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지도론 제33권
50. 초품 중 도피안(到彼岸)의 뜻을 풀이함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유위(有爲)ㆍ무위(無爲)의 법의 저 언덕[彼岸]에 이르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저 언덕[彼岸]이라 함은 유위의 법과 무위의 법을 다하여 그 끝에 이르는 것이다.
어떻게 저 언덕을 큰 지혜로써 모두 알고 모두 다 하는가?
유위의 법에서는 전체의 모양[總相]과 각각의 모양[別相] 갖가지를 모두 이해하는 것이고,
무위의 법 안에서는 수다원(須陀洹)에서부터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유위와 무위의 법의 모습의 의미는 먼저 설명한 것과 같다.
【經】 보살마하살이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법의 여(如)와 모든 법의 법상(法相)과 무생제(無生際)70)를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위에서 이미 여(如)를 설명했는데 이제 무엇 때문에 다시 설명하는가?
【답】 위에서 곧장 모든 법의 여만을 설명했고, 이제는 3세가 모두 여임을 말하는 것이다. 위에서는 간략하게 설명했고 여기서는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며, 위에서는 하나[一]임을 설명했고 여기서는 셋[三]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법상은 곧 그것이 법성(法性)이며 무생제는 곧 그것이 실제(實際)이다. 과거법의 여(如)는 곧 그것이 과거의 법상(法相)이며 미래와 현재도 역시 그와 같다.
또 과거법의 여(如)는 곧 그것이 미래와 현재의 법의 여이며,
현재법의 여는 곧 그것이 과거와 미래의 법의 여이며,
미래법의 여는 곧 그것이 과거ㆍ현재의 법의 여다.
그것은 왜냐하면, 여의 모양은 동일한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 먼저 설명했듯이 두 가지의 여가 있다.
첫째는 세간의 여[世間如]요,
둘째는 출세간의 여[出世間如]다.
이 세간의 여로써 하면 3세가 저마다 다르지만 이 출세간의 여로써 하면 3세가 동일한 것이 된다.
또 법상(法相)이란 모든 법의 업(業)과 모든 법이 짓는 힘[力]과 인연과 과보를 이름하니,
마치 불은 더운 모양이고 물은 축축한 모양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모든 법안에서 인연과 과보를 분별하면 저마다 각각의 모양이 있게 된다.
마치 시처비처력(是處非處力) 중에서의 설명과 같나니, 이것을 세간의 법상이라 한다.
만일 이 모든 법상을 추구하면서 찾고 궁구한다면 생함이 없는 법[無生法] 안에 들어가게 된다.
다시는 이보다 더 지나는 것이 없나니, 이것을 무생제(無生際)라 한다.
【문】 마치 법상에서와 같이 3세가 있다고 분별할 수 있으면 무생제는 미래의 법인데 어떻게 과거와 현재가 있겠는가?
마치 아비담(阿毘曇)의 설명과 같아서 생하는 법[生法]이면 과거와 현재이고, 이것이 생함이 없는 법이라면 미래 및 무위의 법이다.
그런데 어떻게 과거와 현재에 생김이 없는 것[無生]을 있게 하려 하는가?”
【답】 마치 먼저 갖가지로 생기는 법을 설파(說破)한 것과 같다.
온갖 법이 모두가 생겨남이 없거늘 어찌 미래에만이 무생이겠는가.
마치 어느 때[一時]의 뜻 가운데서 이미 3세를 설파한 것과 같나니,
3세는 한 모양이어서 이른바 모양 없는[無相] 것이다.
이와 같다 하면 생김이 없는 모양[無生相]이다.
또 생김이 없는 것을 열반이라 하나니, 열반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열반이라 함은 맨 뒤의 마지막[末後究竟]이어서 다시는 더 생기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온갖 법이 곧 열반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온갖 법은 모두가 무생제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온갖 성문이나 벽지불 앞에 있고자 하거나, 모든 부처님을 곁에서 모시고자 하거나, 모든 부처님의 안의 권속[內眷屬]이 되고자 하거나, 큰 권속[大卷屬]을 얻고자 하거나, 보살의 권속을 얻고자 하거나, 청정한 과보를 받는 큰 보시[淨報大施]를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만일 보살이 아직 번뇌가 다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번뇌가 다한 성인 앞에 있을 수 있겠는가?
【답】 보살은 처음 뜻을 일으켰을 때 벌써 온갖 중생의 앞에 있는 것인데 하물며 오랜 겁 동안 수행을 쌓은 이겠는가.
이 보살의 공덕과 지혜는 크기 때문에 세상마다 항상 크게 성문과 벽지불을 이익되게 하고, 중생들은 보살의 은혜를 알기 때문에 숭앙하고 공경 존중하며 축생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존중하게 된다.
마치 보살이 옛날 사슴으로 있을 때 그 빛깔은 금과 같았고 그 뿔은 7보(寶)로 되었으며 5백의 사슴이 따르면서 존중하고 섬긴 것과 같다.
