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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하는 마음”의 거부
- 안숭범이 ‘나’에게서 ‘타자’를 소환하는 방식
박성준(시인, 문학평론가)
인류 최초의 살인은 성서의 카인에게서부터 시작된다. 주지하듯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두 아들을 두었다. 농부였던 카인과 양치기 아벨이 그들이다. 갈등의 촉발은 신이 제물로 바친 형제의 예물에 차별을 두었기 때문이다. 형 카인은 신에게 곡물을 바쳤으나 외면을 당하기 일쑤였고, 동생 아벨은 첫 양과 양기름을 신에게 바치면 신은 그것을 흡족하게 받아드렸다. 그래서 앙심을 품은 카인이 동생을 살해하게 된다. 물론 이 성서의 메타포는 인류학적 측면에서는 농경과 유목이라는 대립된 생활 양식 가운데에, 당시 히브리인이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아벨을 선인 쪽으로 구획된 바가 없지 않다. 이 서사에는 농부였던 카인을 악인으로 묘사하면서 원죄를 전승당한 아벨의 제물 공양의 행위를 격상시킨 맥락이 있었던 것이다. 한데 여기서 주목해서 볼 점은 농경과 유목, 제물 봉양의 문화 양식 등과 같은 거시적인 차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인간의 질투심이나 폭력에 대한 기원을 논하고자 하는 것 또한 아니다. 동생을 살해하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던 카인의 얼굴에서 발견하게 되는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왜 얼굴일까.
“타인의 얼굴은 철학의 시작 자체일 것이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던 레비나스는 「철학, 정의와 사랑」이라는 대담 일부에서, 카인의 얼굴을 다루고 있다. 그는 카인의 일화에서 신이 “네 동생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을 때,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되묻는 부분을 타자에 대한 인식으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카인은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죽였어요.’와 같은 의미로 신께 되물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카인은 신을 비웃듯 언사를 한 것이 아니라, 신에게 “나는 나이고 그는 그다, 라는 존재론”(레비나스)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은 왜 나에게서 아벨을 찾는 것이냐, 나는 오직 나일 뿐인데, 죄지은 내 얼굴에서 아벨이라는 타자를 찾으려 하지 말고, 오직 나의 죄를 직시하시라는 강한 형언일 수 있다. 물론, 이후 카인은 신께 형벌을 받아 ‘모든 사람이 카인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얼굴에 품고 살게 된다. 카인의 얼굴에는 일종의 낙인이 찍힌 것이다.
너무 멀리 돌아온 듯도 하지만, 카인과 아벨의 서사를 통해 우리가 생각해볼 점은 종국에는 카인이 왜 아벨을 죽이고 당당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왜 그 당당함을 얼굴에 품고서, 제가 죽인 형제의 얼굴을 닮은 카인에 얼굴에서 우리는 왜 그(‘나’)를 찾기보다 죄를 찾으려고 했던 것인가. 종국에는 후회와 두려움으로 종결될 신께 바칠 표정이라도, 그것이 가장 나에게서 기인한 나의 욕망이자 나의 첫 목소리는 아니었을까. 카인의 죄를 옹호하려는 것도 아니고, 카인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언사도 아니다. 다만, 가장 가까운 타자 중에 하나를 범한 카인의 지독한 마음을 생각하는 밤이, 내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밤에 안숭범의 근작시를 읽었던 적이 있었다고, 지금 여기 고백해봐도 괜찮은 것일까. 처연
십수 년만의 두근거림을 십수 년 전으로 돌려보내며
아빠는 퇴근한다, 사소한 것들은 그렇게 살아가지
옛집 장독대 옆에서 해종일 웅크린 검둥이처럼
버리기는 아까워 모아둔 서류 봉투처럼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일들은 늘 내년에 살지
감정 없는 구름이 어제의 입장을 보채는 계절이고
일단 몸을 출근시키면 마음은 뒤따라가는 습관으로
오늘도 표정 없는 친절이 발명되는 의자에 앉지
뭐든지 오래 연습한 사람이 이기는 거야
아이에게 해줄 말이 사는 나라를 찾다가
벽시계는 늘 다음 순간으로 망명을 가는구나
