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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합과 다양체(L’ensemble et la multilplicité)」
들뢰즈, 「내재성: 생명(L’Immanence: une vie…)」(1995)과 「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L’actuel et le virtuel)」(1995, 1996출판), 이 두 편은 위 제목의 기획물이다.
* 「집합과 다양체(L’ensemble et la multilplicité)」는 논문이 아니라, 들뢰즈가 논문을 쓰기 위한 구상 또는 구도를 잡기 위한 제목이었으며, 이 구도 하에 두 편의 논문 「내재성: 생명(L’Immanence: une vie…)」과 「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L’actuel et le virtuel)」을 썼고 그 이후를 쓰지 못한 채 세상을 마감했다. (52VLB)
*** 원문을 다시 읽으며, 불교에 빗대어 본다.
뜬금없이 왜 조에 부스께(Joë Bousquet, 1897-1950)의 상처의 이야기를 마지막에 해 놓았는가? 의미의 논리를 읽을 때 참 이해 안 되는 문장 «나의 상처는 나 이전에 죽 있어왔다. 나는 그 상처를 구현하기 위하여 태어났다.(Ma blessure existait avant moi, je suis né pour l'incarner. »(LS. 174)이 있다. 상처를 불교의 고(苦)로 바꾸면, 생명있는 존재는 상처투성이 즉 고통투성이 이다. 고통을 구체화하는 과정이 삶이다. 그 삶은 들뢰즈 표현으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내재성의 평면 안에 있다. 불교식으로 삶은 고통(苦痛)을 지니고 태어났고 고통을 안고 죽 살아왔다. 이것이 신체적이든 영혼적이든 생명체에는 내재해 있다. 이 상처의 해소는 아마도 권능의 고른평면(내재성의 평면)으로 되돌아가는 것, 들뢰즈가 좋아했던 니체의 영겁회귀로 돌아가는 것일 수 있다. 그 영겁회귀는 동일자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질자로 돌아가는 것이고 다시 동일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반복으로 나올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키아무니의 열반도 이질반복의 내재성의 평면으로 돌아가는 것이리라. 들뢰즈가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까지 주제는 ‘생명은 사건’이며 한 생명체로서 인격은 ‘화로위의 눈한송이(紅爐一點雪, 홍로일점설)’와 같다. (52VLB)
베르노(André Bernold, 1958-)가 쓴 “수이다스(Suidas)”(Philosophie, no 47, septembre 1995, pp 8-9)는 들뢰즈에 대한 조사(弔詞)이기도 하고, 그리스 식으로 사전에 올린다면 이렇게 쓸 것이라는 의미에서 쓴 글이다. 그 시작 문장은 “들뢰즈,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히파티아의 아들이다..”로 되어 있다. 이글에서 흥미로는 점도 있다. “그는 정열적으로 땅을 사랑한다. 그런데 아라토스(Aratos, 전315-240, 시인 천문학자)가 말하기를 들뢰즈는 혈거인(troglodyte)이었다고 한다.”(8-9) 들뢰즈(1925-1995)가 학문 바깥을 기웃거리지 않고 연구실에서 연구만 했다는 의미로서 혈거인이라고 한 것일 진데, 우리나라에서 박홍규(1919-1994) 선생님도 혈거인이라 할 수 있다. (52VLB)
푸코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의미의 논리』를 묶어 ‘철학극장(Theatrum Philosophicum)(Critique, no 282. novembre 1970, pp. 885-908)’이라는 제목의 서평을 썼다. 거기에서 첫 문단 끝에 “언젠가 20세기는 들뢰즈의 세기로 기억될 것이다(Mais un jour, peut-être, le siècle sera deleuzien.” 이런 문장이 있다. (52VLBK)
** 「집합과 다양체(L’ensemble et (la multilplicité)」에 관한 단상
「내재성: 생명(L’Immanence: une vie…)」과 「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L’actuel et le virtuel)」, 이 두 작은 논문은 들뢰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쓴 글이며, 그가 구도를 잡은 「집합과 다양체(L’ensemble et (la multilplicité)」의 일부로서 다 쓰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 논문은 분명히 다양체 이론을 ‘방법후설’로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집합에 대한 글은 없다. 아마도 들뢰즈는 이 두 논문 다음으로 요소에 대한 집합의 이론에 대해서 쓰려고 했을 것이다. 우리가 가정하기를 그렇다면 발표에는 집합론이 먼저 놓일 것이고 다양체론을 뒤에 두고 마무리 글을 덧붙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벩송의 DI를 연상해서이고, 또한 MM에서 거울의 비유에서처럼 생각해 볼 수 있다. 내재성의 이미지는 잠재적인 동시에 실재적인데 비해, 거울 효과로서 내재성의 외화(표상화, 재현화)는 기호(le signe)로 표현되는 상징들 또는 의미들이며 또 현실화에서 가능성에 대한 선호도에 따라 달리 표현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제거리는 삶이다. 박홍규는 회의주의(허무주의)의 극복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무화시키거나 무를 선전제하고서 새로이 창조 또는 새로 만들기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가 하는 것이라 한다. 다른 하나는 아페이론과 같은 흔들리는 원인을 어떻게든 구슬러서 제대로 된 모습(이데아)을 본 따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전자에는 질료와 같은 덩이(생명)의 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인데 비해, 후자에는 덩이에도 어떤 저항하는 힘 또는 필연 같은 것이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새로운 하나가 더 있다. 생명은 그 자체 자기 권능을 지니며, 또한 자기에 의한 자기 생성을 가고 있어서 무(無)도 없고, 이데아에 대한 수동성도 아니며, 게다가 자기 노력의 과정이라 능동적이고 활성화라는 것이다. 생명은 긴 과정동안에 발산과 수렴을 하면서도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 가다. 이 과정에서 먼저와 다른 모습을 만든다는 의미에도 생명의 도약이다. 도약을 열린 세계를 인정한다. 이 역동론 열역학 제2법칙의 등장에서 가능한다. 이런 역동론의 활성화를 인성에 적용하는 들뢰즈는 「드라마화의 방법(La méthode de dramatisation, 1967)에서 역동론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왜, 어떤 경우에. 박선생님 “철학은 데이터(자료들)을 총체적으로 다룬다”고 한다. .