만일 인간 가운데 있을 때 좋은 세상에는 전륜성왕이 되고 나쁜 세상에는 항상 위대한 왕이 되어서 부처님 법을 수호 유지하고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만일 출가하여 부처님 법을 만나면 세간을 위하여 크게 제도하는 스승[大度師]이 되어서 부처님의 법을 일으켜 떨치고,
만일 부처님의 법이 없다면 외도(外道)의 큰 스승이 되어서 4무량(無量)을 행한다.
나한과 벽지불은 비록 번뇌는 없다 하더라도 이익되게 하는 일이 적음은 마치 한 되[升]의 소[酥]가 비록 정세(精細)한다 하더라도 큰 바닷물만큼의 타락[酪]보다는 못한 것과 같다.
보살은 비록 번뇌를 지닌 지혜일지라도 그 성숙되게 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한량이 없다.
또 나한과 벽지불은 4사(事)의 공양과 도를 돕는[助道] 제구[具]를 거의 모두 보살로 말미암아 얻게 된다.
마치 『수릉엄경(首楞嚴經)』에서,
“문수사리(文殊師利)는 72억 번을 벽지불이 되어서 벽지불의 사람을 교화하며 그들로 하여금 도를 이루게 하였다”고 말씀한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 앞에 있게 된다.
모든 부처님을 곁에서 모시고 섬기는 이[給侍]가 되고 싶다 함은,
마치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아직 출가하지 않으셨을 때 차닉(車匿)71)이 모시고 섬겼으며, 우타야(優陀耶)가 같이 놀아 주고 구비야(瞿毘耶)ㆍ야수타(耶輸陀) 등과 모든 채녀(婇女)들이 안의 권속[內眷屬]이었다.
그리고 출가하여 6년 동안 고행을 할 때는 다섯 사람이 모시고 섬겼고,
도를 얻을 때에는 미희라타(彌喜羅陀)72)ㆍ수나찰다라(須那刹多羅)ㆍ아난(阿難)ㆍ밀적역사(密跡力士) 등이 있었나니, 이들을 안의 권속이라 한다.
큰 권속[大眷屬]이라 함은, 사리불(舍利佛)ㆍ목건련(目揵連)ㆍ마하가섭(摩訶迦葉)ㆍ수보리(須菩提)ㆍ가전연(迦栴延)ㆍ부루나(富樓那)ㆍ아니로두(阿泥盧豆) 등의 성인들과 미륵(彌勒)ㆍ문수사리(文殊師利)ㆍ발타바라(颰陀婆羅)의 모든 아비발치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 등을 바로 큰 권속이라 한다.
또 부처님에게는 두 가지의 몸이 있나니,
첫째는 법성생신(法性生身)73)이고,
둘째는 세간을 따르는 몸이시다.
세간 몸에서의 권속은 먼저의 설명에서와 같다.
법성생신에게는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의 일생보처 보살들이 있으면서 모시고 섬겼다.
그것은 왜냐하면, 마치 『불가사의해탈경(不可思議解脫經)』에서,
“부처님이 태어나려 할 때에는 8만 4천의 일생보처 보살이 그 앞을 인도하고 보살은 그 뒤를 따라 출생하셨으니, 마치 검은 구름이 달을 싼 것과 같았다”고 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 『법화경(法華經)』에서,
“땅에서 솟아나온 보살들이 모두 이는 안의 권속이요 큰 권속이다”고 한 것과 같다.
보살 권속(菩薩眷屬)이라 함은 어떤 부처님은 순전히 보살을 권속으로 삼고 어떤 부처님은 순전히 성문을 권속으로 삼으며 어떤 부처님은 보살과 성문들을 같이 권속으로 삼는다.
이 때문에 “보살들만의 권속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권속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상ㆍ중ㆍ하이다.
하(下)라 함은 순전히 성문들의 권속이고,
중(中)이라 함은 성문과 보살이 섞인 권속이며,
상(上)이라 함은 보살들만의 권속이다.
청정한 과보를 받는 큰 보시[淨報大施]라 함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보살은 복덕을 많이 쌓았으나 미처 번뇌를 제거하지 못하면, 남의 신시(信施)를 받되 아직 청정한 과보가 될 수는 없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모든 법은 모두가 공하여 얻을 수가 없는데, 하물며 모든 번뇌[結使]이겠느냐”고 하신다.
보살은 법성(法性) 안에 들기 때문에 진제(眞際)를 증득하지 않나니, 이 때문에 청정한 과보를 받는 보시의 복이다.
또 보살은 공덕이 광대하여 발심한 이후부터 낱낱 중생을 대신하여 온갖 고통을 받으려 하고 온갖 공덕을 온갖 중생에게 주려고 하면서 그런 뒤에야 스스로 부처님의 도를 구해야 되지만, 그 일만은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가 부처님이 되신 뒤에 온갖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또 보살이 뜻하는 원[志願]은 아승기(阿僧祇)에 구애받지 않고 마치 세간과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ㆍ허공(虛空) 등과 같이 오래도록 머무르고,
보살의 마음은 세간에 머무르면서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역시 그와 같이 오래 머무르면서 한이 없나니,
이런 사람이 청정한 과보를 받는 보시의 복일 수가 없으면 그 누가 청정함을 다하겠는가.
