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영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이 명제로 유명한 르네 데카르트가 1596년 3월 31일 태어났습니다. 데카르트는 철학자이자 수학자로서 최초로 방정식의 미지수를 ‘x’로 표기했다고 합니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x’로 두고 회의(懷疑)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의문에 의문을 거듭하는 자신의 존재는 긍정할 수밖에 없어 이 말을 남겼습니다. Cogito Ergo Sum! 이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철학용어로 내성(內省)이라고 합니다.
데카르트는 내성과 언어, 수학적 사고(思考)를 물체와 구분되는 정신 or 영혼이 존재하는 증거라고 주장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반대론자들은 사람의 시각이나 청각이 잘못될 수 있듯, 내성도 절대적이지 않다고 반론을 펼칩니다. 언어와 수학적 특성은 컴퓨터의 등장으로 인간 정신의 특징으로만 볼 수 없게 됐지요.
데카르트는 또 정신이 물체를 움직인다고 주장했는데, 자신이 굳게 믿은 ‘에너지 보전의 법칙’과 어긋납니다. 물체 세계에서 에너지는 일정하게 유지되는데, 정신세계에서 간섭할 여지가 없는 것이죠. 어려운가요? 여하튼 정신과 영혼의 존재 여부는 철학의 근본적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최근에는 이 부분만 다루는 '심리철학'이 철학의 주요한 분야로 자리잡았지요.
정신은 뇌의 현상일 뿐이라는 일원론(一元論)과 정신과 영혼은 물질세계와 별개라는 이원론(二元論) 중 어느 것이 옳을까요? 과학과 의학은 일원론 쪽에 가까운데, 그렇다면 종교의 영역이 설 자리가 없어지지요. 2500년 전 공자는 제자가 “귀신이나 영혼이 있느냐” 고 묻자 “현실도 모르는데 사후(死後)를 어떻게 알겠느냐” 고 대답했지요. 이것을 일원론으로 해석할 수가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느 것을 믿습니까? 정신은 뇌 안에 있을까요, 아니면 뇌 활동의 영역 밖에 마음, 영혼이 따로 있을까요? 여러분의 정신은 어느 쪽에 있습니까?
- 정신은 뇌 활동일까, 다른 영역일까? | 이성주의 건강편지 제572호(2011-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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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는 유교의 영향으로 신을 믿지 않았다. 공자(孔子)는 “사람의 일도 다스릴 줄을 모르면서 어떻게 귀신의 일을 알겠느냐” 고 말했다. 송나라 때 주희(朱熹)는 죽어서도 개인의 영혼이 그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참으로 확신했다. 중국은 신이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정리하면 동양은 신이 없음을 알고 자연의 본성을 알고자했다. |
데카르트, 푸코, 들뢰즈의 ‘육체’
Body of Descartes, Foucault and Deleuze.
1.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육체
육체(Body)에 대한 철학적 인식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 인간이나 존재에 대한 물음이 철학적 사고의 출발이라면, 철학적 성찰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육체가 철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은 때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니체 이전의 철학사에서 그 관심은 대체로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이었다. 일찍이 플라톤은 육체와 정신을 이분법적인 대립 관계로 파악하여, 육체를 변화하고 소멸되는 물질성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육체는 욕망과 질병으로 영혼을 혼탁하게 만드는 악의 거처이기 때문에 철학자는 육체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극복함으로써 올바른 진리와 사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철학은 육체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소멸시킨 연후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 된다. "철학자의 영혼은 신체를 극도로 멸시한다" 는 그의 유명한 말은 그뿐 아니라 철학자들에게서 육체의 의미가 얼마나 무시되었는지를 잘 보여 주는 말이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인간이란 무엇보다 영혼의 존재로 정의될 수 있고, 영혼의 존재인 인간에게 육체는 비정신적이고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실체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육체는 영원하고 변화하지 않는 본질의 세계와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하는 인간에게는 거부하고 극복해야 할 질곡이 된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거나 무덤과 다름없는 부정적인 것으로 사유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영혼이 육체와 결합되어 있는 상태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이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는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영혼과 육체의 옷을 걸쳐 입기 전에 이미 본질의 세계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인식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마치 추락한 천사의 유배된 삶처럼 육체와 동거하도록 유배된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천상의 세계, 본질의 세계로 되돌아가려는 의지와 육체와의 접촉을 멀리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육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인간은 부단히 육체의 물질성을 거부하고 영혼의 순수성을 간직해야 하고, 인간의 지혜란 그러한 노력과 의지를 견지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육체와 정신의 이원론적 개념은 곧바로 선과 악, 존재와 비존재라는 이원론적 개념으로 확산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서구 철학사에서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적 논리는 플라톤에서부터 데카르트를 거쳐 헤겔에 이르기까지 합리주의적 인식론의 토대를 형성했을 만큼 오랫동안 지속해 왔다.
17세기의 데카르트(Descartes)도 육체와 영혼을 이질적이고 분리된 두 개의 실체로 파악하면서, 육체란 물질적 · 물체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정신만이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와 같은 명제는 어디까지나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인간의 본질을 보려는 철학자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데카르트에게는 '생각하는' 모습이 아니라, 행동하는 육체의 모습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다. 인간은 순수한 사고의 능력이나 정신의 활동에 의해서 다른 동물들과 구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하나의 실체라는 것과, 그 본질 혹은 본성은 오직 생각하는 것이고, 또 존재하기 위해서는 아무 장소도 필요 없고, 어떠한 물질적인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임을 알았다. 따라서 이 '나', 즉 나를 나되게 하는 정신은 신체와 전혀 다른 것이고, 신체보다 인식하기가 더 쉬우며, 설사 신체가 없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온전히 스스로를 보존하는 것이다." 1)
이처럼 주체를 결정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사유하고 판단하는 순수한 정신의 행위이다. 육체의 어떤 움직임이나 어떤 감각도 진정한 주체의 모습으로 연결될 수 없다. 오직 사유의 존재를 증명하는 코기토 (Cogito)의 행위만이 육체라는 이질적인 대상과 구별되는 '나' 라 하는 사유하는 존재의 모습을 뚜렸이 보여 준다는 것이다. 사유하는 존재의 모습과 달리 육체의 운동은 단순한 기계 장치의 움직임과 같다.
『방법서설』 5부에 실명된 것처럼 인간의 육체는 기계이지만, "하느님의 손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사람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어느 기계 보다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잘 질서 잡혀져 있는" 2) 기계일 뿐이다. 그러나 그 기계는 모든 동물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인간의 특징을 설명해주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인간의 영흔과 이성적 정신은 육체의 기계로부터 독립된 것이며, 육체와 함께 죽지 않는 것으로 인식된다.
물론 데카르트가 영혼과 육체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자연은 또한 나에게 이러한 고통 · 배고픔 · 목마름 등의 감각을 통하여 마치 뱃사공이 배를 타고 있는 것처럼 내가 내 신체 속에 깃들여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고, 이를테면 혼합되어 있어서 신체와 더불어 일체를 이루고 있음도 가르쳐 준다." 3)
이 말과 관련하여 데카르트는 자신이 오직 사고하는 존재일 뿐이라면 육체가 상처를 입었을 때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 것 이라는 가정을 제시한다. 정신과 육체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배고프고, 목마르고,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과 육체가 과연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의 문제는 분명하지 않다. 그의 논리에서 육체는 물체의 본질이며 무수히 분할될 수 있는 연장성을 갖는 실체이지만, 영혼은 분할될 수 없고 비연장적인 사고하는 실체이다. "데카르트의 원리에서 볼 때 어떻게 비연장적인 사고하는 실체가 연장적이며 사고하지 않는 실체 안에 감각을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가장 설명하기 힘든 문제이다. 두 종류의 실체의 속성들은 각각의 실체 내에서 다양한 범주들을 차지하고 있는 듯이 보이므로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
이렇듯 데카르트에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나 상호작용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기대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그러한 주제는 철학적으로 규명하기도 어려운 문제가 된다.
육체와 영혼의 연결성을 인정하더라도 결국 육체와 영혼을 분리된 실체로 생각한 데카르트적 사유는 육체와 영혼의 상호 연관성을 명확히 해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등 육체와 외부적인 것들과의 관련성에 대한 문제를 외면하고, 오직 사유하는 자아 중심의 논리로 귀결하게 된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부정적 육체관이 초래하는 문제점을 비판하는 다음의 논지는 귀 기울여 볼만한다.
데카르트의 이와 같은 구분이 초래한 가장 심각한 결과는 그것이 사회성의 개념, 즉 한편으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 연관성,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과 지구 사이의 상호연관성을 부정하였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연관성을 정당화할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몸이 배제된 데카르트적 '코기토'는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몸을 전혀 보지 못한다. ‘코기토’의 내향성은 육체적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세계의 외향성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5)
인간의 '사유하는 자아'로서의 이성적 능력을 규명하기 위한 데카르트의 인간 중심적 형이상학은 육체를 배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지구와 인간의 상호 공존적 삶의 논리도 배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구인들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소유 혹은 착취의 근거가 이러한 데카르트의 인식론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신과 육체가 별개의 실체로 인식되는 한, 인간의 자아 중심주의의 한계는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 니체에게서 육체의 디오니소스적 가치
니체는 육체의 존재 가치와 육체의 사회적 현상을 고려하지 않은 자아와 이성 중심적 인식론에 대해 누구보다 가장 날카롭고 핵심적인 비판을 가한 철학자이다. 그는 『비극의 탄생』(1872)에서 비극의 개념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상징되는 두 가지 예술적 충동의 모순적 통일로 이루어진 것임을 규명하였다. 아폴론적인 것의 특징이 현상계의 원리와 질서의 모습으로 예술의 형식을 부여한 것이라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특징은 맹목적이고 혼란스러운 본능적 충동으로서 삶의 역동적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아폴론의 상징은 소크라테스이고, 디오니소스의 상징은 프로메테우스이다. 또한 전자가 오성법칙과 인과율 등 예술의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특징이라면, 후자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나타내는 삶의 근원적인 요소이다.
니체는 이 두 가지 대립적 요소가 갈등을 일으키면서 조화로운 통일을 거두어 위대한 비극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한편, 아폴론적인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지양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한다. 그가 결국 강조하는 것은 디오니소스적 요소이며 이러한 인간의 본능이야말로 세계와 삶의 본질 또는 '힘(權力)에의 의지' 를 구성하는 중심적 논리가 된다. 디오니소스적 충동은 이처럼 인간의 육체에서 새롭게 발견해야 할 중요한 본능적 요소로 부각된다. 이러한 주장은 나중에 자라투스트라의 예언에 잘 나타나 있듯이. 기독교 문화와 역사, 형이상학적 인식과 도덕의 전통 속에서 육체의 욕망을 억누르고 금욕적 이상을 내세웠던 흐름과 정면에서 대립하는 것이다.
니체에게 금욕적 이상은 질병의 상태나 다름없고, 삶을 허무주의자처럼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생명의 본능적 감각을 중시한 철학자로서 그는 무기력한 체념과 순종에 길들여진 육체의 모습을 뒤흔들어 생명과 권력의 의지를 찬양하고 고무한다. 중요한 것은 무겁게 짓눌린 인간의 육체를 해방시키는 일인데. 이런 점에서 그가 찬미하는 춤은 인간에게 우주적인 비상과 무한의 세계를 지향하는 인간의 해방된 모습을 보여 준다.
니체는 생명의 본능적 요소와 힘의 의지에 가치를 부여하고 선과 악의 가치관이나 사회적 인습의 장벽을 넘어서는 초인의 의지를 주장한다. 관습적 도덕에 묶여 사는 군중들과는 달리, 초인은 도덕의 계율을 뛰어넘는 사람이다. 그는 기존의 인식을 타파하고 대지의 진실에 귀를 기울인다. 이런 점에서 초인의 육체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니체는 정신을 자아와 이성이라고 생각하면서, 육체의 가치를 외면하는 사람들을 경멸해야 한다고 말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잘 언급되어 있듯이 육체야말로 이성이며 육체 속에는 슬기로운 정신의 지혜보다 더 많은 이성이 깃들여있다는 것이다. "나의 육체는 나의 전부이다. 나는 육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파격적인 주장과, 이성의 정신을 육체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라고 강변하는 외침에는 초인적 가치관이 보인다. 육체 속에는 자연의 본성이 살고 있다. "건강한 육체의 소리를 들어라!" 는 짜라투스트라의 외침은 바로 자연의 본성이 원하는 순수한 욕망의 진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육체를 경멸하는 사람들은 위선자이며, 육체를 벗어나야 할 감옥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병자이기도 하다.