인간을 대상화하여 주체가 객체에 대한 조작과 행위에서 문제를 다루기보다, 인간 자체의 자기 생성의 과정으로 다루게 되면 주체는 그 덩이 속에서 작동하는 또는 역동하는 힘으로서 존속한다. 역동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힘은 운동이며 정지가 아니고, 현존이며 무가 아니고, 능동성이며 수동성이 아니고, 파(물결, 빛결)이며 톨(입자, 물체)로서 설명이 안 되며, 현실화된 사회에서 노마드이며 폴리스가 아니다.
생성과 과정에서 투쟁(사상 투쟁, 이론 투쟁)과 전투(시위, 저항, 봉기)는 전쟁이 아니다. 전쟁은 제도의 기구가 제도자체의 유지를 위해 상대를 굴복시켜 예속시키는 그리스의 식민지 작업과 같다. 식민지의 건설은 무력과 강압으로 이루어지고 토착민(피식민)의 자연의 얼굴을 파괴하고 건설자(식민자)의 얼굴을 모방하게 한다. 예수의 얼굴을 백색으로 표현하는 백색이데올로기도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바비인형과 얼음공주도 마찬가지이다.
투쟁과 전투는 변증법이 아니다. 전쟁은 변증법으로 설명하기에 적합할 것이다. 전쟁의 승리는 변증법으로 설명하면 쉽고, 승리자가 전체를 지배하는 (제국)독식의 권력에, 그리고 정복자 또는 식민자의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 올해 ‘미국은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으로 6조 원 가량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전쟁의 효과에서 미국이 한국을 지배하고 예속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 자국민은 투쟁과 전투를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들뢰즈는 누가, 어디서, 어떻게 등을 묻는 것이다. 미국이 이 땅에 사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 사는 자들이 자신의 얼굴과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노마드의 논리이다. 노마드의 활동성은 드라마화의 방법처럼 전개된다. 그 전개 과정에서 투쟁과 전투를 하려고 하지 않고, 굴종과 예속을 자발적으로 하는 자들의 논리가 폴리스 논리이다. 이 아테네 폴리스 논리 안에는 전쟁이라는 방식으로 멜로스(Μήλος)의 학살과 식민지화에 있다(전416년). 소크라테스가 살아있던 당시 기원전 416년에는 아테네 민주정이라고 한다. 이 민주정이 타국에 대한 학살은 힘센 자들의 논리이다. 민주정이라고. 민주정이라는 이름하에 폴리스는 국가로 그리고 세월에 따라 제국으로 또는 자본으로 전개되고 있다.
노마드란 헤라클레스 전통에 가깝다. 그 전통은 퀴니코스파와 스토아학파로 계승되어 알렉산드리아에서 존속하다가 로마 제국에서 전쟁 속 묻혀버렸다. 그럼에도 학문적 투쟁은 플로티노스에 의해 면면히 이어진다. 인도에서 힌두교의 위계 사회에서 변방의 불교가 생명과 평등 사상을 통해 이어져 오다가 나가르주나에 의해 학문 투쟁의 길을 모색했다. 이 불교는 힌두교의 폴리스를 타파하지 못하고, 달마가 동쪽으로 쫓겨나는 과정을 걷는다. 폴리스적 위계는 자기 방어로서 노마드에 저항한다. 그리고 예속에 이끌리는 민중은 노마드들을 폴리스에서 배제한다. 역사적으로 동양에서 노마드의 활동성의 공간은 1227년 징기스칸에 의해 매끈한 공간을 전개하는 데, 그 표현에는 맹우단도 한 예이다. 말과 초원이라는 관계에서 초원은 매끈한 공간이다(12장 1227년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그리고 서양에서 매끈한 공간의 전개는 배와 바다에 의해서 이다. 헨리케(엔히크 Henrique 1394-1460)의 적도 이남의 항해에서 바다가 매끈한 공간개념을 얻는다. 매끈한 공간과 홈패인 공간, 유목적 공간과 정주적 공간에 대비는 여러 측면에서 제기될 것이다(14장 1440년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직물의 기술 모델에서 코바늘과 대바늘의 천짜기와 다른 방식으로 펠트의 방식이 제기되고, 나중에는 천조각들의 이어붙이기에 퀼트와 패치워크에서도 발명된다. 산다는 것이 먼저다. 음악모델은 나중에 등장하겠지만 8음계와 달리 12음계, 그리고 20세기에 음계를 넘어서는 음악이 등장하는 것은 신디사이저 때문만이 아니라, 삶에서 공간에서 소리 나는 여러 변이들을 음악에 도입하기 때문인데, 들뢰즈는 모차르트에 이미 있었지만, 음악사적으로 슈만슈만(Schumann, 1810-1856)이 어린이의 음계와 여성의 생활음계(자장가)등을 음악에 도입되는 길을 열었다(11장 1837년 리토르넬로에 대해).