마치 부모가 비록 번뇌[結使]와 모든 악(惡)이 있다 하더라도 한 세대(一世) 동안은 자식들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그들의 공양을 받고 자식들로 하여금 큰 복을 얻게 한다.
그러니 하물며 보살은 모든 결사가 없고 끝없는 세상 동안에 머무르면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데도 청정함을 다하지[淨畢] 않겠는가.
또 보살은 다만 가엾이 여기는 마음만 있고 반야(般若)가 없어도 오히려 이익되게 하는데 하물며 반야바라밀을 행함이겠는가.
【문】 만일 보살에게 번뇌[結使]가 없다면 어떻게 세간에 태어나게 되는가?
【답】 먼저 이미 대답했다. 보살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고 법성생신(法性生身)을 얻은지라 곳곳마다 변화하면서 중생을 제도하고 세계를 장엄하나니, 이런 공덕의 인연 때문에 비록 아직 부처는 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청정한 과보를 받는 보시의 복이다.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간탐하는 마음[慳心]ㆍ파계(破戒)하는 마음ㆍ성내는 마음ㆍ게으른 마음ㆍ산란한 마음ㆍ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려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이 여섯 가지 마음은 삿되기 때문에 능히 6바라밀을 가리고 막는다.
마치 보살이 보시를 행할 때 만약 간탐하는 마음이 있으면 보시가 청정하지 않게 되나니, 이른바 좋은 물건을 보시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설령 좋은 물건을 베풀어 준다 해도 많이 주지 못하고, 설령 바깥 물건을 베풀어 준다 해도 안의 물건은 주지 못하며, 설령 안의 물건을 베풀어 준다 해도 모조리 주지 못하나니, 모두가 간탐하는 마음 때문이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온갖 법은 나가 없고 내 것이 없고 모든 법은 모두가 공하여 마치 꿈과도 같고 허깨비 같은 줄 알므로, 몸의 머리와 눈과 골수를 보시하는 것이 마치 풀과 나무와 같이 한다.
이 보살은 비록 아직 도를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항상 이 간탐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모든 그 밖의 사람은 욕망을 여의고 도를 얻기 때문에 파계(破戒)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까닭에 파계하는 일을 보지 않는다. 그것은 왜냐하면, 계란 온갖 모든 착한 공덕이 머무르는 곳이 되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땅은 온갖 만물이 의지하는 곳이 되는 것과 같다.
파계하면 오히려 그 밖의 도(道)도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겠는가.
이 때문에 파계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며,
다시 생각하기를,
“보살의 법이란 중생을 안락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파계하면 온갖 중생을 괴롭히고 어지럽히게 된다”고 하나니,
이 때문에 보살은 파계하려는 마음조차도 내지 않는데 하물며 파계하는 일이겠는가.
소승(小乘)과 모든 범부조차도 오히려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하는데 하물며 보살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뜻을 내는 이겠는가.
몸은 고통의 그릇[苦器]인지라 스스로 괴로움을 받는다.
비유하건대 마치 죄를 범한 사람이 스스로 형벌의 죽임을 초래함은 스스로가 지어서 스스로가 받는 것이니 남을 원망하지 않아야 하는 것과 같다.
다만 자기의 마음을 수호하면서 악(惡)이 일어나지 않게 할 뿐이니,
마치 사람이 모진 바람과 비와 추위며 더위를 만난다 해도 역시 성내는 바가 없는 것과 같다.
다시 생각하기를,
“보살이 부처되기를 구함은 대비(大悲)로써 근본을 삼는다.
만일 성을 품는다면 뜻하는 원을 상실하게 된다.
성을 내는 사람은 세간의 즐거움조차도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도(道)의 즐거움이겠는가. 성을 내는 사람은 스스로도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데, 어찌 남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으랴”고 한다.
게으른 사람은 세간의 뛰어난 일조차도 오히려 이루지 못하는데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겠는가.
비유하건대 마치 나무를 비비어 불을 일으키려 하면서 자주자주 쉬게 되면 불을 얻을 기약조차 없는 것과 같다.
산란한 마음은 마치 바람 속에 켜져 있는 등불이 비록 광명은 있다 하더라도 물건을 잘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산란한 마음속에 있는 지혜도 역시 그와 같으니, 지혜는 바로 온갖 착한 법의 근본이다.
만일 이 지혜를 성취하고자 하면 먼저 마음을 다스린 다음에야 이룰 수 있다.
