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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지역 풍수기행
일시 : 2017. 4. 23
대상 : 하회마을
유성룡 선생 묘
정사 선생 묘
글 : 민 중 원
1. 안동하회마을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민속마을인 하회(河回)마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으로 풍산유씨(豐山柳氏)의 씨족마을이다. 문화유씨(文化柳氏)의 한 분파(分派)인 풍산유씨가 낳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을 들 수 있다.
화산(花山)이 서쪽의 낙동강 변으로 뻗어 내려 들판과 마을을 이루고 강물이 둥글게 감싸 돌아 흐르니 글자 그대로 하회(河回)마을이다. 큰물이 가깝고 지대가 낮은 편이므로 이런 곳의 터 잡기는 주변보다 다소라도 지대가 높은 곳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곳 마을에서 주변을 돌아보면 부용대(芙蓉臺)의 바위절벽이 보이는데 이는 풍수지리상 살기(殺氣)에 해당하므로 집터에서 보이지 않아야 한다. 만약 보이는 집이 있다면 담장을 높이거나 나무를 심어 시야를 차단할 필요가 있다.
이곳에서 집터의 좌향(坐向)을 잡는다면 지역 특성상 배산임수(背山臨水)를 고집하여 화산(花山)을 등지고 서향(西向)을 할 필요는 없고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부용대의 바위절벽이 보이지 않아야 하고, 둘째는 물이 나가는 곳을 향하지 말며, 셋째는 이곳은 큰 강물이 가깝게 둘리니 수기(水氣)가 강하므로 양광(陽光)을 많이 받아야 한다. 이상의 요인을 고려한다면 남향집이 적합하다. 이에 부합되는 주택이 양진당(養眞堂)으로 생각된다.
이 마을에서 풍수지리상 비보책(裨補策)은 부용대의 바위절벽과 물이 나가는 쪽으로 숲을 조성하여 안보이게 하면 좋겠다. 현재의 소나무 숲을 북쪽으로 더 길게 연장하면 차가운 북풍도 막아주는 효과를 겸할 수 있겠다.
마을에서 화산(花山)쪽으로 올라가면 비교적 넓고 마을보다 지대가 높은 언덕이 있다. 현재의 마을은 편출맥(偏出脈)으로 연결되었으나 이곳 언덕은 중출맥(中出脈)으로 이어졌으며 만약 강물이 범람할 경우에도 안전한 곳이다. 전통 민속 마을에 어울리는 모습의 관광명소로 개발하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
갈형(喝形)은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등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하회마을의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며 다음 행선지로 향하였다.
2.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 묘
경북 안동시 풍산읍 수리에 위치한 서애 선생 묘소에 올라보니 혈장(穴場)이 좌우로 넉넉한데 묘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뒤로 내려온 용맥(龍脈)을 따라 오르며 살펴보니 길(吉)한 형태인 개자(个字) 내맥(來脈)의 중출맥(中出脈)인데 좌선(左旋)의 곡맥(曲脈)으로 굽어내려 왔다.
혈장(穴場)이 좌우로 넓은데 백호방으로 치우쳐 점혈(點穴)한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즉 입혈맥(入穴脈)이 시계 방향으로 굽어 돌아 현재의 자리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자(个字) 형태의 중출(中出) 내맥(來脈)은 좋았으나 혈장 가까이 내려올수록 속기(束氣)하지 못하고 넓게 벌어져 혈장이 좌우로 넓어지니 기운이 원만(圓滿:둥글게 부푼 형태)하고 단단하게 뭉치지 못하여 일종의 보살면(菩薩面:혈증(穴證:分合)의 윤곽이 뚜렷하지 못하고 번번함) 형태가 되었음이 아쉽다.
혈장에서 앞을 보니 백호방(白虎方)에서 뻗어내려 앞으로 나간 줄기가 가까운 것은 혈장을 감싸고 뻗어 내렸고 그 뒤쪽의 줄기는 무정(無情)하게 달아났다. 혈장 바로 앞을 감싸고 뻗어 내린 줄기는 유정(有情)하여 다행이었으니 이곳에 점혈한 이유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좌선룡(左旋龍)에 우선수(右旋水)로 음양의 조화를 이루었다. 물길(水域)을 보면 내당수(內堂水)는 우수도좌(右水倒左)이나 외당수(外堂水)는 좌수도우(左水倒右)로 합법(合法)이다. 그러나 혈장이 마을이 있는 중명당(中明堂) 기준으로 한쪽에 치우쳐 혈(穴)의 좌향선(坐向線)이 중심을 관통하지 못하여 자손 간 길흉의 편차를 면하지 못하겠다.