수학 모델은 훨씬 흥미롭다. 데카르트가 좌표기하학으로 운동을 설명하는 동일한 시기에, 데자르그의 사영기하학이 분할로서 설명될 수 없는 연속성의 공간을 이론적으로 전개한다. 그리고 라이프니츠와 뉴턴이 타원운동의 벡터량(벡터질)을 설명하는 시기에 베르누이의 유체역학에는 행렬(行列, matrix)의 방식을 전개하였으나, 19세기 와서야 비유클리드 기하학처럼 의미를 논하게 된다. 수학에서 원리로소 홈패인 공간은 현실화된 공간이 아니라 순수 사고의 공간이라는 것을 리만에 와서야 알게 된다.
리만에 의한 다양체 개념의 성립은 변증법에 종언을 고하고, 다양체의 위상학(topologie)과 유형학(typologie)이 시작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산술학이 기하학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형학인 집합론은 퍼진 또는 흩어진 공간 또는 매끈한 공간을 의미하는 위상학은 다른 사유로서 등장한다. 이 사유에서 진정으로 영혼(psyche, 심리)의 다양체론이 등장하게 되고 벩송의 기억이론 그리고 20세기에는 유전자논의를 하게 될 것이다.
산업사회에서도 동태적 활동과 정태적 노동의 대비가 있다. 전자의 매끈한 공간에서 자유로운 활동과 후자의 홈패인 공간에서 일 사이에서 전자의 경우를 인문학이나 예술 분야의 활동을 “여가(le loisir)”로 간주하고, 후자에서 분업화되어 표본적이고 국가적 조직 속의 일(노동)을 추상화의 구체화로 여기고 모든 기계적 작업 활동(공공토목이든 군대조직이든)을 국가 장치의 일부로 만든다. 전자에는 삶의 질의 향상인데 비해, 후자에서는 저장과 잉여 노동이 포함되어 있다. 국가는 전자의 전쟁기계를 제도와 기구 속에 포획하고 복속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삼권분립(입법, 사법, 행정)은 5권분립(언론, 학문)으로 또 10권분립(문학, 조형예술, 운동, 대중예술)으로 진행하고 있다. 분립만큼이나 정주화된 폴리스로 제도 속에 안착이라기보다 각 절편들의 활동성들에서 연대가 이루어질 것이다.
다양체의 위상학에서 물론 유형화로서 분립이 있고, 서로 간에 이합집산으로 연합을 이루고, 유형들에서 시대에 맞게 또는 환경(millieu)에 맞게 중요성과 우선성을 확보하는 쪽에서 폴리스의 기구를 제시할 수 있다(여기에는 잉여가 있기 때문이다). 전쟁기계로서 절편들
각각은 경계를 무너뜨리며(가로지르기, 건너뛰기, 타넘기), 잉여보다 선물(기부, 포틀래치(Potlach))를 실행하는 노마드 공간을 만들어 가며, 인간 본연의 자연성을 실현하는 쪽으로 퍼져 간다. 매끈한 공간은 홈파인 공간처럼 폴리스로 집중이 아니라, 중심에서 빛살처럼 원주 상에서 현들을 형성하며 회오리로 발전해 나간다.
왜 정주적이라는 방식으로 중심(중앙)으로 모이는가? 들뢰즈의 답은 간단하다. 흐름에서 개인이 자기 이익과 축적을 위한 방향을 선택할 경우에, 여러 흩어진 매끈한 공간에서부터 어느 점(영토)으로 모임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 영토 안에서는 분업과 수량화(표준화)된 기술로 생산력이 높아지고 잉여가 확대되는데, 그 잉여의 착취와 수탈은 제도로서 사회체 수렴하는데, 그래서 농업의 발달은 노마드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도시화에서 생겨났다고 하다. 사회체의 성립은 어느 시기에 갑자기 도래한 것처럼 나타난다고 한다. 사회체의 제도화에서 분업화가 일어나고 그리고 잉여 생산이 확대되는 시기에, 힘센 자로서 전제군주 형태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루소가 말했듯이 가장 힘센 자는 없다. 힘센 자는 제도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거꾸로 제도가 위계의 상위를 구성하고 상위자가 힘센자가 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도시화가 홈패인 공간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거대 도시 안에서는 매끈한 공간이 끊임없이 생성된다고 한다. 서울에서 새벽 첫째 버스나 첫째 지하철을 타보면, 잉여를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검은 옷으로 무장하고 졸면서 흘러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도 외곽에서 중심으로 새벽에 흘러들어온다. 제도가 움직이는 아홉시 이전에 일을 하고 중심에서 사라진다. 그들의 삶은 중심과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이 노마드이다. 이들 노마드가 전쟁기계가 아니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제도와 다른 삶을 산다는 점에서 또 전쟁기구에 복속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전쟁기계이다,
전쟁기계가 징기스칸 시절 초원과 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경우는, 어느 시대 어느 영토화에서 누가 어떤 경우에 정주적 도시보다 노마드 형태를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들뢰즈의 역동론의 관점에서는 노마드 전쟁기계가 이룬 제국이 정주적 제국의 영토보다 더 크게 확장할 수 있다는 한 예이다. 들뢰즈는 현대에서 중국 공산당의 전쟁은 노마드의 전쟁기계였다고 한다. 장개석 국민당 군대와 모택동의 팔로군 군대의 전쟁이야기를 보면 팔로군은 노마드 전쟁기계 였다. 또한 북만주에서 독립운동이나 남미에서 일어났던 게릴라전이거나, 김원봉의 의혈단이거나 전쟁기계이다. 또는 카스트로의 쿠바 상륙의 대원들은, 징기스칸의 맹우단과 같은 전쟁기계이다. 