비유하건대 마치 몹시 취한 사람은 자기의 이익이나 다른 이의 이익이나 곱고 추한 일들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산란한 마음도 역시 이와 같나니, 세간의 좋은 일조차도 오히려 잘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출세간(出世間)의 법이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온갖 성취하고 실패하는 일에도 모두 미치지 못하는데 하물며 미묘하고 깊은 이치이겠는가.
비유하건대 마치 눈이 없는 사람은 혹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혹은 길이 아닌 데로 들어가기도 하듯이,
지혜 없는 사람 역시 그와 같아서 지혜로운 눈이 없기 때문에 삿된 법을 받아 집착하고 바른 소견을 받지 못한다.
이와 같은 사람은 세간의 비근한 일조차도 이루지 못하는데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겠는가.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힘 때문에 이 여섯 가지 폐단을 능히 막고 6바라밀을 청정하게 하나니, 이 때문에,
“만일 여섯 가지의 폐단을 일으키지 않으려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보시(布施)의 복처(福處)와 지계(持戒)의 복처와 수정(修定)의 복처와 권도(勸導)의 복처에 서게 하려 하거나 중생으로 하여금 재물의 복[財福]과 법의 복[法福]의 처소에 서게 하려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어떤 것을 복처(福處)라 하는가?
【답】 아비담(阿毘曇)에서 말하기를,
“복이라 함은 착한 유루(有漏)의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의업(意業)이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불은몰무기(不隱沒無記)가 그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착한 유루법의 인연의 과보로 이 불은몰무기의 복을 얻기 때문이다”고 한다.
이 과보를 역시 복이라 하는데, 마치 세간 사람이 큰 일을 이루고 성취하는 일이 많은 이를 바로 복덕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 복은 요약하여 세 가지로 말하나니, 보시(布施)와 지계(持戒)와 수정(修定)이다.
어떤 것이 보시인가?
곧 어떤 사람이 의복ㆍ침구ㆍ음식이나 꽃ㆍ향ㆍ영락 등을 남에게 주는 것이니, 이것을 보시라 한다.
【문】 음식 등의 물건이 바로 보시인데 다시 보시라는 것이 있는가?
【답】 음식 등의 물건이 곧 보시는 아니다. 그 음식 등의 물건을 남에게 줄 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법을 버림[捨]이라 하는데, 인색한 마음과는 서로 반대되니, 이것을 보시 복덕이라 한다.
이것은 유루(有漏)이기도 하고 무루(無漏)이기도 하다.
항상 이것은 착한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과 마음과 상응한 수심행(隨心行)과 함께 마음이 생기며,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으면서 능히 반연[緣]을 짓는다.
업(業)과 상응한 수업(隨業)ㆍ행업(行業)과 함께 생기고 먼저 지은 업의 과보로 얻는 것은 아니며, 행수(行修)ㆍ혜증(慧證) · 신증(身證)이면서 범부의 사람도 얻고 또한 성인도 얻는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버림[捨]의 법과 상응한 사(思)를 바로 보시의 복덕이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업(業)은 과보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思)는 바로 업이다. 몸과 입은 업이라 하지 않으며, 사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업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고 한다.
이 보시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청정한[淨] 것이고,
둘째는 청정하지 않은[不淨] 것이다.
청정하지 않은 것이라 함은 그냥 베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혹은 재물을 잃을까 두렵기 때문에 주기도 하고,
혹은 질책을 싫어하기 때문에 주기도 하며,
혹은 쓸 데 없기 때문에 주기도 하고,
혹은 친밀히 사랑하기 때문에 주기도 하며,
혹은 보시를 함으로써 세력의 도움이 많으므로 그 세력을 구하기 위하여 주기도 한다.
혹은 아주 급한 일 때문에 주기도 하고,
혹은 좋은 명예를 구하기 위하여 주기도 한다.
혹은 훌륭한 이와 이름을 같이하기 위하여 주기도 하고,
혹은 질투 때문에 주기도 하며,
혹은 “소인(小人)과 비천한 이조차도 베풀거늘 나는 귀한 이요 대인(大人)이면서 어떻게 베풀지 않겠는가”고 하면서,
그 교만 때문에 주기도 한다.
혹은 복덕을 빌기 위하여 베풀기도 하고,
혹은 길(吉)한 일을 구하면서 흉(兇)한 일을 제거하기 위하여 베풀기도 하며,
혹은 한 패거리에 들어가기 위하여 베풀기도 하고,
혹은 한결같지 않은 마음으로 공경하지 않고 받는 이를 업신여기면서 베풀기도 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은 이 세상의 일을 위하여 보시하는 것으로 청정함과는 어긋남을 일컬어 청정하지 않다고 한다.
청정한 보시[淨施]라 함은,
마치 경 가운데에서 설명하듯이 마음을 다스리는 까닭에 보시하고,
뜻을 장엄하는 까닭에 보시하며,
으뜸가는 이익을 얻기 위하여 보시하고,
청정한 마음을 내고 잘 분별하면서 열반을 돕기 위하여 보시하는 것이니,
비유하건대 마치 새로 핀 꽃이 아직 시들지 않았으면 빛깔도 좋고 또한 향기로운 것처럼, 청정한 마음의 보시도 역시 그와 같다.