갈형(喝形)은 선인무수형(仙人舞袖形)으로 생각된다. 물론 시간관계상 이곳 주변 전체를 다 살피지는 못하였지만 백호(白虎)에서 앞으로 뻗어 내린 두 줄기가 오른쪽 소매자락으로 각기 흩날리는 모습에서 그렇게 생각해 보았다. 이는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참고로 옛글에 보면 선인무수형(仙人舞袖形)의 시(詩)에 이르기를 “일산나산일산회(一山懶散一山回), 각사선인무수래(却似仙人舞袖來), 혈재정상단정작(穴在頂上端正作), 하수수요응용시(蝦鬚水要應龍腮)”라 하였고 또 글에 이르기를 “쌍비태양정격쌍타탕자(雙臂太陽正格雙拖蕩者), 시혈거복제이향대위안(是穴居腹臍以香臺爲案)”이라 하였다.
후손의 발복을 기원하며 다음 행선지를 향하였다.
3. 동래정씨(東萊鄭氏) 정사(鄭賜)선생 묘
안동에서 돌아오는 길에 예천의 조선 8대 명당이라는 정사(鄭賜)선생 묘소에 들렀다. 경북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에 있는 정사 선생 묘는 동래정씨(東萊鄭氏)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파조(派祖)의 묘소다. 동래정씨는 조선시대에 정승 17명을 배출했는데 정사(鄭賜)선생의 후손에서 정승 13명이 배출되었다.
직제학공파의 파조인 정사 선생은 세종때 예문관 직제학(藝文館 直提學)을 지낸 인물로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그 중에 셋째 아들인 정난종(鄭蘭宗)의 후손에서 13명의 정승이 나왔다.
정난종의 아들 3형제 중 둘째 아들 정광필(鄭光弼)이 중종 때 영의정에 올랐고 그의 후손에서 정승 12명, 판서 10여명 등 정이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만 30여명이 나왔다. 부산에 있는 조선 팔대 명당이라는 곳에 자리한 정문도(鄭文道)공은 정사선생의 11대조가 된다.
묘소 아래의 도로에 도착하여 혈장(穴場)을 올려다보니 넓고 화려하게 단장되고 남향(비문에 子坐午向으로 기록됨)으로 양지바른 언덕에 있어 언 듯 보기에 아름다웠다. 혈장에 올라보니 혈형(穴形) 4격(四格) 중 와혈(窩穴)인데 와혈 중 활와(濶窩)에 해당되었다.
혈(穴)의 진위(眞僞)와 대소(大小)를 분별하고자 뒤로 이어진 입수(入首)와 내룡(來龍)을 밟아 올라갔다. 뒤의 내룡이 한 번의 기복(起伏)과 봉요(蜂腰: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과협(過峽)이 벌의 허리처럼 잘록한 곳)는 있으나 내려오면서 기운이 모이지 못하고 점차 흩어지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특히 혈장(穴場) 바로 뒤로 연결된 입수룡(入首龍)은 기운을 모아서 혈(穴)로 보낼 수 있는 속기처(束氣處)가 뚜렷하지 않고 흩어진 형태를 보였다. 그리고 혈장에서 입혈맥(入穴脈)의 윤곽이 희미하니 오히려 지기(地氣)가 분산되어 일부는 혈 뒤에서 양쪽으로 내려간 줄기를 타고 나뉘어 아래로 달아나는 형태였고 혈(穴) 속으로는 온전히 들어가지는 못하는 입혈맥(入穴脈)의 형태이다.
만약 혈 뒤의 테두리(현릉:弦稜)와 혈 앞의 순전(脣氈)이 인공(人工)이라면 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순전은 혈에 응취(凝聚)되고 남은 기운의 발로(發露)인데 이것이 인공(人工)이라면 문제가 된다. 이곳 혈장의 형태상 현재로서 거의 유일한 혈증(穴證)은 바로 순전(脣氈)의 유무(有無)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순전이 지금보다 풍만하게 부풀었다면 현재의 가파른 혈장도 기운이 멈춘 형태의 평탄함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릉(弦稜:와혈의 테두리)의 양국(兩掬:양쪽 옆에서 혈을 감싸는 미미한 줄기)이 혈을 향하여 환포하지 못하고 마치 영문 대문자 A자나 짊어지는 지개의 다리처럼 생긴 형태로 거의 곧게 양쪽으로 각기 달아나고 있다. 물론 왼쪽 줄기의 비석세운 부분과 오른쪽 줄기의 끝 부분에서 갈라진 한 줄기가 역수(逆水)하여 안쪽으로 구부린 것은 다행이나 너무 내려가 있다.