니체는 육체의 모멸자들을 공격하고, 육체의 진실을 새롭게 논리화한다. 그는 육체에 대한 믿음과 열정으로 육체의 욕망을 옹호하는 한편, 육체의 고행을 찬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모순된 논리가 아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른다는 것은 본능적 쾌락을 추구하는 나약한 태도와 구별되기 때문이다. 관능적인 여성의 꿈속에 빠져드는 것보다는 살인자의 손아귀에 붙잡혀 죽는 것이 낫다고 짜라투스트라가 말하는 것도 그와 같은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은 짐승의 본능적 차원으로 추락할 수도 있고, 초인의 차원에 올라설 수도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육체는 얼마든지 양극단에서 추락할 수도 있고 초월할 수도 있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걸쳐놓은 하나의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려 있는 밧줄인 것이다" 6)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짐승의 요소와 초인의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은 짐승의 차원으로 몰락하지 않고 심연 위의 밧줄을 힘차게 잡아당기며 초인의 차원으로 상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니체가 힘의 의지가 담긴 육체의 해방과 육체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 것일 뿐, 육체의 충동에 따라 흔들리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옹호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는 문명 비판적인 관점에서 도덕과 종교와 학문의 가치들을 뒤집어 보는 성찰과 함께 미래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는 철학자의 의지를 다양하게 보여 준다. 육체와 정신의 관계에서 육체의 디오니소스적 가치를 강조하는 내용도 새로운 가치 정립의 의도로 서술되어 있다.
본질적인 것은 육체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길잡이로 이용하는 것이다. 육체는 관찰을 보다 명료하게 해 주는 훨씬 중요한 현상이다. 육체를 믿는 것은 정신을 믿는 것보다 오히려 굳건히 확립될 수 있다.7)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정신(아니면 영혼, 아니면 현재의 전문 용어로서 영혼 대신에 사용되는 주관)을 믿는 것보다 오히려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소유물, 우리의 가장 확실한 존재, 요컨대 우리들의 자아로서의 육체(Body)를 믿는 편이 옳았던 것이다.… 요컨대 육체를 믿는 것이야말로 당분간은 여전히 정신을 믿는 것보다 오히려 더 강한 신앙일 것이다. 8)
니체는 이처럼 육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육체를 덧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육체를 경멸하는 이상주의자들의 논리를 공격한다. 또한 그는 육체에 대한 관념적 논리를 무너뜨리려 할 뿐 아니라 육체에 관한 새로운 사회적 · 정치적 시각을 제시한다. 육체는 이론적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 정치적 의미에서 해석될 수 있는 사회성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3. 사르트르와 푸코의 육체
20세기에 접어들어 데카르트적인 정신-육체의 이원론을 비판하며, 정신과 육체의 두 실체는 분리될 수 없고 밀접하게 상호 작용하는 것임 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하이데거, 가브리엘 마르셀, 메를로-퐁티, 사르트르 등 실존주의 철학자라고 알려진 사람들은 정신과 육체의 경계선을 제거한 논의를 전개했을 뿐 아니라 육체의 실존적 의미와 감각적 체험을 중요한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사르트르는 그의 소설 『구토』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에 대한 존재론적 회의를 표명하며, 인간은 '그저 우연히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 라는 것을 일상적인 체험의 차원에서 규명한다.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사물들은 인간이 그것들에 부여한 의미를 떠난상태에서 볼 때, 그 자체로서 충족된 즉자적 존재이다. 그 사물들과 접촉하고 있는 인간의 신체를 근본적으로 돌아보면 그것 역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은 육체의 한 부분일 뿐이다. 가령 신체가 외부적 존재와 관계를 맺지 않고 자기 자신을 대상화할 때 그것은 하나의 사물이나 다름없다. 사물의 우연성이나 무상성 등 본래적 모습 앞에서 주인공이 당혹감이나 구토를 느끼는 것처럼, 벌거벗은 육체, 분식하지 않은 육체. 아무것도 나타내 주지 않는 육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느낌이 표현된다.
『존재와 무』(1943)는 존재의 본질을 현상학적으로 탐구한 사르트르의 중요한 저서로서, 여기에 나타난 현상학적 존재론은 무엇보다도 신체와 의식의 이원론을 거부한다. 사르트르에게 신체는 바로 의식이다. 가령 우리가 어떤 풍경을 바라보거나 어떤 물건을 손에 쥐고 있을 경우 우리의 눈과 손은 망원경이나 지팡이와 같은 도구가 아니고 바로 '나의 신체이고, 나의 의식 이고,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의식과 동일시된 신체는 의식의 신체성이기도 하고, 신체의 의식성이기도 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사르트르의 철학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은 자유이다. 인간은 미리 정해진 본질을 갖고 있지않기 때문에 살아 있는 한 끊임없이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그러한 자유는 물론 책임이 따르는 고통스러운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는 사랑의 관계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내가 나의 자유를 행사하면서 타인의 자유를 나의 자유 속에 동화시키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의 자유를 타인의 자유속에 희생시키는 것은 마조히즘(masochism)이고, 자신의 욕망을 계속 충족하기 위해 상대방의 자유를 구속하고, 그의 존재를 육체 속에 가두어 두려는 것이 사디즘(sadism)으로 논의된다.
'성적 욕망' 도 이러한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문제와 더불어 사르트르의 육체의 인식에서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다. 성적 욕망은 자신의 신체와 타자의 신체가 접촉되기를 바라는 욕망이다. 사르트르는 애무가 성적 욕망을 처음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며, 타인의 육체를 내가 소유하고자 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타자를 애무할 때 나는 나의 애무에 의해서 내 손가락 밑에서 타자의 육체를 탄생시킨다. 애무란 타자를 육화하는 의식(儀式)의 총체이다."9)
이러한 애무는 타자의 자유를 제한하고 상대의 신체에 부여된 많은 가능성을 박탈해 버린다. 애무하는 자는 타자의 신체를 나의 의식과 자유로 가득 채우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의 신체가 나의 의식과 자유로 가득차게 되면, 그 육체는 매력을 잃어버린다. 자유야말로 육체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라면, 자유를 상실한 육체는 물체로 전락한다. 이것은 사디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사디스트의 목적은 상대편의 의식과 자유와 주체성을 완전히 소유하려는 것인데, 그 목적이 달성되는 순간, 상대편의 주체성은 소멸되고, 육체는 물체로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이처럼 인간의 실존뿐 아니라 육체적 존재이자 성적 존재인 인간의 문제를 현상학적으로 탐구하였다. 그의 철학에서 신체에 대한 문제는 다른 사람의 신체를 내가 어떻게 경험하고, 다른 사람은 나의 신체를 어떻게 경험하는가 등의 대타 관계에서 중요한 성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사르트르 이후에, 푸코는 『감시와 처벌』(1975)과 『성의 역사』 1권(1976)을 통해 그가 이전에 의존해 왔던 고고학적 방법론을 떠나서 계보학적 방법론의 시각으로 권력과 지식, 권력과 육체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한다. 계보학자의 시각은 역사 발전의 고정된 법칙을 인정하지 않고, 어떤 선입견도 배제하면서 역사적 사건이나 역사의 흐름 속에 감춰진 지배와 복종의 역학 관계를 규명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육체의 문제는 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논의되는데, 푸코가 이런 계보학의 시각으로 육체의 문제를 탐구한 것은 니체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니체를 통해서 인간의 육체나 욕망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양하게 이용되고, 해석되고, 변형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육체가 유럽의 역사에서 어떻게 취급되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이러한 그의 시각은 육체에 대한 사르트르의 실존적 시각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인데 푸코는 존재의 자유와 육체의 불안정성을 강조하는 사르트르의 논리로는, 사회와 권력이 오랜 역사에 걸쳐서 지속적 으로 개인의 육체를 통제하고 조작하고, 영향을 미치게 된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는 권력의 역사란 결국 개인의 육체를 어떻게 지배하고 공략하고 포위해 왔는지를 규명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푸코가 다각적으로 탐구한 권력의 역사에서 18세기는 매우 중요한 시대 이다. 그러나 푸코에게 18세기의 중요성은 이 시대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계몽 사상과 역사의 진보, 인간의 해방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다. 『임상의학의 탄생』과 『광기의 역사』,『감시와 처벌』에서 중심적으로 논의되는 진료소와 정신병원, 근대적 감옥의 형태는 모두 18세기에 생겨났다. 이러한 사실은 외면적으로 이 시대가 환자와 죄인에 대한 인간적 배려를 보인 시대로 해석될 여지를 보여 준다. 그러나 푸코의 관점에서 이러한 현상은 개인에 대한 권력의 통제 기술과 전략이 근대적인 형태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18세기 이전에는 의학적 치료라는 것이 일종의 종교적인 구원에 필요한 수단이었고, 병원의 기능도 허약하고 노동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복지기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8세기의 진료소와 더불어 비로소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가 형성되었고, 환자의 증세와 육체가 전문적인 관찰과 해부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환자의 질병을 치료한다는 점에서는 개선으로 볼 수 있지만. 전염병의 위험이 있는 환자를 격리시킨다거나 그의 혈통과 가계를 조사하고 신체를 해부할 수도 있는 등 임상의학적 번화에서는 개인의 신체에 대한 권력의 적극적 개입과 권력 관계의 작용을 볼 수 있다는 짐에서 부정적이다. 또한 정신병원은 이성 중심적 부르주아 사회의 대변인인 의사가 비이성적 존재인 광인을 사회로부터 제도적으로 격리시켜 감시와 심판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므로, 정신병원의 탄생이 광인에 대한 인간적 배려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근대적 감옥의 출현은 죄인에게 잔혹한 신체형을 완화시켜 주기 위한 권력의 배려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다만 권력의 개인에 대한 지배의 전략이 바뀌었을 뿐이다. 푸코는 개인의 육체에 대한 권력의 행사가 계몽주의 시대에 더 정교하고 기술적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푸코는 '권력과 육체'라는 주제의 한 대담에서 인간에게 "해방의 시대인 18세기를 오히려 통제 장치가 강화된 시대로 묘사한" 까닭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권력 관계가 대체로 그렇듯이 우리는 헤겔적인 의미에서 변증법을 따르지 않는 여러 복잡한 현상을 바라보게 된다. 개인의 육체에 대한 통제와 의식은 육체에 대한 권력의 투자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즉, 체조와 운동, 근육 강화, 노출, 아름다운 육체의 과시 등 이 모든 것은 권력이 어린아이와 군인의 육체, 건강한 개인의 육체등 모든 육체에 대해 집요하고 정교하고 세밀한 작업을 행사하게 된 결과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이 육체를 정복하게 되는 이러한 효과가 발휘되고 나면 곧 그에 따르는 육체 요구와 주장도 생기기 마련이다.10)
푸코는 18세기가 바로 육체를 지배하려는 권력의 요구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 시대임을 말하는 한편, 육체에 대한 권력의 행사가 일방적인 것만이 아님을 주장한다. 물론 개인의 육체는 권력의 작용에 저항하기도 하지만, 저항의 형태는 기껏해야 결혼전의 동거 생활이나 낙태의 자유에 대한 주장, 성적 쾌락의 유혹에 빠지는 일 정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육체의 저항은 근본적인 저항이 아니라 표면적인 저항일 뿐이다. 육체의 저항 앞에서 권력의 효과는 단절되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작용하면서 육체를 관통하기 마련이다. 푸코는 국가 기구와 대중의 관계가 육체를 매개로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묻는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이 영혼과 의식과 관념성을 위해 육체의 현실의 중요성을 부정하였을 것이라는 일반화된 명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권력의 행사만큼 물질적이고, 물리적이며, 육체적인 것은 없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가 작동하는 데 필요하고 충분한 육체의 투자 형태는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권력에 의한 육체의 투자를 육중하고, 거대하고, 지속적이고, 세밀한 것으로 생각해 왔다. 학교, 병원, 군대, 공장, 주택단지, 아파트 등에서 볼 수 있는 엄격한 규율 체계가 그런 형태일 것이다. 그런데 1960년대에 들어와서부터 사람들은 그처럼 막강한 권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절대적인 권력 체계로서가 아니라. 산업사회의 권력이 훨씬 이완된 육체 위의 군림으로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은 성(sexuality)에 대한 통제가 완화될 수도 있고, 그것이 다른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11)
육체에 대한 권력의 전략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말하고, 또한 권력의 행사가 '물리적'이고, '물질적'이며, 또한 '육체적'이라는 것을 지적해 주는 이 답변에서 우리는 육체야말로 권력의 문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주제임을 확인하게 된다. 어린아이의 순진한 육체, 군인들의 튼튼한 육체, 건강한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육체, 그 육체 위에 권력의 전략은 다양하게 행사되고 구체적으로 새겨진다. 식이요법에 의해서건 규칙적인 운동에 의해서건, 사람들이 '보기 좋은 몸매'를 가꾸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권력은 어느새 그들의 육체를 관통해 점령하고 있다. 권력은 억압적으로 군림하지만 않고, 모습을 감춘 채 부드럽고 생산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권력과 육체의 문제가 첨예하게 논의되어 있는 『감시와 처벌』은 감옥과 학문뿐 아니라 동시대의 다른 제도들, 즉 병원, 공장, 학교, 군대 등이 어떤 상관관계로 연결되어있으며, 규율과 체제의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광범위한 자료로 규명한다. 결국 근대적사회의 질서는 육체에 대한 제도적 훈련과 규율이 권력의 기술과 접목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감시와 처벌』의 주제는 그러므로 육체를 규율의 틀 속에 길들이고 순응 시키는 권력의 기술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 준다. 권력자의 육체가 위압적으로 군림하던 고전주의 시대에 죄인의 육체가 끔찍한 고문과 신체형의 대상이었다면, 근대에 접어들면서 권력자의 육체는 점점 위압적 모습이 감춰지고, 죄인의 육체를 다루는 기술도 끔찍한 폭력성으로부터 부드럽고 정교한 속박의 방법으로 전환하게 된다.
