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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영락경 제12권
34. 청정품(淸淨品)[1]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못함]
그때에 장로 빈누문타니자(邠耨文陀尼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제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 3세의 법을 설하심을 듣고서 여러 하늘과 인간 백성 그리고 8부 귀신이 모두 공양을 일으키니,
숙세의 호위하던 보살마하살로 성불에 나아간 이와 미래ㆍ과거ㆍ현재의 여러 부처님께서 3세의 분별지혜로 온갖 법이 만들어내는 일체를 태워 없앰을 연설하고,
다시 신족의 도력(道力)으로 교화한 바로써 삼천대천세계를 감동시키고,
행을 닦아서 마음을 잡아 본래의 소원을 버리지 않고, 국토를 청정하게 하여 중생의 자취를 깨끗이 없애나이다.”
이때에 장로 빈누문타니자가 다시 부처님에게 나아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본래 없는 한 모습의 법[本無一相法]을 닦아 익히면, 속으로 스스로 사유하고 신상(身相)을 분별해서 안팎을 청정하게 하여 물들어 집착함을 내지 않으리니,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마하살이 속으로 스스로 사유하고 신상을 분별해서 안팎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옵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족성자여,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6바라밀의 모든 부처님이 행한 바를 행하면, 일체 모든 법이 모두 청정하리라.
어떻게 하는 것이 모든 법이 일체 청정해지는 것인가?
그래서 선남자나 선여인이 3세의 있는 바가 본래 없음을 분별하여 3승의 도를 성취한 이를 보지 않으면, 수다원(須陀洹)으로부터 여래ㆍ지진ㆍ등정각에 이르기까지 모두 3세의 청정한 행을 닦고 안으로 몸을 스스로 관해서 식의 상념[識想]을 분별하여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느니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는 것인가?
여기에서 족성자여,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세 가지 지향인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을 분별하여 나[吾我]와 남[人]과 수명의 일체 모든 법을 보지 않으면, 수다원으로부터 보살마하살에 이르기까지 설한 바가 청정하니라.
다시 빈누문타니자여, 배움 없고[無學], 집착 없고[無著], 생멸하는 바 없음[無所生滅]으로 공관(空觀)의 세 가지 무학법[三無學法]을 분별하지만,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느니라.
무엇이 세 가지 무학법이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음인가?
여기에서 족성자여, 미래 가운데서 일체 모든 법을 분별하고 닦고 있는 정법(正法)을 낱낱이 사유해서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는 정수(正受)삼매라면,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느니라.”
빈누문타니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배움 없고, 집착 없고, 생멸하는 바 없음으로 공관의 세 가지 무위법을 분별하지만,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옵나이까?”
부처님께서 빈누문타니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배움 없음을 배우는 사람이 미래의 일체 모든 법을 분별해서 영원히 단멸(斷滅)하여 없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다시 이 법으로써 널리 중생에게 미치게 한다면,
이것을 소위 때로는 청정하다고 이르느니라.
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으로 수행하는 사람이 의욕(意欲)의 끊음을 익혀서 미래의 번뇌를 영원히 일어나지 않게 한다면,
이것을 때로 청정하지 않다고 이르느니라.
이와 같이 빈누문타니자여, 세 가지 무학(無學)에서 하나의 법을 성취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빈누문타니자여, 배움 없는 학인(學人)이 현재의 일체 모든 법을 분별해서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는 정수(正受)삼매로 영원히 단멸시켜 번뇌를 나지 않게 한다면,
이것을 때로는 청정하다고 이르느니라.
처음에 행을 익힌 사람이 현재의 법에서 분별하고 사유해서 각이 있고 관이 있는 정수삼매로 길이 단멸케 한다면,
이것을 때로는 청정하지 않다고 이르느니라.
이와 같이 빈누문타니자여, 세 가지 무위법에서 때로는 청정하지 않으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빈누문타니자에게 말씀하셨다.
“혹 배움 없는 학인이 과거의 법에서 일체 모든 법의 나는 바를 분별하고 낱낱이 사유해서 각이 없고 관이 없음으로 길이 단멸시켜 번뇌를 나지 않게 한다면,
그리하여 이와 같이 세 가지 무위법을 성취한다면,
이것을 때로는 청정하다고 이르느니라.
만일 닦아 행하는 사람이 현재의 모든 법을 분별하고 사유하여 각이 없고 관이 없음으로 단멸시켜 번뇌가 나지 못하게 한다면,
이것을 선남자여, 때로는 청정하지 않다고 이르느니라.
3세의 분별과 세 가지 유위법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빈누문타니자에게 말씀하셨다.
“배움 없는 학인은 다시 마땅히 3향법성(向法性)이 다 청정해서 있는 바가 없다고 분별할 것이다.
