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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朋自远方来不亦乐好啊!
친구가 있어 먼 데서 찾아오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2004년 여름 두번째로 중국을 갔을 때 친구 슈군이 내게 해 줬던 말입니다.
중학교 시절 한문 교과서에도 나왔던 말인데, 직접 중국인 친구에게서 들으니 나 또한 기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2015년 5월 이른 어느날 슈군(君)과 함께
슈군을 처음 만난 건 2002년 동경 어느 대학 영어 바이블 서클에서였습니다.
기독교에도 영어에도 관심이 있어 찾아왔다고 했는데,
그 다음에 어디선가 파티에서도 '관심이 있어 찾아왔다'는 슈군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전자공학 전공이면서도 마크르스의 자본론 일본어판 45권을 모두 사 놓고 중간까지 읽다 어려워 관뒀으며,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 10여 권은 모두 독파한, 지적 탐구심이 높은 친구입니다.
두번째 만날 때까지도 그저 우연히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중국인 유학생 중 하나였는데
세번째로 일본 영상학회 연례 학술 대회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는 단순한 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나는 회원이자 회의 주관 업무를 돕고 있었는데 슈군이 또 눈 앞에 보이길래 여긴 뭐하러 왔냐고 물으니
슈군은 '전에부터 영상에 관심이 있어 찾아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부터 친구가 되어 생사고락까지 같이할 만큼은 아니래도 좋은 친구가 되어
자취방에도 자주 쳐들어가고 같이 자주 밥먹고 술먹고, 같이 '관심있는' 이런저런 행사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2004년 3월 슈군은 석사 공부를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슈군의 고향은 안후이성 허페이시(安徽省合肥市)였으며,
정신과 의사인 어머니와 교통 관련 관공서 간부인 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내가 볼 땐 전혀 아니었지만,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동네에서 이름난 수재였다고 합니다.
자라서 때가 되자 중국서 유명한 대학에 입학했고, 그 학교에서도 우수하였던 까닭에
불과 대학 1학년 때, 나중에 귀국해서 모교의 교수가 된다는 조건으로
학교에서 후원하는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일본에 온 지 1년도 되기 전에 중국 쪽 모교가 계약을 없던 걸로 하겠다는 통보를 해 왔다고 합니다.
이국 땅에서 배신 비슷한 걸 당한 슈군은 스스로 알바를 해 가면서, 때론 장학금을 받아가면서
고군분투한 끝에 대학을 졸업했고 대학원에도 진학해 지적 탐구심을 추구한 끝에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게 됩니다.
그 때까지 봐 왔던 다른 중국인 유학생들과 달리 슈군은 늘 공부가 우선이었고
탐구심으로 가득해서 갖가지 학술 행사에 얼굴을 내밀다가 우연찮게 나와도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더랬습니다.
여하튼 슈군의 지적 탐구심은 내게 있어 감탄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적 탐구심과는 별도로 큰 친절로 나를 감동까지 시킨 일이 있습니다.
2002년 가을 사이타마현 와라비시(埼玉県蕨市)를 떠나 도쿄도 이타바시구(東京都板橋区)로 이사하게 되었을 때,
그 전에 우연히 길에서 만난 슈군에게 얼마 뒤에 이사하게 되었다는 말을 했더니,
대뜸 이삿짐 나르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일본에서 만났던 수많은 중국인 친구들 중에는 말로만 이것저것 약속을 하는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에
슈군도 그냥 하는 소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사하는 날 슈군이 실제로 나타났던 겁니다.
그 날 이사는, 내 평생 가장 좋은 친구 중 한 명인 후지타(藤田)씨와 오카베(岡部)씨, 슈군과 나
이렇게 동아시아 3개국 연합 이사팀의 공동 작전으로 치러졌습니다.
돈을 아끼려고 이삿짐 센터를 안 부른 대신 트럭을 렌트해서 직접 운전했습니다.
후지타씨가 자신의 세단을 가지고 오기도 했고,
이런저런 잡다한 일로 잔뼈가 굵은 오카베씨가 진두지휘를 했습니다.
이래저래 2년 좀 넘는 시간 동안
6조(六畳: 다따미 6장, 다따미 1장은 60X180이었던 듯) + 3조 + 주방 + 욕실의,
유학생치고는 꽤나 사치스러운 아파트에서 혼자 살며 늘어난 짐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먼저 트럭으로 한 차 실어 오카베씨와 내가 첫번째 짐을 이타바시 자취방으로 나르게 되었습니다.