육체는 여러 가지 훈련과 속박을 받으면서 다양한 형태로 확산된 권력의 형태와 조직의 요구에 길들여지고 수동적이 된다. ‘강제권’, '통제' '예속화', '분할 점령 방식(quadrillage)', '금지 조항' 등은 육체에 대한 권력의 부정적 방법이 복잡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음을 보여 주는 규율의 다양한 예들이다. 사회는 이러한 규율의 메커니즘을 토대로 질서를 이루고 가동된다. 육체는 규율의 메커니즘을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규율은 복종하고 훈련된 육체들을 만들어 낸다."12) 규율은 모든 육체를 비개성적으로 만들고 동질화하고 규율화한다. 가장 일반적이고 단순한 실습 행위로부터 학교에서 교사들이 가르치는 글쓰기의 정서법에 이르기까지 올바른 자세와 기본적 훈련이 반복되다 보면 자연적인 육체는 기계적인 육체로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육체는 수동적인 순응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과 육체의 관계에서는 권력이 일방적으로 억압하고, 검열하고,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힘을 생산적으로 만들고 해방의 방향으로 유도한다는 것이다. 권력의 생산적 기능에 따라 육체는 능숙해지고, 이익을 거둘 수 있는 유효한 것이 된다. 육체는 기계적인 것에서 유기적인 것으로,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수동적인 것에서 능동적인 것으로 전환 된다. 육체는 힘은 육체의 속박에 따른 예속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닌 어떤 긍정적 경제의 틀 속에서 가동하는 것이다.
권력은 유용성의 경제적 측면에서 육체의 힘을 증가시키는 한편, 복종을 요구하는 정치적 측면에서 육체의 힘을 감소시킨다. 푸코는 이러한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규율의 확립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조건을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첫째는 개인으로 하여금 규율을 지키게 만드는 공간을 여러 독립적 단위로 분할하여 개인을 관리하고 조직을 운영하는 모든 분할 체제로서, 수도원이나 학교, 공장 같은 기관에서 이용하는 것이다. 둘째는 개인의 활동을 통제하는 모든 규율의 수단으로, 일과 시간표나 군대의 제식훈련 같은 것을 이용하는 일이다. 셋째는 육채에 시간의 의미를 부과하여 육체의 의미를 분할하도록 훈련시키고, 넷째는 개인이 명령에 따라 부과된 역할을 빈틈없이 수행하도록 개인의 힘을 최대한 통합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규율 체계와 감시의 모델이 만들어지면서 근대적 감옥 형태가 생겨난 것이다. 이 감옥은 범죄자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개인을 규율에 순응하는 존재로 교화하는 역할을 한다. 감옥은 육체를 통제하고 길들이는 모든 장치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기관이다. 육체를 격리시켜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게 할뿐 아니라, 죄수에게 노동을 부과하는 것도 그러한 장치의 수단이다. 이러한 감옥은 개인을 통제하고, 교화하고, 관찰하는 장소일 뿐 아니라 수형자들에 대한 임상의학적 지식을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1830년대에 만들어진 일망 감시 장치(lepanopticon)는 바로 그러한 효과를 거두기 위해 수형자 개인의 신체적 특징과 행동방식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를 교정할 수 있도록 감시망을 조직화한 시설이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범죄자에 대한 실증적 지식은 의학적 지식과 구별되면서도 공통된 특징을 갖는다. 푸코는 감옥이 범죄자를 제거하는 기관이라기보다 범죄자를 생산하는 기관임을 역설한다. 감옥의 환경이나 체제가 범죄자를 교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보다 범죄자의 정신을 더욱 오염시킬 뿐 아니라, 그들의 신상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권력이 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감옥과 경찰은 권력의 동일한 장치일 것이다.
감옥의 제도를 포함한 사회체의 모든 규율 중심적 통제는 개인의 신체에 대한 접촉을 하지 않을수록 그만큼 통제의 효과가 증대될 것이라는 전제에서 실행된다. 가령 일망 감시 장치의 구조는 권력이 개인의 육체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하지 않아도 가동될 수 있는 장치이다. 가능한 한, 신체에 거리를 두고 권력의 끊임없는 시선의 통제가 작동하면, 권력의 효과는 반드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점에서 "권력은 비육체적 형태를 지향한다"는 것이 어쩌면 『감시와 처벌』의 핵심적 내용일 것이다 육체에 대한 접촉을 하지 않고, 육체적인 폭력을 가하지 않으면서 개인을 통제하고 예속화하는 권력의 기술이야말로 근대적 권력의 주요한 특징일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근대 산업 사회의 복잡한 체제를 푸코식으로 압축해 설명할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푸코의 생체 통제 권력(biopouvoir)'의 개념이다. '생체 통제 권력'은 인구의 증가와 출산, 국민의 건강과 질병 등 질병과 성의 정치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권력의 기술이 18세기에 태어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결국 개인의 생명과 신체에 대한 권력의 행사를 '생체 통제 권력'의 개념 으로 이해한다면, 이 개념 속에는 『감시와 처벌』에서처럼 기계로서의 신체를 훈련하고 순응시켜 그 효용성을 최대 한도로 증대하려는 방법의 문제와, 『성의 역사』에서처럼, 성과 성욕, 출생과 사망, 수명 연장, 인구 증가, 국민의 건강 등 인간의 육체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문제가 포함될 수 있다. '생체 통제 권력'은 권력에 육체를 순응시키면서 생산적으로 만드는 전략을 구사한다. 그것의 장치는 공장, 병영, 감옥, 병원, 학교 등 다양한 집단에서 제도화되고 운영된다. 육체를 순응적으로 길들이는 통제 방법이 자본주의의 발전과 관련되어, 자본의 축적과 권력의 축적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것은 푸코의 독특한 시각이다. 푸코는 '생체 통제 권력'의 개념을 제시하는 한편, 그것과 관련된 여러 가지 권력의 메커니즘을 다양하게 논증한다. 권력에 대한 그의 다양한 논증과 개념화는 결국 권력이 얼마나 정치적·경제적 물질성의 근거에서 인간의 육체를 관리하고 지배해 왔으며, 또한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철저히 침투하고 점령해 왔는지를 보여준 작업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푸코의 육체에 대한 인식은 아무래도 비극적이고 절망적이다. 육체를 통한 해방의 가능성이나 출구의 빛은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4. 들뢰즈와 '욕망하는 기계'의 육체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13)을 통해 니체의 중심적 작업이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는 일이었고, 또한 칸트로부터 시작된 비판철학의 과제를 완성하려는 노력이었음을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는 '권력에의 욕망'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 하며, 전자의 경우가 능동적인 의지이고 긍정의 원천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노예적이고 반동적인 부정적 욕망이라고 규정짓는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권력에의 욕망'은 '권력에의 의지'가 전락한 형태일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권력에의 의지'를 힘과 육체의 개념을 통해 접근한다. 그의 해석에 의하면, 니체의 철학에서 세계의 본질이란 이런 존재도 안정된 통일성을 누릴 수 없는 변화와 생성의 형태이며,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지배하거나 지배당하는 역동적 관계에 놓여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육체 역시 지배하는 힘과 지배받는 힘의 관계로 나뉘어, 지배하는 힘은 능동적인 힘이 되고, 지배받는 힘은 반동적인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는 니체의 철학을 논의하면서 니체의 철학을 설명하기에 급급한 입장이 아니라 니체를 통하여 그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개진한다. 그가 정신분석학자인 가타리와 함께 쓴 책으로 널리 알려진 『안티 오이디푸스』는 단순히 맑스와 프로이트를 종합한 책이 아니라 '맑스와 프로이트를 니체주의적 틀 속에 융해하고 있는'14) 책으로 평가된다. 그만큼 그는 니체의 철학과 그 영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단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창조적 가능성을 이끌어 내며 발전시킨 것이다. 이 책의 1장은 욕망하는 기계들이란 제목으로 욕망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논의하는 가운데, '욕망하는 기계(machined?sirante)', '기관들 없는 신체(corps sans oranges)', '독신 기계(machine c?libataire)' 등 상호 연결된 의미의 개념들을 제시하고 설명한다.
이 책은 또한 기존의 정신분석을 비판하면서, 정신분석과 관련된 자본주의 사회의 억압적 논리와 낡은 중심적 체제를 비판하는 한편, 이 체제에서 희생된 분열증 환자의 목소리로 욕망의 해방을 모색한다. 여기서 저자들이 말하는 정신분열증적 인간의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병적인 모습으로 규정된 환자가 아니라 새로운 '자연인'이며, 기존의 관습적 코드와 구조 혹은 통제된 언어로부터 벗어나 끊임없이 자유롭고 유동적인질서 속에서 유목민처럼 사는 사람이다. 기존의 정신분석은 욕망의 문제를 '어머니-아버지-나'라는 가족의 삼각형 도식 속에서 개인에게 형성되는 문제를 다루고, 여기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정신분열증 환자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정신분석적 해석에 의하면, 욕망은 가족의 범위 안에서 생성되고 거세되는 오이디푸스화의 과정을 거쳐 개인으로 하여금 사회적 질서를 내면화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은 어디까지나 거세된 욕망이고, 오이디푸스화한 욕망이며, 생산적 측면이 배제된 표상적 욕망이라는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저자들은 정신분석적 표상 체계나 질서에 갇혀 있지 않고 거세되지 않은 욕망의 본래적 성격을 주장하고, 진정한 욕망은 폐쇄적인 가족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 속에서 생산적으로 작용하는 것임을 역설한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의 욕망 개념은 라캉의 욕망 개념과 구별된다. 라캉의 욕망은 대상이 부재하거나 결핍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지만 들뢰즈의 욕망은 대상의 부재라는 의미를 내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욕망은 대상의 존재나 부재와 상관없이 프로이트의 리비도와 같은 에너지의 흐름을 나타낸다. 라캉은 요구와 욕망을 구별지어서 어머니로부터 분리된 어린아이에게 요구는 의식적인 것이지만, 욕망은 무의식적인 것으로서 어머니를 소유하고 싶다거나, 남근(phallus)이 되고 싶다는 것 등 채워질 수 없는 결핍으로 정의한다. 라캉의 상상계(l’imaginaire), 상징계(le symbolique), 현실계(le r?el)의 개념은 한 사람의 주체가 상정하는 세계와 언어 행위를 통해 정립되는 세계를 구별하여, 이것과 현실과의 관계를 통해 욕망의 근원과 욕구 충족의 메커니즘을 설명한 것이다. 어린아이인 주체가 상징계로 들어가는 과정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으로서 무의식의 생성 과정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언어를 습득하는 사회화의 과정에서 의식의 그림자로 무의식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욕망은 상상계와 동시에 태어난 무의식적인 것으로 거세 콤플렉스와의 관련에서 상징계 안에 재구성된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그의 유명한 명제는 무의식적 욕망이 상징계 안에서 언어 표상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라캉의 무의식과 욕망의 개념을 비판하는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 표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무의식 안에서 욕망은 결핍을 전제로 한 부정적 의미보다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고, 그러한 욕망을 '욕망하는 기계들'로 명명한다.
이렇게 들뢰즈와 가타리는 육체의 모든 기관이나 욕망에 기계라는 개념을 부여한다. 물론 이것은 '인간 기계'라는 18세기적 개념을 부활시킨 것이 아니다. 가령 그들이 인간의 육체를 여러 가지 '욕망하는 기계'들로 구성된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육체의 모든 기관이 기계적으로 작동하면서도 통일된 체계에 예속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단절되고 접속되고 분열하면서 생산하는 자유로운 기계의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모든 것은 기계이다."15) 이렇게 모든 것을 기계로 규정할 때, 그것은 또한 어떤 대상의 의미가 중요하지가 않고 사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기계의 기계성을 규정하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사용과 용법일 것이다. 그러한 용법은 고정된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고,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육체 기계도 들뢰즈의 시각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육체의 모든 기계들의 분절과 결합의 방식은 통일되어 있지않고, 연쇄의 흐름에 따라 유동적이다. 가령 젖가슴 기계와 입 기계 사이의 우유의 흐름 이거나, 입 기계와 귀 기계 사이의 언어의 흐름도 그러한 유동적인 에너지의 흐름과 관련되어 있지만, 그것은 결코 통일적이거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는 라캉의 부분 충동과 유사하다.16) 그것은 충동적 성격을 갖고 있고, 목적도 없고, 원인도 없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욕망의 목적이 있더라도 그것도 궁극적인 목표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과정의 추구가 중요한 목적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계와 같은 것이다.