이들이 길을 따라가는 폴리스 제도에 포획되거나 복속된 것이 아니라는, 흩어지기하고 수렵하기도 하며 퍼져나가는 투쟁과 전투의 과정을 겪는다. 더하여 들뢰즈의 예로는 갱단이 아닌 청소년의 주먹조직이 뒷골목에서 행동하는 것도 전쟁기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 청소년 조직은 한시적이고 좁은 지역이지만 전쟁기계이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제도의 코드화에 들어가지 않고, 활동하였던 전쟁기계들도 많다. 소위 말하는 정치 결사체들, 프랑스 혁명 후 바뵈프의 평등당과 여러 계절사들, 우리나라에서는 통혁당, 인혁당, 남민전도 전쟁기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최근래에 박근혜 제도에 봉기한 촛불다양체도, 그리고 검찰개혁을 위한 서초동의 촛불저항도 일종의 전쟁기계이다. (52VLB) (53MMI)
# 「집합과 다양체(L’ensemble et la multilplicité, 1995)」 두 논문
「내재성: 생명(L’Immanence: une vie…)」 발표
「현실인 것과 잠재적인 것(L’actuel et le virtuel)」 미발표 유고. (1996발표)
*논문 1. **
# 「내재성: [온]생명(L’Immanence: une vie‥…)」, 1995
선험적인 장(un champs transcendantal)이란 무엇인가? 우선 선험적인 장은 그것이 [표면 위의] 대상을 가리키지도 않고, 또 [상층의 재현인] 주체에 속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현실적] 경험과 분명히 구별된다. (509) [칸트의 선험성은 선천적과 초월성과 구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선험적인 경험론에는 야생적인 어떤 것, 강력한 어떤 것이 있다. 이 야생적이고 강력한 어떤 것이 (단순히 경험론을 구성하는) 감각의 요소가 아님은 분명하다. (510) [ 선험적 위상은 감각아래 인 감정보다 더 깊이(속에) 감화와 닮은 의식 흐름이다. 즉 기억의 총체로서 흐름이라서 추억들과 같은 요소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나와 대상이 배제된 직접적인 순수 의식, 시작도 끝도 없는 운동인 한에서 무매개적인 순수의식을 가지고서 선험적인 장을 정의해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과 관해서](심지어는 이동[통과]과 양의 스피노자 개념작업은 의식에 호소하고 있다.)(510)
그러나 선험적 장이 의식과 연관은 단지 권리상으로 있다. 의식이 사실(un fait)이라는 경우는, 단지 주체가 자기의 대상과 동시에 생산되는 경우이며, 영역의 바깥에서는 “초월적”인 것처럼 나타나는 경우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의식이 선험적인 장을 무한한 속도로 가로지르면서 선험적인 장 이곳저곳에 퍼지는 한, 그곳에서 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510)
그러한 이유에서 선험적인 장이 자기의 의식에 의해, 그럼에도 공연적(coextensive)이지만 모든 드러남[계시, 솟아남]에서 제거된 자기의 의식에 의해 정의될 수 없다. (511) [공연적이란 동연적과 구별해야 한다. 단어는 같지만 의식 차원은 동연적이고 신체 차원은 공연적이다.]
초월적인 것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다. 의식이 결여되었다면, 선험적 장은 순수한 내재성 평면처럼 정의된다. 왜냐하면 그 선험적 장은 대상으로부터와 마찬가지로 주체로부터도 모든 초월적인 것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511)
이 절대적인 내재성은 그 자체적(en elle-même, 즉자적)이다: 절대적 내재성은 어떤 것 안에도(dans) 또 어떤 것에 속하지도(à quelque chose) 않는다. 또 그것은 대상에 의존하지도 않고 주체 속하지(appartient)도 않는다. 스피노자(Spinoza, 1632-1677)에 있어서 내재성은 실체에 속하지도(à la substance) 않으나, 실체와 양태들이 내재성 속에(dans)에 있다. (511) [벩송의 그 안에(dedans)에 대한 설명과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칸트에서처럼) 경험을 중복하게(redoubler) 하는 것은 선험적인 것의 본성을 변질하게 하는 것(dénaturation)이고, 초월성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내재성의 왜곡(déformation)이다. .. 선험적인 장이 의식에 의해 정의되지 않듯이, 내재성의 평면도 주체에 의해 또는 와 그것을 포함할 수 있는 대상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511-512) [변질(dénaturation)은 경험의 발생에 현실을 첨가하는 것이고, 왜곡 (déformation)은 경험 안에 먼저 이데아를 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손님의 진술(이야기)는 변질이 기본이고, 그의 이상을 넣어서 하는 경우에, 기존 도덕과 종교에 습관을 포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순수 내재성에 대해, 그것이 대생명(UNE VIE)이라고, 또 그것이외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 생명은 권능이자, 충만한 지복이다. 생명은 내재성의 내재성이고, 절대적 내재성이다. (512) [왜 이렇게 강조하느냐 하면, 생명은 부정성이나 수동성이 아니라도 말하고자 하다. 생명에는 모순으로서 무(le neant)이라는 것은 없다. 즉 (있는 것)인 것은 (있는 것)인 것이다.]
