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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과 기억(1896)』 제2장: 기억과 두뇌
Henri Bergson, Matière et mémoire, Paris: PUF, 1990(1919, origine. 1896),
# “물질과 기억” 2장에 대한 단상
제2장의 제목이 ‘이마쥬들의 재인식’이고 부수적으로 ‘기억과 두뇌’로 되어 있다. 이 장에서 시작에서 기억의 두 종류로, 신체(학과)기억과 인격(독서)기억으로 나눈다. 학과 기억은 습관과 마찬가지로 나의 현재를 구성하며, 표상이라기보다 행동이다. 이에 비해 독서기억은 동반하는 모든 지각과 더불어 내 역사의 한 순간을 구성한다. 이것은 표상과 같아서 여기에는 임의의 지속을 할당할 수 있다. 전자가 반복하는데 비해 후자는 상상한다. 그런데 전자는 노력에 의해 획득되고 나의 의지에 의존하는 데 비해, 둘째는 전적으로 자발적이며 보존에는 충실한 만큼 재생에는 변덕스럽다.
자, 이 양자의 중간 상태가 있다. 한편으로 현실적 지각을 연장하고 다른 한편으로 과거의 지각을 재생한다. 이런 과정에서 과거를 다시 포착하는 것이 재인식이다. 재인식에도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이미 보았던 것, 즉 과거를 현재로서 지각하는 것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현재로서 지각이 추억을 찾으러 기억의 심층에 들어가는 경우이다. 전자의 것은 동일한 닮음 또는 반복의 효과와 같이 습관과 닮았다. 그런데 후자에서는 지각이 과거의 추억들과 접근을 찾고, 지각이 재인식되고 난 뒤에야 추억의 출현 또는 경험했음을 안다. 여기에서 추억이 잔존하고 있다는 것을 넘어서 지각의 재인식은 소멸되었다고 여기는 이마쥬들이 현재하고 있음을 또는 완전히 폐지되지 않았음을 안다. 그런데 많은 맹(盲)환자의 경우에 현재로 지각의 이마쥬를 현실적으로 떠올리지 못하지만 지각이 있기는 한데 나오지 못하거나 또는 신체적 조직화에 무용하게 내버려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현실적으로 지각활동하는 신체적 활동에는 언제나 과거 지각이 이어져(etendue) 있다는 것을 안다. 맹환자들의 경우를 보면, 현실지각과 과거지각 사이에 유대가 끊겼으나 소멸되거나 폐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재인식의 두 종류는 일단 신체적 인식에서 벗어난 것이다. 여기에서 한편으로 자동적 재인식에서는 신체 운동들이 과거 지각을 연장하는(prolonger)하는 것은 유용한 사용으로 편리와 좋은 결과를 이끌고자 한다. 그래서 재인지적 차원으로 반복되면 대상과 멀어지고 지각대상 대신에 표상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주의 깊은 재인식이 있다. 에 있다. 이 재인식은 표상이 지시 또는 지칭하는 상징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해 작동하는 인식의 윤곽을 점점 더 잘하기 위해서 이마쥬-추억을 데려온다. 이마쥬-추억이 대상 지각과 합치하면 할수록 재인식은 분명해진다. 벩송은 대상에 대한 현실적 지각에 덧붙여지는 내재적 지각들이 있으며, 나아가 내재적 지각은 추억들과 연관되어 있다. 이런 이마쥬-추억은 이중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한편으로 지각으로 다른 한편으로 추억으로. 이중화에서 지각이 현실적 대상과 관계맺는 방식이 신체적 행동이고, 지각이 추억과 연관있는 방식이 의식적 작동인 셈이다. 의식적 작동(acte)이 현실화하는 행동과 연관이 없을 경우에도 잔존하여 남아 있으며, 폐기되거나 망각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문제는 벩송이 지각이라는 용어를 이중화에 비추어서 이중적으로 사용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발생적으로 보면 이중화가 아니라 내재적 지각이 먼저이고 그리고 대상에 대한 외적지각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즉 일차적 지각은 의식과 신체의 연관에서 지각이고, 그리고 내적 지각과 외부 대상과의 지각 사이는 재인식의 방식에 따라 관계맺는 방식이 다르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지각의 이중성은 속성의 이중성과 닮았다. 신체와 의식(영혼)은 이중화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나서 신체의 활동(행동)에서 생겨난 지각은 생겨나는 재인식이고, 신체의 행동에서 이루어진 지각은 인지활동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벩송이 제4장의 서두에서 신체 – 지각 – 추억으로 각장에서 다루어 왔다고 하는 설명을 보자. 제1장은 신체를 이마쥬라고 함으로써 지속하는 상태로 보았다. 상태란 말은 만들어진 사실(fait)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 신체는 변전하고 변화하며 운동하는 이마쥬이다. 그렇다고 물체로서 대상화도 아니고 물질로서 추상적으로 관념화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신체는 지속(운동)하는 유동체 즉 흐름이다. 그럼에도 나의 신체는 행동이 수용하고 반사하는 한계에 한정되어 있다고 여기지만, 신체가 연관맺는 방식에 따라 경계의 범위는 훨씬 넓을 수 있다. 그 넓은 범위가 내적 지각의 범위(위상)라고 할 수 있다. 이 범위에 부딪히는 부분이 대상인 셈이다. 그렇다고 내적 지각의 범위가 대상화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의식(영혼)에 내재하는 추억 또는 기억에 비해 내적 지각의 위상은 대상화될 수 있다. 즉 속성의 두 계열, 하나는 지각과 지각된 것의 표상들로 행동과 연결되는 계열이 있고, 다른 하나는 추억들과 기억으로 작동하는 계열이 있다. (우리가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스피노자를 염두에 두고 있고, 통속적 유물론이 아니라 실재적 유물론의 관점을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이 두 계열이 모두 운동 중이다. 하나는 신체 안에서 감각운동체계로 운동중인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신체 안에서 기억 활동으로 흐름 중인 운동이다. 두 운동은 연속성이며 불연속은 없다. 둘 사이에 불연속으로 여기는 것은 어느 한 쪽만을 언술로 표현하기 때문에 지성은 착오를 하는 것이다. 한 회오리(꼬갈)의 양 끝 선분을 서술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신체라는 물체에서 보면 감각운동기제의 제약으로 이원론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지성이 행하는 추상화의 이중 방향에서 경계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착오이다.
그러면 지각이 추억들의 출연을 기계적으로 결정하는가? 아니면 추억들이 지각 앞으로 자발적으로 나아가는가? 뇌와 기억 즉 전자는 뇌 또는 신체가 습관적으로 행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아라는 인격체가 흐름을 이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주의 깊은 지각을 잘 들여다보면 그 지각에는 항상 기억을 달고 있다. 즉 이마쥬들이 지각과 연계되고, 지각이 표상화하면서 닫힌 것 같지만 지각에는 이미쥬-지각과 이마쥬-추억과 연결되어 있다. 제3장 첫 쪽에 그림은 간단히 3단계로 설명했지만, 8자 도표에서 여러 회로로 그려놓았다. 이 회로들은 추억들의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질적 차이이며, 상호 침투하고 흐르고 있어서 실재상으로는 위상적이지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흐름의 절단이 추억을 원자나 요소로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벩송이 제시한 당대의 생리-의학의 자료들 중에서 맹(盲)환자나 농(聾)환자의 경우에서 기억은 단절된 것이 아니고, 추억의 등장은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이제 그러면 연속적인 흐름이라는 추억과 지각 사이에 운동은 어떻게 실행되고 검증되는가? 하나는 추억들이 운동으로 나오는 과정을 실증적으로 검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추억들이 현실화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운동과정과 현실화에서 지각의 위상을 보면, 한편 추억은 분명히 작동하는데 신체의 장애로 생긴 운동과정의 장애 또는 손상으로 생긴 환자들도 있고, 다른 한편 기억(추억들)의 현실화에서 재인식(자기형성)의 심층적인 부분이 드러나면서(표출하면서) 고유함과 특이성이 작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억 상실증 환자들의 예를 검토하여, 기억은 언제나 작동중이고 추억들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단지 운동으로 가는 기제가 문제일 경우에 상실 또는 폐기로 보일 뿐이다. 게다가 현실화는 운동기제에 관계 없이도 상상으로 충분히 등장하고 또한 추억들은 순서와 단계의 관계 없이도 현실화로 올라온다는 점이다. (51QLE)
Ch. 2. De la reconnaissance des images - La mémoire et le cerveau
제2장 이마쥬들의 재인식- 기억과 두뇌
I. 기억의 두 형식 Les deux formes de la mémoire (83)
II. 재인식 일반: 이마쥬-추억과 운동 De la reconnaissance en général: Images-souvenirs et mouvements(96)
운동과 추억 Mouvements et souvenirs (sous-titre) (96)
III. 추억에서 운동으로: 재인식과 주의 Passages des souvenirs aux mouvements: La reconnaissance et l'attention (107)
추억과 운동 Souvenirs et mouvements 107-119,
1) 120-128
추억의 실현 Réalisation des souvenirs 2) 128-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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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2. De la reconnaissance des images - La mémoire et le cerveau 81
제2장 이마쥬의 재인식- 기억과 두뇌
신체는 단지 운동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자신이 잡아두지 않을 경우에 어떤 운동기제에 전달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전도체(un condicteur)에 불과하다. ... 이 이미지는 우리가 생성일반 속에서 어떤 순간적인 절단을 행사하면서 매 순간 얻게 된다. 이 절단(coupe) 속에서 우리 신체는 중심을 차지한다. (원 81)
1. 과거는 두 가지 다른 형태로 존속한다. 그것은 1) 운동기제들mécanisme moteurs 속에 2) 독립적인 추억들souvenirs indépendants 속에 존재한다.(82) [83-96]
2. 현재적 대상의 재인식은 대상으로부터 나올 때는 운동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주체로부터 나올 때는 표상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82) [96-107]
3. 사람들은 시간을 따라 배열된 추억들로부터, 미세한 단계들을 통해, 공간 속에서 그것의 시발적이거나 가능적인 행동을 그리는 운동들로 이행한다. 뇌의 상태는 이 운동들에 손상을 입힐 수 있지만, 이 추억들에 대해서는 그럴[손상 입힐] 수 없다.(83)
[107-119, 추억과 운동 120-128, 추억의 실현 128-146]
1. 기억(mémoire)의 두 가지 형태들 (83)
기억의 두 형식 Les deux formes de la mémoire
학과추억(Le souvenir de la leçon)(84)과 독서추억(souvenir de telle lecture)(84) [전자는 외운 기억 후자는 본성을 변하게 하는 기억이다. 전자는 습관 비인격적이며 자동적이며 후자는 개인적(인격적)이고 자발적이다.]
