 이것은 너무나 신기하다.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재단을 통과해서 들어간다는 뜻이 된다. 출애굽기 25장에 가면 건축을 위해서 예물을 드린다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 위해서 재료가 있어야 한다. 그 재료는 바로 우리의 인격이다. 가장 중요한 재료가 우리의 인격이다. 조각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인성인데 그 인성은 그냥 인성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을 의미한다. 사람으로 지어진 그것을 드려야 한다. 세상에 나와서 다듬고 만들고 허물어진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그 격(格)을 드려야 한다.
그 격(格)이 어디서 나왔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이 격(格)이 드러났다. 이 격(格)을 드려야 한다. 그래야만 건축이 된다. 조각목이 있어야 건축이 되듯이.
돌판으로 드린다. 이것은 다듬어진 돌을 의미한다. 조각목으로 드린다. 이것도 짜여진 돌로 나무로 드린 것이다. 이것은 전부 다 하나님의 용도, 하나님의 필요에 맞도록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다시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증거를 새길 수가 있다.
하나님의 집에 건축에 절대적이고 기본적인 재료는 인격이다. 교회의 수준도 교회의 모양도 우리의 인격에 달려 있다. 금은 그 위에 입혀질 수 있지만 이것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느냐는 것이다. 둥그러면 둥글게 되고 네모나면 네모가 되고, 금은 그냥 모양이 있으면 있는 대로 입혀 질 수밖에 없다. 금이 따로 형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네모면 네모가 되고 내가 세모면 세모가 되고 내가 뿔 달리면 뿔이 달리고 그렇게 된다.
인격을 하나님께서 드리라고 한다. 조각목으로 짠다. 이것은 하나님이 필요하도록 형태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천연적인 것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속리산에 있는 소나무든지 법주사의 소나무든지 한라산에 있는 소나무든지 간에 이것을 어떤 형태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야 한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서 다시 만들어야 한다. 베실로 짠다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덮기 위해서 만든 것인데, 성막의 내용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역시 우리 인성이 필요하다. 오늘 우리 대구 교회 안에 있는 보와 대구 교회에 안에 있는 그리스도, 대구 교회 안에 있는 이 은혜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우리의 인성이 필요하다. 여기 좋은 것이 있는데 이것을 잘 보호하지 않으면 손상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볼 때 좋은 것이 된다.
요즘 물건들은 포장술이 발달되었다. 선진국의 물건하고 후진국의 물건의 차이가 물건 자체도 차이가 있지만 포장술에도 엄청나게 차이가 있다. 중국에서 온 것을 보면 포장이 엉성하다. 한국에서 나온 것을 보면 포장이 좋다. 일본에서 온 것은 포장이 더 좋다.
성막의 내용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포장도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보물을 보호하느냐 하는 것이다. 세상에 나가서 우리가 아무렇게나 해버리면 아무리 좋은 보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 보물이 손상되고 만다. 우리가 잘 보호해야 좋은 것이 될 수 있다.
우리 교회에 대해서도 잘못 말해서 사람들을 걸리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내가 보호해야 할 것을 잘 보호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잘못 말해서, 엉뚱하게 말해서, 교회의 본질도 아닌 것을 말해 버리면, 그 사람들은 그것으로 우리 교회는 이렇다라고 판단해 버린다. 또 내가 잘못 행동해도 그렇다. 사람들이 볼 때 저것이 대구교회구나 할 것이다. 나는 나 혼자니까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다. 나 혼자니까 별거 아니겠지하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나 혼자를 볼 때 다 대구교회로 보는 것이다. 미국사람이 2억이 넘는 사람들인데, 미국사람 2억을 다 보고 미국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사람 한 사람만 보고도 다 미국사람이라고 한다. 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미국사람이라고 한다. 한국사람 한 사람이 하는 것이 다 한국 사람이 하는 것이 되고, 미국사람 한 사람이 하는 것이 다 미국사람이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오늘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나는 개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개인 같지만 개인이 아니다. 남이 볼 때는 나를 개인으로 보지 않는다. 나를 하나의 단체적인 사람으로 본다. 베실로 짠 앙장으로 잘 덮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소유를 드려야 한다. 금과 은과 보석과 귀중품들을 드리라 그러는데,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들이고 가깝게는 애굽을 통해서 받아 온 것들이다. 그것을 성막을 건축하는데 드리라고 하였다.
건축은 드림으로 완성된다. 우리 자신의 인격을 드리고, 우리의 소유를 드리고, 그렇게 해서 성막은 건축된다. 저절로 건축되는 것이 아니다. 창조는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지만 건축은 우리가 아니면 안되는 일이다. 창조는 하나님 혼자서 하는 일이지만 건축은 우리와 협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내가 잘못하면 건축이 안 된다. 내가 잘못하면 건축이 엉성하게 된다.
좋은 건축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좋은 인격을 드린다면, 좋은 재료를 드린다면 좋은 건축이 될 것이고, 좋은 소유를 드린다면 우리는 풍성한 성막이 건축되게 될 것이다.
건축은 하나님의 증거를 형상화시킨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의 형상화, 인격적인 형상화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것이 됐다. 하나님을 보려면 그리스도를 봐라가 되었다. 이 표현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표현하려면 우리 자신을 드리지 않고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세상에 나가서도 내가 그리스도를 표현하려면 내 자신을 드려야 표현된다. 자기를 드리지 않고는 표현 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자기의 소유를 다 내놔야 한다.
어떤 사람 앞에 가서 내가 지식이 있다는 것을 자랑해서는 그리스도가 가려진다. 어떤 사람한테는 돈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면 그리스도가 가려진다. 내 소유를 하나님께 안드린다면 다 가려지고 만다. 내 소유를 하나님께 다 드려야만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된다. 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고, 내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내가 가진 것은 오직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한 것처럼 내가 가진 것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다. 이것을 드러내야 하지 다른 것을 자기가 쥐고 앉았으면 안된다. 소유를 드림으로 건축은 완성된다.
우리는 이 건축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필요하신 것과 우리에게는 어떻게 이 건축이 귀중한 것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건축을 할 수 있는 것과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씀 드렸다. 다음 시간에는 우리가 이 건축 안으로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기 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다 쓸모없이 길바닥에 널려 있던 돌멩이와 마찬가지고 애굽에 팔려가서 종살이하면서 바로의 국고성을 쌓고 있던 사람들인데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구속 안으로 당신의 구원 안으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산에 이르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데만 종사하도록 우리를 배려하여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우리 일생에 할 일이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기를 원하고 깊이 인상 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두 건축 중에서 우리는 어느 건축을 할 것인지, 어디에 속할 것인지를 지혜롭게 선택하는 사람들이 되게 되길 원합니다. 바로의 국고성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전인가, 이 둘 중에 하나밖에는 우리에게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고 우리가 지혜로운 선택 안에 들어가도록 축복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