피히테(Fichte, 1762-1814)가 그의 말년의 철학에서, 선험적 장을 마치 생명(une vie 삶)처럼 제시한다. 이 생명은 존재(Etre)에 의존하지 않으며, 작동(un Acte, 행동)에 복종하지 않는다. 즉 [생명은] 무매개적 절대적 의식이며, 이 의식의 활동성은 하나의 존재로 더 이상 귀착하지 않고, 생명 속에서 의식 스스로를 제시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512)
선험적인 장은 이제 철학적인 조작의 핵심 속에 스피노자주의를 다시 들여오는 진정한 내재성의 평면이 된다. 사실 멘 드 비랑(Maine de Biran, 1766–1824)이 만년의 철학(Dernière philosophie)[전집, 제10권, 브룅판](그가 너무나도 지쳐있었기에 그 결말을 보지 못한 철학)을 하는 도중에 힘의 초월성 아래서 내재적인고 절대적인 생명을 발견했을 때, 그에게 돌연히 일어났던 유사한 모험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선험적 장은 내재성의 평면에 의해 정의 되고, 내재성의 평면은 생명에 의해 정의 된다. (512-513, 원 4-5)
내재성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생명....이다. 우리가 특별히 정해지지 않은 하나의 어떤 항목을 취하여 선험적인 것을 위한 실마리로 고려할 경우, 하나의 어떤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함에 있어서 디킨즈(Dickens, 1812-1870)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었다. (513, 5)
[디킨즈의 소설에서] 모든 사람이 경멸하는 한 못된 주체, 한 불량배(canaille 천민)가 다 죽어가는 채로 실려 온다. .. 모든 사람이 그를 구하기 위해 매달리고 이 비천한자는 가장 깊은 혼수상태 속에서 포근한 그 무엇이 자신에게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그의 생명과 그의 죽음 사이에는, 한 순간(un moment)이, 즉 죽음과 함께 노는[유희하는] 한 생명의 계기(un moment)가 있다. (513, 5)
그 개인[불량배]의 생명은 내적 외적 생명의 우발성들(des accidents)들로부터 해방된, 즉 그 어떤 것이 발생한다고 할 때 그 발생의 주관성과 객관성으로부터 해방된 순수사건을 이끌어내는 바로 그 비인격적이지만 특이한 하나의 생명에게 자리를 마련하게 했다. [순수사건으로서]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이 관대하게 대하고, 그리고 일종의 지복에 도달한 “지고한 인간”(Homo tantum)이다. 이것은 [스콜라철학의] 이것임(hecceité)이며, 이것임은 개별화로부터가 더 이상 아니고 특이화로부터이다. 즉 순수 내재성의 생명, 중성, 선과 악을 저넘어 이다. 왜냐하면 사물들 한 가운데에서 이것임을 육화하는 유일한 주체가 이것임을 좋게 하거나 또는 나쁘게 해왔다. ... 개별성의 생명이 사라지고.. [남는 것은] 특이성의 본질, 즉 하나의 생명...을 위하여 이런 저런 개별성의 생명이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513-514, 5)
따라서 우리는 개별적인 생명이 보편적 죽음과 대치하게 되는 그런 단순한 순간[계기] 속에 하나의 생명을 포함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하나의 생명(Une vie)[온생명, 즉 신]은 도처에 있다. (514 원5)
레르네트-홀레니아(Lernet-Holenia, 1897–1976)의 소설은 군대를 전체 삼켜버릴 수 있는 사이-시간(un entre-temps) 속에 사건을 들여 놓는다. (514, 원5)
예를 들어 아주 어린애들은 그들 모두 서로가 서로를 닮음으로써 개별성이라는 것을 거의 지니지 않지만, 반면에 그들은 특이성을 지닌다. (515, 원6)
그런 것처럼 정해지지 않은 것[비한정적인 것]은 경험적 비결정성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재성의 결정성 또는[즉] 선험적 결정가능성을 표시한다. 부정관사는 인칭의 비결정성이긴 하지만 단수의 결정이라는 것이다. 즉 [부정관사로서] 그 하나(l’UN)는 내재성 자체를 포함할 수 있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선험적인 장 속에서 포함되는 내재적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Un, 1)은 언제나 곱셈[다양체]의 지수(l'indice)이다. 하나의 사건, 하나의 특이성, 하나의 생명[온생명]‥…. (515-516, 원6)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초월성은 오로지 이 [내재적]평면에 고유한 내재적인 의식의 흐름 속에서만 구성된다. 초월성은 항상 내재성의 생산물이다. (516, 원6) [언어로서의 초월은 내재성의 반영물이다. 즉 초월성은 내재성의 작은 티끌, 먼지 같은 것이며, 이를 상징화하여 고유성의 다자로서 세계를 구성한다고 한다. 다자들(이데아들)에게 의미를 부여하여, 그 불변의 세계를 전체 또는 완전이라 하며 초월적이라고 한다. 하나(온)의 단위를 무한히 확장하여 또는 투사하여 테두리 전체를 초월이라고 부르는 것이 종교이다. (47MLG)(첨, 53MMB)] [게다가 지향성은 정관사를 쓸 것 같다. la vie라고, 그리고 그 생명(삶)은 정해진 삶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하나의 생명[온생명]은 오로지 잠재적인 것들(des virtuels, 가상적 포함)만을 포함한다. 즉 이 생명은 잠재성들, 사건들, 특이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잠재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재성이 결여된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우리가 잠재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현실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과정에게 그 과정의 고유한 실재성을 부여하는 평면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516, 6) [이 생명은 인격성의 삶 총체이다. (47MLG)]
사건은 비-현실화(non-actualité)(무한정한, indéfini, 부정관사의 의미에서)로서 생각되었기에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실재성, 내재성은 결함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건을 자신의 동반하는 수반물 연관 속에 시작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수반물들이란, 선험적 장, 내재성의 평면, 생명, 특이성들[다양체들]이다. 상처(une blessure)는 분명 사물들의 상태와 체험 속에서 육화되거나 현실화된다. 허지만 상처는 그 자체로 놓고 볼 때, 우리를 생명 속으로 이끄는 내재성의 평면위에 놓인 하나의 순수한 잠재적인 것이다. 나의 상처는 나 이전에 현존하고 있었다. 상처의 초월성이 우월한 현실성처럼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의 내재성이, 환경(장 또는 평면)의 한 가운데에서, 마치 항상 잠재성처럼 있는 것이다. (517, 원7) [다양체의 분화는 당연히 상처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상처는 영혼(심리)적으로 분열증이며 사건의 균열이다. 세상을 그렇게 표면이 등장하는 것이다. (47MLG)]
선험적인 장의 내재성을 정의하는 잠재적인 것들과, 잠재적인 것들을 현실화하며 선험적인 장을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 변형시키는 가능한 형식들 사이에는 이와 같이 커다란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517 원7: 마지막 문장)
*참조 {논들뢰1995내재성14철학 }-(재정리, 53MMB, 수정53MMC)
# 인명록 **
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lat. Benedictus de Spinoza, 1632-1677) 유태계 네델란드 철학자. 범자연내재주의자.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일 계몽주의 철학자. 오성에 대한 “비판철학”을 전개하여 비판주의를 창안하였다. 흄을 읽지 않아서 사회와 제도에 대한 교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1762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는 독일 철학자. 후기 칸트주의자라고 하지만, 인간론을 다루는 실재론 철학자에 가깝다.