[학과추억] 학과는 암기하기 하게 되면.... 마침내 전체로 조직화된다. 바로 이 순간에 나는 암기 할 수 있게 된다. 이제 이것은 추억이 되고 나의 기억 속에 새겨졌다고 말해진다. [독서추억] 독서는 앞선 것들과 뒤따른 것들, 그리고 그것이 시간 속에서 점유하는 위치 자체에 의해 구별된다. 간단히 말해 이 각각의 독서는 내 앞에서 내 역사의 정해진 사건처럼 지나간다. 사람들은 이 이마쥬를 추억이라 하고, 이것이 기억 속에 새겨졌다고 한다. 이 두 기억은 동일한 것인가? (83-84)
학과의 추억은 암기된 한에서 습관이 가진 특성들 모두를 갖는다. 습관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동일한 노력의 반복에 의해서 획득된다. ...하나의 운동기제 속에 축적되고 동일한 순서로 잇따르고 동일한 시간을 점유하는 자동적인 운동들의 닫힌체계 속에 축적된다. (84) [학과의 추억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라고 하면 마르고 닳도록이 자연적으로(무의식적으로) 신체의 습관처럼 나오는 것을 말한다. 신체가 고착된 방식으로 행하듯이 고정된 방식으로 표상이 다시 나오는(재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51PKD) / 이는 미분화된 것으로 존속한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독서 추억은 ...두 번 읽든 세 번 읽든, 습관의 특성을 갖지 않는다. 그[첫 번째로 읽는] 이마쥬는 기억 속에 첫째로 필연적으로 각인되고, 왜냐하면 그[첫 번째]와 다른 독서들은 정의상 다른 추억들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삶의 하나의 사건과 같다. 덧붙여지면 ... 원래의 본성을 변질시킨다. 이마쥬를 떠올리기 위한 나의 노력이 이것을 반복함에 다라 점점 더 쉬워진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en soi) 고려된 이마쥬는 미래에도 그러할 모습으로 우선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84) [이전의 추억도 기억 속에 있고 그리고 보태어진 추억에 의해 기억은 변화되며, 숨어 있더라도 노력하면 끌어낼 수 있는 이마쥬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작동이 기억이다. 기억은 추억들이 보태지거나 부분이 (신체를 통해) 삭제되는 것도 영향을 받는다. (51PKD)]
독서의 추억과 학과의 추억 중에서 ..., 독서는 ...동반하는 모든 지각과 더불어 내 역사의 환원할 수 없는 한 순간을 구성한다. 독서의 추억은 하나의 표상, 단지 하나의 표상일 뿐이다. 그 기억은 내가 내 맘대로 늘이거나 줄일 수 있는 정신의 직관 속에 들어온다. 나는 그것에다 임의적인 어떤 지속을 할당할 수 있다. ... 암기된 학과의 추억은 비록 내가 이 학과를 내적으로 반복한데 지나지 않을 때조차 어떤 정해진 시간을 요구한다. 그것은 상상 속에서라도 필요한 모든 발음의 운동들을 하나하나 전개시키기 위한 만큼의 시간을 요구 한다. 따라서 그것은 더 이상 표상이 아니라 행동이다. 실재로 암기된 학과는 자신의 기원을 드러내고 자신을 과거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는 어떤 표시도 겉으로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은 걷거나 쓰는 나의 습관과 마찬가지로 나의 현재를 구성한다. 그것은 표상되기보다 체득되어(vecue)있고 작동되어(est agie) 있다.(85) [독서 쪽은 작동하는 중이며 유동적이고, 학과 쪽은 이루어져 습관적인 쪽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의 생성하는(naturante) 와 생성된(naturantée)과 닮았다.]
[말하자면, 의식은 우리에게 두 종류의 추억 사이에 깊은 차이(difference profonde) 즉 본성상(en nature)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심층과 표면 사이와 같다.]
첫째 추억[독서 추억]은 우리 일상적인 삶의 모든 사건들이 펼쳐짐에 따라 그것들을 이마쥬-추억(images-souvenirs, 표상)의 형태로 기록할 것이다. 이 추억은 어떤 세부 사항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이 추억은 각각의 사실과 각각의 동작에 그 위치와 날짜를 남겨 놓을 것이다. 유용성이나 실재적 적용이라는 속셈 없으며, 그 기억 속에 과거를 오로지 자연적 필연성의 결과로 축적될 것이다.(86) [모든 추억은 기억 속에 있다. 나오고 안나오는 것은 실용과 이해관계이다. ]
[둘째 추억 습관추억]이처럼 신체 속에 축적되는 아주 다른 종류의 경험이 형성되는데, 그것은 완벽하게 만들어진 일련의 운동기제들이며 외적 자극들에 점점 증가하고 다양화하는 반작용들과 함께 끝없이 증가하는 많은 가능한 질문들에 이미 준비된 답변을 동반한다. 우리는 이 운동기제들을 그것들이 작동되는 순간에 의식한다. 그리고 현재 속에 축적된 과거의 노력들 전체에 대한 이러한 의식도 물론 역시 기억이다. [/] 그러나 그것은 첫째 기억과는 심층적으로 다르다. 언제나 작동을 향해 있으며 현재 속에 자리 잡은 채 단지 미래만을 바라보고 있는 기억이다. (86)
이 두 기억들 중에 하나는 상상하고(imaginer), 다른 하나는 반복하는(répéter) 데, 후자는 전자를 보충할 수 있고 종종 환상[l'illusion]을 줄 수도 있다.(87) - [전자는 인격적이고 후자는 비인격적이다. 전자는 자발적(spontané) 후자는 비의지적(involontaire)] / [들뢰즈에 따르면, 전자는 확장 반복이며, 후자는 동일반복인 셈이다.(51PKH)]
그러나 반복에 의해 구성되어야 하는 것[습관기억]과 본질상 반복될 수 없는 것[인격 기억] 사이에 극단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는가? 자발적(spontané) 추억[인격기억]은 즉시 완전하다. 시간은 거기에 무언가를 덧붙이면 반드시 그 이마쥬를 변질시키게(dénaturer) 된다. 시간은 그 기억에 대해서 위치와 날짜를 보존한다. 반대로 학습된(appris) 추억[습관기억]은 더 잘 암기됨에 따라 시간 밖으로 나와서 점 점 더 비인격적인 것, 우리 과거의 삶에 점점 더 낯선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반복은 결코 자발적 추억을 습관적 추억으로 전환시키는 효과를 갖지 못한다. (88) [자발적 추억은 습관적 추억과 다른 방향이다. 속성이 다르다 또는 아펙투스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방금 구별한 두 기억 중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기억으로 보이는 것은 첫째이다. 둘째 것은 심리학자들이 일상적으로 탐구하는 것인데, 그것은 기억 자체라기보다 오히려 기억에 의해서 조명된 습관이다.(89) [전자는 정신병리학, 후자는 행동주의 심리학에 가깝다.] [기억의 총체적 덩어리와 기억의 축적된 단계 사이의 차이가 아닐까? 철학적으로는 전자가 형이상학 후자가 인지론이 될 것이다.(51PKD)]]
암기된 학과의 예는 상당히 인위적이다. (89)
따라서 우리가 구별한 두 기억들 중 능동적이거나 운동적인 둘째 기억은 항상 첫 째 기억을 억제하거나, 아니면 이 기억 중에서 현 상황을 조명하고 유용한 방식으로 보완할 수 있는 것만을 받아들임에 틀림이 없다. 관념들의 연합의 법칙들은 이렇게 도출된다.(90) [현실적으로 표면에 드러난 것은 둘째기억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신체와 관련된 습관의 기억을 연구하는 것에는 조건반사도 행동주의도, 단계적 발생 심리학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들뢰즈가 말하는 행동학은 전자에 속한다. (51PKD)] [둘째는 탈영토화의 방향으로 편위를 발생하게 하고, 변용태를 형성한다. (51PKH)]
[1]독립적인 두 기억들에 대한 우리의 구분이 근거 없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 구분이 사실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신경계의 감각-운동적 평형이 교란될(troublé) 대부분의 경우에[une inhibition, 제지당할 경우에] 자발적인 기억이 고양됨을 확신해야 할 것이고, [2]반대로 정상상적인 상태에서는 현재의 평형을 공고히 하는데 유용하지 않는 모든 자발적인 추억들이 억제된다는 것, 그리고 결국 습관-추억을 형성하는 작용에서는 이마쥬-추억이 잠재적으로 개입됨을 확신해야 할 것이다. 이 가설이 사실들에 의해 확증될 수 있을까?(91) [[1]신경계의 장애이라도 자발적 기억은 작동하는가? [2]정상인의 경우 자발적 기억은 어떤 작용을 하는가?] / [첫째 답: 그렇다. 둘째 답: 침잠하여 드러나지 않는다.] [제지당하는 경우 또는 억제당하는 경우에 신경증이 발생한다고 보는 프로이트 류는 고양(편위 또는 파생의 창발)이 시대와 사회에 맞지 않는다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지, 왜 발생 또는 생성하여 변형하고자 하는 노력에 주목하지 않느냐는 것이 들뢰즈/가타리 입장이다. 시대의 고착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탈영토화가 있다. 환경 변화과 인지 발달로 탈주선을 찾고, 새로운 변용태를 만들려는 노력에서 되기(생성)이 죽 있어왔다가 균열을 틈타 분출 용솟음친다. 저항, 항거, 봉기, 혁명은 용솟음의 양태들이다. (51PKD)]
[전자의 경우 기억 기제 손상, 후자의 경우는 관념연합을 다룰 것이다.] [전자에서 농(surdité), 후에서 맹(cécité)을 다룬 이유가 있을까?]