마치 설명하기를,
“모든 하늘이 청정하지 않은 마음으로 보시하면 궁전의 광명이 박(薄)하고 적지만,
만일 청정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궁전의 광명이 더욱 광대하다”고 한 것과 같다.
이 보시의 업은 비록 과거 세상의 것이라 하더라도 천만의 세상까지 이르면서 상실하지 않나니, 마치 어음[券]의 언약과 같다.
【문】 이 보시의 복은 어떻게 더욱 자라나는가?
【답】 때맞추어 보시하기 때문에 복이 더욱 자라게 된다.
마치 경 가운데에서 설명하듯이,
굶주릴 때에 보시하면 복이 더욱더 많아지게 되며,
혹은 먼 데를 가고 올 때나 광야나 험한 길을 지나고 있을 때에 보시하거나,
혹은 항상 보시하면서 끊어지지 않거나 때로는 늘 보시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보시한다면, 그 복이 더욱더 광대하다.
6념(念) 중의 염사(念捨)에서의 설명과 같으니, 만일 크게 보시하면 그 때문에 복을 얻음이 많고,
또는 좋은 사람에게 보시하거나,
부처님께 보시하거나,
보시하는 이[施者]나 받는 이[受者]가 청정하기 때문에 결정된 마음으로 보시하거나,
또는 자기의 힘으로 재산을 모아서 보시하거나,
가지고 있는 많고 적음에 따라 모조리 보시하거나,
또는 번갈아 물건을 보시하거나,
동산과 밭과 심부름꾼 등으로 보시한다.
이와 같은 보시는 오직 보살만이 깊은 마음으로 행할 수 있다.
마치 위라마(韋羅摩)74)보살이 12년 동안 보시하고 나자 장엄하게 꾸민 젖소와 7보로 된 발우와 채녀(婇女)가 각각 8만 4천이나 있게 되었고 모든 그 밖의 물건과 음식 등속은 이루 다 헤아릴 수조차 없었던 것과 같다.
또 수제예나(須帝隸拏)75)보살은 좋고 훌륭한 흰 코끼리를 원수에게 보시하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 있으면서 사랑하던 두 아들을 12명의 추한 바라문에게 보시했으며,
다시 아내와 눈을 변화한 바라문에게 보시하자,
그때 땅은 크게 진동하고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요란하였으며 공중에서 꽃비가 내려왔다.
또 살바달다왕(薩婆達多王)은 스스로 그의 몸을 묶어서 바라문에게 보시하고,
시비왕(尸毘王)은 한 마리의 비둘기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비둘기 고기에 대신한 것과 같으며,
또한 보살은 일찍이 토끼의 몸이었을 때 자신의 살을 구어서 선인(仙人)에게 보시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들은 『보살본생경(菩薩本生經)』 가운데에서 설해지는 바이다.
또한 성문(聲聞)의 사람의 보시도 있다.
수미타(須彌陀) 비구니 같은 이는 두 동학(同學)과 함께 가나가모니부처님[迦那伽牟尼佛]을 위하여 정사(精舍)를 지어 드려 수없는 천만의 세상 동안 전륜성왕과 천왕(天王)의 복을 누렸다.
시(施) 바라문 같은 이는 한 병의 타락[酪]을 가져다가 스님들에게 보시하고는 세상마다 즐거움을 받았고, 지금은 아라한이 되어서 모든 즐거움을 누리는 이 가운데서는 가장 으뜸이다.
또 말리부인(末利夫人)은 수보리에게 공양한 까닭에 금생에 과보를 얻어 파사니왕(波斯尼王)의 왕후가 되었으며,
시바(尸婆) 같은 이는 가전연(迦栴延)에게 공양한 까닭에 금생에 과보를 얻어 전타바주타왕(栴陀波周陀王)의 왕후가 되었었다.
또 울가타(鬱伽陀) 거사(居士)는 사리불 등의 5백 아라한에게 공양한 까닭에 바로 그날 과보를 얻었다. 즉 5백의 장사꾼들이 그 남은 밥을 얻어먹고 저마다 구슬과 영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갑자기 큰 부자가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졸가타(卒伽陀)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베풀어서 금생에 과보를 얻은 예이다. 그러므로 보시를 논의하자면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줄 알아야 하리라.
지계(持戒)의 복처(福處)라 함은 부처님께서 5계(戒)를 말씀한 바로 그것이다.
【문】 어떤 것이 살생죄[殺罪]의 모양인가?
【답】 그가 중생인 줄 알면서 고의로 목숨을 빼앗으면 살생의 죄가 된다.
살생을 하고도 고의가 아닌 것도 아니면서 안온하고 유쾌한 마음이 되면 살생의 죄가 되며,
산란하거나 미친 마음이 아니면서 목숨을 빼앗으면 살생의 죄가 되고,
상처를 낸 것은 아니나 죽게 되면 살생의 죄가 된다.