1766 멘 드 비랑(Maine de Biran, Marie François Pierre Gontier de Biran, 1766–1824) 프랑스 철학자, 수학자. 아버지는 의사. 대학에서 시민법을 공부했다. 근위대 출신으로 1789년에 베르사이유 방어했다가, 1792년 은퇴하고 네델란드로 떠났다. 로베르삐에르 몰락후에 고향이 베르제락에서 의사협회를 창설하였다. 유심론에 속하는 심리학의 선구자이며, 이데올로그들과는 단절했다. Essai sur les fondements de la psychologie et sur ses rapports avec l'étude de la nature, 1812.
1812 찰스 디킨스(Charles John Huffam Dickens, 1812-1870) 빅토리아 시대 영국 소설가. 크리스마스 캐럴(A Christmas Carol, 1843), 두 도시의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 1859), Our Mutual Friend 1864–65: l’ami commun
1842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미국 철학자, 심리학자. 프래그머티즘 철학을 정립하였다.
1859 벩송(1859-1941)
1859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 유대계 오스트리아 출신 독일 철학자. 현상학의 체계를 세운 철학자. 1886년 루터파로 개종했다(au protestantisme luthérien le 8 avril 1886). 내용상으로 가톨릭 토마스주의에 가깝다. 데카르트적 성찰(Les Méditations cartésiennes: Introduction à la phénoménologie(1929 파리 소르본에서 발표 논문 2편, 1953 정보판)
1891 게루(Martial Gueroult, 1891-1976) 프랑스 철학자, 17세기 철학사가, 스피노자 전공. Spinoza, tome 1: Dieu (Éthique, livre I), 1968, tome 2: L'Âme (Éthique, livre II), 1974
1897 레르네트-홀레니아(Alexander Lernet-Holenia, 1897–1976) 오스트리아 작가, 극작가, 시나리오작가, 시인. 언어와 문학 독일 아카데미 회원. 환상적 소설 바게 백작(Der Baron Bagge, 1936: Baron Bagge(군대 은퇴자의 이야기), 양편의 시실리아인(Beide Sizilien, 1942: Le Régiment des Deux-Siciles.
1897 부스께(Joë Bousquet, 1897-1950) 프랑스 시인 작가. 21살의 나이로 1919년 전투에서 척추에 독일군 총알의 타격으로 흉부 위 부분이 마비되고, 하반신은 쓸 수 없었다. 겉창이 닫혀진 방에서 평생 침대에서 지냈다. « Ma blessure existait avant moi, je suis né pour l'incarner. »(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coll. « Critique », 1969, 393 p., chap. 21 (« de l'événement »), p. 174.)
1905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프랑스 철학자, 다재다능한 철학자로서 노마드처럼 살았다.
1964 라푸자드(David Lapoujade, 1964-) 프랑스 철학자. 파리 1대학(Panthéon-Sorbonne) 교수. 「William James. Empirisme et pragmatisme, 1997」 「Puissances du temps. Versions de Bergson, 2010.」 「Deleuze, les mouvements aberrants, 2014」
(7:20. 53MMB) (7:32, 53MMC)
*논문 2. ******
#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L’actuel et le virtuel) [미발표 원고, 1996발표]
1.
철학은 다양체들(les multilplicités)에 대한 이론이다. 모든 다양체는 현실적인 요소와 잠재적인 요소들을 함축한다. 순수하게 현실적인 대상이란 없다. 현실적인 모든 것은 잠재적인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안개로 둘러싸여 있다. (518)
- [다양체 대 집합론, 덩이론 대 요소론, 생명(체) 대 물체, 인격 대 인간, 직관주의 대 주지주의 등으로 대별되는 철학의 문제거리는 살다(vivre)라는 관점에 대한 견해 차이이다. 살다, 즉 누가, 왜, 어떻게, ‘어떤 경우에’라는 항들과 더불어 살다라는 견해를 보면, 전자의 입장은 공감과 공명이 내재해 있고 후자의 입장은 이용과 편리라는 관점이 들어있다. 플로티노스, 스피노자, 루소, 벩송, 들뢰즈 등은 사람의 생명(인격)의 본성(자연)에 대해 고민했다면 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홉스, 로크, 칸트, 후설 등은 인간의 지위에 대해 해답을 찾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같은 [시간상의] 짧음이 그것들[창조와 파괴]을 불확실성의 언리 또는 비결정성의 원리 아래 잡아두는 한에서 잠재적이라 부른다. (519)
(“잠재적인 것의 안개구름 한 가운데에는 그 보다 높은 질서의 잠재적인 것이 여전히 있다‥… 각각의 잠재적 입자는 자기 고유한 잠재적인 우주로 둘러싸여 있으며, 또 마찬가지의 일이 각각의 잠재적인 입자에 대해하여 무한히 행해진다‥…”) (519)
그리고 역동론의 드라마틱한 동일성(l’identité, 정체성) 덕분에, 지각은 입자처럼(comme particule) 있다. 현실적인 지각은 잠재적 이미지들의 성운[별구름]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이미지들은 점점 더 멀어지고 점점 더 넓어지는 움직이는, 또 형성되고 분해되는 회로들 위에 분배된다. 이것[이미지]들은 다른 질서들로 된 추억들이다. (519) [성운과 회로의 용어는 벩송이 자주 쓰는 용어이기도 하다. 벩송에서 멀어지고 넓어지는 방식은 회오리와 같다.]