미친 자들이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련의 질문들에 명민하게 대답하는 일도 있다. 언어는 그들에게 반사작용과 같은 방식으로 기능을 한다. (91-92)
자발적으로(spontanément) 한마디도 말할 수 없는 실어증 환자들이 노래를 할 때는 한 멜로디의 단어들을 아무 오류없이 상기하는 일도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그들은 여전히 어떤 기도문, 수의 계열, 한 주의 날들과 한 행의 달들을 유창하게 암송할 것이다(92)
[신비적인 요소들] 정신 속에 보이지 않지만 현재하는 것, ...의식의 모호한(obscure) 심연으로부터 일종의 경고(avertissement)를 받고 있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 완전한 이마쥬가 거기에 있으나 달아나는 것처럼 느끼고... 활동하는 순간에 사라지는 진실한 환영(fantôme)...(92)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뒤에 끌고 오다가 뒤돌아보는 순간 지하(심층)으로 사라진다. (51PKH) ]
아주 다른 목적에서 시행된 최근의 실험과정 중에 ... 실험자가 그들의 눈앞에 몇 초동안 일련의 문자들을 보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도록 요구했다. ...그들을 시각적 이마쥬를 완벽하게 소유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그들은 “원하는 순간에 최소한의 부분도 재생할 수 없었다. 즉 매우 놀랍게도 윤곽이 사라져버렸다” 그들 중 한사람의 말에 따르면, “현상의 기초에는 전체의 표상, 즉 전체를 포괄하는 일종의 복합관념이 있었는데, 거기서 부분들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표현할 수는 없으나 느껴졌다.”(93) [부분과 전체에 관한한 벩송의 견해를 설명해준 수학자 로트망의 로칼과 글로발에 관한 설명 참조(51PLA)]
이 자발적(spontané) 추억은 아마 획득된(acquis) 추억 뒤에 숨어 있다가 갑작스런 섬광들에 의해 드러날 수 있다 [특히 애정적 추억은 무심결에 등장한다 자발적이지만 비의지적]. 그러나 그것은 의지적(volontaire) 기억(memoire)이 조금만 운동해도 모습을 감춘다.(93) [자발적 기억(무의식)의 발현은 항상 삶의 주의에 의해 차단되거나 억제된다. 그러나 언제나 섬광처럼 튀어나올 준비(지체)가되어 있다.]
환자가 그 이마쥬를 보존하고 있다고 믿었던 문자들의 계열이 사라지는 것은 특히 그가 그것들을 말로 반복하기 시작할 때이다. “이러한 노력은 이마쥬의 잔재를 의식 밖으로 밀어내는 것처럼 보인다.”(93)
[예] 기억술의 상상적 절차 -- 자발적(spontané) 기억을 전면으로 가져와서 그것을 활동적(actif) 기억처럼 우리의 자유로운 처분에 맡기는 것...(93-94) ... 어떤 저자가 말하듯이, 정신적 사진술(la photographie mentale)의 능력은 의식에 속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잠재의식에 속한다. .. 예를 들어 (94) [요즘에서는 오티즘(자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 올리비에 색스의 저술들을 보라(51QLA)]
(95)과거는 .. 극단적인 두 형태로 축적되는 것으로 ... 한편, 과거를 이용하는 운동기제[신체, 두뇌]들의 형태로, 다른 한편 개인적 이마쥬-추억의 형태로 축적된다. 첫째는 진정으로 자연의 방향으로 향해 있으며, 둘째는 그 자체로 놓아두면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갈 것이다. 첫 째는 노력에 의해서 획득되고, 나의 의지(volonté)에 의존하며, 둘째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며, 보존에는 충실한 만큼 재생에는 변덕스럽다.(95)
둘째 기억이 첫째의 기억에 할 수 있는 규칙적이며 확실한 유일한 봉사는 첫째 기억의 선택을 조명하기 위해 현재적 상황에 유사한 상황으로부터 선행했거나 뒤따랐던 것의 이마쥬들을 그 기억에 제시한다. 관념들의 연합은 그와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다. [흄을 생각하자.] 다시 떠오르는 기억이 반복하는 기억에 규칙적으로 복종하는 경우이외 다른 경우가 없다.(95) [관념연합은 새로운 기억도 반복에 종속시킨다.]
우리는 이 중간적 상태들을 고찰하고, 이 상태들 각각에서 시발적인 작용(action naissance)의 몫 즉 뇌 몫과 독립적인 기억의 몫 즉 이마쥬-추억의 몫을 정하려고 한다. 이 중간적인 상태는 어떤 측면에서는 운동적이기에 ...현실적 지각을 연장하며(prolonger), 그러나 다른 한편 이마쥬들인 한에서 이 상태들은 과거의 지각[affectus의 변용]을 재생한다. 우리가 현재 속에서 과거를 다시 포착하는 구체적인 작용이 바로 재인식(reconnaissance)이다.(96)
2. 재인식에 관하여: 이마쥬-기억들과 운동들 (sous-titre) Mouvements et souvenir
재인식 일반 De la reconnaissance en général (96)
이마쥬-추억과 운동 Images-souvenirs et mouvements
[과거의 기억 전반이 어떻게 표면의 운동에 접속 되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관념연합이다. 반복의 방식에 재현을 설명하는 것은 관념연합론의 결과론 인 셈이다.(51PKH)
‘이미 본 것’(déjà vu)의 감정을 설명하는 일상적인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A] 어떤 사람들은 현재적 지각(une perception présente)을 재인식하는 것은 그것을 사유에 의해 과거의 환경 속에 삽입하는 것이라고 한다.(96) [어쩌면 현재적 지각은 신체 지각의 유비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을 것이다.]
따라서 재인식하는 작용이란 현재적 지각에 이전에 그것과 인접하여 주어진 이마쥬를 연합하는 것이다.(97) 그러나 사람들이 올바르게 관찰하였듯이, 다시 나타난 지각이 원초적 지각에 동반하는 상황들을 암시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원초적 지각이 우선적으로 자신을 닮은 현실적 지각에 의해 환기될 때만 가능하다. 그 예로서 최초의 지각A가 있다 하자. 동반적인 상황들인 B, C, D는 인접성에 의해 거기에 연합되어 있다.(97)
[인접성(contiguïté)에 의한 연합] [인접성은 지각의 부분관계 차원이다 - 그러나 부분의 조합이 총체에 대한 재인식이 아니라는 점에서 인접성은 재인식의 초기단계이다.] ; [지각된 A^과 추억 A는 유사하다 하더라도 지각과 추억은 차원이 다르다 - 말하자면 하나는 신체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의 것이다. 둘 사이에는 내용상 다르다](97) 둘째는 [유사성(ressemblance)에 의한 연합]이다.
[문제는 유사성의 연합에서 둘 사이의 정합성이 어떻게 보장되는가 이다. 얼마나 많은 오류를 범하는가? 알았고 생각했던(보았던)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경우는 매우 많다. 재인식의 오류이다.]
[B]사람들은 이번에는 현재적 지각이 항상 자신과 닮은 이전 지각의 추억을 찾으러 기억의 심층으로 들어간다고 가정한다(97)
‘이미 본 것’의 감정은 지각과 추억 사이의 병치 또는 혼합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관찰하였듯이, 유사성은 정신이 접근시키는 항들, 따라서 정신이 이미 소유하는 항들 사이에서 정신에 의해 세워진 관계이며, 따라서 유사성에 대한 지각은 연합의 원인이라기보다 오히려 연합의 결과이다 (97-98) [심리학적으로] ... [원본 소유 인정하는 .. 유사성을 인정하는 심리학자들 부로샤르(Brochard)와 라비에(Rabier)]
[사본과 유사성을 인정] 객관적 유사성의 견해가 - [필롱(Pillon)과 셜리(James Sully)] -가 있다. 사람들은 [상호] 일치하는 뇌의 흔적들이라는 가설로 도피할지도 모른다. ... [생리학적으로] 또 훈련에 의해 용이하게 될 뇌의 운동이라는 가설, [회프딩, Höffding] 또는 추억들이 놓여 있는 세포들이 지각 세포들과 소통한다는 편리한 가설 [뭉크 Munk]속으로 피신할지 모른다.(98)
이 가설들은 모든 재인식을 지각과 추억 사이의 접근으로부터 이끌어 내려고 한다. 그러나 추억은 종종 지각이 재인식 된 후에야 출현할 뿐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경험이 여기에 있다.(98) [이 가설들에서는 추억의 이마쥬가 뇌에 축적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만일 재인식이 이런(지각과 기억의 연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재인식은 과거의 이마쥬가 사라졌을 때 소멸될 것이고, 이 이마쥬가 보존되어 있을 때, 항상 일어나야 할 것이다. (99-100).