무엇이 배움 없는 학인이 3세 가운데서 3향(向)을 분별하여 있는 바가 없음인가?
배움 없는 학인이 미래의 법에서 일체 모든 법의 나는 바를 분별하는데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으니,
이것을 족성자여, 세 가지 유위법에서 하나의 법을 성취했다고 이르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빈누문타니자에게 말씀하셨다.
“닦고 배운 사람이 다시 미래의 법에서 일체 모든 법의 나는 바가 모두 공하고 모두 고요해서 있는 바 없다고 분별하여 길이 단멸시켜 번뇌를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을 족성자여,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다고 이르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빈누문타니자에게 말씀하셨다.
“배움 없는 학인이 현재의 법에서 다시 마땅히 원이 없는 바른 행[無願正行]을 분별하여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음으로 또한 단멸시켜 번뇌를 나지 못하게 하니,
이것을 유위법에서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다고 이르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빈누문타니자에게 말씀하셨다.
“닦아 행하는 사람이 현재의 법에서 무상정수(無相正受)를 사유하고 분별하여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음으로 단멸시켜 번뇌를 내지 못하게 한다.
이것을 세 가지 무위법(無爲法)에서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다고 이르느니라.”
이때에 빈누문타니자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오직 이 세 가지 공(空)과 세 가지 향(向)만이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는 것입니까?
자못 모든 법이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치 않나이까?”
부처님께서 빈누문타니자에게 말씀하셨다.
“그와 같고 그와 같으니라.
족성자여, 너의 물음대로 일체 모든 법이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못하나니,
수다원으로부터 위로 여래ㆍ지진ㆍ등정각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못하며,
4의지(意止), 4의단(意斷)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의(覺意)ㆍ8현성행(賢聖行)으로부터도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못하느니라.”
그때에 빈누문타니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못한 것이옵나이까?”
부처님께서 빈누문타니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제일의(第一義)의 관점으로부터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못함을 듣고자 하느냐?
아니면 3세의 모든 법의 관점에서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못함을 듣고자 하느냐?”
[제일의로부터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못한 것]
빈누문타니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일의로부터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못한 것을 듣기를 원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빈누문타니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모든 법은 수(數)가 없어서 수를 두지 않는다. 또한 머물지도 않고 머물지 않는 것도 아니니, 이것을 3세의 법에서 청정함을 얻었다고 이르고,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머묾도 보지 못하고 또한 머물지 않음도 보지 못하는데, 머묾에 상념이 집착하여 물들어 더러운 생각을 낸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보살이 크게 서원하여 온갖 중생의 무리를 두루 구원하는데, 비록 중생을 제도하더라도 바라는 마음을 품지 않나니,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만일 다시 뜻을 내서 상념의 집착을 일으킨다면 이것을 청정치 못하다고 이르니라.
지혜의 빛을 나타내서 어두움을 제거하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그 가운데에서 문득 상념의 집착을 내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중생을 인도하여 길이 무위(無爲)에 처하게 하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제도한 바 있다고 보아서 물들고 더러운 뜻을 내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한뜻으로 한결같이 무위의 도[無爲道]에 나아가되 중생으로 하여금 자기가 얻은 바와 같게 한다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스스로 일컬어 나는 제도한 바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니라.
도가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 품류에 따라 교화하는데 용맹하게 정진하여 게으른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부지런히 힘써 닦아 마음이 퇴전하지는 않지만, 상념의 집착으로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고자 한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온갖 행을 분별해도 공하여 있는 바가 없고 성품은 본래 스스로 그러하니, 이것을 청정한 것이라 이르고,
다시 스스로 분별하지만 바라고 구함을 끊지 못한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수없는 신행(身行)으로 모두 공(空)이 됨을 알아서 이룬 바가 있다는 상념을 내지 않으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스스로 공로(功勞)를 찬탄하여 신법(身法)에 물들어 집착한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입으로 연설하는 바의 가르침에 막힘이 없고, 또한 스스로 유무(有無)의 도를 일으키지 않으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능히 온갖 것을 버리고 나아가 위의(威儀)를 닦지만,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고자 한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문자(文字)를 분포(分布)하고 온갖 법을 총지(總持)해서 강력한 기억으로 잊지 않으면, 이것을 청정한 것이라고 이르고,
문자가 온갖 법을 낳음을 보지 못하고 공혜(空慧)가 도의 가르침을 이룸을 믿지 않는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일체 모든 상념은 모두 공에 돌아가니, 이것을 청정한 것이라고 이르고,