'욕망하는 기계'의 개념은 현실적으로 물질적인 육체의 개념과 같은 것으로서 자아의 통일성을 부정한다. 그것은 개인의 인격적 범위를 넘어서서 정신적 에너지가 투여된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많은 다른 주체들과 연속적으로 동일시되는 탈중심적 자아를 전제로 한다. '욕망하는 기계'의 논리가 통일된 자아와 주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기존의 정신분석과 오이디푸스의 삼각형 도식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존의 정신분석은 '욕망하는 기계'의 생산적 흐름을 코드화하고 영토를 구획지어 억압하고 통제하며 욕심 많은 자본가처럼 끊임없이 영역을 확장해 왔다. 들뢰즈에 의하면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와 정신분석의 공통적 속성인 영토 확장의 메커니즘이자 정주민의 탐욕적 속성이다. '욕망하는 생산' 혹은 '욕망하는 기계'는 코드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분열적 흐름을 생산하고, 주어진 영토의 경계를 벗어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운동을 전개하면서 탈주선(la ligne de fuite)을 지향한다. 그것은 가족의 울타리 속에서 굴절되고 속박된 리비도를 본래의 사회적 영역으로 해방시키려는 유목민의 작업과도 같다.
들뢰즈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힘을 '리비도'라고 명명하고, '욕망하는 기계들은 그것들 자체의 힘으로 '기관들 없는 신체'를 생산한다"17)고 말한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부분 충동들의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성감대가 유기체를 이루지 않고 이질적 종합의 상태로 작용하는 신체이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끝 부분에서 프루스트 소설의 화자가 하나의 거대한 '기관들 없는 신체'라고 말하면서 화자의 역할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지각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18)는 거미가 미세한 진동의 기호를 감지하고 그 기호가 뜻하는 먹이의 대상을 향해 덤벼드는 행위에 비유를 한다. 그가 소설의 화자를 거미에 비유한 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구성이 거미줄과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거미와 같은 존재인 화자는 뛰어난 감수성이나 비상한 기억력을 갖고있지만 이 능력을 자발적이고 조직적으로 사용할 수 없고, 비의지적 감수성과 기억력, 사유를 통해 자신의 형태를 마음대로 바꾸어 나가는 정신분열증 환자'의 모습과 닮아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관들 없는 신체'는 분열증적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들뢰즈는 이러한 분열증적 주체에 '독신 기계'라는 이름을 붙이고, 독신 기계의 에너지를 '환희(Voluptas)'라고 부른다. 그가 주체를 독신 기계로 명명한 것은, 이 기계가 욕망을 오이디푸스화할 장치인 부모도 배우자도 갖지 않는 존재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노마드적 주체의 힘은 종국에는 참으로 인간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자유를 구현할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안티 오이디푸스』의 저자들은 말한다.
정주민이기를 거부하고, 영토성을 부정하며, 유목민의 속성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동하면서 기존의 정신분석과 반대되는 입장에서 욕망의 사회적 투여를 분석하는 작업은 '분열증적 분석(la schizo-analyse)'이다. 그것은 억눌려 있던 무의식적 욕망의 힘을 분출시켜 파괴와 소탕과 혁명의 임무를 수행한다. '분열증적 분석자'는 '무의식의 압력선'을 중시하지 않고, '무의식의 탈주선'19)을 중시하는 사람이며, '오이디푸스적 억압의 함정과 예속 관계'20)를 해체하는 사람이다. '분열증적 분석'은 그러한 욕망의 탈주선을 찾고, 오이디푸스를 거부한 욕망이 사회 공간 속에 투여되지 못하고 붕괴될 때 발생하는 정신병의 단계를 뛰어넘는 작업을 감행해야 한다. 정신분열증이 자본주의와 정신분석에 의해서 생산된 것이라면, '분열증적 분석'은 자본주의 체제와 질서를 교란하고 전복시키는 혁명적 힘의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그렇다면 욕망하는 기계들을 통한 혁명의 꿈과 논리는 유토피아적인 것일까? 분열증적 흐름에 기초한 자유로운 욕망의 해방이 과연 기존 체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정신분열증의 지나친 미화이거나, 분열증적 세계의 고통과 혼란스러움을 간과하고 관념적인 입장에서 욕망과 정신된열증의 긍정적인 측면만 확대해서 것은 아닐까? 물론 정신분열증 환자는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통제된 언어를 수용하지 않고,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 자유로운 세계 속에서 체제와 질서를 전복할 가능성을 갖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분열증의 유목민들은 혁명의 가능성을 보여 주긴하지만, 혁명의 현실적 세력으로 규합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혁명의 실현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 책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인간의 육체 속에 내재한 욕망의 정체와 크기 혹은 그것의 진정한 힘과 가능성을 새롭게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미셀 푸코는 『안티 오이디푸스』에 대한 서평에서 이 책이 욕망과 현실과의 관계를 분석한 책으로서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사유와 언술과 행위 속에 욕망을 끌어들이고 있는가?", "욕망은 정치의 영역 안에서 어떻게 그 힘을 발휘할 수 있으며, 기존 질서를 전복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그 힘이 강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깊이 있게 파헤친 역저라고 평가한다.21) 그의 말처럼 『안티 오이디푸스』의 참된 의미는 인간의 외부와 내부의 어디에서건 굳건히 자리 잡은 정주민적 사고 파시즘 형태를 타기하고, 권력의 경직된 외피를 깨뜨리면서 진정한 자유와 욕망의 인간을 복원시키고 육체적 무의식의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힘의 가치를 일깨운 점에 있을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욕망과 권력의 사회사라는 관점에서 '욕망하는 생산'의 역사로 파악하는 다음의 견해는 우리의 주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유익하고 시사적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역사는 어느 정도까지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전개되는 니체의 권력사, 그리고 『저주받은 몫』(1954)에서 전개되는 바타이유의 일반적, 리비도적 과잉의 경제학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은 '욕망하는 생산'을 새로운 분석 대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의 탐구 대상과 유사한 것이다. 푸코의 권력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처럼 모든 사회적 관계들에 스며들며, 개인의 하부수준에 있는 신체를 관통하며, 행동과 생산의 보다 큰 회로들 내부에서 전통적인 제도들의 구조와 일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신체에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투자를 실행한다.22)
이러한 견해처럼 푸코와 들뢰즈의 작업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푸코에게 권력의 문제가 일차적인 반면에, 들뢰즈에게는 욕망의 문제가 일차적이다. 푸코가 권력의 전술이나 '생체 통제 권력'의 개념을 세밀히 분석하면서 육체의 예속성을 부각시켰다면, 들뢰즈는 '욕망하는 기계'가 권력의 지배 체제들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를 모색하였다. 그들은 모두 욕망과 권력, 육체와 권력의 밀접한 문제를 깊이 파고들면서 육체와 욕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각 주
1 R. Descartes, 1953, "Discours do la M?thode". (Euvres et Lettres, Gallimard. P.148.) 2 Ibid., p.164. 3 Ibid., p.326. 4 (안소니 케니, 1991), 『데카르트의 철학』. 서광사, p.239. 5 (정화열. 1996/7~8). "생태철학과 보살핌의 윤리", 『녹색평론』. 6 니체/박환덕 역(1970).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전집 3권, 휘문출판사, p.28. 7 니체/박환덕 역(1970). 『권력에의 의지』 제 3서. 니체 전집 4권 519장, 휘문출판사, p.325. 8 Ibid., 646장. p.391. 9 J. P. Sartre, 1943 L?tre et le N?ant. Gallimard. p 440. 10 M. Foucault. 1986. "Pouvoir et Corps", in Quel Corps?, Les ?ditions de la passion. P.62. 11 Ibid. 12 M. Foucault. 1975. Surveiller et punir. Gallimard, p.140. 13 G. Deleuze. 1962, Nietzsche et la Philosophie, P.U.F.. 14 R. Bogue. 1989, Deleuze and Guattari, Routledge, p.83. 15 Deleuze·Guattari. 9172, 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nie. Minuit. 16 라캉은 육체에는 네 가지 성감대와 상승하는 네 가지 충동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입-구순 충통>, <항문-항문 충동>, <눈-시각적 충동>, <귀-청각적 충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충동의 대상인 젓가슴. 배설물. 시선. 목소리는 통일적 유기체를 구성하는 신체 부위들이 아니라 부분 충동에 대응하는 파편적 조각으로서 <루분 대상>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17 Ibid., p.40. 18 G. Deleuze. 1998, Proust et les signes, P.U.F., 218. 19 G. Deleuze. 1998, op.cit., p.405. 20 Ibid., p.14 21 M. Foucault. 1988/09, "L’Anti-Edipe : une introduction ? la vie non-fasciste", in Magazine litt?raire, No. 257, pp.49-50.. 22 R. Bogue, op.cit., p.105.
- 데카르트, 푸코, 들뢰즈의 ‘육체’ | 오생근 201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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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의 철학과 동양철학 :
초인의 동양적 조명.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0.15 ~ 1900.8.25) 지난 이십년 이래 세계를 휩쓴 포스트모더니즘과 아울러 니체의 사상이 새롭게 조명되고, 환경과 생태계 파괴를 야기한 과학기술 문명이 위기에 직면하면서 불교와 노장사상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동양사상에 관한 관심이 확산되어 왔다.
이러한 두 가지 현상이 우연한 것일까? 아니면 니체와 동양사상은 그것들간의 시간적 및 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떤 유사성을 갖고 있으며, 다같이 사상과 문명사적 위기 극복의 어떤 지침이 될 수 있기 때문인가? 언뜻 보기에 니체의 철학만큼 비동양적, 아니 반동양적인 사유체계도 찾아보기 어렵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와 "초인" 철학은 부처의 "자비"와 "보살" 사상과 노장 사상의 "도"와 "무위" 사상과 공통점은 커녕 정면으로 대립된다. 전자가 폭력적이며 제국주의적 적극성과 공격성을 반영하는데 반해서 후자는 따뜻하면서도 공생적인 수동적 화쟁성(和諍性)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니체가 동시대 유럽의 정신적 풍토를 한탄하면서, 불교에 대한 경멸심을 감추지 않고 "나는 날로 확산되는 측은지심의 도덕 ‥‥‥ 그 자체가 아마도 새로운 불교의 통로로서 이미 유럽 문화의 가장 불길한 징조로 이해하고 있다1)"라고 썼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세계관으로서 니체 자신의 철학과 불교와 노장사상으로 대표되는 철학으로서 동양사상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비전의 혁명성과, 언뜻 보기와는 전혀 달리, 그 비전의 내용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에 비추어 볼 때, 양자는 놀랍게도 유사하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이다2)"라고 선언한 니체 철학의 혁명성이 당시까지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플라톤의 합리주의적 철학과 기독교의 종교적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데 있었다면, 불교와 노장사상의 혁명성은 힌두교와 유교의 규범적 세계관과 도덕주의적 가치관을 전복한 데 있으며, 니체와 부처 그리고 노장의 세계관의 내용적 유사성은 역동적인 일원론적 형이상학에서 그리고 그들의 존재와 언어에 대한 철학적 통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니체의 철학과 동양사상의 관계는 역설적으로 보인다. 이 두 사상 체계는 한편으로는 극단적으로 대립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놀랍게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그들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어디에 있으며, 동양철학의 맥락에서 볼 때 니체의 철학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의 대답을 찾아보기 위해서 나는 먼저 니체의 철학과 동양철학을 각기 요약한 다음 그것들 비교ㆍ평가하기로 한다.
1. 니체 철학의 총체적 재구성
니체는 예술, 종교, 심리, 언어, 정치, 가치, 인식 등 다양한 영역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철학을 개진했으며, 그의 철학적 논지는 직관적이기도 하지만, 단토가 일찍 밝혀 주었듯이 놀랍게도 분석적이다3). 그러나 니체의 철학적인 근본의도는 특정한 분야에 대한 특정한 철학적 이론을 분석적으로 해명하는 데 있지 않고, 당시까지 서양을 지배했던 세계관의 오류를 고발하고, 오류의 어둠으로부터 인간과 인류 문명을 해방하고자 했으며, 철학적 문제와 관련해서는 잘못된 세계관에 대치할 수 있는 완전히 혁명적인 세계관을 세우는 것이었다.
'權力에의 意志', '永遠回歸' 그리고 '超人' 세 개념은 니체의 많은 저서에서 간헐적으로 언급하기는 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체계적으로 논의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개의 개념들을 떠나서는 니체 철학을 언급할 수 없을 만큼, 그리고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의 철학자, '영원회귀'의 철학자, '초인'의 철학자로 불리어질 만큼, 이 세 개념은 니체의 철학적 세계관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이는 없을 것이다. ' 권력에의 의지'가 니체의 형이상학적 존재론 내지 우주론의 입장을 규정한다면, '영원회귀'는 그러한 존재론 내지 우주론의 구조에 대한 니체의 관점을 설정하고, '초인'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가치에 대한 니체의 이념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니체의 철학은 이 세 개의 개념들의 개별적 분석과 그것들의 관계를 설명함으로 총체적 조명이 가능하다.
