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침
밤새 자란 수염을 깎는데
입술 언저리에 면도날이 닿지 않는다
입 속 혀가 입 언저리 오목한 부분을
볼록하게 받쳐주어서 면도를 마친다
꽃받침이 꽃을 앉히는 것처럼
책받침이 글씨를 앉히는 것처럼
혀는 말없이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입 속의 혀처럼 나의 앞길을 걱정하며
뒤에서 손전등을 비춰주는 사람이 있었다
뒤에서도 눈부신 사람이 있었다
나도 산밭에 심어둔 오이 지지대처럼
사소한 것들의 받침으로나 살다가
목숨을 다한다면 얼마나 싱겁고 좋을까
<시작 노트>
「받침」을 쓴 후에 받침이 되어주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한다. 모든 나무의 받침은 흙이고, 새들의 받침은 나뭇가지이다. 사람의 받침은 신발이고, 나를 등 뒤에서 받쳐준 사람은 엄마였다. 세상 모든 것에 받침이 존재했는데 그것을 못 보았을 뿐이다. 나를 위하여 마룻바닥에 무릎 꿇고 기도를 바치는 당신이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받침’은 ‘바침’에서 온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간절하게 바친 적이 있는가.
첫댓글 박경한 시인님의 시 한 편 더 올립니다.
바닥
아버지가 노름해서
우리 집 누렁소 끌려 나가자
엄마는 고무신 벗어 땅바닥을 쳤다
늦가을 홍시가 간당간당 바닥을 치고
부도난 친구가 눈물 바닥을 쳤다
친구는 생의 발바닥 간지럼 한 번 못 태우고
반지하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배롱나무꽃을 오래 바라본 죄로
슬픔이 꽃잎처럼 부풀고
그 꽃잎은 바닥을 치겠지
칠 바닥이 있다는 것,
바닥이 있어 발바닥으로 일어선다
-네이버 블로그 <이슬나라 시인 박상희>에서
이 선생님, 저의 졸시를 이렇게 환대해주시니 민망합니다.
위의 시 「받침」은 『풀물 들었네』(학이사, 2022)에
「바닥」은 『사람의 문학』(2022 가을호)에 게재된 시입니다.
고맙습니다^^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다 받침이 있기 때문에
설 수 있고 꽃 피우며 그자리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작은 돌맹이 하나도 흙이나 동료의 받침이 있기에
그 존재 이유가 생기듯
구름이나 별 하나 까지도 받침이 있기에 존재합니다
내가 있는 것은 부모의 받침이 있었고
자녀가 있는 것도 나의 받침이 있기 때문이리라
학교가 있는 것은 학생의 받침이 있기 때문이고
국민이 받침이 있어야 대통령이 있듯 ㅎㅎㅎ
우리는 누군가의 받침위에서 살고 있고
또 누군기를 바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끝까지 파고 파고 든다면 결국 신이 유기적으로 만든 그물 코에 걸린 거지요
그 걸림으로 그 받침 배반 할 수 없어 슬퍼도 잘 살아야하지요
어려운 단어를 시 제목으로 잘 선택하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박경한 선생님
선생님, 이렇게 꼼꼼하게 짚어주시니 고맙습니다.
근래 <대구문학>2022년11월호에 선생님의 명시 '삭은 갈피'와 12월호에 평론을
<시인부락> 2022년 가을호에 선생님의 명시 '천판으로 만든 하마비'를
<사람의 문학> 2022년 가을호에 선생님의 명시 '씨 뿌리지 않아도'와 겨울호에 평론을 읽었습니다.
아무래도 관심은 기우는 쪽인 것 같습니다.
왕성한 창작열에 경의와 존경을 표합니다. 건안과 건필을 축원드립니다^^
받침은 혀. 혀가 피리이거나 생황笙簧이라면, 황簧은 혀.
받침은 마음과 사물을 온전히 쉬게 하고 머물게 하는 꽃과 책.
받침은 뒤와 손과 등불.
받침은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지는 수직의 말, 혹은 목숨의 끝간 데.
받침은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산밭의 오이
받침은 온몸과 온마음. 온생명과 온우주.
받침은 모름지기須 수염이 난 사람. 깨침의 도.
선생님의 비시론을 읽으며 밑줄을 그었던 생각이 납니다.
구심력의 문학이 아니라 원심력의 문학이 되고자 하지만
매번 '비시'를 모시지 못하고 헛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도 내일은 더 온전한 시를 쓰리라 기대하면서 스스로 다독입니다.
귀한 죽비, 고맙습니다^^
시든 꽃다발을 정리하다 보면 받침이 견고히 말라붙어 쉬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면도를 하다가 혀의 숨은 역할에서
받침을 연상하고 나를 있게 한 모성으로 연결 지은 발상이 새롭습니다
구석진 곳에서 가만히 주변을 위해 바치는 받침의 삶을 바라는 시심이 마지막까지 소박하고 구성지게 잘 표현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채 선생님, 어떤 분인가 했더니 이번에 대구시협 새 식구가 되신 분이시군요.
선생님의 등단작도 잘 감상했습니다.
시인의 재산은 관찰과 응시가 아닌가 합니다.
그러다보면 발견하게 될 것이고
다른 세계를 얻게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감각은 자꾸 뭉툭해 가니
시의 갈 길이 멉니다.
새해 시향천리(詩香千里)를 축원드립니다^^
장 선생님,
일필휘지의 글 감사히 받았습니다.
가보로 보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