본래 이름[名號]없는 것에 이름을 짓고, 다시 그 가운데서 위없는 도를 이루고자 한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에 집착함도 없고 얽매임도 없어서 경계를 추구하되 집착하는 바가 없으면, 이것을 청정한 것이라 이르고,
식신(識神)의 무위(無爲)는 안계(眼界)의 볼 바가 아닌데도 바야흐로 그 소굴(巢窟)을 은근히 알고자 한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일체 모든 법에서 받아들임[受入]을 보지 않고 바야흐로 온갖 도(道)의 출생을 찾고자 하는데, 그 가운데서 미혹하지 않고 도의 가르침을 이룬다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비록 온갖 법을 내지만 뜻에 나아가고 물러남이 있어 세 가지 도의 마음을 품는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법계에 정성스럽고 은근하여 지혜를 익혀 수증(受證)한다면, 이것을 청정하다 이르고,
모든 부처님 법은 하나로서 둘이 아님을 알아서 다시는 일어나고 멸함이 없이 공적하여 형상이 없다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10력(力)에 머물러서 10지(地)가 멀지 않고, 밝은 지혜를 닦아 나가면서 온갖 경계를 교화한다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여러 가지 법을 관찰하여 3독(毒)을 영원히 여읜다면, 이것을 청정이라 이르고,
대승의 바른 법[大乘正法]으로 나고 죽음을 뛰어 넘는다면, 이것을 청정이라 이르고,
온갖 법에 집착이 없으나 스스로 식의 상념을 낸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온갖 법에 가르침이 없는데도 6바라밀을 내면, 이것을 청정이라 이르고,
바퀴를 굴리는 법[轉輪法]을 알아서 처소를 세운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온갖 법을 닦고 익혀서 모두 동일한 모습이면, 이것을 청정이라고 이르고,
온갖 법은 생겨남이 없는데도 출생을 말하여서 두 소견의 마음을 일으킨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여래달성(如來達聖)이 큰 법륜을 굴리면서도 형상 없는 공의 성품으로 길이 열반에 처한다면, 이것을 청정이라고 이르고,
온갖 법도 보지 않고 열반도 보지 않는 이 두 가지 분별하는 마음으로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고자 한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3세의 모든 법이 위와 중간과 아래가 있는데, 차례대로 증명을 받으면서도 미련의 집착이 없다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그 가운데서 상념을 일으켜 증명을 받음을 본다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본래 늘고 주는 것이 없이 모조리 공으로 돌아간다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가령 늘고 주는 것을 보고서 온갖 법을 분별한다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일체 모든 법은 본래 생겨남이 없으니, 생겨남이 없음을 증득하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온갖 법에서 출생한 바가 있음을 보고서 식의 상념을 일으키고 그 이름을 기억한다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일체 모든 법의 거칠고 난삽함, 보드랍고 연함의 차별을 보지 않는다면, 이것을 청정한 것이라고 이르고,
만일 다시 분별하여서 거칠고 난삽함, 보드랍고 연함을 보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일체 모든 법은 무상(無上)이라서 동전(動轉)을 보지 않으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가령 다시 분별해서 동전을 보면, 또한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일체 모든 법은 길이 적멸하여 수호해 지니지 않는다면, 이것을 깨끗함이 된다고 이르고,
설사 다시 분별하여 온갖 법을 받아 지니면서도 이것은 선한 법[善法]이고 이것은 선한 법이 아니라고 하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일체 모든 법은 안팎이 없어서 신법(身法)이 모조리 공으로 돌아간다고 이해해 알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 된다고 이르고,
만일 다시 안팎의 여러 가지 법을 분별하여서 이것은 안의 법[內法]이고 이것은 밖의 법이라고 하여 두 가지 마음을 갖는다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일체 모든 법에서 귀먹어 소리를 듣지 않으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만일 다시 분별하여서 온갖 법에 귀머거리가 있고 소리가 있다고 두 가지 소견을 일으키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모든 법에서 온갖 도품(道品)을 성취하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출요(出要)가 있음을 보고 도과(道果)를 본다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니라.
백천 만행(萬行)이 다함이 없어서 모조리 허공에 돌아가면서도 상념(想念)이 없다면, 이것을 청정이라 이르고,
샘[漏:번뇌]이 다하고 맺힘[結:번뇌]을 끊고 얽힘[縛:번뇌]를 없앰이 있음을 보면, 이것을 깨끗지 못하다고 이르니라.
일체 모든 법은 모두 공하고 형상이 없어서 나는 것은 스스로 나고 멸하는 것도 스스로 멸하는데, 또한 나는 것도 보지 않고 멸하는 것도 보지 않는다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만일 다시 분별하여 일어나고 멸함이 있다고 본다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일체 모든 법을 스승에게서 받지 않고 자연히 깨달아서 8등행(等行)을 이루었다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만일 다시 스승으로부터 훈계를 받고 높고 낮음의 분별이 있다고 보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억지로 참는 마음[忍心]을 일으키지 않고 자연히 참는 마음[柔忍心]을 얻어서, 온갖 번뇌 끊어 없애 길이 쉬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만일 능히 사유해서 근본 행[本行]을 헤아리지 않지만, 일어남이 있고 멸함이 있다는 두 마음으로 온갖 법을 분별한다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대저 도를 구하고 선지식을 가까이하고자 하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다시 사유하면서 뜻에 게으름을 품고 중도에 물러나는 마음이 있으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근본부터 지말(枝末)까지 법을 굴리면서 음향(音響)으로 가르침을 주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 된다고 이르고,
큰 법륜을 굴리고 음향으로 가르침을 받음이 있다고 보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이르느니라.