짐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정리할지 걱정이 되었었는데, 슈군이 아주 상쾌한 얼굴로
"걱정마 걱정마 내가 다 정리해 놓을게" 큰소리를 치길래 다른 선택지도 없고 해서 그러라고 한 뒤,
이타바시에 한 차 내려놓고 다시 운전해서 예전 집으로 돌아갔더니
정말 슈군의 말대로 집이 아주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슈군이 버려야 될 것 안 버려야 될 것 다 깔끔하게 버려뿌렸기 때문에
나중에 없어진 물건들 중 필요한 걸 새로 사거나, 없는 채로 견디며 고생 좀 해야 했습니다.
이 때 나와 슈군은 아직 20대, 오카베씨는 이제 마악 서른, 후지타씨는 63세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 내가 이사하기 조금 전에 일본에 다녀갔던 우리 아버지는 61세, 엄마는 56세였습니다.
이사를 한 다음 해 2003년 여름 나는 처음으로 중국을 여행했고,
그 해 여름 중국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인 칭다오에서 시모노세키로 배를 타고 온 후
기차를 타고 칙칙폭폭 동경으로 돌아왔더니, 슈군 어머니가 유방암이랍니다.
슈군은 서둘러 중국으로 일시 귀국을 해야 했는데,
그 때 중국에서 쓰고 남아서 가져온 돈 수백여 위엔을 슈군에게 어머니 병원비에 보태라고 줬습니다.
그 때만 해도 인민폐 100위엔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100위엔은 가히 당시 100달러의 가치에 육박했습니다.
지금 100위엔은 불과 15달러의 가치밖에는 안 됩니다만......
이 일을 계기로 해서, 나는 슈군뿐만이 아니라 슈군의 부모님과도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슈군 어머니의 유방암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다양한 이유들과 함께, 그리고 무엇보다 슈군과의 우정으로 인해 중국과 중국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짜고짜 슈군한테 중국어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는데,
자기 가족과 친척들 앨범을 가져오더니 자기 부모님 이름을 중국어로 적으면서
나더러 그 중국어 발음을 따라하랍니다. 발음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슈군의 부모님 성함 발음을 겨우 조금 비슷하게나마 흉내낼 수 있게 되자
슈군이 그 자리에서 바로 중국으로 전화를 걸어서, 자기 부모님한테 인사를 시켰습니다.
전화를 끊고 슈군이 말하기를, 앞으로 그 앨범 속 친척들 이름을 다 가르쳐주겠답니다.
중국어 공부에 좋다면서... 지금 10여년이 넘어 생각해 보면,
그 때 사람 이름으로 배운 중국어 공부는 솔직히 아무 짝에도 쓸모없었습니다.
2002년, 2003년 전공이 전혀 다르고, 캠퍼스도 달랐던 슈군과 아무튼 같은 이름의 대학원에서 공부한 후,
슈군은 2004년 3월에 졸업과 동시에 중국의 우시(无锡)라는 곳에 있는 일본계 회사 공장 관리직으로 취직했습니다.
그리고, 2004년 여름에 나는 두번째 중국 여행을 계획하게 되는데,
그 목적지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우시(无锡)였습니다.
그때 슈군이 내게 메일로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有朋自远方来不亦乐好啊!
그 때나 지금이나 상쾌한 동생 슈군의 2004년 여름 초상입니다.
우시 슈군 아파트에서 슈군이 아침으로 만들어 준 면
우시에서 사나흘 같이 지냈고, 슈군과 함께 평생 처음 상하이에 가 보기도 했습니다.
우시에서 상하이로 가는 2층 열차 2층 칸
그 해 여름 계획에는, 광저우에 가서 총칭익스프레스를 타고 홍콩을 가는 일정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상하이역에서 표를 못 사고 어떻게 할까 고민할 때, 암표상이 와서 광저우 가는 표를 팔았습니다.
20% 쯤 돈을 더 주고 암표를 사서 광저우로 갔더랬습니다.
2004년 여름 슈군과 상하이에서 헤어질 때
슈군과 함께 갔던 상하이 박물관에서 본 송대 그림 중 하나
슈군의 설명에 의하면, 상하이 박물관은 중국내 5대 박물관 중 하나로,
그 특징은 민간 서민들의 물건을 많이 전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슈군을 만날 때면 늘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어지간한 사람들 모르는 잡다한 지식들을 갖추고 있어 대화가 즐거워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광저우로 가는 기차에서 만났던 길림성(吉林省) 출신 화장품 회사 직원입니다.
광저우역에서 홍콩행 표 사는 걸 도와주기도 하고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하던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12년 전 사진이니, 지금은 멋진 중년 여성이 되어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쉽게도 연락처를 잃어버려 그 후에 고맙다는 인사 메일도 보내지 못했습니다.