- 「퇴근」 부분
주지하듯, 안숭범의 이전 시집 소문과 빌런의 밤(파란, 2022.)에서는 성씨(姓氏)와 그들이 겪는 정황들로만 명명되는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들을 기획한 바 있다. 이 시편들은 일종의 알레고리이자 이야기 시편들이다. 이런 기획은 전대 고은의 만인보의 작업들을 떠오르게 하면서도 또 그것과는 다른, ‘마성적 3인칭’ 주체들의 향연으로 가득하다. 우리가 딛고 있는 지금 여기 현실을 겨냥하며, 읽는 내내 독자를 시끄럽게 하다가 각각의 인물들의 환부 곁으로 돌아와서는 이윽고, 처연해지게 만드는 가편들이었다. 가령 이 시집에서 “여기 당신은 없다”(「시인의 말」)라는 선언은 ‘당신이 있어야 함’을 호출하는 신호이자 ‘여기 (당신 대신) 우리가 (살아내고) 있음’을 호소하는 정동일 것이다. 그러니 “2인칭이라는 징검다리가 부재하는 이곳에서 ‘나’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다. 반대도 매한가지다. 이렇게 사람 사이(人間)가 절단되었다는 것”(김영범 「구원의 시학」)이라는 해설 또한 우리에게 설득력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번에 송고된 안숭범의 근작 시편들이 전작 시집의 기획과 변별되는 지점들은 아마도, 그렇게 소거된/소거 당한 ‘2인칭’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용한 신작시 「퇴근」은 우선 구조상 퇴근하는 아빠가 아이에게 퇴근의 의미를 늘어놓는 화술 구조를 택한 시이다. 그러나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이내 우리는 불편한 얼굴이 된다. 동생처럼(타자) 되고 싶었던 카인의 마음이라든가, 살면서 끝끝내 내가 ‘나’일 수 없었던 우리의 얼굴이 “아빠”에 얼굴에는 다녀갔던 것 같다. 그렇다면 먼저 ‘퇴근’이라는 행위에 천착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퇴근’은 언뜻 생각하면,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스스로의 몸을 거둬들이는 일이자, 공공에서 온전히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행위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퇴근 후 업무의 연장으로 회식 자리가 있다든가, 업무 외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는 수준의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집에 돌아와도 다시 업무와 같은 스트레스가 있다고 말하려는 것 또한 아니다.
화자는 “십수 년만의 두근거림을 십수 년 전으로 돌려보내며” 퇴근을 한다고 언술한다. 그러니까 시편을 시작할 때부터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떤 상태를 감지하고 있는 화자의 심리가 추동되고 있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어쩌면 결혼조차 하지 않은 과거의) 내가 나에게 퇴근의 의미를 늘어놓고 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사소한 것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화자는 저 스스로 사소한 존재라 명명하고, 현재를 포기하고 있다. “옛집 장독대 옆에서 해종일 웅크린 검둥이처럼/ 버리기는 아까워 모아둔 서류 봉투처럼/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일들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에야 가능한 것이고, 그 내일도 기약 없는 “내년”으로 수사된다. 그런데 여기서 “내년”이라는 기표는 ‘1년 뒤’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좀처럼 다가오지 않을지 모르는 ‘무한한 시간’에 갇혀 있는 시간이다. “표정 없는 친절이 발명되는 의자”라든가, “뭐든지 오래 연습한 사람이 이기는 거”라는 현실에 대한 직시도, 이 화자에게는 좀처럼 제 아이에게 들려주기 싫은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이에게 해줄 말이 사는 나라를 찾”아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일 텐데, 화자의 육신을 그대로 두고 ‘망명하고 있는 시간’ 또한 붙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스스로 과거에 당도해서는 현재의 아이에게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는 처지이다.
