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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다. 2022년에 산티아고 순례 길을 걷는다고 스페인에 들어간 이후에 다시 스페인을 들어간다. 이번에는 아프리카 여행을 마치고 모로코 탕헤르에서 배를 타고 스페인 타리파로 들어간다.
아침에 출발한 페리는 타리파 항구에 들어간다. 파란색 페리가 항구를 나간다. 아마도 모로코로 가는 페리인 것 같다. 빨간색 경비 보트가 우리 배를 안내해서 항구로 들어서게 한다. 경찰 선인 것 같다.
우리 배는 스페인 타리파에 도착했다. 건너편에 웅장한 성벽과 성탑이 눈에 들어온다. 부두에는 승용차들이 줄을 서 있다. 배에 차를 태우려는 것 같다. 선착장에는 정박해 있는 작은 배들이 보인다.
하얀 건물들이 아마도 창고인 것 같다. Puerto de Tarifa 라는 글씨가 보인다. 배낭을 메고 내린다. 큰 짐, 캐리어들은 아래 갑판에 모여 있다. 입국수속을 밟았다. 배를 타고 스페인을 들어가기는 처음이다.
간단하게 절차를 끝냈다. 출구를 따라 나오니 부두다. 스페인에 도착한 것이다. 걸어서 나오니 둥근 로터리가 나온다. 숙소를 찾아가야한다. 타리파는 작은 도시라 지도와 주소를 참고해서 걸어서 숙소를 찾는다.
사자 왕 동상이 있다. 용감한 왕'이라고도 불리는 알폰소 10세의 아들인 카스티야 왕국의 산초 4세(1258~1295)의 동상이다. 걷다보니 구시가지에 들어선 것이다.
예쁜 가게들이 동화 속 마을 같다. 골목길은 보행자 전용도로로 예쁘게 장식되어있다. 하얀 집들에 화분이 줄지어 있다. 골목에서 숙소를 찾았다. 리셉션에 사람이 있다. 젊은이가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
오후 2시에 체크인을 할 수 있단다. 배낭을 맡기고 시내 구경을 나섰다. 먼저 만난 것이 성당(Iglesia de San Mateo Apóstol)이다. 타리파에 있는 산 마테오 아포스톨 성당은 건축학적 보석이라고 한다.
구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한 인상적인 바로크 양식의 외관과 출입구는 이곳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1506 년에 오래된 모스크 유적 위에 지어졌다고 한다.
성당에서의 예배는 1534년 이래로 문서에만 언급되어 있단다. 바로크 양식의 외관은 1774년 건축가 Torcuato Cayon de la Vega에 의해 설계되었다고 한다.
내부는 3개의 본당과 고딕 양식의 늑골이 있는 둥근 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7세기 후반에 예배당이 추가되었다. 견고한 기둥과 꽃 장식으로 둘러싸인 정문은 즉시 시선을 사로잡고 당시 장인 정신의 숙달을 반영한다.
그 위에는 곡선형 페디먼트와 격자 디테일의 창문이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구조를 완성한다. 페디먼트 아래 둥근 기둥 사이에 성모상이 있다. 페디먼트는 고대 건축물의 지붕을 보면 가장 먼저 들어오는 곳이다.
3 개의 반원형 예배당을 형성하는 지상까지 뻗어있는 가리비의 웅장한 돔이 있다. 기념비적인 것과 세부적인 것 사이의 균형으로 인해 이 외관은 이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가 되었다.
이 건물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외관의 예술적 풍부함과 역사적 특성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타리파의 건축과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관심 장소다. 웅장하고 엄숙한 내부도 구경을 한다.
성당 앞 광장은 보행자 도로와 연결되어있다. 성당이 있는 구시가지는 좁은 골목길로 되어있어 차량 통행이 어렵다. 골목길에는 관광객들이 많다. 타리파 헤레스 문(Puerta de Jerez)을 나선다.
이 문은 13세기에 성벽이 확장되면서 건설되었으며, 도시에 있던 4개의 문 중 하나다. 문의 또 다른 특징은 두 개의 총안 모양 탑이 있다.
상부에는 1292년 용감한 산초 4세(Sancho IV the Brave)가 도시를 점령한 것을 기념하는 명판이 있다. 타리파의 구 시가지를 방문하는 여행자라면 반드시 지나게 되는 헤레스 문이다.
중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역사적인 상징물이다. 이문은 타리파의 풍부한 과거를 대표하는 유산이다. 마치 시간 여행을 하듯 여행자들을 매혹적인 중세 세계로 안내한다.
무슬림 통치 시대와 기독교 재정복 시기의 문화를 모두 담고 있다. 타리파의 전략적 중요성과 문화적 혼합을 상징한다. 13세기 무슬림이 타리파를 지배하던 시기에 건설된 성벽의 일부다.
도시 방어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타리파로 들어가는 주요 관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벽과 연결되어 도시에 대한 침입을 방지하는 중요한 구조물이다.
이후 기독교 세력이 타리파를 탈환한 후 이 문은 개조되면서 두 문화가 혼합된 독특한 양식을 갖게 되었다. 문에 새겨진 무슬림과 기독교 요소는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서 벌어진 문화적 전환과 융합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고딕과 무데하르(Mudejar)양식의 건축적 디테일이 돋보인다.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다. 문을 지나면 좁은 자갈길과 하얗게 칠해진 전통가옥들, 작은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구 시가지를 볼 수 있다.
중세의 매력이 조금이나마 느껴진다. 이곳은 타리파의 주요 축제와 행사가 열리는 중심지가 된다. 좁은 골목을 걷다보면 수공예품 상점과 현지 예술가들의 작품도 만날 수 있고 숨겨진 작은 광장과 교회들도 발견된다.