현릉의 양국은 둥글게 환포하고 그 끝이 우각사(牛角砂)의 모양으로 안쪽으로 굽어야 와혈(窩穴)에 부합하고 합수(合水)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순전 바로 아래에 있어야할 우각사 형태가 너무 밑으로 내려가 끝에서 흔적이 있으니 소분합(小分合:혈장분합)의 상분하합(上分下合)에서 하합(下合)의 합금수(合襟水)를 기대할 수 없는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상분(上分)의 흔적인 계수(界水)가 불분명하여 해안수(蟹眼水)도 자취가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위에서 내룡(來龍)을 타고 내려온 기운이 혈(穴)에 멈추어 모였는지가 관건인데, 혈장이 다소 가파른 편이니 모든 기운이 이곳에 멈추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즉 기울어 가파르면 기운이 멈추지 못하고 흘러 내려가는 형태이고 평탄하면 기운이 멈춘 형태라 하겠다. 음래양수(陰來陽受)라 하여 가파른 것은 음(陰)이고 평탄한 것은 양(陽)인데 가파른 곳은 평탄한 곳에 기운이 멈추는 것이다. 가파른 곳이 평탄하게 되려면 순전(脣氈)이 풍만하게 부풀어 발달하면 자연히 혈장도 평탄하게 된다.
참고로 옛글에 보면 “활와(濶窩)의 경우 와(窩) 중에 미유(微乳)나 미돌(微突) 혹은 육지(肉地:살찐 곳)가 있어야 유두(乳頭)나 돌정(突頂) 등에 안천(安扦)하여야 합격(合格)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공망(空亡) 허냉(虛冷)의 와(窩)로 기운이 응취(凝聚)하지 못한다. 또 현릉(弦稜;테두리)이 명백(明白)하고 양국(兩掬:양쪽 옆에서 감싸는 줄기)이 만포(彎抱:굽어 감싸는 형태)하여야 합법(合法)이다.
만약 와(窩)의 형상이 태활(太濶)한데 유(乳), 돌(突)이 없고 양국(兩掬)이 불교(不交:혈을 감싸고 아래로 내려간 줄기가 혈 아래쪽에서 만나거나 오므라들지 않아서 상분하합(上分下合)의 합수(合水)를 유도하지 못하고 혈을 돌아보지 않고 각기 달아나는 형태)하면 불가(不可)하다”고 옛글에서 경계하고 있다.
시야를 멀리하여 주위를 돌아보니 청룡작국(靑龍作局)의 안산(案山)과 앞으로 뻗어나간 백호(白虎)가 낮아 외명당(外明堂)이 보이니 외명당을 뚜렷하게 경계짓지 못하였다. 따라서 외당(外堂)의 강바람을 차단할 수 없어 완전한 장풍국(藏風局)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내당수(內堂水)와 외당수(外堂水)가 엇갈리지 못하고 똑같이 좌수도우(左水倒右)이니 아쉽다.
그리고 고대(高大)한 조산(朝山)인 비봉산이 나를 향하지 않고 외면하고 있으며 그 왼편 뒤쪽으로 다른 산이 뒤에 숨어 몸을 한쪽 일부만 드러내고 엿보고 있어 약간의 흠이 된다. 그러나 고대한 조산의 오른 쪽 산줄기가 허(虛)한 백호방(白虎方)을 멀리서 보완하여 거수방(去水方)을 차단한 것은 다행이다.
이곳은 자손 발복(發福)으로 인하여 조선 8대 명당이라 칭하는 자리로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는데 일부 후학들이 조선 8대 명당이라는 소문만 듣고 무조건 좋게만 평가할 것이 염려된다. 이곳 한 자리로만 그 많은 발복이 이루어 졌다고 단정하지 말고 윗대와 후대의 다른 자리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필자는 장점은 생략하고 아쉬운 점만을 현재의 모습에서 학술적으로 엄격하게 분석했는데 그에 따른 보완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오랜 세월 지사의 도움 없이 치산(治山)하고 사초(莎草)하는 과정에서 원형(原形)이 훼손되어 현재의 모양이 이루어졌다면 다음과 같이 보완하면 좋겠다.
첫째, 봉분(封墳) 주위를 한자 이상 흙으로 돋우어 높여서 와(窩) 중 미유(微乳) 미돌(微突)의 형태를 복원하고 봉분 뒤쪽으로 훼손된 입혈맥(入穴脈)을 연결하며, 봉분 양쪽의 계수(界水) 흔적도 복원하여 기운이 좌우로 흩어지는 형태를 바로잡아 상수(相水)의 한 부분인 상분(上分)과 해안수(蟹眼水)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
둘째, 제절도 따라서 높이고 제절 아래 쪽 순전(脣氈)도 풍만하게 둥근 형태로 보토(補土)하여 가파른 혈장을 평탄하게 하여야한다.
셋째, 순전 아래쪽에 양쪽으로 뻗어 내려간 줄기와 연결하여 우각사(牛角砂) 모양을 복원해서 합수(合水)를 유도하는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옛 모습을 회복하거나 비보(裨補)하여 풍수상 소중한 유적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기를 바란다.
갈형(喝形)은 옥녀개각형(玉女開脚形) 등으로 알려져 있다.
후손의 발전을 기원하며 하산하였다.
첫댓글 잘보았읍니다...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이번답산에는
참석을 못해지만 가서 답산을 한것 보다 자세한 설명에 많은것을 배우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잘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