[이런 연합 가설의 비판으로] 시각적 기억의 억제는 그 결과로 반드시 심리맹(cécité psychique)을 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환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빌브란트(Wilbrand)의 거리와 방향 재인식 불가능 환자 - 그 환자는 자신이 거주했던 마을을 눈을 감은 채로 그릴 수 있었고, 거기서 산보하는 상상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일단 그 길에 들어서자, 그에게 모든 것이 새로운 것처럼 보였다. 뮐러(Müller)와 리사우어(Lissauer)의 환자는 - 그 환자들은 사람들이 이름 부른 대상의 내적인 영상(vision)을 떠올릴 줄 알고 그것을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대상이 자신 앞에 제시될 때 그것을 재인식할 수 없다. 대상에 대해 말하지만 앞에 두면 모르는 경우, 샤르꼬(Charcot)의 보고서 - 시각적 이마쥬들은 완전히 소실되었으나 지각들의 재인식이 전부 폐지되지 않았다. (99) [재인식의 오류는 다른 것이다.] / [심리맹(cécité psychique), 시각기관과 신경계의 통로에 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심리적(두뇌의 작동상)인 이유로 재인식이 불가능한 경우를 말한다. ]
재인식이란 무엇인가?.../ 우선 극한적 경우 순간적인 재인식 즉 어떤 명백한 기억[추억]들을 개입시키지 않고 신체만이 할 수 있는 재인식이 있다. 이것은 표상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루어진다.(100) ... [도시 산보의 예, 처음과 친숙한 다음] ... 이 두 극단적인 조건들 중에서 하나는 지각이 그것을 동반하는 한정된 운동들을 아직 조직화하지 않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이 동반적인 운동들이 나의 지각이 무용하게 될 정도로 조직화되어 있는 경우이다.(101)
일상적 대상을 재인식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을 사용할 줄 아는 데 있다. 이것은 너무나 적절한 말이어서 우리가 심리맹이라고 부르는 재인식(불가능) 질환에 최초의 관찰자는 행위불능증(apraxie)라는 이름을 부여했다.(101)
[그러나] 운동으로 연장되지 않는 지각이란 없다. 리보(Ribot)와 모즐레(Maudsley)는 오래 전부터 이점에 주목했다. 감관 교육이란 바로 감각적 인상과 그것을 이용하는 운동 사이에 세워진 연결들 전체로 이루어진다. 인상이 반복됨에 따라 연결은 견고해 진다. (102)
예를 들어 암기된 한 멜로디의 각음이 다음 음에 기대어 그것이 실행되는 것을 지켜볼 때 일어나는 일이 그러하다. 따라서 만일 모든 일상적 지각이 운동적 수반에 의해 조직되어 잇다면, 일상적 식별의 감정은 이러한 조직화(organisation)의 의식 속에 그 근거를 갖는다. (102)
실제로 운동적 기구들은 지각의 영향아래서 만들어지고 지각은 신체에 의해 점점 더 잘 분석되는 반면에, 우리의 지나간 심리적 삶은 그대로 있다. 그것은 - 우리가 나중에 입증하겠지만 - 시간 속에 위치한 자신의 사건들의 세부사항 전체와 더불어 존속한다.(103, 167) [관계남(정)의 오류는 그 여성과의 만남의 사실은 그대로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의 심리(영혼) 속에 있는 것을 재인식하지 못했더라도 있다는 점을 느끼고 있었으리라.. 전체와 더불어 존속한다.(51PKH)]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측면에서 운동은 이마쥬를 준비하는데 기여한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의 과거 이마쥬들의 전체가 우리에서 현재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하더라도, 모든 가능한 표상들 가운데서 현실적 지각(la perception actuelle)과 유사한 표상이 선택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103) [관계남(정)에게 미투를 제기한 그녀에게는 표상이 현재적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선택에 의한 표상이 있다. 관계남(정)은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이 (지나간) 이마쥬들은 권리상 현재적 상태에 의해 덮여 있어야 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때 우리의 의식에 나타난다. 따라서 기계적인 재인식을 야기하는 운동들이 한편으로는 이마쥬에 의한 재인식을 방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돋워준다고 말할 수 있다. 원리상[논리상] 현재는 과거를 대치한다. (104)
만일 우리의 분석이 정확하다면, 재인식에 관한 질병은 극히 다른 두 형태를 띨 것이고, 두 종류의 심리맹이 확인 될 것이다. 실제로 한편으로는 과거 이미지들을 떠올리는 일이 불가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각과 동반적인 습관운동들 사이의 유대가 끊어질 뿐이다.(104) ... /첫째 점에 관해서는 반론이 있을 수 없다. ...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추억들이 어느 지점까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실제로 사라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끄는 것은 시각적 기억이 거의 소멸되지 않았는데도 재인식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경우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105) [망각(소멸)은 인간이 현실을 살아가게 하는 한 방편이다. 마땅히 내재하는 추억임에도 망각으로 덮어버린 것은 실생활에서 필요하지도 선택받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51PLH)]
[소멸되지 않았지만, 재인식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경우] 그러한 사실들 중 첫 째는 방향 감각의 상실이다. [방향맹] 리사우어(Lissauer)의 환자는 자신의 집으로 가는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했다. 뮐러(Müller)의 환자의 예 - 심리맹의 환자는 몇 달의 훈련을 거친 후에도 자신의 방을 찾아갈 수 없었다. (105) [감각운동기제의 고장일 경우... 꽃을 반쪽 만 그리는 경우도 있다. ‘인지부조화’라는 것은 광범위하다.]
. 앞에서 인용한 책, p. 898 (mm 105)
둘째로 더욱더 특징적인 사실이 있다. 우리는 이 환자들이 그림을 그리는 두 가지 방식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둘 중에서] 첫째 방식은 종이 위를 더듬으며 몇 개의 점들을 고정시키고, 매 순간 이미지가 대상을 닮았는지를 확인하면서 이 점들을 서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것은 점묘화법이란 부른다.(105-106) ... [일상인은 선을 그린다]... 그[환자]는 연속된 선으로 그릴 수 없을 것이다. [리사우어 환자의 경우이며 이런 심리맹은 드물다.] [둘째의 방식] 실필증(失筆症, cécité verbale)[실독증 失讀症]의 경우, 즉 알파벳의 문자들에 제한된 시각적 재인식의 상실의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런데 이 경우 환자가 문자를 보고 쓰려할 때 문자들의 운동(mouvement)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포착하는 데 무능하다는 것은 일상적으로 관찰되는 사실이다. 그는 그림[글자]이 모델과 일치하는지를 매순간 확인하면서 임의의 한 점으로부터 문자를 그리기 시작한다.(106)
[실필증 환자에서] - 여기서 소멸된(abolie) 것은 바로 지각된 대상의 분절(artuculation 마디)들을 분간하는 습관, 다시 말하면 대상의 시지각을 대상의 도식을 그리는 운동적 경향에 의해서 완성시키는 습관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고했듯이, 재인식의 원천적 조건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06-107)
우리는 이제 운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동적 재인식에서 이미쥬-추억의 규칙적인 개입의 재인식으로 나가야 한다. 첫 번째의 것[운동에 관한 것]은 부주의 상태에서 재인식이고, 두 번째[이마쥬-추억의 개입]는, 우리가 곧 보겠지만, 주의깊은(attentive) 재인식이다.(107) [전자의 재인식은 습관에 맡긴 방심이고 후자는 인격의 개입에 의한 자아의 개입이다. 그래서 두 번째에서 자아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 주의깊은 재인식 역시 운동들에 의해서 시작된다. 그러나 자동적 재인식에서 운동들이 지각을 연장하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유용한 결과들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이며, 따라서 그것은 우리를 지각된 대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데 반해, 주의 깊은 재인식에서는 반대로 대상의 윤곽을 강조하기 위해 운동들이 우리를 대상 앞으로 데려간다. 그 결과 이마쥬-추억들은 거기서 더 이상 부수적이 아니고 지배적 역할을 하게된다. (107) [운동기제의 활동도 이마쥬-추억들의 역할을 배제하지 못한다. 이 추억들은 실재적으로 운동에 내재하고 현재화되 있다. (51PLH)] - [들뢰즈의 영화(L'image-mouvement. Cinéma 1, 1983, L'image-temps. Cinéma 2, 1985,): 영화1에서 현실의 운동에 대한 지각적 관점에서 영화2에서 과거의 부분(추억)의 개입으로 지속적 재인식으로 향한다. 즉 시간-이미지에서 이마쥬- 추억이 지배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운동이미지가 사실에 대한 설명 또는 표면이라면, 시간-이미지는 과거와 연결 또는 과정을(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부)를 보여주면서 실재성의 의미를 다시 파악하게 한다. 주의 깊은 재인식은 이 부분이 전체와 연관 속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리라.(51PLH)]
(10:33, 51OMD) (11:19, 51PLH) (9:36, 51QKJ)
[번] 기억들과 운동들 / (sous-titre) 추억과 운동(Souvenirs et Mouvements)
3. 기억들로부터 운동들로 가는 점진적 이행. 재인식과 주의 (107)
추억에서 운동으로: 재인식과 주의 Passages des souvenirs aux mouvements; La reconnaissance et l'attention (Oe)
[2.에서 재인식 일반은 현실에서 신체적 활동과 연관이며 3.에서 주의깊은 재인식에 대한 주의는 심리적, 인격적이다. 그러고 나서 [A]. 추억이 신체에 개입(120-128), [B]. 심층이 현실에 투사(128-146).]