1) "權力에의 意志"와 존재 일반
니체가 십여 권의 저서를 이미 출판한 다음에도 자신의 철학을 총체적으로 정리하고자 했으나 불행하게도 그의 사후에야 여동생에 의해서 출판된 『권력에의 의지』라는 저서를 위해서 수많은 노트를 남겼다는 사실은, "권력에의 의지"라는 개념이 그의 철학적 사유에 얼마만큼 큰 비중을 갖고 있는가를 말해준다. 니체의 도덕철학, 예술철학, 종교철학, 인식론도 "권력에의 의지"를 전제할 때만 그 본질이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철학에서 이 개념 못지 않는 비중을 갖는 개념들이 또한 "영원회귀"나 "초인" 개념이다. 니체 철학의 전체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개념도 또한 우선 파악해야 한다.
니체 철학에서 "권력에의 의지"란 무엇에 관한 개념이며,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가? 일상적 담론에서 '권력'은 정치적 개념이며, '의지'는 심리적 개념으로서 필연적으로 어떤 인격적 존재를 전제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 사회에만 정치가 존재하는 만큼 권력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며, 의지는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의 심리적 속성을 지칭하게 된다. 그렇다면 "권력에의 의지"는 결코 철학적으로 핵심적인 어떤 존재를 지칭하는 개념일 수 없다. 그래서 니체의 철학 체계에서 권력에의 의지는 어떤 특정한 존재나 그것의 특정한 속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일반을 지칭한다. 간단히 말해 "권력에의 의지"는 '도대체 무엇이 존재하는가?' 라는 존재 일반의 본질에 관한 물음에 대한 니체의 형이상학적 대답이다. 권력에의 의지는 우주에 있는 어떤 특정한 존재나 그것의 속성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가장 일반적 그리고 근본적 속성, 아니 모든 존재들을 서로 차별할 수 없는 하나로 볼 때 그것이 갖고 있는 본질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는 하이데거가 지적했듯이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이러한 사실은 니체가 자신의 저서 『권력에의 의지』 마지막에 단호한 어조로 "이 세상은 권력에의 의지이다. 그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당신들 자신도 역시 이러한 권력에의 의지이다. 그리고 그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4)"라고 말한 사실에서 분명하다.
'존재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서로 환원할 수 없는 존재의 수에 대한 물음인 동시에, 그 존재 혹은 존재들의 존재 양식에 대한 물음일 수 있다. 첫 번째 측면에서 볼 때 위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플로티누스와 스피노자 그리고 헤겔과 맑스의 경우처럼, 모든 존재를 단 하나로 보는 일원론적 존재론과, 플라톤, 기독교, 데카르트 그리고 사르트르의 경우처럼, 물질과 관념 두 가지로 환원할 수 있다고 보는 이원론적 존재론 그리고 라이프니츠의 경우처럼 무한하다고 보는 다원론적 존재론이 가능하다. 두 번째의 측면에서 볼 때 위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파르메니데스 계열의 주장으로, 절대와 부분을 어떤 영원 불변한 고정된 실체(being)의 중심에서 보는 견해가 있고, 헤라클레이토스를 비롯하여 헤겔, 베르그송 그리고 동양사상의 경우처럼 역동적 변화(becoming)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존재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의 성격을 위와 같이 분석할 때, 니체의 대답은 분명하다. 그에 의하면 우주 혹은 자연 전체는 궁극적으로는 아무 것으로도 구별할 수 없는 단 하나이며, 그것의 본질은 고정된 실체(substance, being)가 아니라 '역동적 변화'(becoming) 그 자체이다. 그는 역동적 변화를 의인적으로 '권력에의 의지'라고 이름 붙인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점에 주의해야 한다. 첫째로는 니체가 '권력에의 의지'라고 했을 때 '의지'라는 말은 '존재'로 불릴수 있는 하나의 고정된 실체인 인격적 주체가 '권력'이라는 어떤 특정한 대상을 향해 행동을 보인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본질이 '권력을 추구로서 의지자체'라는 사실이며, 둘째로는 니체가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전체에 대해 인간의 경우에만 적용할 수 있는 '권력에의 의지'라는 개념을 적용한 것은 우주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을 의인화해서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 일반의 본질이 역동적이며 형이상학적 속성이기에, '에너지', '중력', '역학' 등과 같은 과학적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주 내지 자연 전체가 단 하나의 존재로서 그 속성이 '권력에의 의지'라는 니체의 주장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가장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일상적 경험 세계에 배치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주의 전체적 속성을 '권력에의 의지'로 서술하는 것은 과학적 지식에 비추어 볼 때 의 인적이며 따라서 원시적 사고의 어둠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한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일상적 경험에 근거할 때 존재하는 것은 단 한 가지나 두 가지가 아니라 무수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개, 사람, 산, 바다, 풀, 별, 달, 하늘, '나', '너', 마음, 몸, 책상, 포도주, 컴퓨터, 비행기가 존재한다. 분자, 전자, 세포, 유전자가 존재한다. 색깔들, 소리들이 또한 존재한다. 사물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건, 일, 행위, 경험이 또한 존재한다. 플라톤은 관념적인 이데아만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기독교는 비가시적 즉 초월적인 신이나 천당이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하나의 존재는 다른 존재와 구별되며, 객관적이며, 존재하는 것들의 수는 무한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존재를 진리라고 부른다. 아니 존재하는 개를 '개'로 부를 때 그것을 진리 즉 사실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존재들 즉 이러한 진리들을 전제와 근거로 우리는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간다. 이렇게 수많은 것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이 진리라면, 모든 것이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존재라는 일원론적 존재론은 맞지 않는다. 만약 니체가 주장하는 대로 모든 존재가 '권력에의 의지'로 불릴 수 있는 단 하나의 주장이 옳다면, 일반인들이 자명하다고 생각하고 적지 않은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우주와 자연은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실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다원적 존재론은 오류일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해 니체는 역설적으로 선언한다. "진리는 거짓이다. (‥‥‥) 진리란 어떤 종이 생존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오류이다.5)" 그는 다시 묻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은유, 환유 그리고 의인화의 유동적 군단이다. (‥‥‥) 진리는 너무 많아 사용하여 낡아빠지고 감각적 힘을 상실해서 그것이 원래는 환유였다는 사실도 망각된 환상이다.6)" 니체는 다원주의적 존재론의 오류를 지적한다. 일반인들은 물론 많은 철학자들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개'나 '삶', '원자'나 '전자', '몸이나 마음', '이데아'나 '천당'은 각각 서로 구별될 수 있는 실체와 사실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생존 전략상자의적으로 관념 즉 개념의 차원에서 조립한 관념적이며 개념적 이고 언어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그의 관점주의 즉 상대주의적 인식론에 근거한다. 그의 인식론에 의하면 어떠한 인식의 주체도 그 대상을 시간과 공간, 상황과 의도를 초월한 어떤 절대적 관점에서 관찰하고 인식할 수 없다. 모든 인식은 인식 주체의 역사적, 문화적, 언어적 그리고 목적적 특수성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니체의 인식론은 칸트적 인식론과 유사하다. 칸트의 인식론에서 인간의 인식이 자신의 의식 구조에 의해서 제한되어 있는 만큼,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물 자체(Ding-an-Sich)를 인식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오로지 인간의 의식 구조에 의한 현상적 해석으로만 이해되듯이, 니체의 인식론도 관점과 언어와 목적을 초월한 위치에서 인식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상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니체는 인식을 사실의 발견으로 파악하고, 진리를 사실과 일치하는 명제로 보는 실증주의에 반대해서 "아니다! 사실이야말로 다름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바로 그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해석뿐이다"라고 쓴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다원주의적 존재론이 최근까지의 철학을 지배하고 있는 이유는 언어의 구조에 의해 착각을 일으켜서 인식과 그 대상 존재, 언어와 그 지칭 대상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말한다. "모든 것을 사물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세계를 통일성, 동일성, 영구성, 실체, 원인, 사물성 그리고 존재로 서술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들은 완전히 언어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법을 집어치우지 않는 한 하느님을 집어치울 수 없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8)"
니체의 위와 같은 상대주의적 인식론은 모든 진리에 대한 신념, 모든 인식이 절대적 그리고 보편적 객관성을 가질 수 없음을 뜻한다. 이러한 점에서 니체의 인식론은 허무주의적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큼 자명한 것이 없고, 또한 위와 같은 니체의 허무주의 인식론이 옳다면, 다원주의적 존재론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며, 다원주의적 존재론이 제거된다면 일원적 존재론은 불가피하며, 니체의 '權力에의 意志'라는 개념으로 나타난 니체의 존재론이 일원론적이라는 것이 틀림없다면, 그의 존재론이 참이라는 결론은 불가피하다. 실제로 고전역학과는 달리 양자역학은 에너지가 파장의 개념과 그와 동시에 파장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입자의 개념으로 동시에 서술될 수 있으며, 상대성 원리는 일반적 경험의 차원에서나 뉴턴적 역학의 틀 안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공간과 시간이 분리될 수 없는 단 하나의 현상임을 입증하고, 최근의 생명과학은 물체와 생명의 경계를 허물어 놓고, 우주과학의 대폭발 이론은 우주가 단 하나의 원천에서 나타났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일원론적 존재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만약 니체가 주장하는 대로, 우리가 현상적 차원에서 차별할 수 있는 존재들이나, 모든 담론에 전제된 마음과 몸의 구별이나, 여러 철학에서 전제하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관념들이나 여러 종교에서 말하는 영혼이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이나 논리학에서 전제된 논리적 법칙이나 수학에서 말하는 수학적 존재들이 영원불변한 실체가 아니며 사실도 아니며 해석에 불과하고, 진리가 아니라 거짓과 오류이며, 실체가 아니라 환상에 지나지 않고, 이 모든 것들은 서로 분류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우주요 자연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존재 일반의 개념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작된 허구라면, 단 하나의 실체로서의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의 속성은 무엇인가? 어떤 종류의 존재론적 범주 속에 단 하나로 파악된 실체를 가장 포괄적으로 묶을 수 있는 존재론적 범주는 무엇인가?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가장 포괄적인 존재론적 범주 개념은 정신 아니면 물질이다.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존재론적 일원론이 관념적 일원론과 유물론적 일원론으로 구분되는 것은 당연하다. 존재론적 일원론은 그 존재의 속성을 '관념' 아니면 '물질'이라는 두 가지 속성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고, 존재론적 일원주의자는 버클리의 경우처럼 '관념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맑스의 경우처럼 '유물론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존재론적 일원론자인 니체는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의 속성을 지칭하기 위해서 '관념'이나 '물질'이라는 개념 대신 '권력에의 의지'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원래 인간의 속성에만 적용될 수 있는 '권력'이나 의지'라는 개념이 어떻게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의 속성에 적용될 수 있는가?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을 '권력에의 의지'로 부름으로서 니체는 일종의 원시적 애니미스트 즉 물활론자로 변신한 것이 아닌가? '권력에의 의지'라는 말이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의 속성에 대한 의인적 메타포라면, 니체는 어째서 그러한 의인적 메타포를 사용했는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니체가 보기에 우주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의 속성은 관념과 물질이라는 두 개의 개념 가운데 어떤 쪽을 선택하더라도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이유는 이렇게 추측된다. '관념'과 '물질'이라는 말은 서로 대립시켰을 때에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고, 각기 독립적으로는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의 속성에 대한 서술 개념으로서 관념과 물질은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이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속성들로 구성되었을 때만 의미를 가질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은 일원론적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의 속성에 관한 서술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함을 함의한다.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의 총체적 속성은 관념도 아니고 물질도 아닌 그 무엇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존재의 속성을 가장 포괄적으로 지칭할 수 있는 범주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칭하려면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들을 은유적으로 전용하는 수밖에 없다. '권력에의 의지'는 기존의 아니 어떤 한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일반의 속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니체가 사용한 메타포이다.