추억들은 소위 말해서 잠재적 이미지들이며, 그것들의 속도 또는 그것들의 짧음(leur brièveté)은 여기서 무의식(inconscience)의 원리 아래에서 유지한다. (519-520) [프로이트에서처럼 무의식(l’inconscient)이라고 하지 않았다.]
잠재적 이미지들은 현실적 대상과 분리될 수 없고 거꾸로도 안된다. 잠재적 이미지들은 현실적인 것 위에서 재작동 한다. 이런 관점에서 잠재적인 이미지들이 각각의 경우에서 사유 가능한 시간의 최대치에 의거하여 결정된 어떤 한 연속체(un continuum), 어떤 한 공간체(un spatium)을 원들의 집합 또는 각각의 원 위에서 잰다. (520) [연속체와 공간은 다른 의미일 것이다. 하나는 사유에서 다른 하나는 신체와 더불어.]
잠재적 이미지들로 넓혀진 원들은 대상의 전체적 충동을 형성하는데, 그것은 잠재적 층들 자체이며, 이 층들 안에 현실적 대상이 이번에는 잠재적이 된다. 여기서 대상과 이미지는 둘 다 모두 잠재적이며, 내재성의 평면을 구성한다. 그리고 내재성의 평면에서 현실적 대상은 용해된다. ... 잠재적 이미지들의 연속체는 조각으로 되었고[파편화], 공간체는 규칙적이거나 또는 불규칙적인 시간의 해체에 따라서 절단된다.(520) [의식의 연속체 파편화와 신체의 공간화에서 절단은 차히의 위상에 속한다.]
그리고 잠재적 대상의 전체적 충동은 부분적 연속체에 상응하는 힘들로(en forces), 잘려진 공간체를 가로질러가는 속도들로(en vitesse) 부셔진다. (521) [의식에서 힘들로, 신체에서 속도로]
라이프니츠가 제시했던 대로, 힘은 현실화 과정에서 공간만큼이나 잠재적이며, 이 공간 속에서 힘이 이전되고 있다. (521) [벡터의 힘이 공간에서 잠재적으로 또는 현실적으로 이동하고 있다. 라이프니츠는 움직이는 과정전체를 묘사한다는 의미에서 힘을 운동의 궤적으로 보기보다 에너지의 (연속적)이동으로 보았다.]
그러나 모든 평면들은, 잠재적인 것에 이끌리는 길을 따라서, 하나를 이룬다(ne font qu’un). 내재적 평면은 잠재적인 동시에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작업]을 포함하는 데, 이 경우는 둘 사이에 할당할 수 있는 경계가 없을 경우이다. 현실적인 것은 현실화의 부가물[보충물] 또는 생산물이며, 현실화의 주체는 잠재적인 것이다. 현실화는 잠재적인 것에 속한다.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는 특이성(la singularité)이며, 반면에 현실적인 것 그 자체는 구성된 개체성(l’individualité)이다. (521) [특이성은 의식을 의미하고 개체성은 신체를 포함한 인격을 의미한다. / 개별화(individuation)과 결정체화(cristalisation) 대 특이화(singularsation)과 현실화(actualisation) = 인물화 대 인격화라고 해야 하나. .. ]
2.
우리는 이제까지, 현실적인 것이 점점 더 너비를 갖게[펼쳐지는]되고 점점 더 멀어지며 점점 더 다양해지는 여러 다른 잠재성들로 둘러 싸여 있는 경우를 고려했다: 입자는 순식간(찰나)을 창조하고, 지각은 추억들을 불러온다. (522) [여기서 입자는 벩송의 인광과 같다. 신체는 인광의 사라짐에서 현실에서 멀어지고, 지각한다는 의식(현실화)은 기억 속에 있는 추억을 덧붙여서 현실화로 나간다.]
현실적 입자는 자신의 잠재적 분신을 가지며, 이 분신은 입자로부터 거의 머리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현실적 지각은, 마치 일종의 무매개적적이고 계속 이어지고 심지어는 동시적인 분신처럼, 자기 자신의 추억을 갖는다. (522)
[벩송에서 (신체의) 지각과 (의식) 추억의 연결은 무매개적이고 거울효과처럼 동시적이다. 이 둘 사이의 평행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둘 사이의 일대일 대응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지각과 추억에서 추억들이 지각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은 살아온 내력에서 당연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벩송이 우리에게 제시했던 대로, 추억은 지각된 대상 다음에 형성되었을 현실적 이미지가 아니다. 그러나 잠재적 이미지는 대상의 현실적 지각과 공존적이기 때문이다. 추억은 현실적 대상과 동시간적인 잠재적 이미지, 즉 그것의 분신[이중화]이며, 그것의 “거울 속 이미지”(son “image en miroire”)이다.