재인식이 주의 깊은 경우에, 즉 이마쥬-추억들이 현재적 지각에 규칙적으로 결합하는 경우에, 지각은 추억들의 출연을 기계적으로 결정하는가[습관], 아니면 추억들이 지각 앞으로 자발적으로(spontanement) 향해 가는가? [자아의 개입] / 뇌와 기억(mémoire) 사이에 설정할 관계들의 본성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에 달려있다.(107-108)
추억(s)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첫째 가설에서 기억(m)의 장애가 뇌의 손상에 의해 야기되었다는 것은, 기억들이 손상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과 함께 파괴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반대로 둘째 가설에서 이 손상들은 우리의 시발적인 또는 가능적인 행동에 관련되지만 단지 그뿐이다. 이 손상들은 한편 신체가 대상 앞에서 이마쥬의 소환에 적절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고[néverose, hysterie], 다른 한편 이 기억이 현재적 실재와 접근하는 것을 차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psychose, schizo]. ....전자의 경우이든 후자의 경우이든 뇌의 손상은 기억들을 진정으로 파괴하지 못한다. / 이 두 번째 가설이 우리(Bergson)의 가설이 될 것이다.(108) [첫째 가설에서는 브로카와 베로니카와 연관이고 둘째 가설에서는 심리적으로 신경증과 정신병에 관한 논의인 셈이다. (51PLH)
주의(l’attention)이란 무엇인가? 한편으로 주의[작용]은 지각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고, 지각으로부터 세부사항들을 이끌어 내는 것을 중요한 결과로 갖는다. 따라서 질료의 측면에서 고찰되면 주의작용은 지적인 상태의 일정한 증대로 환원될 것이다. ... 그러나 다른 한편 의식은 이러한 [내재적] 강도의 증가와 외적인 자극이라는 더 커다란 힘에 기인하는 [강도의] 증가 사이에 환원불가능한 형식의 차이를 확인한다. (109)
사람들은 지각을 판명한 지성의 시선 아래 놓이기 위해, <정신의 집중>에 관해서 말하거나, 아니면 <통각적(aperceptif)> 노력에 관해서 말할 것이다. 어떤 이는 이 관념을 물질화하면서, 뇌 에너지의 특별한 긴장을 가정하거나, 또는 중추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소비되어 받아들여진 자극에 덧붙여진다고 가정하기도 할 것이다.(109)
점차로 사람들은 주의 작용을 정신보다 신체의 일반적 적응으로 정의하기에 이르고, 의식의 이러한 태도가 무엇보다도 하나의 태도에 대한 의식이라고 간주하게 될 것이다. 그 논쟁에서 리보가 취한 입장이 그러하다. 비록 공격받기는 했지만, 그의 입장은 그가 기술한 운동들에서 단지 현상의 부정적 조건만을 보고자 한다면, 생생한 힘을 보존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109-110)
그러나 몇몇 저자들이 주목하고 서술했던 더욱 미묘한 운동이 덧붙여지는 데, 이 운동들을 지각된 대상의 윤곽들을 다시 돌아보는 역할을 한다. 이 운동들과 함께 주의작용에서 단순히 부정적인 것이 아닌 적극적 작업이 시작된다.(110)
/ 외적 지각이 실제로 우리에게 그것의 핵심적인 윤곽을 그리는 운동들을 야기하는 반면, 우리의 기억(m)은 받은 지각 위로 그것을 닮은, 그리고 우리의 운동들이 이미 소묘를 한바 있는 과거의 이마쥬들을 향하게 한다. 이처럼 기억은 현재적 지각을 새롭게 창조하거나 또는 오히려 현재적 지각에 그것의 고유한 의미나 동일한 종류의 이마쥬-추억을 보냄으로써, 그것(m)은 이중화한다(doubler). ... 우리는 이마쥬 대 이마쥬로 작업하는 주의의 요소작용을, 중요한 전보를 접수하고 그것의 정확성을 보증하기 위해 단어 대 단어로 원본의 자리에 전보를 재발신하는 전신기사의 작업에 비유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111)
그러나 전보를 보내기 위해서는 기구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각으로부터 받았던 이마쥬를 거기에 반사하기 위해서는, 지각을 종합의 노력(un effort de synthèse)에 의해서 재생, 즉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주의 작용이 분석의 기능(une faculté d’analyse)이라고 말한바 있는데 그것은 옳다(111)
우리의 기억(m)은 그것이 새로운 지각의 방향으로 던진 다양하고 유사한 이미지들을 차례로 선택한다. 그러나 선택이 우연적으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가설들을 제안하는 것, 멀리서 선택을 주재하는 것, 그것은 바로 모방운동(mouvement d'imitation)들인데, 이 모방 운동에 의해 지각을 연속되게 하고, 또한 이 운동들은 지각과 상기된 이마쥬들에 공통의 틀(cadre commun)의 구실을 할 것이다. (112)
그러나 모든 주의 깊은 지각은 진실로, 말의 어원적 의미에서, 반성(reflexion, 반사)을 전제한다. 반사란 대상과 동일하거나 유사하게 그 윤곽들을 따르는 이마쥬를 능동적으로 창조하여 외적으로 투사하는 것이다. (112)
그러나 대상과 동일한 이마쥬들 뒤에는, 기억 속에 축적되어 있고 그것과 단순히 유사성을 갖는 다른 이마쥬들, 결국 다소 먼 친연성(parenté, 친족성)을 갖는 이마쥬들이 있다. 이 이마쥬들은 모두가 지각과의 만남을 행해있고, 지각의 실질로부터 양분을 받으면서, 지각과 함께 와화되기 위해 충분한 힘을 얻는다. 뮌스터베르크(Müsnsterberg) 귈페(Külpe)의 실험.... 독서방법에 관한 골드샤이어(Goldscheider)와 뮐러(Müller)의 천재적 실험... ... [이들은] 그라스헤이(Grashey)에 반대하여...이 실험자들은 일상적인 독서가 진정으로 예측의 작업이며, ...모든 간격을 이마쥬-추억들에 의해서 보충한다는 것을 확립하였다.(113)
우리의 판명한 지각은 진실로 닫혀진 원에 비유될 수 있는데, 거기에서 정신으로 향해진 이마쥬-지각과 공간 속에 던져진 이마쥬-추억은 서로 뒤따른다.(113)
반대로 우리는 반성적 지각이란 하나의 순환(회로 circuit)을 형성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회로에서 상호 긴장 상태에 있으며, 따라서 대상으로부터 출발한 어떤 진동도 정신의 심층 속에서 중간에 멈출 수 없다.(114)
이 각각의 회로들 안에는 기억의 전체가 들어온다. 왜냐하면 기억은 항상 현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한히 팽창할 수 있는 이 기억은 대상 위에 점점 증가하는 수의 암시적 사물들을 - 때로는 대상자체의 세부사항을 때로는 대상을 조명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동반적인 세부사항들을 - 반사한다. 이처럼 지각된 대상을 하나의 독립적 전체의 방식으로 재구성한 한 후에, 우리는 그 대상과 더불어 대상이 체계를 형성할 조건들을 점점 더 멀리까지 재구성한다. (115) - 참조: 베르그송의 도표, ‘중첩된 8자의 도표’(115) 이 도표에서 굵은 선의 회로들은 기억(mémoire)의 확장[추억의 평면들]이며 점선으로된 회로들은 지각된 대상을 파악하는 층들(couches)이다. [이 도표상으로 선들의 회로는 내재성이며 점선들의 회로는 대상의 외재성이다. 전자의 강조는 관념론에서 후자의 강조는 실재론에서 주장이다. 그런데 베르그송은 둘 다 이마쥬의 흐름이며 관여하는 방식의 차이이다 전자는 두뇌에서 신체로 행동의 방향이며 후자는 대상에서 신체의 자극을 통한 두뇌로 방향이란 점에서 다르다.] /따라서 동일한 심리적 삶이 기억(mémoire)의 뒤따르는 단계들에서 무한히 반복될 것이고, 정신의 동일한 행위가 다수의 상이한 높이들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주의의 노력을 할 때 정신은 항상 전제적으로 주어지지만, 정신은 그것을 과정을 완성하기 위해 선택한 수준에 따라 단순화되거나 복잡화된다. 보통 우리 정신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현재적 지각이다.(115-116) [외적 위험에 대한 대비이기 때문이다] [지각은 절편이나 조각일 수 없다. 경곅다 흐릿할 진동의 연속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파문(波紋)이 퍼져나가는 것과 같이]
종의 방식... 축소된 기억이 현재적 지각 속으로 아주 잘 삽입되는 순간이 도래하는데, 이 때 사람들은 어디서 끝나고, 어디서 기억이 시작되는지를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116) [전체적 기억의 현실의 개입은 위치도 자체의 크기도 알 수 없지만(그래서 흐름이라 하지만), 실재하는 덩어리가 있고 현실에 영향과 감화(affecter)주는 것은 분명하지 않는가. 선택기제인 신체에 묻는 것이 아니라 신체에 영향을 주는 실재성에 대해 물을 묻는 것이다. (51PLH)]
기억 작용은 더 높은 실용적 중요성을 얻게 된다. (116)
우리 생각으로는 우리의 지각이 모방운동(le mouvement d'imitation)들로 자동적으로 분해되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의 활동성에 호출(appel)이 던져진다. 그 때 하나의 밑그림이 우리에게 제공되고, 우리는 거기에 다소 먼 추억들을 투사하면서 그것을 세부사항과 색깔을 재창조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통 그런 방식으로 사태를 고찰하지 않는다. 때로는 정신의 절대적 자율성을 부여하고[관념론]... 때로는 상상적 과정들을 현재의 지각으로 나오는 그 만큼의 기계적 효과들로 간주한다[실재론]. ... 전자의 경우에서도 후자의 경우에서도 사람들은 신체의 진정한 기능을 오인하고 있다. 운동기제의 개입이 도대체 어디에 필요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어디서 그것을 멈추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더욱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117) [일반성에 대한 두 관점 유심론과 유물론의 생각인데, 베르그송은 [언어] 일반관념은 생성중이라고 본다.(제3장)] [추억의 개입을 통한 새로운 현재성, 즉 탈영토화 이루어질 경우에 개념의 창조가 이루어질 것이다. (51PLF)] [가령 내가 여러 가지를 성찰하며 고민하는 중에도 추억들 중에 소록소록 솟아나는 어떤 것이 지금 현실의 도식(지도)와는 다른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도식이 삶의 양식을 변경시킬 때 달리 사는 것이고, 인류적 차원에서 탈영토화의 길을 걷는 것일 것이다. (51PLH)]
그러나 만일 우리의 가설이 근거가 있다면, 재인식에 관한 이 손상들은 결코 기억들이 손상받은 지역을 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신체가 외적 자극에 대해 이마쥬-추억을 자동적으로 취할 수 없을 있고]... 때로는 추억들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수단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인할 수 있다] ... 첫째의 경우에 손상은 모아들여진 진동을 자동으로 행사된 운동으로 연장시키는 운동기제들에 관련될 것이다. 이 때 대상은 더 이상 주의를 [자동적으로]고정시킬 수 없을 것이다. 둘째의 경우에 손상은 의지적 운동들이 필요로 하는 선행적 감각을 제공하면서 이 운동들을 준비하는 피질의 특수한 충추들에 관련될 것이다. 전자든 후자든 현실적인 운동들이[감각-운동기제] 손상을 입거나 미래의 운동들이 준비될 수 없게 된다[상상기제-인격]. 즉 추억들의 파괴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118)