모든 법에 본래 12연기(緣起)가 있지 않음을 능히 분별하여 버리고 쫓지 않으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번뇌를 태워서 멸하는 것 있음을 보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일체 모든 법은 매우 기이하고 매우 특별하여 가도 다할 수 없고 와도 또한 다하지 않으니, 중생을 제도하여 저 언덕에 이르게 하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라 이르고,
만일 다시 저 언덕을 건너간 이를 본다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이르느니라.
온갖 법의 미래는 영원히 멸했다고 사유하면, 이것을 청정이라고 이르고,
미래가 있고 일어나고 멸함이 있다고 보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현재 여든네 가지 행[八十四行]을 분별하여 여래의 위엄 있는 얼굴과 낯빛을 장엄하면, 이것을 깨끗함이 된다고 이르고,
현재 애착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얼굴빛에 물들어 집착한다고 보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여러 가지 법은 생겨남이 없어서 조작(造作)을 보지 않고, 자연의 율(律)을 일으켜서 바라밀에 응하면, 이것을 깨끗함이 된다고 이르고,
만일 일체 모든 법을 조작해서 금하는 계율(戒律)에 응하여 이 마음을 내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일체 모든 법은 형상이 없어서 모조리 무위(無爲)에 돌아가서 위없는 도에 응하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다시 저의 형상과 빛깔이 변함을 보고서 스스로 상념(想念)을 내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 아니라고 이르느니라.
일체 모든 법은 홀로라서 짝이 없으니, 여러 가지 법이 말이 없어서 언교(言敎)를 보지 못하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법을 설함이 있고 언교가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 아니라고 이르느니라.
모든 법이 일어나지 않아서 3세에 물들지 않으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3세의 법에 일어나고 멸함이 있다고 보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 못된다고 이르느니라.
여러 가지 법은 의지함이 없어서 삼계(三界)에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라고 이르고,
삼계에 의지하고 집착함이 있으면, 깨끗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여러 가지 법은 몸[身]이 없고 오직 법만을 체(體)로 삼으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법신(法身)에 도지견(度知見)이 있음을 보면, 이것을 또한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미래ㆍ과거ㆍ현재의 여러 부처님은 가신 이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고 오실 이도 다함이 없지만, 설하신 도의 가르침이 저마다 들쑥날쑥하여 다르지 않으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만일 다시 3세의 여러 부처님이 가르치는 언교의 늘고 줄음을 선포해 말한다면, 이것을 또한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모든 법은 형상도 없고 또한 색상(色像)도 없으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다시 모든 법으로 색상을 만든다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이르느니라.
모든 법이 볼 수 없고 고요히 비고 공하면, 이것을 깨끗함이 된다고 이르고,
만일 다시 모든 법은 볼 수 있다고 선포해 말한다면, 이것을 깨끗함이 못되는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모든 법이 한량이 없으면서도 서로 어긋나지 않으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모든 법이 한량이 있고 정해진 수(數)가 있다고 보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이르느니라.
모든 법은 경계가 없고 찰토(刹土)가 없는데도 중생을 교화하고 부처님 나라를 깨끗이 하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만일 중생이 부처님의 나라가 청정하고 중생을 교화함을 보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 못된다고 이르니라.
모든 법이 평등하고 열반도 하나의 성품이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라 이르고,
과(果)를 받고 도를 성취하는 이가 있음을 보면, 이것을 깨끗함이 못된다고 이르느니라.
모든 법이 출요(出要)하고 법의 과보를 생각하지 않으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라 이르고,
출요하여 법의 과보를 받음이 있다고 보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모든 법은 생겨남을 다하여 영원히 형상과 빛깔을 여의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라 이르고,
생겨남을 여의어서 형상과 빛깔을 받음이 있다고 보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모든 법이 늘 정해져서 처음부터 변하거나 바뀌지 않으면, 이것을 깨끗함이 된다고 이르고,
움직이고 구르고 변하고 바뀌어서 머물러 있지 않다고 보면, 이것을 깨끗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모든 법은 깨달아 알 수 없고 또한 어떤 사람도 능히 자취를 찾을 수 없나니, 이것을 깨끗함이 된다고 이르고,
형상의 자취를 찾아가 구할 수 있다고 보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