다시 말해, 온전히 내가 아닌 나로 살다가 나에게로 돌아오는 듯한 착각을 유발하는 퇴근의 행위는 실상, 나를 다시 나 아닌 곳으로 되돌리게 하는 잠깐의 멈춤 상태일 뿐이다. 즉 ‘일에서 물러나는 일’(退勤)이 아닌 다시 또 일을 하기 위해서, 내일은 더 두꺼운 가면을 쓰기 위해서 내일을 예비하는 일이 퇴근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불편의 의미를 전수하는 대상이 ‘아이’여야만 했을까. 예컨대 레비나스는 “자아는 아버지됨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아버지가 된 자아는 하나의 존재로 멈추지 않고 자신이되, 자신이 아닌 존재인 아이로 자아를 확장해나간다. 그 결과인 아이는 아버지의 처지에 있어서는 자기동일적인 동시에 절대로 ‘자기’가 될 수 없는 존재로 모순적 관계로 묶이게 된다. 즉 레비나스에 따르면 “아버지-자식의 관계는 단절의 관계와 의존의 관계를 동시에 가리”키고 있으며, 존재 그 자체로 나(아버지)의 에로스에 빚진 ‘다른 나(아이)’는 ‘나’이고 싶으나 ‘나’일 수 없는, ‘다른 나’의 확산이 셈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화자는 어쩌면 아이에게 현실을 말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청년 시절 과거의 나를 소환해 말하려는 것과 동시에, 유년 시절 과거의 나에게도 삶의 질서를 발화하려고 하는 것만 같다. 이쯤 되면 화자의 발화는 ‘과거의 나-현재의 자식-현재의 나’를 모두 교차하며 전대에 걸친 ‘견딤’이 된다.
이제는 누구에게도 연필 하나 다 닳아지는 시간을
견디지 않지, 그것은 구멍을 견디는 마음
빠져나갈 것들은 다 빠져나갔다고 말하면
라흐마니노프의 큰 손, 포지타노의 레몬 캔디
독수리성운의 기둥, 앤디 워홀의 수프 캔
그러나 내 발바닥에 들러붙은 안개와 밤
어쩔 수 없이 밤의 안개, 네가 있는 여름에서
식지 않는 것들이 있어도 두근거림 없이
십수 년을 살 수 있는 쪽으로, 내일이면
정말이지 기계적인 걸음걸이가 완성될 거야
늙은 자동차는 바꿀 수 없거나 바꾸지 않고
화창한 날씨가 세 들지 않는 빈방은 안전하여라
잠시라도 내 것이었던 이의 혈관 속 음악은
내 뼈를 그리워할 일이 없고, 이것은
신앙생활, 사소한 건 알 턱이 없는 사람들과 더불어
십수 년 전부터 오래 연습한 마음으로 그렇게
- 「퇴근」 부분
그리고 「퇴근」의 후반부에서는 “닳아지는 시간”, “구멍을 견디는 마음”, “발바닥에 들러붙은 안개와 밤”과 같은 훼손되고 결핍이 가득한 감정어 다발들을 지나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들러붙었던 “어쩔 수 없”는 “밤의 안개”를 완성한다. 그 과정에서는 마르팡증후군 탓에 자유자재로 테크닉을 구사할 수 있었던 “라흐마니노프의 큰 손”이 등장하기도 하고, 몽상을 불러일으키는 포지타노 어촌 마을에 강한 레몬향을 품은 사탕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별이 형성되고 있는 우주 창조의 기운이 서린 독수리성운을 언급하기도 하고, 작금의 소비지상주의를 조롱하는 동시에 향유하던 앤디 워홀의 수프 캔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러한 기표들은 우연과 필연에 함께 빚지며 ‘지금 이곳’의 질서들을 구축하고 또 해체해내 버리는, 화자에게는 이미 멀리 떨어진 기표들이다. 어떤 물상들과 사태를 동경한다는 것은 이미 그것들이 지금 화자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이내 멀어져갔다는 것이다. 그러니 화자는 결함이 장점이 된 적도 없었고, 몽상을 품어볼 휴식 또한 없었으며 자신이 이곳에서 새롭게 재탄생하거나 그 기원이 무엇이었는지 고민해볼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반복되어 생산되는 일상의 제품처럼 소비될 뿐이었다.