정신병리학은 이러한 예측들을 확증해 준다. 정신병리학은 심리맹(盲)(cécité psychique)과 심리농(聾)(surdité psychique), 그리고 언어맹(cécité verbale 언어실맹, 실독증)과 언어농(surdité verbale 언어 실농, 어농)이라는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두 종류[심리면와 실행면]가 존재함을 우리에게 알려준다.(118-119) 첫째 종류에서 시각적 기억들 또는 청각적 기억들은 환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상응하는 지각들에 적용될 수 없다. 둘째 종류에서 기억들이 환기 자체가 억제된다. 우리가 말했듯이 손상은 정말로 첫 번째 경우에서는 자동적 주의(attention automatique)의 감각-운동적 기제에 관련된 것이고, 두 번째 경우에서는 의지적 주의(attention volontaire) 상상적 기제에 근거하는 것인가? (119)
우리는 뇌가 실제로 이마쥬-추억들을 축적할 수 있는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말의 청각적 재인식에서 1) 감각-운동적인 자동적인 과정(processus automatique), 2) 이마쥬-추억들의 능동적인, 말하자면 원심적인 투사(projetion active excentrique)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119) [첫째 습관기억과 두뇌, 둘째 인격기억과 투사]
[A] [(sous-titre)추억과 운동(Souvenirs et mouvements): 언어적(verbale, 신체) 측면]
(120-128)
10 나는 어떤 두 사람이 내게는 알려지지 않은 언어로 대화하는 것을 듣는다. 내가 그들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그것으로 충분한가? ... 반대로 이 똑같은 소리의 덩어리에서 두 대화자는 자음들, 모음들 그리고 서로 닮지 않은 음절들을 극 결국 구별된 단어들을 분간한다(120). - [우리는 소쉬르의 관여적 b/p에 대한 설명, 그리고 언어는 통시태가 아니라 공시태임을 실감하게 한다.] / 문제는 어떻게 추억일 뿐인 언어(langue)의 인식이 현재적 지각의 물질성을 변형할 수 있고, 동일한 신체적 조건에서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어떤 이들은 현실적으로(actuellement) 들을 수 있는지 아는 것이다. ... 만일 지각된 소리들이 음절로서 그리고 단어들로서 이미 분리되고 구별되고, 결국 지각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것들이 기억에 말을 할 것이며, 어떻게 그것들이 청각적 이마쥬들의 창고 속에서 그것들 위에 겹쳐져야만 하는 것들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120)
/ [생리학자(심리학자)는] 실어증 환자에게서 피질의 파괴 ... 상피질 또는 하피질 손상으로 설명할 것이다.(121)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한편으로 청각적 인상에만, 다른 한편 청각적 추억에만 관계한다면 난점은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121) ... 이렇게 해서 우리가 청취된 말의 운동적 도식(schème moteur)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우리 의식 속에서, 시발적 근육 감각들의 형태로 전개될 지 모른다. ... 그것은(어떤 새로운 언어의 요소들에 맞는 청각을 형성한다는 것) 청각의 인상에다 성대근육의 운동적 경향들을 조정하는 것이고 운동적 수반을 완성하는 일이 될 것이다.(121)
하나의 신체적 운동을 배우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운동을 총체 속에서(dans son ensemble)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 그러나 우리의 시지각이 한 연속된(continu) 전체(un tout continu)에 대한 지각인데 반해, 우리가 그것의 이마쥬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운동은 무수한 근육적인 수축과 긴장으로 구성되어 있다.(122) ... 반복과 훈련으로부터 생겨날 진행(progrès)은 ... 다른 요소들의 운동과 연대성(solidarité)을 보존하면서 ...정확성을 보장하는 자치성(autonomie)을 요소들의 운동의 각각에서 부여한다. ... 반복의 효과[과정]는 진실로 우선 분해하는(décomposer) 것, 그 다음에 재구성하는(recompoer) 것, 이렇게 해서 신체의 지성에게 말하는 것이다. ... 반복은 신체로 하여금 분할하고 분류하게 한다. 반복은 신체에게 본질적인 것을 드러내준다. 반복은 전체적 운동 속에서 그것은 내적인 구조를 표시하는 선들을 하나하나 재발견한다. (122)
[언어와 마찬가지로] ... 내가 한 선율(mélodie)을 포착하고, 그것의 음률(도식 dessin)을 따라가고, 심지어는 그것을 나의 기억 속에 고정할 수 있다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독일어를 말하는 한 영국인에게서 변음과 억양의 특이함을 어렵지 않게 분별한다. 따라서 나는 그의 말을 내적으로 수정하기도 한다. ... 운동적 실어증(aphasie motrice)이 언어농(surdité verbale)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123)
도식(schème)과 말투(parole)의 관계는 크로키와 완성된 그림과 같다. ... 신체의 논리는 생략(sous-entendus, 암묵)을 인정하지 않는다. 신체의 논리는 요구된 운동의 모든 구성적 부분들이 하나하나 제시되고, 그 다음에는 전체로 재구성되기를 요구한다. 여기서 어떤 세부 사항도 소홀히 하지 않는 완전한(complète) 분석과 어떤 것도 축약되지 않는 현실적(actuelle) 종합이 필요하게 된다.(123)
남은 것은 이런 종류의 수반[근육 운동 도식]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지, 그리고 실제로 항상 생겨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한 단어의 실제적인 발음은 굴절을 위해 혀와 입술의 동시적인 개입을, 발성을 위해 목구멍의 개입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날 숨의 흐름을 생산하기 위해 흉곽 근육들의 개입을 요구한다고 알려져 있다.(124)
환자는 추락한 후에 단어들의 발음의 기억을 상실했고, 따라서 자발적으로 말하는 기능을 상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들이 그에게 말한 것을 아주 정확하게 반복했다(124). 리히트하임(Lichtheim)의 환자(6형태 중에서 넷째와 여섯째)
다른 한편 자발적으로 말하는 기능은 손상되지 않았으나 완벽하게 어농이 나타난 경우에서, 환자는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나 다른 사람의 말을 반복하는 기능은 여전히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바스티앙(Bastian)처럼 이 현상들은 말에 대한 발음 분절의 기억이나 청각적 기억이 단순히 무기력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청각인상들은 이러한 기억을 무기력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는데 불과하다는 것을 증거한다고 말할 것인가? 우리가 다른 곳에서 한번 고찰하게 될 이 가설은 오래전부터 롬베르크(Romberg), 봐쟁(Voisin), 윈슬로(Winslow), 쿠스마울(Kussmaul)의 예 ... 반향언어(écholalie), ... 몇몇 사람들은 말을 듣는 청각 중추와 말하는 발음 중추를 연결하는 한 특수한 운동기제를 가정했다. (125)
이 현상들은 청각적인 말의 인상들이 발음 운동으로 이어지는 경향(tendance) ...그리고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청취된 말투(parole)의 두드러진 특징들이 내적으로 반복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어떤 경향을 증거한다. 그런데 우리의 운동 도식(schème moteur)은 이와 다른 것이 아니다.(125-126)
환자는 단어의 청각적 추억과 청각 기관을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로 보존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발음하여 들은(소리를 들은) 어떤 단어들도 재인식하지 못했다.(126)
문제는 무엇보다도 뇌가 이미지들을 축적할 수 있는지 아는 것이고 그 다음에 지각의 전달 통로들 안에 손상이 있음을 확정한다고 해서 이 현상에 관해 심리학적 탐구를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이다. [기억의 잔존에 대한 탐구는 계속된다]」(126)
그러므로 손상이 입을 수 있었던 것은 운동도식이다.(127)
[아들러가 전하는 언어농 사례] 환자들은 소음을 아무리 강하게 하더라도 거기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은 반면, 그들의 청각은 최대의 섬세함을 보존하고 있었다.(127) 다시 말해 그들에게 소리는 더 이상 운동적 반향(echo moteur)을 찾지 못했다.
샤르꼬(Charcot)의 환자는 일시적으로 언어농의 상태가 되었는데 추시계의 울림소리가 아주 잘 들리는데도 그 소리를 셀 수 없었다고 이야기했다.(127) 따라서 그는 아마도 그 소리들을 분리하고 구별하는데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와 같은 형태의 다른 환자는 사람들의 대화에서 말(parole)을 지각하지만 혼란된 소음(bruit confus)처럼 지각한다고 말했다. (127)
마지막으로 청취된 말(parole)의 지성을 상실한 환자는 사람들이 그에게 단어를 여러 번 반복하게 할 때, 특히 그것을 음절마다 또박또박 발음하게 할 때, 그것을 회복한다. 이 사실은 청각적 기억들을 보존하고 있으나 언어농이 절대적으로 선명한 여러 경우들에서 확증된 것인데 특별히 의미심장하지 않는가? (127-128)
스트리케(Stricker)의 오류는 청취된 말 전체가 내적으로 반복된다고 믿는데 있었다. 그의 주장은 운동적 실어증이 언어농을 초래한 경우는 단 하나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단 순한 사실에 의해 이미 논박될 것이다. 그러나 소리들을 분절하고 그것의 도식을 세우는 어떤 운동적 경향이 존재(existence)한다는 것을 입증하는데는 모든 사실들이 일치하고 있다. (128)
이 반복과 재인식의 내재적 운동들은 의지적 주의의 전주곡과 같은 것이다. 이 운동들은 의지와 자동현상 사이의 한계를 표시한다. ...그러면 충만한 재인식자체가 이루어지게 될 완전한 재인식은 무엇인가?(128) [과거 기억과 몸 전체의 연결의 재인식]
[번] 기억들의 실현
[B] [(sous-titre) 추억들의 실현 Réalisation des souvenirs: 심리적(인격)측면 이다] (128-146) [-추억이 재인식으로 실현되었다는 것은 자기 방식으로 안다는 증거]
[* 왜 대상인식을 언어 인식처럼 설명해야 하는가? -인격 때문이며, 언어처럼 분해되었다가 재구성되는 과정을 겪기 때문이다. 추억의 실현이란 인격의 외화방식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또한 이런 재구성하는 재인식(인격의 자기 재형성)은 각 인간에게 고유하며, 개인의 특이성을 살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설 따라 삼천리에서 지정학적 위상은 그 인격형성에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각 개인이 겪는 경험의 영역에서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이 재구성은 공시태 위에서 성립한다.]