니체가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의 속성을 '권력에의 의지'로 부른 두번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명사는 언어적 관례에 따르면 다같이 다이아몬드처럼 화석화된 실체 혹은 존재(being)를 지칭한다. 니체가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은 시간을 초월한 정태적 실체 내지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역동적 운동 자체(becoming)이며, 이 운동은 에너지를 전제한다. 이런 점에서 니체는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을 '에너지'라는 개념으로 묶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그것을 '에너지'로 부르지 않고 구태여 의인적 개념인 '권력에의 의지'라는 낱말을 사용한 것은 일반적으로 물리적인 속성을 '에너지'라고 지칭하는데 반해서 그가 이해하고 있는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의 속성은 관념적인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것도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에 의하면 속세와 천당, 인간과 하느님, 이데아의 실체와 감각적 현상, 삶과 죽음, 인간과 동물, 자연과 문화, 무기물과 유기물, 물과 바위, 몸과 마음, 주체와 객체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개별적으로 그리고 실체로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과 서로 구별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사건, 흐름, 긴장된 관계로서 '권력에의 의지'라는 에너지이다. 여기서 그 힘은 무엇의 힘이냐는 물음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은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변화하는 현상과 변화하는 현상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전제하는 불변하는 어떤실체 내지 본질과의 (플라톤적) 구별 즉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전제했을 때만 제기될 수 있을 뿐 현상과 실체 내지 본질의 구별을 거부하는 니체적인 형이상학적 일원론의 맥락에서는 그러한 물음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현상이 곧 실체 내지 본질이며, 실체 내지 본질은 곧 현상이다. 어느 곳, 어느 때를 막론하고 변화하지 않는 현상을 관찰할 수 없다면,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은 단 하나의 변화 자체, 역동적 움직임 자체(Becoming)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여기서 변화 자체로서 '권력에의 의지'를 어떻게 서술하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변화는 차이를 전제하고, 차이는 서로 다른 두 개 이상의 고정된 실체 내지 본질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상태와 그 상태들간의 관계를 전제하는 이상, 변화를 파악하고 설명하자면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상태간의 관계에 대한 구조적 설명이 요청된다. 그렇다면 그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설명할 수 있는가? 목적론적인가 아니면 인과론적인가? 필연적인가 우연적 인가? 규칙적인가 불규칙적인가? 니체의 세계관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개념인 '永遠回歸'는 바로 위와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고안되었다.
2) 永遠回歸와 우주 (혹은 자연)의 총체적 구조
니체의 철학에서 '영원회귀'는 모든 현상, 사건 그리고 존재들이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반복되어 나타남을 뜻한다. "세계는 그 자신을 무한히 반복했고, 자신의 놀이를 영원히 계속하는 순환이다9)"라고 말할 때 니체는 세계의 구조를 '영원회귀'로 서술한다. 그러나 '세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니체의 서술은 맞을 수도 있고 전혀 무의미할 수도 있다. 만약 '세계'를 하나로서의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으로 규정한다면 그것이 스스로 반복한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반복은 시간 속에서의 운동을 의미하고, 운동은 변화를 함의하는데 그 자신 외의 어떤 존재나 상태를 인정할 수 없는 단 하나로서의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은 그 자체 이외의 어떠한 다른 존재나 상태를 논리적으로 배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와는 달리 니체가 말하는 '세계'를 단 하나로서의 '권력에의 의지' 즉 우주 내지 자연 존재 일반 내부의 차별 가능한 무한 수의 현상이나 사건들 전체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해석할 때, 그러한 것들이 영원한 싸이클 속에서 무한히 반복한다는 명제는 의미를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참일 수도 있다. 니체가 '권력에의 의지' 즉 단 하나로서의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묘사는 니체가 '세계'라는 말을 권력에의 의지 즉 우주 자체 혹은 존재 일반의 뜻으로서가 아니라 '그 속에서 관찰할 수 있는 수많은 현상과 사건들의 총체'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세계는 곧 시작도 끝도 없는 끔찍하게 큰 에너지이며, 더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는 채 자신을 팽창하는 것이 아니라 변신하는 단단한 무쇠와 같은 놀랍게 큰 힘이며, 전체적으로 볼 때 지출 혹은 손실의 크기가 변하지 않지만 동시에 증가 혹은 수입도 없는 하나의 가정으로서, 그것은 無에 의해서 한계 지어져 있다. (‥‥‥) 그것은 엄청난 세월을 주기로, 수많은 모양의 썰물과 밀물로 그 형태로 흘러오고, 한꺼번에 확 닥쳐오고, 영원히 변하고, 영원히 거꾸로 흘러간다10).
현상적 차원에서 볼 때 생명이 유전자의 산물이라면, 모든 형태의 삶은 유전자의 끝없는 즉 영원한 복사 즉 반복이며, 유전자를 비롯한 모든 무기물, 유기물, 식물, 생명체, 동물 그리고 인간이 궁극적으로는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무한히 작은 분자로 환원될 수 있다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현상적 존재들 그리고 삶과 죽음은 그러한 미세한 분자들이 시작도 끝도 없이, 원인도 목적도 없이 그냥 반복되어 나타난 다양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의인적, 신학적, 때로는 철학적 세계관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리고 날로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는 현대 물리학과 생명과학을 부정하지 않는 한, 거시적이고 원시적 입장에서 볼때 모든 현상은 수많은 동일한 존재들의 영원한 반복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꼭 그렇게 봐야한다. 영원의 차원에서 볼 때, 적어도 현상적 차원에서 지금 분자로 분해되는 하나의 돌, 지금 부서진 하나의 컴퓨터, 지금 죽어서 흙이나 재로 되는 '나'는 수많은 하나의 혹은 수많은 다수의 돌, 컴퓨터, 흙, 재, '나'의 형태로 바뀌었다가도 언젠가는 지금과 똑같은 돌, 컴퓨터, 흙, 재, '나'의 형태로 되풀이되어 재구성 될 수 있고 또한 이러한 과정이 영원히 반복될 수 있고 꼭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니체의 관점주의적 인식론이 필연적으로 인식론적 허무주의로 통한다면, 니체의 단 하나의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으로서의 '권력에의 의지'의 구조에 대한 그의 '영원회귀'론은 논리적으로 가치론적 허무주의로 향한다. 인간의 행위를 포함한 모든 우주 안의 현상과 사건들이 시작도 끝도, 이유도 목적도 없는 영원회귀의 수레바퀴 속에 갇혀 있다면 궁극적으로 가치 있는 것 즉 의미있는 것은 단 하나도 있을 수 없고, 그렇게 가치나 의미 없는 것들의 총체를 지칭하는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 즉 '권력에의 의지' 자체도 아무 가치나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어떤 끝이 없는 세계 안에서 목적을 생각할 수 없고, 목적을 떠난 어떠한 존재, 어떠한 행위도 가치나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적어도 현상학적 차원에서는 자신의 행위를 선택할 수밖에 없고, 행위 선택을 위해서는 목적이나 가치 혹은 의미를 선택한다. 인식론적인 경우만이 아니라 가치론적으로도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없는 세계 즉 형이상학적 차원에서부터 가치나 의미를 배제하는 니체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기준에 의해서 행동을 선택할 수 있으며 선택해야하는가? 도대체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어떻게 하면 시작도 끝도 이유도 목적도 없이 '영원한 회귀'의 굴레 속에 자전하는 '권력에의 의지'로서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의 무한히 작은 일부나 측면으로서 이 순간과 같은 나의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살 수 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니체의 대답을 검토하기 앞서 과연 일원론적이며 순환적인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론 안에서 이러한 물음이 논리적으로 가능한가 라는 물음이 생긴다. 왜냐하면 우주 전체의 모든 현상과 부분들이 알 수 없는 인과적 법칙에 의해서 시작도 끝도 없는 또한 원인도 목적도 없이 작동한다면 그 전체에 속한 무한히 작은 존재로서 인간의 자율성은 생각할 수 없고, 자율성이 전제되지 않는 한 행동의 선택은 무의미한 말이며, 선택이 부재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당위적 물음은 논리적으로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원론적 존재론을 전제하는 니체 그리고 뒤에 보게 되겠지만 불교와 도교로 대표되는 동양적 존재론 내에서는 위와 같은 물음은 제기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도 니체 철학의 초점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가치를 선택해야 하는가?'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여기서 우리의 우선적인 물음은 위와 같은 물음에 대한 니체의 대답을 알아보기 전에, 과연 니체의 일원론적 존재론의 테두리에서 이러한 물음이 논리적으로 가능한가를 물어보고, 가능하다면 어떻게 그러한가에 대한 대답을 찾아야한다.
일원론적 존재론의 테두리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당위적 행동의 선택에 대한 물음은 가능하며, 그 가능성은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현상이 '존재론적'이고 또한 '의미론적' 두 차원, 즉 '현상적'인 것과 '현상학적'인 두 차원에서 서술되고 이해된다는 사실로 뒷받침 된다. '나'라는 존재를 '현상'으로 볼때 다른 모든 존재 즉 우주 전체와 마찬가지로 인과적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지만, 경험이나 인식 주체로 볼 때 즉 나의 경험이나 의식의 차원에서는 내가 내행동을 선택하는 자율적 존재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비록 존재론적으로는 모든 나의 생각과 행동마저도 인과론적 법칙에 의해서 결정된 것일지라도, 적어도 현상학적 차원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와 같은 선택의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인간이 가장 바람직한 인간인가?"라는 당위성에 관한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니체는 자신이 창조한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나는 여러분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인간은 반드시 극복되어야할 무엇이다.11)"라고 선언한다. '초인'이 됨으로 비로소 나의 존재뿐만 아니라 우주 내지 자연 존재 일반의 무의미가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超人과 궁극적 가치
'초인'은 무엇인가? 니체는 "초인은 지구의 의미 내지 가치이다12)"라고 선언한다. 초인의 탄생을 통해서 비로소 이 세상의 가치 내지 의미라는 말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초인이 인류의 범주에 속한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
초인은 '마지막 인간'과 대조된다. 본래 자연의 생성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 스스로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힘을 발휘하여 자연을 제어하고, 정복하고, 착취하고, 경이로운 종교적, 철학적, 과학적, 기술적, 도덕적 그리고 미학적 세계를 구축하고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종으로 진화해 왔다. 인류는 이러한 자신을 자찬할 수 있다. 그런데 니체의 의미에서 '마지막 인간'은 바로 이러한 인간을 지칭한다.
'마지막 인간' 즉 오늘날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니체에 의하면 그는 아직도 지적으로는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아니 보지 않으려 하면서 아직도 무명 속에 살고 있으며, 도덕적으로는 진실하지 못한 채 비굴한 노예처럼 자기 기만 속에 안주하고 있다. 동물로서 인간은 안정과 육체적 및 정신적 행복을 본능적으로 추구한다. 이러한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종교적으로, 철학적으로, 기술적으로, 정서적으로 세계와 자신을 위장하고 포장함으로써 그 속에서 자위한다. 이런 점에서 인류는 아직까지 한번도 세계의 진리에 충실하고 자기 자신에 정직한 적이 없다. 한마디로 '마지막 인간'은 잘못된 세계관, 병든 가치관 속에 갇혀 있으며, 그 곳에서 벗어나길 두려워하는 인간이다. 그는 지적으로는 진리 대신 거짓을 선호하는 가짜이며, 성적으로 호위적 가치에 집착하는 병든 동물이다. 이러한 모든 인간의 경향은 부정적 뜻에서 즉 연약하다는 점에서, 철저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모든 인간 그리고 오늘날의 '마지막 인간'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으로 살아 왔다.
그렇다면 '마지막 인간'이 바람직한 인간상일 수 없다. '마지막 인간'을 지탱해준 지금까지 인간을 지배한 종교적, 철학적, 과학적 세계관은 폐기되어야 하고, 그러한 잘못된 세계관에 의해서 정당화되었던 모든 가치들의 가치의 관점에서 완전히 재평가하고 수정해야 한다. '마지막 인간'은 극복되어 새로운 종류의 인간에 의해서 대치되어야한다. '초인'은 다름 아니라 이러한 '마지막 인간'을 대치할 수 있는 이상적 미래의 인간상이다. '초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전혀 의미가 없는 각각의 인간 자신의 삶을 포함한 '영원회귀하는 권력에의 의지'로서의 우주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은 비로소 짜릿하게 즐거운 가치 내지 의미와 살아있음과 존재함과 실존함의 환희가 생긴다.
'마지막 인간'과 대조되는 '초인'으로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정직한 삶을 사는 데 있다.
'권력에의 맹목적인 의지 자체'인 단 하나의,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극히 보잘 것 없는 '인류', 더 나아가서는 '나' 자신을 포함한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이 그 자체로서는 맹목적으로 즉 무의미하게 영원히 회귀한다는 객관적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할 때 삶에 대해 '나'는 두 가지 다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나는 부정적으로 '노'라고 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거부하거나, 수동적으로 따라가거나, 한탄과 슬픔 속에 빠질 수 있거나 아니면, 긍정적으로 '예스'라고 하면서 그러한 운명적 즉 객관적 사실을 하나의 즐거운 도전을 받아 '운명에 대한 사랑'의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운명에 대한 사량'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니체에 의하면 그것은 "사물 현상이 과거나 미래 그리고 영원히 현재의 모습과 다르기를 바라지 않는 태도13)"를 뜻하며, "인간 속에 있는 위대성을 집약해서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14)"
단 하나의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의 본질적 즉 운명적 속성이 '권력에의 의지'라면, 그 안의 일부인 '나'의 본질적 즉 운명적 속성도 '권력에의 의지'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운명에 대한 사랑'이란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나도 '권력에의 의지'인 이상 나 자신 즉 권력의 의지로서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야 함을 뜻하며,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여 적극적으로 살아간다 함은 "위험스럽게 산다15)"는 것을 함의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권력에의 의지'는 필연적으로 의지의 긴장된 싸움을 함의하고, 이러한 싸움은 필연적으로 위험을 동반할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니체는 '초인'에 대한 이 같은 자신의 인간관은 초인의 의미가 자신에 주는 다음과 같은 정언적 명제로 요약한다.