아직 죽지 않은 것이 아닌 신업(身業)은 바로 살생의 죄이고, 입으로 지시하고 몸으로 지은 것이 아니어도 그것은 살생의 죄이다.
비단 마음으로 내는 것만이 아니라 이와 같은 죄를 그치고 짓지 않는 것이 바로 첫 번째의 계선(戒善)의 모양이다.
혹은 어떤 사람은 이것을 불은몰무기[不隱沒無記]라고 말하기도 한다.
혹은 욕계에 매이기도[欲界繁] 하고 매이지 않기도 하며,
이것은 마음도 아니고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도 아니며,
마음과 상응한 것도 아니고 마음을 따라 행해지는 것도 아니며,
혹은 마음과 함께 생기기도 하고 마음과 함께 생기지 않기도 한다.
업(業)과 상응한 것도 아니며, 업행을 따라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혹은 업과 함께 생기기도 하고 혹은 업과 함께 생기지 않기도 한다.
먼저 지은 업의 과보도 아니고 득수(得修)ㆍ행수(行修)ㆍ신증(身證)ㆍ혜증(慧證)이며, 혹 사유(思惟)에서 끊어지기도 하고 혹은 끊어지지 않기도 하며, 욕계의 욕망을 여읠 때에 끊어지게 되고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음을 아나니, 이것을 불살생(不殺生)의 계상(戒相)이라고 한다.
그 밖의 계율도 역시 그와 같아서 이치를 따라 모든 계율을 분별하고 찬탄하며 논의하니, 마치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 가운데서의 설명과 같다.
수정(修定)의 복처(福處)라 함은, 비록 경전 가운데서는 “인자함[慈]을 닦는 것이 바로 수정의 복이다”고 하였지만,
또한 “유루의 선정[有漏禪定]은 능히 과보를 낸다”고 설명한 것도 통틀어 수정의 복이라 부른다.
욕계에는 성을 냄도 많고 산란한 일도 많기 때문에 먼저 인자한 마음[慈心]을 말하면서 수정의 복을 얻는다고 한다.
인자한 방편은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기를 원하고 나중에는 실로 즐거움을 받는 것을 보나니, 이 마음과 상응하는 법을 일컬어 인자한 법[慈法]이라 한다.
이 법은 혹 색계(色界)에 매이기도 하고 혹은 매이지 않기도 하나니, 이것이 진실한 자(慈)이다.
이 방편의 자는 욕계에 매인 것이며, 항상 마음의 행을 따르고 마음을 따라 생기며, 형상도 없고 대(對)할 수는 없다.
능연(能緣)의 법이면서 업(業)은 아니되 업과 상응하면서 업행을 따르며, 업과 함께 생겨난다.
먼저 지은 업의 과보도 아니고, 득수(得修)ㆍ행수(行修)ㆍ신증(身證)ㆍ혜증(慧證)이며, 혹은 사유(思惟)에서 끊어지기도 하고 혹은 끊어지지 않기도 하며 색계(色界)의 욕망을 여읠 때에 끊어지게 된다. 유각유관(有覺有觀)과 또한 무각유관(無覺有觀)과 또한 무각무관(無覺無觀)임을 알 수 있다.
혹은 기쁨[喜]이 있기도 하고 기쁨이 없기도 하며,
혹은 숨[息]이 있기도 하고 숨이 없기도 하다.
또한 범부와 성인의 즐거운 느낌[樂受]과 상응하기도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과 상응하기도 하며,
먼저 득해(得解)의 모양을 반연하고 뒤에는 실의(實義)를 반연한다.
근본사선(根本四禪) 중에서 역시 4선을 초과하고 4선에 의지하여 얻게 되는 이는 견고하면서 힘이 있다.
자(慈)는 마땅히 친밀한 사랑[親愛]이라고 말해야 하리니, 원한도 없고 다툼도 없기 때문에 친밀한 사랑이라 한다.
한량없는 중생을 반연하기 때문에 한량없다[無量]고 하고, 중생을 이익되게 하면서 욕망을 여의기 때문에 범행(梵行)이라 한다.
자심(慈心)에 관한 그 밖의 논의는 4무량(無量) 중에서의 설명과 같다.
【문】 수정의 복 가운데서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자의 마음만을 말씀하시고 그 밖의 것은 말씀하지 않는가?
【답】 4무량 중에서 자의 마음은 능히 큰 복덕을 내거니와,
비(悲)의 마음은 근심하고 걱정하기 때문에 복덕을 버리며,
희(喜)의 마음은 스스로 공덕을 생각하기 때문에 복덕이 깊지 않으며,
사(捨)의 마음은 놓아 버리기 때문에 복덕이 역시 적다.
또 부처님께서는 자(慈)의 마음에 다섯 가지의 이익이 있음을 말씀하셨고,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 이익인가?