20 [(1) 감각-운동적인 자동적인 과정(processus automatique), (2) 이마쥬-추억들의 능동적인, 말하자면 원심적인 투사(projection active excentrique)]
우리는 운동으로부터 기억으로 이행해보자. 주의 깊은 재인식은 진정한 회로(circuit)이다. 이 회로에서 외적 대상에 대칭적으로 놓여 있는 우리 기억(mémoire)이 대상을 향해 추억들(souvenirs)을 투사하기 위해 더 높은 긴장을 취함에 따라 대상들은 우리에게 자신의 점점 더 심층적인 부분들을 드러낸다.(128-129) - [이는 기억의 작용뿐만 아니라 인식의 지평의 확대에서 추억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진실이라면, 청자는 단번에 상응하는 관념들 사이에 위치해서, [청취자는 들었던 관념(청각 이마쥬)들에 대응하는 자신(인격) 속의 추억(관념)들 사이에서] [과거 추억 관념들, 즉] 그것들을 청각적 표상들로 발전시키고, 이 청각적 표상들은 운동적 도식 속으로 끼어들어 가서는 지각된 자연적 소리들을 덮어야 할 것이다. 어떤 계산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자기 스스로 다시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인의 말을 이해한다는 것은 지적으로 재구성하는 것, 즉 관념으로부터 출발하면서 귀가 지각한 소리들의 연속성을 지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주의하는 것, 지성으로 재구성하는 것, 해석하는 것은 단 하나의 동일한 작용으로 혼합되는데, 이 작용이란 정신이 자신의 수준을 정하고, 그 자신이 가공되지 않은 지각들과 관계에서 이 지각들의 다소간 근접한 원인의 대칭점을 선택하면서, 지각들을 덮을 추억들을 그것들을(지각들을) 향해 흘려보내는 것이다.(129) [- 베르그송의 가설이자 자기 이론이다 그림에서 실선의 회로가 점선의 회로를 덮으러 갈 것이다.].
[연상이나, 인접성에 의한 설명에서는] 이처럼 심리학적 관찰과 임상적 사실이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129) ../.. 단어의 청각적 이마쥬에서,... 다른 높이 다른 음색의 청각적 추억들, 모든 이마쥬들이 뇌 속에서 축적될 수 있을까? 뇌가 선택한다면 뇌가 선호하는 이마쥬는 어떤 것일까? 그럼에도 뇌가 하나의 이마쥬를 선택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보자.(130)
우리가 우선 발음하기를 배우는 것은 단어(mots)가 아니라 구절(phrases)이다. 한 단어는 언제나 그것을 동반하는 다른 단어들과 접합되어 있다.(130) - [베르그송은 단어보다 구절이 우선이며, 멜로디처럼 분절된 단어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랑그의 이해는 단어와 단어들의 연결에 있다.] .... 한 선율(mélodique)의 주제의 각 음이 주제 전체를 모호하게 반영하듯이 말이다. 따라서 뇌 내부의 어떤 장치들에 의해 그려지는 표본적인 청각 추억들이 있고, 그것들이 중도에서 소리의 인상을 기다린다고 해보자. [그러면] 이 인상들은 재인식되지 않은 채로 지나갈 것이다. 실제로 어디에 [인상들 사이에] 공통의 척도가 있으며, 어디에 메마르고 타성적이고 고립된 이마쥬와, 구절로 조직화된 단어의 살아있는 실재성, 사이에 접촉점이 있는가? (131)
감각적 실어증-정해진 어떤 단어들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상실된 경우.... 때로는 정신적 청취 기능이 완전히 소멸되므로, 사라진 것은 추억의 총체이고, 때로는 이 기능의 일반적인 약화가 나타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감소한 것은 기능이지, 추억들의 수가 아니다. (131) ...단어를 되찾아 주기 위해 그 예로 환자들에서, 첫 음절을 알려주거나[베르나르 바빌레 Bernard et Babilée], 용기(격려)를 하거나[리거, Rieger], 감동(émotion)도 효과가 있다[베로니케, Wernicke 경우].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범주에서 추억의 상실은 일반적으로 갑작스러우며, 둘째 범주에서는 점진적이다. 첫째에서 기억(mémoire)에서 떨어져 나간 추억(souvenirs)들은 임의적이고 심지어 변덕스럽게 선택된 어떤 것들이고, ... 둘째에서 단어들은 방법적이고 문법적인 순서를 따라 사라지는데, 이것이 바로 리보의 법칙이 지시한 순서이다. 즉 고유명사, 보통명사, 마지막으로 동사들이 사라진다. 바로 이것이 외적인 차이들이다. 이제 여기에 우리가 보기에 내적 차이가 있다. [둘째 범주에 대해 벩송 EC wp4장.]
첫째 기억상실에서 윈슬로(Winslow)가 전하는 환자 - F자만을 망각한 환자(132). 다른 환자는 그가 배웠던 언어 그리고 또한 그가 썼던 시를 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시를 짓도록 요구받았을 때, 그는 거의 같은 시들을 다시 썼다. 게다가 사람들은 그러한 경우에서 종종 사라진 기억들의 완전한 회복을 목격한다. (133)
쟈네(Pierre Janet)가 기술한 인격분열...(133) 그리고 인격분열 중에서 몇몇은 최면술사들이 추론한 “부정적 환각(hallucination négatives)”와 “지표점을 가진 암시들”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 (133)
둘째 기억상실에서(133) .. 환자가 같은 순서로 뇌의 세포가 손상되는시킨다는 것은 어색한(étrange) 일이 아니겠는가? (133)
다음과 같은 특이한 사실을 주목해보자. 자신이 찾고자 하는 명사를 되찾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게 된 어떤 실어증 환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루어진 적절한 완곡어법(périphrase)으로 그것을 대치할 것이다: 가끔 명사가 떠오르지 않으면, 그는 정확한 단어를 생각할 수 없어서 그것에 상응하는 행동을 생각하였는데, 이 태도는 문장이 생겨나는 운동의 일반적 방향을 결정한다.(134) -
우리에게 일어나는 경우(정상적인 사람의 경우) 잊어버린 이름의 머리글자를 유지하고 있어서(생각이 나서), 그 머리 글자를 발음함으로써 그 이름을 다시 발견한다. (134). 이처럼 둘째 종류의 사실에서 전체적으로 손상된 것은 기능이다. 첫째 종류의 사실들에서 망각은 외견상으로는 더욱 분명하지만, 실제로는 결코 결정적이 않음에 틀림이 없다. 전자의 경우건 후자의 경우건, 우리는 뇌수질의 특정한 세포들 속에 위치화된 추억들 그리고 이 세포들이 파괴되면 소멸될지 모르는 추억들을 발견하지는 못한다.(134)
그러나 우리 의식에게 질문해보자. 타인의 말을 이해하려는 생각으로 들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질문해보자(134). .... 운동 도식은 자신의 억양들을 강조하면서, 그 대화자의 사유의 굴곡을 고비마다 따르면서, 우리의 사유에 길을 제시한다. 운동도식(schème moteur)은 그리로 돌진하는 유동적 덩어리(masse fluide)가 지향하는 형태를 자신의 형태에 의해 결정하는 빈 용기(recipient vide)이다.(135) - [운동도식은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의미에서 빈 그릇이다. 그렇다고 그릇이라는 틀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틀이 있기는 있다. 그것은 신체이며 이 신체 속에 이동하는 어떤 것을 유동적 덩어리라고 한다. 이것이 (전기적) 회로라는 명칭과 같은 것일 것이다.] [들뢰즈는 형식에도 기표체계에서 이중성 내용에도 이중성을 말한다. (51PLH)]
사람들은 [지성으로] 진행(progrès)보다 사물(choses)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연속적 진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세 개의 항이 있다. 생경한(brute) 지각, 청각적 이마쥬, 관념.... 순수경험을 만족하기 위하여, 반드시 이 관념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청각적 추억들의 결합은 관념의 덕을 보고, 생경한 소리는 추억에 의해서만 완전하게 된다.(136) [베르그송의 진행을 내부에서 외부로 간다. 이에 비해 관념연합이나 인접을 주장하는 사람은 외부에서 내부로 간다] ... [이들의 주장하는 방식에서는] 병치된 정지점들이 운동자체를 재구성하는데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제논에 대한 반박과 같다]
[이를 증거 하는 것으로] 감각적 실어증의 도식들(schémas)들에 대한 역사
샤르꼬(Charcot), 브로벤트(Broadbent), 쿠스마울(Kussmaul), 리히트하임(Lichtheim) 등은 관념화 중추(centre ideationnel)의 가설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 관념들의 중추는 분석에서 곧 바로 취소되었다. ... 이 중추를 여러 가지 중추로(시각 촉각 청각 중추들)로 분해할 수밖에 없었고, ... 이 중추들을 둘씩 짝지어 소통하는 길을 상승하는 길과 하강하는 길로 나누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137)
비스만(Wysman), 묄리(Moeli), 프로이트(Freud), 등의 다른 도식이 있다.(137) ... 도식들이 점점 복잡해짐에 따라 ... 도식의 복잡성은 바로 사람들이 처음에 섞어 놓은 중추들을 분해한데 기인하다. (138) -
실어증의 이론에 관한 복잡성은 이처럼 그 자체로 해체된다. 따라서 최근의 병리학이 도식들에 관해서 점점 회의적이 되면서, 오로지 사실들의 기술로 회귀하는 것을 보고 놀랄 필요가 있겠는가? (138)
감각적 실어증 ... 같은 단어가 그것이 점하는 위치와 그것이 결합하는 항들에 따라 표현할 수 있는 무수한 상이한 관계를 생각해 보라!(138) [단어가 문장 속에 위치와 관계에 따라 다르다.] ... 그것은 각각의 이미지가 자신의 관념을 가지러 간다는 가설을 당신이 점차 포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139) ... 한 언어(langue)는 세련된 것이든 조야한 것이든, 그것이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함축한다. 말투(parole)이란 그것이 병렬된 단어들에 의해 진행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불연속적[digital]이기 때문에, 사유의 운동의 주요한 단계들을 나타내는 표식들을 점점 멀리 세우게 하는 것일 뿐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내가 당신의 말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당신과 유사한 사유로부터 출발해서, 표지판처럼 때때로 길을 나에게 제시하도록 정해져 있는 언어적 이마쥬들의 도움으로 당신 사유의 우여곡절을 따를 때뿐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언어적 이마쥬들 자체로부터 출발한다면 나는 당신의 말투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잇따르는 두 언어적 이미지들 사이에는 모든 구체적인 표상들이 채우지 못하는 어떤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실로 이마쥬들은 사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사유는 하나의 운동이다. (139)