중국내 매년 장거리 이용 승객수 최고를 기록중인 광저우역입니다.
근중거리 전철역으로는 일본 신주쿠역이 전세계 최대 유동 인구(하루 약 2백만 명) 기록을 가지고 있겠지만,
전세계에서 장거리 승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역은 단연 중국 광저우역일 겁니다.
예로부터 광저우는 중국 낭방 지역에 있어서의 중심지 중 하나였고,
이미 150년 보다 더 오래된 때부터 서구화와 공업화가 진행된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션전(深圳)과 함께 중국 개혁 개방 정책에 있어 큰 성공을 거둔 전설과 같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내게 광저우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 <첨밀밀>과 관련된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광저우역에서 홍콩으로 가는 열차때문에 그렇습니다.
진가신(陈可辛) 감독의 영화 <첨밀밀>에서 장만옥과 여명이,
중국 본토에서 홍콩까지 함께 타고 온 그 열차입니다.
<첨밀밀>에서의 장만옥은 이곳 광저우에서 일하던 중국 본토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홍콩으로 가는 그 열차가 중국 총칭(重庆)에서 출발하던 시절이 있었던 듯합니다.
총칭은 쓰촨성 동쪽에 붙은 중국 정부 직할시로, 인구와 면적으로 보면,
북경, 상하이와 더불어 중국내 3대 도시 중 하나입니다. 인구만으로 보자면, 전세계 최대 도시 중 하나입니다.
나는 아직 총칭에 못 가 봤고, 뉴욕시티에도 못 가봤는데,
이상하게도 총칭과 뉴욕시티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렇지 싶습니다.
아무튼 좋게 생각하자면, 곧, 머잖은 미래에 두 곳을 가보게 될 거라는 의미지 싶습니다.
내 마음 속 이미지에 있어 총칭은 늘 상하이보다 크고 화려합니다.
2004년 상하이에서 찍은 상하이 푸동취(浦东区)
2004년 만남 이후로 다시 슈군을 만나게 되는 건 2007년 여름입니다.
당시 슈군은 진지하게 사귀는 애인이 있었는데, 그 애인 어머니가 참 까다로운 분이어서
자신의 사위가 되려면 BMW 승용차 쯤은 몰아야 된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고 합니다.
사랑은 외바라기라고... 슈군의 당시 애인은 그다지 슈군에게는 관심이 없었던 듯 합니다.
또다시 사랑은 외바라기, 슈군은 관심이 없지만, 슈군을 쫓아다니는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고, 북경에 위치한 전국 규모 은행의 직원이었습니다.
내가 2007년 다시 중국으로 가서 당시 북경에서 국영 휴대폰 제조회사에서 일하다가 관두고,
자신의 회사를 경영하던 슈군을 만났습니다.
그 때, 슈군을 대신해서 북경에서 내가 잘 방을 예약해 준 것이 바로 슈군을 쫓아다니던 그 아가씨였습니다.
2007년 8월말 북경에서 다시 만난 슈군과, 그 옆에 앉은 슈군을 쫓아다니던 아가씨와 함께 때론 일본어로
때론 프랑스어로, 대화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몇달 후, 결국 슈군은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본래 있던 여자친구와는 헤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슈군이 BMW를 살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슈군의 사고방식으로는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은 BMW를 왜 사야하느냐 하는 게 문제였습니다.
자신이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딸이 결혼하는 건데, 사위가 BMW를 몰지 않으면 안된다는 조건...
슈군의 입장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을 터입니다.
아무튼 2007년 그 해 여름에도 슈군은 말했습니다.
有朋自远方来不亦乐好啊!
2008년 1월 중국 고속열차가 북경과 천진 사이에 최초로 개통되었고,
나는 그 때 영업 시작 후 얼마 안 되는 첫 고객들 중 하나였습니다.
피에르가르댕 2003년 수트케이스와 어느 선생님이 사 주신 배낭을 들고 중국 최초 고속철도 앞에 섰습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은 수트케이스를 들고 똑같은 배낭을 메고 지금 몽골에 와 있습니다.
당시 슈군을 쫓아다니던 아가씨는 슈군과 결혼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2년 전 쯤 이혼했습니다. 슈군은 북경에 있을 때, 자신의 회사를 가지고 있는 비즈니스맨이었습니다.
우시의 일본계 회사를 그만둔 후, 션전(深圳)에 있는 팍스콘 공장에 취직해 대단히 우직한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팍스콘은 애플 아이폰을 조립 생산하는 회사고, 한국 회사들도 팍스콘에 위탁해서 일부 제품을 생산합니다.