곧 첫째는 칼이 상하지 못하게 하고,
둘째는 독이 해치지 못하며,
셋째는 불이 태우지 못하고,
넷째는 물이 빠뜨리지 못하며,
다섯째는 온갖 성을 내고 악하고 해치는 중생들도 보면 모두가 환희한다.
비(悲)의 마음 등 세 가지 일은 그렇지가 못하니, 이 때문에 수정의 복은 자(慈)라고 말씀한 것이고,
그 밖의 나머지는 그것에 붙따르며 모든 과보를 내는 유루의 선정[有漏定]이다.
권도(勸導)의 복처(福處)라 함은 만일 어떤 비구가 좌선(坐禪)도 하지 못하고 경전도 독송하지 못하면, 교화하고 권하여 이끌어 복덕을 닦고 세우게 한다. 혹 어떤 비구는 좌선도 하고 경전을 독송할 수 있으나, 비구들의 옷과 음식이 모자라는 것을 보고는 힘껏 끌어 들이는 등 역시 권도를 행한다.
나아가 모든 보살은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복덕의 인연으로 그들을 권화하며, 또한 출가한 사람이 만일 재물을 구하게 되면 계율을 잃게 되므로 이 때문에 권하고 이끌어 인연을 짓게 한다.
재복(財福)이라 함은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ㆍ금ㆍ은ㆍ수레ㆍ말ㆍ밭 및 집 등이다.
【문】 위에서는 보시의 복처라고 말하고 여기서는 재복이라 말하는데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답】 보시라 함은 온갖 보시, 곧 재물의 보시[財施]와 법의 보시[法施]와 세속의 보시[俗施]와 도의 보시[道施]를 통틀어 포섭한다.
여기에서는 법의 보시와 재물의 보시를 분별해 보겠다.
법의 보시라 함은,
마치 부처님께서 큰 자비로 최초로 법륜(法輪)을 굴리어 한량없는 중생이 도를 얻게 된 것과 같다.
뒤에는 사리불이 부처님을 따라 법륜을 굴렸으며, 그 밖의 모든 성인들은 비록 법륜을 굴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역시 중생을 위해 설법으로 도를 얻게 했으니 역시 법의 보시라 한다.
또 변길(遍吉)보살과 관세음(觀世音)ㆍ득대세(得大勢)ㆍ문수사리(文殊師利)ㆍ미륵(彌勒) 보살 등이 있는데, 두 가지의 신통력인 과보(果報)의 신통과 수득(修得)의 신통 안에 머물러서, 복덕과 방편의 힘과 광명과 신족(神足) 등의 갖가지 인연으로 중생을 개화하고 제도함도 역시 법의 보시라 한다.
모든 벽지불이 허공을 날아오르면서 하나의 게송을 설해 중생을 인도하며 선근을 심게 함도 역시 법의 보시라 하며,
또 부처님의 제자로서 아직 성인의 도를 얻지 못한 이가 좌선을 하고 경전을 독송하면서 모든 법의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고 제자를 교화하는 것도 모두 법의 보시라 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를 법보시의 모양이라 하나니,
이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중생을 여섯 가지 보시의 복처에 세우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다섯 가지 눈[五眼]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의 눈인가?
곧 육안(肉眼)과 천안(天眼)과 혜안(慧眼)과 법안(法眼)과 불안(佛眼)이다.
육안은 가까운 데는 보지만 먼 데는 보지 못하고,
앞은 보지만 뒤는 보지 못하며,
바깥은 보지만 안은 보지 못하며
낮은 보지만 밤은 보지 못하며,
위는 보지만 아래는 보지 못하나니,
이러한 장애 때문에 천안(天眼)을 구하게 된다.
이 천안을 얻게 되면 멀거나 가까운 데를 모두 보며 앞뒤와 안팎과 밤낮과 위아래가 모두 장애가 없다.
이 천안은 화합하여 인연으로 생겨난 임시로 일컬어지는[假名] 물건들은 보지만,
이른바 공하고 모양이 없고 조작이 없고 남이 없고 멸함이 없는 실상(實相)은 보지 못한다.
앞에서와 같이 중간과 뒤도 역시 그러하니, 이 실상을 보기 위해 혜안(慧眼)을 구하는 것이다.
혜안을 얻으면 중생을 보지 않고, 동일하거나 다르다는 특징이 모두 소멸된다. 모든 집착을 버리고 여의어 온갖 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지혜 스스로가 안에서 소멸하나니, 이것을 혜안이라 한다.
다만 혜안은 중생을 제도할 수 없을 뿐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분별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법안이 생긴다.
법안(法眼)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법을 행해 이러한 도(道)를 얻게 하겠노라며 온갖 중생의 저마다의 방편문을 알아서 도의 증과(證果)를 얻게 한다.
법안은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의 도를 두루 알지는 못하나니, 이 때문에 불안(佛眼)을 구하는 것이다.
