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죽지 않게 기도했는데 죽어서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 동생의 친구였다.
가장 힘들 때 기도했지만 주님의 응답은
그저 침묵이었다는 한 전도사의 말을 들었다.
무척이나 가난한 여전도사였다.
어떤 이는 신이 마치 자기 단짝 친구인양
말만 하면 즉각즉각 응답하는 것처럼 호들갑떠는
크리스쳔이 꽤 많다.
남이사 어쨌든 나에 관한 한은 이렇다.
난 단 한 번도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다. (참고로 난 개신교의 '하나님' 용어를 싫어한다. 그래서 '하느님'으로 함)
내 말은 육체의 귀에 들리는 음성으로는 말이다.
난 내 삶의 작은 일들 속에서 주님이 하신 일이라고 착각하며
호들갑떨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난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이 '이런 목적이 있어
내가 이리이리 했다' 라고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좋아보였던 일이 나빠지기도 하고,
나빴던 일이 좋게 될 수도 있기에,
일의 결말이 어느 정도는 나의 자유 의지에 달려있기에
겉보기에 좋은 일이라고 무조건 주님이 하셨다 할 수 없다.
또한 주님을 비전으로 본 적도 없다.
단지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양심의 소리를 들을 뿐이다.
성령의 음성이라고 강력하게 느꼈던 적은 한 번 있다.
배에서 올라온 정확한 음성이었다.
이것 외에는 없다.
단 한 번 배에서 올라온 1초 미만의 음성.
난 단 한 번도 주님을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고
단지 성경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뿐이다.
내 삶에 작은 일들 속에 뭘 지시하신 적도 없다.
이래해라 저래해라 주님이 그랬다는 둥 호들갑 떠는 (착각하는)
크리스쳔들은 뭔지?
자기 머릿속 생각이나 느낌을 전부 주님의 음성으로 착각하나 보다.
주님은 내게 침묵 그 자체이다.
내가 뭘 잘못해도 침묵.
뭐가 필요해서 간구해도 침묵.
뭔가를 잘못했는데 신이 침묵할 땐 그토록 좋을 수가 없을 것이다.
신의 침묵이 그저 고마울 것이다.
근데 뭔가가 절실한데 신이 침묵할 땐 그토록 야속할 수가 없다.
신의 침묵이 원망스럽다. 신의 존재까지 의심할 것이다.
내게 신은 그저 침묵하는 자이다.
그가 내 뒤에서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잘못했다고 당장 번개를 내려 쳐죽이지도 않고,
아픈게 낫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즉시 낫게해주지도 않는다.
향후 인생의 방향에 대해서도 알려주지 않는다.
내 삶 속에선 구약의 드라마틱한 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내게 있어서 신은 그저 뒷짐지고 조용히 앉아만 있다.
왠간해선 참견을 안한다. 마치 어찌 행동하나 두고보는 듯.
신은 내가 외로울 때 다정한 친구가 되어주지 않는다.
내가 아플 때 기도해도 병을 낫게 해주지도 않는다.
가난해도 부유하게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안다.
종말에는 회계가 있을 거라는 것.
잘못해도 즉각 처벌하지 않는 신을 이용해서 계속 죄를 짓느냐
아님 신을 존중하여 죄짓길 미선택하느냐.
불편한 내 상황을 즉시 개선해주지 않는 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느냐
아님 내 삶에 있어 그의 유용성과 상관없이 신되심 자체에 대해 찬미를 드리느냐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신은 침묵할 것이다.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하여 신의 마음이 기쁠지라도 그걸 감추실 것이며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여 신의 마음이 상할지라도 그걸 감추실 것이다.
나의 결론은 이렇다.
기도는 감사기도만 해라. 간구는 왠만하면 하지 마라.
할 수는 있는데 니 뜻대로 되길 결코 바라지 마라.
상황이 개선되길 바라는 기도는 자살 행위다.
해봐라. 개선 안된다. 원망만 쌓이지.
있는 선에서 스스로 삶을 개선/개척해나가라.
신이 기적처럼 바꿔주길 바라지 말고.
예를 들어 장님이면 눈 뜨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장님인 상태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스스로 삶을 개선하라.
신약에 예수가 장님 눈뜨게 해준 기적 보고 그것에 의지해서
계속 기적만 바라는데 꼭 성서에 기록된 모든 사건이 내게
동일하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기도해봐라. 기적 안일어난다. 지치고 상심하고 원망만 쌓인다.
그냥 현재의 위치에서 스스로 삶을 개선해라.
그리고 감사만 하는게 이득임을 알게 될거다.
신의 침묵은 내게 100프로 선택권을 주었음을 의미한다.
100프로의 자유를 주었음을 의미한다.
100프로 내 삶에 참견 안함을 의미한다. 심지어 내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라 할지라도.
신의 도움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인간으로선 알 수 없다.
안보여주니까. 말도 안해주니까.
나는 그냥 순간을 내 힘을 다해 살 뿐이다.
하지만 최악의 순간이 온다할지랄도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마라.
지금은 침묵하시지만 종말에 심판의 때가 있다.
그 때에는 모든 억울했던 일들이 바로잡혀질 것이고,
당시에는 보상받지 못했던 선행들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 당장 응벌도 없고 보상이 없는 이유는
마지막에 가야 온전한 결말이 나오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단지 글자로만 남긴 신의 말을 인간이 얼마나 신뢰하는지 시험하기 위함이다.
보이지도 않는 신.
말도 없는/침묵하는 신.
하지만 성서라는 두꺼운 책에 참 많은 말을 해놓으셨다.
그걸 읽고 삶에 적용하라 그거다.
내 육체의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신을 찾지 말고.
신이 뭔지 난 모르겠다.
보이지 않는다니, 영이라니, 무한하시다니...
다 모르겠고.
워낙 신을 이해할 수 없으니 불쌍한 인간들이 더듬어 만지고 볼 수 있게
인간으로 나타나셨다 잠시 33년 반 동안만.
마치 내가 개미 세계에 개미 형체를 입고 나타난 것과 같지.
하지만 내 정신은 사람이다.
주님의 침묵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내가 참견 안해도 요놈 잘하나 보자 두고보는 것이며,
실수할 여지를 주는 의미도 있고,
완벽한 선택의 자유를 준 것이고,
믿음의 콸러티를 시험하는 것이다.
신이 내 작은 소망들을 이루는 용도로만 전락하진 않았는가?
신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설사 내 병을 안고쳐주고, 사랑하는 사람을 살려주지도 않고,
가난에서 구제해주지도 않고, 외로움에서 해방시켜주지 않는다할지라도
단지 그 분 자체의 위대함만을 묵상해본 적이 있는가?
그의 광대함, 아름다움, 지혜, 무한함만으로 충분히 찬미받기 합당한 분일 것이다.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외롭고
여전히 가난하지만
이미 주어진 것들도 충분히 누리거나 감사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창조하신 자연세계와 기적의 책 성서만 있어도
평생토록 기뻐하며 찬양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침묵은 나의 옹졸함으로 판단하자면 불평거리이지만,
믿음으로 바라보면 주님의 깊은 뜻이 있을 것이기에 찬미할 것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