다시 태어나서 살고 싶도록 이 삶을 살아라. 이것은 너의 의무이다. 어쨌든 너는 다시 태어나 살게 될 것이다. 노력하고 애쓰는 데서 큰 만족감을 갖는 이에게는 노력하고 애쓰도록 내버려두어라. 휴식에서 큰 만족감을 갖게 되는 이에게는 휴식을 취하도록 내버려두어라. 명령을 따라 복종하는데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이에게는 명령에 복종하도록 하라. 단 한가지 중요한 것은 무엇이 그에게 최고의 기쁨을 줄 수 있는가를 분명히 해야하며, 그러한 경험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떠한 방법도 사양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것을 위해서라면 영원히 살아도 보람있다16).
하지만 위와 같은 명제를 통해서는 아직도 초인상은 분명치 않다. 미국의 유명한 깽의 대부, 알 카포네, 진시황, 네로 황제,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같은 잔인한 폭군이나 독재자들은 자식들의 폭악한 힘과 무자비한 권력 행사에 '최고의 기쁨과 쾌감'을 느끼면서도 아무 가책마저 느끼지 않았을 것이며, 수많은 여인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돈 많고 권력 있는 주색가들은 나름대로 '큰 쾌감'을 아무 후회 없이 경험했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폭력적으로 살면서 동물적 본능을 만족시키며 사는 자들을 '초인'으로 부를 수 있는가? 그러한 삶이 바람직한 삶인가?
그러나 '마지막 인간'을 대치해야할 '초인'은 탄생되거나 발명되어야 하는 유형으로서 아직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만큼, 위와 같은 종류의 인물들은 초인의 예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니체가 '초인'에 가까운 사람들의 예로 율리우스 시저, 세자레 보르지아, 나폴레옹 등을 들 때는 위와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의 예로 '그렇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율리우스 시저, 세자레 보르지아, 나폴레옹은 막강한 물리적 힘과 정치적 권력을 갖고 제국을 건설하고, 왕국을 지배하고 유럽 영토를 정복한 정치적이며 군사적 인물이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폭력적이고 잔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는 '초인'과 유사한 역사적 인물로서 위와 같은 무력적 이고 권력적 인물들 이외에 문필가인 괴테와 예술가인 미켈란젤로도 함께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인'이 우주와 자기 자신의 본질인 '권력에의 의지'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의 행사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사는 인간이고, 나폴레옹이나 시저와 더불어 괴테와 미켈란젤로가 다같이 그러한 '초인형'에 속한다면, '권력에의 의지'의 가치는 '물리적 힘'이 아니라 '창조적 자유'로서만 해석되어야 한다. 괴테나 미켈란젤로, 나폴레옹이나 시저는 다같이 한편은 『파우스트』라는 문학작품과 「창조」라는 벽화를, 다른 한편은 18세기 유럽의 새로운 정치적 질서와 로마 제국이라는 새로운 문명을 창조한 자들이라는 점에서 즉 참조적 사유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창조는 혼탁한 본능을 강한 의지 즉 일종의 권력을 전제하고, 주어진 틀에 안주하지 않고 내부의 본능과 외부의 물리적, 사회적, 이념적, 도덕적 억압에 굴복하지 않는 자유, 더 간단히 말해서 자유를 전제한다. 그러므로 초인이 창조적 인간을 뜻한다면 초인은 곧 진정한 의미에서 의지가 강한 인물이며, 의지가 강하다는 점에서, 참과 거짓, 선과 악을 초월하여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외부적 여건 즉 '운명'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인간이다. 초인은 물리적, 생물학적 그리고 본능적 야만인이 아니라 정신적, 도덕적 그리고 넓은 뜻에서 이성적 인간이다. 이런 점에서 초인은 아무 것에도 종속되지 않고 완전히 독립한 인간이며, 기존의 규범에 얽매여 그것을 추종하는 맹목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자유롭게 창조한 규범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자주적 인간이다. 그의 존재 의미는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다. 그는 다른 존재에 정당성을 부여하지만 자기 존재의 정당성은 남이 부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존재 그 자체이다.
2. 동양사상에 비추어 본 니체 : 동양사상의 니체적 재구성
니체의 철학을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에 대한 비전, 그러한 우주 내지 자연 그리고 존재 일반에 대한 구조 그리고 궁극적 가치의 세 측면에서 총괄적으로 볼 수 있듯이, 동양사상도 똑같이 세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동양사상은 크게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중국의 노장사상과 유교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에 가장 동양적인 것들은 불교와 노장사상으로 이 둘은 한편으로는 다 같은 동양사상을 구성하고 있는 힌두교 및 유교와 구별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깊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힌두교에 뿌리를 둔 불교가 인도보다는 도교의 절대적 영향을 받고 있는 아시아에서 더 깊이 보급됐다는 사실로 짐작할 수 있다. 불교는 인도적이기보다 아시아적이 되었다.
니체의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에 대한 총체적 비전을 지칭하는 '권력에의 의지'는 동양사상에서는 불교의 '空'과 도교의 '氣' 혹은 '자연'에 상응하고, 니체 철학에서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의 구조를 지칭하는 '영원회귀'에 상응해 동양사상에서 사용되는 낱말로는 불교의 '윤회'와 노장의 '道'를 들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니체 철학에서 최고의 가치관을 상징하는 '초인'에 해당되는 동양사상의 개념으로는 불교의 '부처' 혹은 '보살', 도교의 '도인' 혹은 '도통', 그리고 유교의 '군자' 혹은 '仁者'라는 개념을 들 수 있다.
1)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의 본질
힌두교에서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을 지칭하는 梵天(브라만)은 아무 것으로도 분리할 수 없는 단 하나의 형이상학적 일원론이듯이, 인도를 넘어 오래동안 동양 문화와 사상을 지배해 온 불교와 도교의 우주관 혹은 자연관도 일원론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空'은 존재 부정 혹은 부재로서 無를 지칭하는것이 아니라 어떠한 개념으로도 서술할 수 없는 '色卽是空 空卽是空' 즉 궁극적으로는 어느 것으로 분리하고 구별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을 총칭한다. 불교는 '一切皆空', '天地同相', '萬物-切', '無分別智', '物我一如' 등의 여러 낱말들로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에 관한 일원론적 비전을 전달하고자 한다.
우주에 관한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본질적 속성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니체의 대답이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물질적 차원을 초월한 '권력에의 의지'였다면, 불교 특히 대승불교의 대답을 '眞如一心' 혹은 '一切唯心'이라는 낱말들에서 찾을 수 있다면, 단 하나로서의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의 총체적 속성이 물질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 아니 물질과 정신의 구별을 초월한 의미에서 비물질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니체의 형이상학적 비전과 동일하다.
그 성격이 일원적이라는 점에서 도교 즉 노장의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은 불교와 전혀 다를 바 없고 또한 니체와도 전혀 다르지 않다. 이런 점에서 사회 윤리적인 관점인 유교도 그것의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에 관한 비전을 중국의 태고적 '太極' 사상에 뿌리박고 있는 한, 도교와 다를 바 없다. 중국 고대 사상에 의하면 단 하나로서의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은 어떠한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따라서 물질이나 정신으로 구별하기 이전의 속성으로서의 氣, 몸과 마음의 두 어느 범주에도 담을 수 없는 속성이다.
동양의 일원론적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불교 특히 禪 불교와 도교가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 것은 존재와 언어, 대상과 그 표상이 넘어설 수 없는 논리적 거리, 존재의 차원과 인식의 논리적 차이 즉 그들의 비동일성이며, 그들이 경고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혼동이다. 진리는 언제나 존재에 대한 진리이지만, 인식되지 않은 진리는 무의미하며, 인식은 개념적 표상을 전제하지만, 언어를 떠난 개념은 상상할 수 없고, 언어를 떠나서는 표상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표상은 필연적으로 무엇에 대한, 무엇의 표상인 이상, 표상 즉 기표와 표상 대상 즉 기의는 절대로 일치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존재, 진리, 인식, 표상, 언어와의 위와 같은 뒤엉킨 밀접한 관계 때문에 그것들이 혼동되어 그것들을 동일시하고 존재와 그 언어적 표상을 같은 것으로 착각하여 사실을 사실대로, 존재를 존재 자체로서 인식하지 못한다. 眞如 즉 궁극적 진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불교의 줄기찬 강조나 道 즉 궁극적 존재의 구조가 언어로 표현될 때 그것은 이미 道 즉 궁극적 존재가 아니라는 노장의 주장은 바로 존재와 언어의 위와 같은 관계를 깨우치고,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으로도 분절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존재로서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존재와 언어의 관계를 착각하여 언어로 표상된 것을 존재 자체로 취급할 때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에 대한 일원론적 존재론은 필연적으로 부정되고 다원적 존재론만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어떤 존재의 언어적 표상은 필연적으로 적어도 한 가지 다른 존재들과의 구별을 전재함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존재와 언어의 관계를 혼동하게 되었고 언어로 표상된 관념을 곧 그것이 표상하는 존재로 착각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동양사상 특히 불교나 도교의 일원론적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론이 그들의 언어철학 즉 언어에 대한 철학적 비판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니체의 일원론적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론의 근거와 똑같다.
2)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의 구조
동양철학에 말하는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은 니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회귀적 순환의 의미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은 힌두교와 불교의 輪廻나 緣起 등의 개념들과 유교와 도교의 陰陽과 道의 개념들에서 다같이 표현된다. 불교적, 더 일반적으로는 인도적 관점에서 볼 때,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살았다가 죽어가는 모든 것들은 서로 다른 것들이 아니라 단 하나의 우주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 즉 梵天 혹은 空의 인과적 즉 연기적 관계로 얽혀 변화하는 다양한 측면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한 존재들의 변화는 단 하나인 無始無終, 不生不滅인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의 순환 과정의 현상적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도교적, 더 일반적으로는 중국적 관점에서 볼 때 모든 현상들은 단 하나의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으로서의 氣의 자연적 그리고 순환적 흐름으로서 道 즉 陰陽의 원리에 따른 無始無終한 動靜의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
3) 궁극적 가치와 이상적 인간상에 비추어 본 니체
동양적인 궁극적 가치는 무엇인가? 위와 같은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전제할 때 인간이 추구해야할 최고의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니체의 초인에 해당되는 불교적 및 도교적 인간형은 무엇인가? 불교적 대답은 菩薩이며, 도교의 대답은 道人이다. 세부적인 여러 점에서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큰 틀에서 볼 때 그들의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에 대한 비전이 시작도 끝도 없이 순환하는 단 하나로 즉 일원론적으로 파악되고 있다는 점에서 니체의 철학과 동양철학은 동일하다. 일원론적 이며 순환적인 동양의 세계관은 서양을 지배해 온 이원론적 이며 목적론적인 서양의 세계관과 정면으로 대립하며, 그러한 대립 속에서 그 특징이 분명해진다. 니체의 철학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반 서양적이며, 본질적으로 동양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서양의 문화권에 속한 니체가 서양사상의 근본적 뿌리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동양사상의 뿌리와 일치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그것은 다같이 일원론적인 순환적 세계관에 뿌리 박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관 즉 이상적 인간관과 최고의 가치관의 관점에서 볼 때, 니체는 전형적인 서양사상을 대표하고, 이러한 점에서 철저하게 반동양적이다. 니체철학과 동양철학의 분명한 차이는 우선 그들의 가치관에서 드러난다. 전자의 가치관이 인간 중심적이라면 불교와 도교적 가치관은 생태 중심적이며 자연 중심적이다.
니체의 이상적 인간인 '초인'과 동양의 이상적 인간인 불교적 菩薩이나 도교적 道人은 그들의 각기 다른 기질상 서로 공존할 수 없으며, 정면으로 충돌하며, 니체의 최고 가치인 자기 힘의 철저한 확인과 주장은 菩薩의 최고의 가치인 解脫이나 도인의 逍遙와 양립할 수 없다. '초인'은 자신의 의지를 밀고 나가는 적극적이며 공격적인 딱딱하고 긴장된 행동인데 반해서 보살과 도인은 非存在 즉 空의 眞理 즉 眞如에 도달하기 위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명상적 인간이거나 아니면 無爲의 원칙 즉 자연의 순리에 따라 유연하고 자적하게 살아가는 수동적이며 부드럽게 적응하는 편안한 인간이다. 니체의 인간이 외향적이고 투쟁적이고 공격적이며 비극적인 인간이라면, 부처와 노장의 인간은 내향적이고, 평화적이고, 관조적이고, 和諍적이다. 니체의 초인이 야심과 자신에 가득 차고, 정열과 객기가 넘쳐흐르고 떠들썩한 젊은이에 비유될 수 있다면, 동양의 菩薩이나 道人은 모든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며 맥락의 순리에 따라 상황에 침착하면서도 조용하고, 오랜 배움과 인생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로서 자연스럽고도 당당하게 화해적 이고 평화적으로 모든 문제에 대응하고 적응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춘 나이가 지긋한 어른에 비교될 수 있다. 니체의 초인이 다른 인간, 자연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부단한 싸움에서 상대방을 정복하는데 희열을 느끼고 그러한 희열에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을 찾는다면, 동양적 보살과 도인은 모든 타자 속에서 바로 자신을 발견하고 그러한 타자들과의 화해와 조화를 모색하고 삶을 인생이라는 전쟁터에 출전함이 아니라 조용하고 잔잔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산과 바다, 들과 냇물의 逍遙 자체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한다. 젊은 초인의 눈에는 불교적 보살과 도교적 은둔자가 도피적이고 무기력한 노인으로 보이겠지만, 깨달음에 도달한 불교의 보살과 유유자적한 도교적 은둔자의 눈에는 잘났다고 자처하는 초인은 아직 철이 나지 않은 따라서 해탈이나 도통에 이르지 못한 낭만적이고 순수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도 유치하다거나 병적인, 미숙하고 애처로운 젊은이로 보일 따름이다17).