또한 현실적 대상과 그 대상의 잠재적 이미지 사이에는 유착과 분열이, 오히려 진동(oscillation)이, 영속적인 교환이 있다. 잠재적인 이미지는 끊임없이 현실적이 되고, 영화 상하이에서 온 부인(La Dame de Shanghaï (The Lady from Shanghai, 1947)의 방식에서 마치 등장인물을 사로잡아, 그 등장인물을 던져넣고, 이번에는 그에게 잠재성만을 남겨두는 거울 속에서처럼 말이다. (523)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은 공존하며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를 끊임없이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로 이끌어 가는 좁은 회로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더 이상 특이화(singularsation) 이 아니고 마치 현실적인 것과 그것의 잠재적인 것 사이에서 과정과 같은 개별화(individuation)이다. 그것은 더 이상 현실화(actualisation)가 아니라, 결정체화(cristalisation)이다. (523)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사이에는 [경계의] 할당불가능(inassignabilité)이 더 이상 없으며, 오히려 서로 교환하는 두 항들 사이에 분간불가능성(indiscernablilité)이 있다. (523)
현실적 대상과 잠재적 이미지, 잠재적이 된 대상과 현실적이 된 이미지, 이것들은 모습들(les figures)이며, 이 모습들은 이미 기초 광학에서 속한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서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구별은 시간의 가장 근본적 분열(la scission)에 상응한다. 그 때 시간은 두 개의 큰 길을 따라서 세분화하면서 앞으로 나간다. 즉 현재를 지나가게 하고 그리고 과거를 보존하게 하는 두 길이다. (523-524) [벩송의 경우에 현재는 과거를 달고서 미래를 갉아먹으며 진행한다고 한다.]
현재는 연속적 시간에 의해, 다시 말하면 유일한 방향에서 가정된 운동에 의해, 측정된 변화하는 자료(une donée)[datum]이다. 즉 현재는 시간이 다써버린 정도에서 지나간다. 지나가는 것이 현재이고 또 현실적인 것을 정의하는 것도 현재이다. 잠재적인 것은, 일정한 방향에서 운동의 최소치를 재는 시간보다 더 적은 시간 안에서, 자기편으로부터 나타난다. 그런 이유로 잠재적인 것은 “하루살이(éphémère, 순식간)”이다. (524) [현재 안에서 잠재적인 것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현재가 미래로 갉아먹으며 진행할 때 사라진다.]
현재는 (자기 척도에 맞추어서) 지나가고, 반면에 순식간은 ([순식간대로] 자기 척도에 맞추어서) 보존하고 또 보존된다. 잠재적인 것들은 자기들을 분리하는 현실적인 것 그 위로 무매개적으로 소통한다. 시간의 두 측면, 즉 지나가는 현재의 현실적 이미지와 스스로 보존되는 과거의 잠재적 이미지, 이 둘은 할당불가능한 경계를 갖지만 현실화작업에서 구별된다. 그럼에도 [두 측면의] 각각이 다른 측면의 역할을 빌리면서, 분간불가능하게 되기까지 결정화 속에서는 서로 교환된다. (524) [어제, 이제, 아제에 관한 의식의 지속에서, 벩송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이제가 지나가는 동안에 경계가 없이 연결되어 있지만 현실화에서 한 지점은 둘의 중첩(소통)이 있다. 그럼에도 이제가 진행하는 한 현재는 잠재적인 것(추억)으로 밀려난다.]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의 연관은 항상 회로를 구성하는데 두 가지 방식으로 이다. 때로는 현실적인 것이, 마치 넓은 회로들 속에 사물에 귀착하는 것처럼, 잠재적인 것들에 귀착한다. 때로는 현실적인 것이, 마치 자기 자신의 잠재걱인 것에 귀착하는 것처럼, 잠재적인 것에 귀착한다. (525) [하나는 기억총체와 연관있고 다른 하나는 해당하는 추억에 연관이 있다. 추억은 기억총체 속에 있다.]
내재성의 평면은 마치 잠적인 것과 다른 항들과 연관처럼 현실화를 포함하고, 동시에 마치 잠재적인 것이 항과 교환하는 것처럼, 현실적인 것을 포함한다.(525)
현실적인 것들은 이미 구성되었던 개별자들을 함축하고, 또 일상적인 점들에 의해 규정화작업들을 함축한다(impliquer). 반면에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의 연관은 작동 중인 개별화작업(une individuation)을 형성하거나 또는 각 경우에서 규정하는 특징점들에 의해 특이화작업(une sigularisation)을 형성한다(former). (525, 마지막 문단의 끝 문장)
(5:19, 52VLC)
# 인명록 **********
1646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독일 형이상학자, 철학자. / 뉴턴(Isaac Newton, 1642–1727) 둘은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했다.
1859 벩송(Henri Bergson, 1859-1941) 프랑스 철학자.
1943 까세(Michel Cassé, 1943-) 프랑스 천체물리학자, 작가, 시인. Du vide et de la création, 2001, Odile Jacob, 1993.
1944 샤뜰레(Gilles Châtelet, 1944-1999) 프랑스 수학자, 철학자. Les Enjeux du mobile, « collection Des Travaux », Éditions du Seuil, 1993.
1947 영화 상하이에서 온 부인(La Dame de Shanghaï (The Lady from Shanghai, 1947) 1947년 상연된 미국 범죄물(noir), 웰즈(Orson Welles 1915-1985) 감독, sorti en 1947.
1956 레비(Pierre Lévy, 1956-) 프랑스 철학자, 사회학자, 정보통신과학(Sciences de l'information et de la communication: SIC) 탐구자. Qu'est-ce que le virtuel ?. Paris : La Découverte, 1995 [들뢰즈 대단하다. 세상을 뜨기 전까지 첨단을 보고 있었구나!]
(5:34, 52VLC)
** 참조: 상하이에서 온 여인(The Lady from Shanghai, 1947)
웰즈(Orson Welles 1915-1985), 1947년 ‧ 드라마/미스터리 영화 ‧ 1시간 32분
(정리: 14:13, 53MMB) (14:38, 53M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