그럼에도 “네가 있는 여름에서/ 식지 않는 것들이 있어도 두근거림 없이/ 십수 년을 살 수 있는 쪽”을 견지면서 아이에게 퇴근을 논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쩌면 ‘두근거림이 없다’는 말은 반어에 가깝다. 두근거리지 않고 살아야 잘 사는 것이다. 모나지 않게 잘 순응하며 사는 것이 좋겠다. 중간만 되어도 괜찮다. 이런 말들을 아버지로서 아이에게 하고 있다는 것인데, 화자는 알고 있다. 그런 삶은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므로 “기계적인 걸음걸이가 완성”된다는 것 또한 절대로 (적어도 나처럼은) 기계적으로는 살지 말라는 조언이지 않을까. 이쯤 되면 이어지는 시행에서도 모든 조언들은 반어로 들리게 된다. 다시 말해, “늙은 자동차는 바꿀 수 없거나 바꾸지 않”는다는 비결정의 상태도 싫고, “화창한 날씨가 세 들지 않는 빈방”도 “안전”하지 않는 곳이 된다. “잠시라도 내 것이었던” 것은 도무지 없게 되고, “혈관 속 음악은/ 내 뼈를 그리워할 일이 없”다는 것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이런 치욕적인 세계의 질서를 “신앙생활”과 같다고 말하는 저 자신도 견딜 수 없는 비열한 주체가 되어 버린다. 살아가는 일을 나에게서 비롯된 정동에서가 아니라 2인칭(타자)이나 3인칭(그들)을 “연습하는 마음”으로 단지 반복한다는 것. 그것만은 제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지 않겠다는 화자의 결단이 「퇴근」 말미에는 숨어 있는 것이다.
좀처럼 하지 않는 표정을 생각해 냈다, 반쯤 내려진 제과점 셔터가 주인을 두 동강 냈다, 살아남은 빵들만 냄새로 다녀갔다, 휴대폰이 오른손으로 기어 왔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했으므로, 누구와는 아무 숫자도 교환하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다, 구름은 또 거기서 서성였다, …… (중략)…… 그렇게 모든 불투명은 떠나기 위해 모인다, 기억을 능욕했던 매서운 문장들까지, 문장 안에 가득 찬 너의 형식까지, 단지 병원과 제과점과 버스 정류장을 지났을 뿐이다,
- 「칠흑(漆黑)」 부분
재미가 없었고, 포기되지 않는 것들 때문에 석양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런 시간들로 나를 당기는 힘을 지울 수 있을까, …… (중략)…… 기쁘다와 살수록 슬프다 사이에 서 있는데, 다가갈 수 없는 반대편은 쉬이 휘발된다는데,
- 「비정규적 슬픔」 부분
그런 점에서 「칠흑」과 「비정규적 슬픔」 역시 앞선 「퇴근」과 같이, 화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동적 상태를 전면화한다. 그러나 역시 여기서 동원된 수동화된 사태들은 모두 능동으로 바꾸고 싶은 화자의 정념들일 수 있다. 가령, 「칠흑」에서 “반쯤 내려진 제과점 셔터가 주인을 두 동강” 낸다고 하지만, 나는 “좀처럼 하지 않는 표정을 생각해”내고 싶다. 휴대폰을 쥐고 전화를 걸까 말까 고민하는 순간도 “휴대폰이 오른손으로 기어 왔”다고 표현한다든가, “아무 숫자도 교환하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대체되고 있다. 단지 나는 구름처럼 서성이는 주체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모든 불투명은 떠나기 위해 모”이고 있으며 화자는 모든 행위를 나의 주체성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너의 형식”에 의해 준거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는 결국에는 “너”의 다른 모습이다. 나는 칠흑으로 지워져 있으며 그 어둡고 반들거리는 면에 반사당하고 있는 ‘모르는 나’일 뿐이다.