우리는 반대로 이 문을 통해 신시가지로 나섰다. 길가에 얼굴이 없는 조각상(Dama Romana)이 서있다. 로마시대의 고고학 유적지에서 발견된 로마 조각상의 복제품이란다.
로마 제국 시대의 특징인 이 여성 조각 모델은 일반적으로 사각형에 배치되었다. 머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옷과 신발의 디테일이 인상적이다. 우리는 도로를 따라 버스터미널을 찾아간다.
길을 따라 줄지어 있는 가게들 중에 서핑 용품을 파는 가게(Kite Local School Tarifa)가 눈에 들어온다. 유치원인줄 알았다. 아주 예쁘게 치장되어있다.
버스터미널(Estación de autobuses de Tarifa)을 찾았다. 작고 텅 빈 터미널이다. 알헤시라스(Algeciras)로 가는 버스는 자주 있다. 우리는 세비야(Sevilla)로 가는 버스를 예약했다.
내일 아침 첫차가 8시 30분에 출발한다. 식품을 구하기 위해 슈퍼를 찾아 다시 서쪽으로 간다. 야자수 가로수가 바람에 흔들린다. 1km 정도를 걸어가니 상가가 모여 있는 단지가 나타난다.
슈퍼마켓(Mercadona)이 반가웠다. 아주 커다란 슈퍼다. 아프리카에서 이제 유럽에 왔다는 느낌을 주는 슈퍼다. 빵과 햄, 치즈, 물, 야쿠르트를 샀다. 파에야도 있고, 하몽도 만났다. 우리나라 김밥도 있다.
김밥 한 팩에 10.75유로(17,000원)로 좀 비싸 보인다. 슈퍼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슈퍼를 나와 둥근 로터리가 있는 나무 그늘에서 빵과 야쿠르트를 마신다. 허기진 배를 채우니 기운이 나는 것 같다.
성문을 통해 이제 숙소로 돌아온다. ‘SAN ROSENDO Caiie de 4’ 라고 벽에 씌어있다. 다윗별 같은 형상도 붙어있다. 아마도 유태인 인가보다. 숙소에서 사모사와 야쿠르트로 점심을 더했다.
숙소는 깨끗하고 햇빛이 잘 든다. 해변 사진이 길게 붙어있는데 페러글라이딩 하는 모습이 가득 담겨 있다. 창 밖에는 하얀 건물들이 펼쳐져 있다. 오후 3시 경에 숙소를 나섰다. 타리파 구경이다.
먼저 도착한 곳이 호라리오(Horario Castillo) 성벽이다. 타리파라는 지명은 711년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한 무어인 장군인 타리크 이븐 말릭(Tarif ibn Malik)의 명칭에서 나온 것이다.
무어인들이 북아프리카를 떠나 가장 먼저 도달한 곳에 타리크 장군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붙인 것이다. 이렇듯 무어인들의 지배를 가장 오랫동안 받은 안달루시아 지방은 곳곳에 무어인들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천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중세의 요새다. 960년경 이슬람 국가가 건설했다. 타리파의 격동적인 역사를 대변한다. 스페인과 북아프리카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로 기능했다.
단순한 방어 시설을 넘어 문화와 용기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구즈만 엘 부에노(Castillo de Guzman el Bueno)라고도 불리는 타리파 성이다. 카스티요(Castillo)는 성이다.
'카스티요'라는 말이 스페인에서는 많이 사용된다. 타리파가 스페인의 땅 끝인 만큼 타리파 성은 스페인의 가장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더불어 유럽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 잡은 성이기도 하다.
북아프리카 모로코까지는 직선거리로 가깝다. 타리파 성은 이슬람 세력에 의해 만들어졌다.
타피라 성은 지정학적으로 역사의 현장이 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초기 무슬림 건축으로 강한 석조 구조를 갖고 있었는데 기독교 세력의 손에 넘어가면서 재건 확장되었다.
성벽 위를 걸으며 타리파의 풍경과 해협과 모로코 산맥을 감상할 수 있다. 이성에서 보는 일몰은 장관을 이루며 관광객들의 사진 명소로도 유명하다.
성을 둘러보는 경험은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자 타리파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들어가려고 성벽을 올라가니 오늘은 문을 닫는 시간이란다. 할 수 없이 밖에서 올려다보고만 나놨다.
좀 더 걸어가니 광장을 끼고 기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단검을 들고 있는 구즈만 장군(Guzman el Bueno)의 동상이다. 1200년 경 이 요새는 스페인 역사에서 잊지못할 사건의무대가 된다.
이슬람 세력과 스페인 왕국간에 분쟁이 격렬하던시기다. 요새는 페르난도 4세의 통치아래 있었다. 앞서 언급한 구즈만 장군도 당시 역사의 현장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당시 스페인 왕국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무어인들까지 끌어들여 왕위를 쟁취하려고 했다. 레콩키스타, 즉 국토회복전쟁이 무색할 정도였다.
이때 구즈만 장군이 지키고 있던 타리파성이 격전지가 됐는데 반란군들은 성을 포위하며 항복을 요구했었다.
반란군들은 구즈만의 아들을 포로로 잡고 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 아들을 죽인다고 협박했었다. 이에 구즈만은 반란군측에 단검을 던지며, 그 단검으로 아들을 죽이라고 말했다.
아들이 아닌 국가를 선택한 것이다. 구스만 장군의 아픈 이야기다. 그의 이름을 요새의 이름으로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카페들이 광장 주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