따라서 사람들은 이마쥬-추억들과 관념들을 이미 만들어진 사물처럼 다루고, 다음에 거기에 머물게하기 위해 문제가 많은 중추들을 설정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해부학, 생리학, 관념연합론은 같은 견해이다. ... 관념연합론의 견해는 단지 모든 과정을 단계(phase)들로 자르고, 그 다음에는 이 단계들을 사물(chose)로 고체화하는 추론적 지성(intelligence discursive)의 항구적인 경향성만 남는다.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 이미지로부터 물체를 추론하듯이, 수학적 도형으로부터 추론적 지성은 이데아를 추론한다. 그러나 이데아는 추론적 지성(dianoia,)을 총합을 넘어서는 직관이다. 베르그송은 이데아 자체를 운동으로 즉 변화하는 상태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 지적 직관(noesis, intellection)을 지성보다 본능에 두고 있다.] 이 견해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편견으로 선험적으로 생겨난 것이기에... (139) [- 이것은 착각을 넘어서 모순에 이르게 된다. (착각140 - 모순141) ]
우리가 말한 바 있듯이(128), 관념들 즉 순수 추억들은 기억(mémoire)의 심층에서 불리어 나와 운동도식 속으로 점점 더 잘 삽입될 수 있는 이마쥬-추억으로 발전한다. 이 추억들은 ... 표상으로 ... 그 다음 지각으로 나아간다. .... 중단없는 연속적 과정을 통해 추억은 현실화(s'actualiser)된다. ...그런데 이것은 정확히 경험이 증거한 것이다. (140)
[두 모순의 경우] [실험심리학의 경우 - 관념연합의 길을 가는 경우] 완성된 지각이 어떻게 어떤 정확한 순간에 다른 성향들을 찾으러 갈 것인가? ([실험]심리학의 모순 베인, 리보) (140)
--- [병리학의 모순]지각이 손상되지 않았음에도 추억총체가 우리를 회피하는 경우도 있다. .. 심리맹이 보는 능력이 있듯이 심리농이 듣는 능력이 있다. [예를 들어] 청각적 기억의 상실의 경우가 회전 돌기 부분의 손상에 관련되어 있다. 이 상해가 소위 말한 난청을 야기한 경우는 단 하나도 알려져 있지 않다. ... 사람들은 원숭이에게 실험적으로 그 상해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데, 오로지 정신적 난청의 상태, 즉 그가 듣고 있는 소리들에 대한 해석 불가능만 야기 되었다. 따라서 지각과 추억에 각각 다른 신경요소를 할당해야 할 것이다.(141) [현대 생리학은 이렇게 할당하려고 한다] [(마실) 경로에 따라 개념의 형성이 달라진다는 가설을 세운다면 경로의 일부 또는 전분의 손상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완전함에도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들 심리맹와 언어맹의 차이도 이해방식의 차이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다]. .. [- 추억이 지각으로 되는 경우에서... 두 개의 상반된 가설이 있다. 하나는 지각과 추억을 동일시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구별한다.(141) / - 일반사람들은 구별된 지각과 정태상태인 이마쥬 추억을 사물(choses)로 생각하지 역동적 진행(progrès)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사물이라 생각하는 경우에 지각이 추억 없이도 완전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진행이라 보는 경우는 둘 중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142)
한편 기계적 반작용 ... 수동적 병렬만이 있고...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가(Bergson) 좀더 나중에 보겠지만 이마쥬-추억자체는 순수 기억의 상태로 환원되면 작용하지(inefficace) 않는 상태로 머물 것이다. 이 순수 추억(souvenirs purs)은 잠재적(virtuel)이기 때문에 그것을 끌어당기는 지각에 의해서만 현실화(actuel)될 수 있다. 구별된 지각은 두 흐름, 즉 외적 대상으로부터 오는 구심적 흐름과 우리가 순수추억이라 부르는 것을 출발점으로 취하는 원심적 흐름에 의해 야기된다.... 첫 번째는 기계적 작용... 두 번째는 현실화된 추억.... 이 두 흐름이 결합하여 만나는 지점에서 판명하고 재인식된(distincte et reconnue) 지각이 형성된다. (142) [벩송에서 지각 형성은 두흐름의 만나는 위상이다. 사람들은 만나는 위상을 대응 또는 대칭으로 여긴다]
추억들이 위치화를 주장할 경우 심각한 이율배반이 나올지 모른다. 우리는(베르그송) 뇌를 추억의 위탁소(dépositaire)로 생각하지 않을 경우 이미 알려진 사실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탐구할 책임이 있다.(143) - [“내적 관찰(142)”이 필요하다.]
기계적 작용을 검토하자... 그런데 사실상 지각들 각각은 이러한 상당수 감각들, 즉 모두 함께 공존하거나 특정한 질서로 놓여진 감각들을 포괄한다. 그리고 이 공존을 보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질서와 공존은 감각기관으로부터 온다.(143) ...거대한 건반에 비유할 수 있다.(144) -- 이제 외적 대상과 감각기관, 이 둘 모두를 제거해 보라. 동일한 요소적 감각들이 자극될 수 있다. 왜냐하면 [건반의]의 동일한 현들이 같은 방식으로 울릴 준비를 한 채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심리적 원인(cause)이 관심있는 모든 현을 직접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정신적 청취(audition mentale)은 위치화가 가능한 것처럼 보이나, 다른 한편 위치화를 인정할 수 없다. 이 후자만의 가설이 그럴듯한데... 이 뇌수질의 영역은 청각중추에 비하여 청각기관과 대칭점에 위치한다. 이 뇌수질의 영역은 정신적 귀(oreille mentale)일 것이다. [대칭 전신 전화국] / 모순은 사라진다. 한편으로 다시 떠올린(상기된) 청각적 이마쥬가 최초의 지각과 동일한 신경요소들을 진동시킨다는 것, 추억은 점진적으로 지각으로 변형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단어와 같은 복합적인 소리를 상기하는 기능은 지각 기능과는 다른 신경물질의 부분들과 관련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현과 건반의 비유] 따라서 심리맹의 경우에서 실제적 청취기능은 정신적(mentale) 청취 옆에 살아 남아 있다. 현들은 아직도 거기에 있으며, 외부소리의 영향아래 여전히 진동한다. 결핍된 것은 바로 내적인 건반이다.(145) [현은 있는 데 건반이 없다, 즉 소리를 울리지만 음(note)가 없다.]
앞에서 중추들은 감각기관들로부터, 따라서 실재적 대상(objet réel)으로부터 인상을 받는다. 뒤에서 중추들은 중개와 중개를 거쳐[여로 회로의 진동의 물결을 따라 공명되면서] 잠재적 대상(objet virtuel)의 영향을 받는다. [철학사적으로 전자는 사물 후자는 표상이다, 여기서 중추는 둘 사이의 역동적 관계로서 매듭과 매듭사이 그물의 코와 코 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것은 상태와 유동 또는 지속이기 때문에 어느 위치를 말할 수 없다. 궂이 말하자면 신체 전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감각기관이 실재적 대상의 위탁소가 아니듯이 이마쥬들의 중추들은 더 이상 순수추억들, 즉 잠재적 대상들의 위탁소가 아니다.(145) / 이것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무한히 축약된 표현이라는 것을 덧붙이도록하자.
여러 감각적 실어증[의 사례들]은 한 청각적 이마쥬의 상기가 단순한 작동(acte simple, 등질적이고 단일적)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입증한다. 의도와 이마쥬-추억사이에 자주 매개적 추억들이 개입하는데, 매개적 추억들은 우선 다소간 멀리 떨어진 중추들에서 이마쥬-추억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그 때 관념은 잇따르는 단계들을 통해 언어적(verbale) 이마쥬라는 이 특별한 이마쥬 속에서 구체화된다. (145) [이 과정은 복잡하다고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각에서 관념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순수 추억]에서 지각으로 이행한다. 그리고 [주의깊은] 재인식은 특징적 과정은 구심적이 아니라 원심적이다.(145-146) [‘이미 보았다’가 지각과 맞지 않는 경우는, 추억이 사물이 아니라 이마쥬 총체로서 형성중인 일반관념이기 때문이며, 순수 추억의 현실화에서 이마쥬 회로의 연결상 착오에서 생긴다.]
순수추억은 그것이 현실화됨에 따라, 신체 속에 상응하는 모든 감각들을 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잠재적인 감각들 자체는 실재적이 되기 위해 신체로 하여금 행동하는 경향이 있고, 자신들이 습관적으로 선행자 역할을 했던 운동들과 태도들을 신체에 새기는 경향이 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른바 감각 중추들의 진동들은, 즉 보통은 신체에 의해서 완성되거나 소묘된 운동을 선행하는 그리고 이 운동들을 준비하고 시작하는 것을 정상적인 역할로 취하는 진동들은 감각의 진정한 원인이라기보다는 감각의 잠재력(puissance)의 표시이며, 감각의 효율성의 조건이다. 잠재적 이마쥬가 실현되는 과정은 이 이마쥬가 신체로부터 유용한 행동방식들을 얻는데 이르는 일련의 단계들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른바 감각 중추들의 자극은 이 단계들의 마지막 단계이다. 즉 그것은 운동적 반응의 서막이며, 공간 속에서 한 행위의 시작이다. 다시 말해서 잠재적 이마쥬는 잠재적 감각으로 발전하고, 잠재적 감각은 실재 운동으로 발전한다. 이 운동이 실현되면서 그것이 자연적으로 연장할 감각과, 감각과 한 몸이 되려했던 이마쥬를 동시에 실현한다.(146). (3절, 13:20 51PLH) .
(2장: 22:29 51QKF, 주가 본문에 있음) (각주로 내림, 22:26 51Q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