내가 모르는 ‘나’로 전락한다는 것. 그래서 나는 나에게서 협소해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시의 화자는 아마도 ‘너’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제 온몸을 구축하려는 것만 같다. “단지 병원과 제과점과 버스 정류장을 지났을 뿐”이라는 단순한 일상의 묘사조차 모두 ‘너’로 인해 기인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너를 사랑하는 나’일 때만 오직 내가 잠시 인지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기억을 능욕했던 매서운 문장들”만 가득한 일상에서 나의 문장(말)은 무엇이고 그중에 너로 향한 말이 무엇인지 구분해보겠다는 심사를 통해 화자는 훼손된 나를 복권하고 너에게 가는 사랑을 구축하는 과정으로 저 자신을 증명해낸다. 그러니 “좀처럼 하지 않는 표정”이란 진짜로 내비취고 싶었던 제 얼굴에 대한 고민과 고백인 셈이다. 그러나 그 얼굴은 여전히 어두워져 있으며 자기 자신을 모두 반사해내는 칠흑에 상태일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뜨거운 감성이 침윤된 이 시의 어조가 냉소적인 이유도 어쩌면 화자의 통점을 더 부각하는 방어기제로 읽힌다.
「비정규적 슬픔」 또한 마찬가지다. “거실로 출근하고 안방으로 퇴근하는 날들 동안” 데리다를 읽으며 백수 놀음을 하고 있는 화자는 나를 추적하기를 포기한 주체처럼 보인다. 나와 타자의 다름에서 더디게라도 나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온전히 나만 집중해서 내가 대체 누구인지 알고 싶다. 그러나 “재미가 없었고, 포기되지 않는 것들 때문에” 이 백수 놀음을 여전히 지속하고 있고, “기쁘다와 살수록 슬프다 사이에 서” 있는 저 자신이 혐오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아무런 상관 없는 저 “석양은 여전히 아름다”우며, 모든 바깥은 나와 무관하게 스스로의 성질대로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이토록 “나를 당기는 힘”이 잉여를 택한 자신 때문인지, 나를 잉여일 수밖에 없도록 하는 세상 때문인지 끝끝내 답을 낼 수도 없을 노릇이지만 분명한 것은 외톨이인 화자는 절대로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또한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일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사랑하기 시작하면 괜시리 그 대상이 미워지며, 절박하게 살고 싶다가도 절실하게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화자에게는 “다가갈 수 없는 반대편”에서 ‘휘발성’을 띠며 아른거리고 있다. 그래서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잉여의 상태를 선택함으로써 화자는 ‘나’를 지연시킨다.
가령 나도 그랬다. 이십 대의 전부를 함께 보낸 당신을 만나서, 먹어본 적도 없는 팥칼국수로 저녁을 때운다든가, 그동안 어떻게 잘 지냈냐고 달라진 것보다 여전히 같은 모습을 찾아내어 추억을 소환한다든가, 그러면서 좀처럼 맞지 않는 시간의 단층부를 어루만지는 서툰 대화 같은 것을 통해, 다시 나에게서 촉발해 된 사랑의 징후에 골똘해져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적 슬픔」에서처럼 마음의 백수 놀음을 그치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고자 하면, 다시 타자들 때문에 나에게서 멀어지고 마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우리는 얼마나 두려워하며 지금 이곳을 횡단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저 스스로를 연습하면서 종국에는 타자를 ‘나를 닮은 나’로 삼아 겨우,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곳을 견디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외로운데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그런 사람이 되기는 틀린 것 같다. 나는 카인의 낙인 찍힌 얼굴을 떠올려보면 카인의 어떤 죄가 생각나기보다는 카인의 처절하고 인간적인 솔직함에 외려 질투심까지 들기도 한다. 그래서 죄를 고백하는 순간 카인의 얼굴은, 동생을 죽인 얼굴이 아니라 모두를 죽이고 저 하나 스스로 살고 싶다고 외치는, 욕망 가득한 얼굴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얼굴을 단지 욕망이라고 해야만 할까. 아니 어쩌면 아벨이 있었기 때문에 카인이라는 ‘지독한 존재’가 발생한 것은 아닐까. 나도 내 안에서 누군가를 죽이고, 나로 살고 싶었던 적이 너무 많았지만, 그게 잘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되지 못했고, 늘 외로웠고, 도무지 멋진 사람이 되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낙인을 품고, 시를 쓰고 또 시를 읽는다. 그게 가령 삶에서 연극적일지라도, 연습일지라도.
저를 탕진하고 돌아가는 욕망이 잠시 뒤돌아보다 갑니다.
- 「득세하는 징후」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