2011년 2012년 팍스콘에서는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자살을 합니다.
그 배경에 있는 어두운 면은 일찍이 조사된 바 있지만, 아직도 발표는 되지 않았습니다.
슈군은 그 곳에서 관리직으로 약 2년 넘게 일했습니다.
그 때 슈군이 가끔 내게 연락을 해 와서, 자신이 정말 '우직하게 일하고 있다'고 말했던 게 기억납니다.
그리고, 그 후 북경으로 와서 자신의 회사를 차리게 됩니다.
이후 슈군의 첫번째 부인이 되는 그녀는 션전에서 알게 된 슈군을 쫓아 부러부러 북경으로 전근을 신청해 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션전에서 은행원을 할 때에 비해 절반 밖에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슈군과 함께 있고 싶어서 먼 길 이역만리를 날아와 슈군 옆에 머물렀습니다.
2007년 8월 여름
2009년 가을 결혼식
불행히도 둘은 2012년도에 이혼했습니다. 둘 다 외동아들 외동딸이었고,
모두 서로 스스로가 이기적이어서 상대방과 결혼한 후에
스스로의 욕심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면서(혹은, 그 부모들이 욕심을 포기하려 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결국에는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슈군은 그녀와 결혼하면서 북경에 아파트를 샀고,
아파트 구입 비용은, 외아들인 슈군을 위해 슈군의 부모님이 평생 벌어 모은 전재산이었습니다.
북경에서 회사를 운영하던 슈군은 뜻하지 않은 난관을 맞게 되면서,
회사 경영을 그만두고 어머니의 가업, 곧 정신과 의사 일을 잇기 위해 남경에 있는 어느 유명 의대에 진학하게 됩니다.
나이 서른이 훨 넘어서 다시 대학을 들어간 게 되네요.
슈군의 이러한 결정은, 처음에는 와이프의 이해를 얻을 수도 있었지만,
와이프의 부모님도 직장에서 퇴직하고 연금으로 생활하겠다는 생각으로 북경 근처에 집을 마련해 이사해 오면서,
남경의 의과 대학 졸업 후 고향인 허페이에 돌아가 부모님을 모시면서 정신병원 의사로 일하겠다는
슈군의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고, 그 후로 슈군은 인생 최대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나는 결혼도 이혼도 해 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어느 글로벌 여론 조사에서,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럽게 기억하는 것이 이혼과 관련된 기억이라는 걸 본 기억이 있습니다.
실제로 슈군은 첫번째 결혼과 이혼을 거치며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고
지금도 그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 합니다.
2015년 5월 자신의 고향 허페이에서 두번째 부인과 아들,
친부모님과 장인 장모와 함께 건강한 듯 하여 다행입니다.
슈군과 처음 만나 그 뒤로 일본과 중국에서 만나기를 거듭한 ㅜ 2015년 다시 만났는데
앞으로 수년 간은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슈군이나 나나 스스로의 힘을 키울 시간이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쉽게 만날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 확실히 슈군과 얘기한 것 중 하나를 이야기하자면,
슈군은 내가 중국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좋은 연구 대상, 곧 샘플이 되어주기로 한 것입니다.
슈군도 동의하고 기꺼이 내 중국에 관한 이해의 도움을 위해 자신이 그 사례가 되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슈군의 클로즈업 사진도 적나라하니 여기 올릴 수 있습니다.
슈군의 진행중인 시간은 참 재미있습니다.
중국 연구 샘플링 슈군을 대상으로 하는 나의 연구도 계속 재미있게 진행중입니다.
요사이 슈군은 긴 인생에 있어서의 짧은 깨달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듯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강요한 데 더해, 자신의 삶을 사는 기술을 깨달아야 하는 순간들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게, 이제까지는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요란하게 이야기하는
'가정을 일구는' 데 정력을 기울여 왔고,
지금은, 물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도 갖춘 듯 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등등의 기대를 안고 살아가는 자신과 자신의 부인
자신들의 아이들... 슈군이 경험하고 봐 온 것들은 정말 특이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부분들입니다.
2012년에 의과대학에서 정신과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던 슈군을 만나러 남경에 간 일이 있습니다.
남경에서는 일본어로 이야기하면 안된다면서 생경스레 중국어와 영어로 이야기해야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부디 슈군이 복잡한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자신의 삶에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축을 발견해 낼 수 있길 바랍니다.
소니와 폭스콘, 그리고 북경에서의 자신의 회사 경영 경험...
엘리트 여성과의 연애와 외동딸을 둔 부모의 반대로 인한 실연,
유럽 유학 경험을 가진 또다른 엘리트와의 결혼, 그리고 이혼, 또 그리고 재혼과 첫 아들의 탄생,
결과적으로 부모의 가업을 잇겠다는 결정과 서른 이후의 재취학...