불안은 일마다 알지 못함이 없고, 덮어 가려서 비록 은밀하다 하더라도 보아 알지 못함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극히 멀지만 부처님에게는 지극히 가깝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둡지만 부처님에게는 환히 밝으며,
다른 사람에게는 의심이 되지만 부처님에게는 결정되어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는 미세하지만 부처님에게는 굵으며,
다른 사람에게는 심히 깊지만 부처님에게는 아주 얕다.
이 불안은 일마다 듣지 못함이 없고 일마다 보지 못함이 없다.
일마다 알지 못함이 없고, 일마다 어렵다고 여김이 없으며,
생각할 바도 없지만 온갖 법 안에서 불안은 항상 비춘다.
후품(後品)의 오안(五眼)의 이치 가운데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經】 보살마하살이 천안(天眼)으로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 안의 모든 부처님을 뵙고자 하거나, 천이(天耳)로써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듣고자 하거나, 모든 부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천안의 법으로 보는 바는 삼천대천세계를 초월하지 못한다. 이제는 반야바라밀의 힘 때문에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나라 안에 모든 부처님을 뵙는 것이니, 그것은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안에는 가까운 데도 없고 먼 데도 없으며 거리끼는 데가 없기 때문이다.
【문】 마치 『반주경(般舟經)』76)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반주삼매(般舟三昧)의 힘 때문에 비록 천안은 아직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시방에 현재 계신 모든 부처님을 뵐 수 있다” 했는데,
여기에서 이 보살이 천안으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뵙는다는 것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답】 이 천안은 불은몰무기(不隱沒無記)이다.
반주삼매는 욕망을 여읜 사람이나 욕망을 여의지 못한 사람이거나 간에 다 같이 얻지만, 천안은 다만 욕망을 여읜 사람만이 얻는다.
반주삼매는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항상 닦고 항상 익히기 때문에 보지만,
천안은 신통을 닦아서 얻는 것으로 형상 있는 경계의 4대(大)로 만들어진 물질의 눈이 4변에 두루 밝은 모양을 얻는다. 이것이 다르다.
천안의 공력이 쉬운 것은 마치 해가 나오면 물질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은 것과 같으며,
삼매의 공력이 어려운 것은 마치 밤에 등불을 켰을 때 물질을 보는 것이 쉽지 않은 것과 같다.
천이(天耳)도 역시 그와 같다.
모든 부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문】 마치 상지[上地]의 둔한 근기로는 하지(下地)의 영리한 근기를 지닌 이의 마음을 알지 못하듯이 보살은 당연히 한 부처님의 마음조차도 알지 못해야 하거늘 하물며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마음이겠는가?
【답】 부처님의 신력으로써 보살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이다.
마치 경의 말씀과 같이,
“온갖 중생으로서 부처님의 마음을 아는 이는 없지만 만일 부처님의 신력으로써 알게 하면 심지어 곤충까지도 역시 잘 알게 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신력으로써 보살로 하여금 부처님의 마음을 알게 한다.
또 반야바라밀은 장애가 없는 모양이어서 굵거나 미세하거나 깊거나 얕거나 어리석은 이거나 성인이거나 간에 전혀 차별이 없다.
모든 부처님의 마음의 여(如)와 보살의 마음의 여는 동일한 여이어서 다름이 없나니, 보살은 이 여를 따르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또 있기 드물고 어려운 일이어서 알지 못해야 하는데도 아나니, 이 때문에,
“이것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經】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말씀하신 법을 듣고 들은 뒤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 잊지 않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한 분의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도 오히려 지니기 어려운데 하물며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잊지 않으려 하는가?
【답】 보살은 문지다라니(聞持陀羅尼)77)의 힘 때문에 받아 견고하게 기억할 수 있고, 이 다라니의 힘 때문에 잊지 않는다.
또 여기서는 반야바라밀의 힘으로 필경 청정하여 집착함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큰 바다가 뭇 흐름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니,
보살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에게서 듣게 된 법에 대해 반야바라밀의 그릇이 큰 까닭에 그 한량없는 법을 받아들여 지니면서 잊지 않게 된다.
또 이 반야바라밀은 비유할 수 없음이 마치 허공과 같나니, 겁(劫)이 불에 타 다하고 나면 큰 비로 가득 차는데, 이 비는 허공을 제외하고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 없듯이,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설법의 비는 부처님의 입에서 나오는데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을 제외하고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있는 이가 없다. 이 때문에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70)
범어로는 anutpādakoṭi. 곧 ‘태어남이 없는 경계’를 말한다.
71)
범어로는 Chaṇḍaka. 원래 석가족의 노예의 자식으로, 석존께서 성도 후 최초로 고향을 방문했을 때 귀의했다.
72)
범어로는 Meghiya.
73)
범어로는 dharmadhātujakāya.
74)
범어로는 Velāma.
75)
범어로는 Sudinna.
76)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Pratyutpanna-buddhasaṃmukhā vasthitasamādhi- sūtra)』을 말한다.
77)
범어로는 śruta-dharadhāraṇ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