니체의 '초인' 개념이 함축하는 위와 같은 가치관의 오류의 근원은 그가 그렇게 비판하는 서양적 세계관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는 인간 중심주의의 폐쇄된 감옥에 갇힌 채 그곳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그의 사유에 논리적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인간 중심주의의 대안은 생태 중심주의, 더 궁극적으로는 자연 중심주의이다. 인류라는 종의 생명은 생태계의 중심이 아니라 하나의 특수한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 중심주의는 생명 중심주의로 바뀌어야 하고, 생태계는 물리적 존재에 바탕을 두고 그것과 끊을 수 없는 고리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생태 중심주의는 자연 중심주의로 바뀌어야 한다. 인류가 오늘날까지 성취한 철학적이며 과학적인 탐구의 결과는 인간 중심주의 허상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 중심주의의 개념을 대체하여 사용한 생태 중심주의와 자연 중심주의라는 두 개념들은 자가당착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핵심은 어떠한 존재론적 그리고 가치론적 '중심'도 인정하지 않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중심'은 없다. 만약 중심이 있다면 모든 개개의 존재와 현상의 측면이 다같이 평등하게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태 중심주의나 자연 중심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인간 중심주의가 주장하는 중심 즉 '인간'을 대신해서 그 자리에 '생명'이나 '자연'을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의 새로운 중심으로 삼자는 것이 아니라 근시적이고 미시적인 관점을 초월하여 원시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을 포괄적으로 파악하자는 데 있다. 생태 중심주의와 자연 중심주의는 '중심 없는 중심주의'이다.
니체의 인간 중심주의적 세계관은 그가 주장한 '권력에의 의지'라는 이름으로 주장한 일원론적 존재론과 '영원회귀'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일원론적 존재의 구조론과 모순된다. '권력에의 의지'와 '영원회귀'의 세계관에서 도출할 수 있는 이상적 인간은 초인이 아니라 불교적 보살이나 도교적 道人이어할 것이며, 최고의 가치는 불교적 解脫이나 도교적 逍遙이며, 삶에 대한 태도는 자기 중심적이고 도전적이 아니라 화해적이고 적응적이며, 그의 성격은 떠들썩하거나 적극적이 아니라 조용하고 관조적이다.
3. 결론 : 니체 철학의 동양철학적 화쟁(和諍)
니체 철학과 동양사상은 다음 세 가지 점에서 동일하다. 첫째 그들의 핵심적 문제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근본적이며 보편적인 대답을 제시하는 데 있다. 둘째 그들은 다같이 지금까지 인류가 매달려 있는 병들거나 잘못된 가치의 '가치 재평가'를 통한 "모든 가치들의 가치 전환"을 기획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기존의 가치관은 니체에 의하면 억압적이며 '병적'이고, 불교나 도교에 의하면 근시안적이고 헛되기 때문이다. 셋째 그들은 다같이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 일반에 대해 이원론적이며 목적론적이 아니라 일원론적이며 순환론적인 비전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철학은 각각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전혀 다르다. 첫째 동양철학을 대변하는 불교와 도교는 인도의 태고적 힌두교와 중국의 태고적 음양사상에 뿌리박고 있는 만큼 동양의 맥락에서 볼 때 혁명적이 아니라 영원한 전통의 일부이지만 니체의 철학은 플라톤이나 기독교가 지배한 이원론적 그리고 목적론적 세계관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더 이상 혁명적 일 수 없다. 더 중요한 차원에서 두 번째의 차이를 들 수 있다. 다 같은 일원론적 그리고 순환적 세계관에 뿌리박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이상적 인간상은 무엇인가?'라는 동일한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 제시한 한편으로는 니체의 의지적 이며 대립적이고 전투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적극적인 삶에의 태도와 자기 과장적 이며 의향적인 '초인'의 인간상과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와 도교가 제시한 명상적이며 화해적이고 자비스럽고 자기 긍적적인 관조적인 삶의 태도와 자기 부정적인 내향적 '보살'이나 '逍遙人'의 인간상과 정면으로 부닥친다.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삶에 대한 태도와 인간상은 니체가 아직도 탈피하지 못한 인간 중심적 가치관과 한편으로는 불교가 깔고 있는 생태 중심주의적 가치관과 다른 한편으로는 도교가 깔고 있는 자연 중심적 가치관에 기인한다.
그러나 니체가 아직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인간 중심주의적 가치관은 동양적 즉 불교적 및 도교적 가치관에 비추어 비판ㆍ수정ㆍ보완되어 동양철학의 큰틀 속에 화쟁(和諍)적으로 통합되어야한다. 그 근거로 세 가지 이유를 댈 수 있다. 첫째, 니체의 철학과 동양철학이 다같이 전제하는 일원론적 우주 내지 자연 혹은 존재론에 일관된 가치관은 인간 중심주의적 가치관이 될 수 없으며, 삶의 태도와 이상적 인간상과 최고의 가치관은 동양적, 더 정확히 말해서 불교적 그리고 도교적인 것뿐이다. 둘째, 인간 중심주의적 가치관이 전제하는 인간 중심주의적 인간관은 오늘날의 철학적 및 과학적 지식에 비추어 이성적으로 수용될 수 없다. 셋째, 가장 절실한 이유로, 현재의 추세로 볼 때 이대로 라면 문명의 파국, 아니 인류의 멸종을 피할 수 없게 할 환경 오염, 자연 파괴의 근원적 원인을 인간 중심주의적 가치관과 니체가 찬양한 정복적인 "금발 동물"로서 즉 약탈자로서 '최고신'의 이상적 인간관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각주와 관련된 설명〉
이 논문 작성에서 니체 천학에 관해서는 영문으로 쓰였거나 번역된 그의 여러 저서와 그에 관한 여러 저서를 참조했고, 동양철학에 관해서는 한형조의 『주희에서 정약용으로』와 신옥희의 『일심과 실존-원효와 야스퍼스의 철학적 대화』에 도움을 청했다. 주석은 편의상 출처의 책이름만 기록하기로 한다.
각 주 1) The Geneology of Morals. 2) Concerning Truth and Falsehood in an Extramoral Sense(논문). 3) Quoted by Arthur Danto in Nietzsche as Philosopher. 4) The Will to Power. 5) Ibid. 6) Concerning Truth and Falsehood in an Extramoral Sense. 7) The Will to Power. 8) Twilight of the Idols. 9) The Will to Power. 10) Ibid. 11) Thus Spoke Zarathustra. 12) Ibid. 13) Ecce Homo. 14) Ibid. 15) Quoted by Danto in Nietzsche as Philosopher. 16) Ibid. 17) Ynhui Park, "Nietzsche selon la Perspective Taoiste" in Ynhui Park, Essais Philosophiques et Litteaires.
- 니체의 철학과 동양철학 : 초인의 동양적 조명 | 박이문 전 포항공과대학교 201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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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명언 모음 |
- 神은 죽었다.
- 인간만이 이 세상에서 깊이 괴로워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웃음을 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불행하고 가장 우울한 동물이 당연히 가장 쾌활한 동물인 것이다.
- 아무 것도 버릴 수 없는 자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
- 내가 보기에, 철학은 모든 것을 위험에 빠뜨리는 무시무시한 폭탄이다.
- 철학은 대중들에게 종교를 대신하도록 함으로써 높게 평가된다.
- 언젠가 날기를 배우려는 사람은 우선 서고, 걷고, 달리고, 오르고,
춤추는 것을 배워야 한다. 사람은 곧바로 날 수는 없다.
- 결혼, 그것은 하나를 만들려고 하는 두 사람의 의지다.
단지 그 하나를 이루려는 것은 두 개 이상의 것이다. 이와 같은 의지를 의지하는 자로서, 서로의 곤경을 같이 치러주는 것을 나는 결혼이라 부른다.
- 결혼 생활은 긴 대화이다.
- 결혼하기 전 당신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라.
즉 나는 이 여자와 늙어서도 여전히 대화를 잘 나눌 수 있을까?
- 글을 가볍고 직설적으로 쓰는 법을 배우는 일이
고상하게 쓰는 법을 배우는 것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 아침에 눈을 뜨면 무엇보다도 먼저 '오늘은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기쁨을 주어야겠다' 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라.
- 알맞은 정도라면 소유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도를 넘어서면 소유가 주인이 되고 소유하는 자가 노예가 된다.
- 어느 정도 깊이 괴로워 하느냐 하는 것이 거의 인간의 위치를 결정한다.
- 얼마만큼 깊이 고뇌할 수 있는가가 인간의 위치를 결정 짓는다.
- 여러가지의 탄식, 어떤 남편들은 자기의 아내가 유혹당한 것을
한탄하는 반면에, 대다수의 남편들은 아무도 자기의 아내를 유혹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한탄하는 것이다.
- 여성은 남성보다 아이들을 더 많이 이해하지만,
남성은 여성보다도 더 어린 아이 같다.
- 여자가 벌집의 말벌처럼 거의 어디에서나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여자가 교활하다는 증거이다.
- 여자는 사랑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가
그렇다고 여기는 대로 되어 간다.
- 여자는 앙심을 품고 잊지 않는다. 이런 속성은
타인의 불행에 동정심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의 나약함에서 오는 것이다.
- 여자들이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할 때,
그것도 질병의 징후이다. 그것을 모르는 의사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진정 여자다운 여자는 손과 발을 동원하며 그런 온갖 '권리' 들을 거부한다. 자연의 법칙, 그리고 끝없는 성(性)의 전쟁은 진정 여자다운 여자에게 최고의 승리를 안겨다 줄 것이다.
- 여자를 만든 것이 신의 두 번째 실수였다.
- 여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명은 자식을 세상에 낳는 것이다.
- 연애에서 맺어지는 소위 연애 결혼은
오류를 그 아버지로 하고, 욕망을 그 어머니로 한다.
- 오직 창조한 사람들만이 사라지게 할 수 있다.
- 온건파(穩健派)로 치닫지 않는 생각이 세상을 주도한다.
- 용기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더욱 강하게 만든다.
- 우리는 소에게서 배워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다.
즉, 그것은 반추(反芻, 되새김) 하는 것이다.
-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아직 그것의 본성을 배우기 전부터도
우리에게 영향력을 구사한다. 우리의 오늘의 규칙을 폐기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이다.
- 우리 중 가장 용기 있는 사람마저도 자신이 아는 것을
행동에 옮기는 용기는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하다.
- 운명아! 비켜라. 용기있게 내가 간다.
- 웃음이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 위대한 것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 위대한 인간이란, 역경을 극복할 줄 아는 동시에
그 역경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 위대함은 과연 어디서 오는가. 어떤 사람이 위대한가.
사람들이 어째서 그를 위대하다고 하는가. 무엇이 그를 위대하게 보이게 하는가.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실함을 그가 일생동안 변함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으며, 위대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 육체적 욕망은 사랑보다 더 빨리 커지는 것이다.
- 이 세상에서 가장 손상받기 쉬운 반면 정복되기 어려운 것은
인간의 허영심이다. 아니, 인간의 허영심은 손상 받았을 때 오히려 힘이 커져서 어이없을 정도로 크게 부푸는 것이다.
- 인간은 똑바로 판자를 만들 수 없을 만큼
옹이가 많은 나무로 만들어졌다.
- 인간은 수목과도 같다. 나무는 높게 밝은 곳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뿌리는 점점 강하게 땅속 아래로, 어두운 쪽으로, 나쁜 쪽으로 향한다.
- 인간은 오직 사랑 속에서만, 사랑의 환상의 그늘에 숨어서만 창조된다.
- 인간이 신의 실패작에 불과하냐, 아니면
신이 인간의 실패작에 불과하냐...
- 인생에 있어서 모든 고난이 자취를 감추었던 때를 상상해 보라.
참으로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지 않은가?
-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이다.
밑에는 언덕이 있고 냇물도 있고 진흙도 있다. 걷기 평탄한 길만 있는 게 아니다. 먼 곳을 항해하는 배가 풍파를 만나지 않고 조용히만 갈 수는 없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차라리 고난 속에 인생의 기쁨이 있다. 풍파없는 항해... 얼마나 단조로운가! 고난이 심할수록 내 가슴은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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