국영 기업 고위직 엘리트 혈연을 가지고 있지 않은,
중국 엘리트 젊은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슈군에게서 늘 보며 배웁니다.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 슈군이 가 닿은 곳은, 아직도 봉건 중국을 벗어나지 못한 어느 곳인 듯합니다.
슈군도 그걸 알지만, 자신을 위해 희생한 부모님을 나몰라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원해서 결혼도 했고, 태어난 아이에 대해서도 의무를 나몰라라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아는 슈군은 가장 똑똑한 중국인 중 하나이니, 잘 처리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바쁜 시간에도 내가 올 때면 늘 '먼 곳에서 오는 형님'을 맞이하듯 기쁘게 반겨주어 감동합니다.
하지만, 이제 앞으로 오랜 시간, 적어도 5년 쯤은 슈군을 만나러 가지 않을 겁니다.
슈군도 슈군의 계획이 있고, 내게도 내 계획이 있으니
그 쯤 시간이 간 뒤에 서로 보여줄 수 있는 결과가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2011년이었는지 2012년이었는지, 슈군이 북경 생활을 마무리짓기에 앞서
중국 내몽골에 있던 나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 땐 내가 이 말을 했네요.
有朋自远方来不亦乐好啊!
부모님 모시고 한국을 가려다가 단체관광 말고는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부모님은 한국 단체관광을 시켜드리고... 그 후 혼자서 내몽골 여행을 왔던 겁니다.
불행히도 그 때 사진이 남아있는 게 없습니다.
이번 2015년 허페이에서의 만남은 그 이후 첫 만남입니다.
슈군의 2세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며, 이제 앞으로 오랜 시간 다시 못 만날 것을 알면서
그 이후에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약하며, 헤어졌습니다.
늘 나를 형제라 불러주는 슈군과 이 다음 다시 만날 때면,
이제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 친구같은 형이 되어 있으려니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지난 번에 만났을 때도 슈군은 일본 동경 메지로대로(目白大通り) 길거리에서
나와 함께 깡맥주와 깡와인 마시던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슈군은, 그 때 스스로 상상도 못했던 정신과 병원 의사가 되어 있고,
나는, 그 때의 슈군처럼 여전히 '관심 있는 많은 일'들을 찾아 헤매이고 있습니다.
첫댓글 흥미롭게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지식의 부랑아시군요.....
언제나 먼 곳을 동경해, 알지 못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온 바람에서 그 흔적이나마 찾고 싶어
바람이 그리운데, 뽀님은 바람이 온 그 자리에 계시는군요..... 참 많이 부럽습니다.... 다음엔
제가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열호라를 외쳐드리겠습니다.....
부랑아는 아닙니다
많이 싸돌아 다니는 것 같이 보여도 늘 뚜렷한 목표가 있어 갑니다
가을에 또 서산 번개라
서해 바다는 어릴 적 기억들 때문인지 왠지 쓸쓸한데
지난 번에는 폭풍우가 몰아쳐 더 쓸쓸했었네요
암튼 한국에 있게 되면 서산 번개 참석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 멀리들 있기는 해도 좋은 친구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쁠 때가 있습니다.
서로가 아직 어떤 면에서건 역량이 모자라지만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서로 기대할 수 있어서
오랜만에 만나 헤어지면서 느끼는 깊은 아쉬움속에서도 그 한켠에 즐거운 마음이 늘 있습니다.
유붕이 자원방래 불역열호! 뽀뽀뽀님 너무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뽀뽀뽀님 글을 오늘 처음 읽다가 하던 번역 멈추고, 그간 쓰신 글을 쫙 읽고 있는데, 너무 재밌네요.^^때지난 글에 댓글 달아서 죄송스럽습니다만, 不亦乐好啊에서 마지막 好는 乎를 오타내신 듯...재밌게 읽고, 이런 뻘 댓글을 달아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중국어 하나 공부하는 데도 힘이 드는데, 참 많은 언어를 하셔서 부럽습니다.
Caution님 감사합니다. 오타가 아니라 잘 몰라서 그랬네요. 지적 감사합니다. 여러 언어를 공부했어도 다들 이렇게 어중간한 실력이네요.
앞으로 자주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뽀뽀뽀 넵. 소심하게 댓글 달고, 불쾌하시지 않을까 걱정했네요. 저는 중국쪽 관련한 책을 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중국 여행을 거의 다니지 못했는데, 중국 곳곳의 모습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여주셔서 재밌게 글 읽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