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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 제6권. 19세기, Le XIXesiècle 507-788
제5장 프랑스에서 절충 정신론 (Le spiritualisme eclectique en France) 570
이데올로지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프랑스에서 왕정복고시대에서부터 멘드비랑(1766-1824), 스코틀랜드 철학자들, 독일 철학 등으로부터 조합된 영향으로 유심론의 형이상학이 전개되었다.이 형이상학은 내적 관찰에서 출발하여 유심론적 보편 실재성들에, 신과 영혼에, 도달하고자 애썼다. 라로미기에르(Laromiguière, 1756-1837)와 르와이에-꼴라르는 이 학문의 선구자들이었다. (570) (47MKJ)(57QME)
제1절 라로미기에르 Laromiguière 570
삐에르 라로미기에르(Pierre Laromiguière, 1756-1837)는 특히 철학 강의: 영혼 역량에 관한 시론(Leçons de philosophie, ou Essais sur les facultés de l'âme, 1815-1818)(2권)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책은 파리 문학부의 강의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1811년 4월 26일 시행된 개강 담론에서 이렇게 썼다. “형이상학과 도덕과학들의 대상인 그 많은 관념들 가운데서, 몇 관념들은 알져지지 않은 역량들에 속하는 것 같고, 또 우리 존재의 깊이[심층]에 감추어져 있는 것 같다. 잘난 체 하는 정신들[겉 멋든 사람들]들의 양식(糧食), 열렬한 상상들의 양식, 아직 꺼지지 않은 어떤 호기심의 양식으로서, 몇 관념들은 항상 제시되어 있고 그리고 모든 철학에 대해 영원히 봉기들(rebelles)로서 제시되었다. 이 모든 철학이란, 관념들의 태어나는 찰나와 그 기원에서 그것들을 관찰할 수 없는 철학을 의미한다.”(철학 강의)(3판, 1권, 36쪽) 그 철학은 여기에서 분석의 방법에 의해 정의 된다. 이 방법은 우리의 모든 관념들을 친숙하게 알려진 역량들의 놀이들로 모이는 것이고, 이렇게 하여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이 관념들 중에서 몇 관념을 박탈하는 것이다(여기서 선, 신, 미의 관념들이 문제일까?). 이 몇몇 관념은 분석에 앞서서 알려지지 않는 역량들로부터 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다가오는 낭만주의에 반대하는 이데올로지의 항의이다. (570)
또한 분석의 방법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말하자면, 한편 사람들은 두 측면을 병치하면서 동일한 사물에 속할지라도 이들 사이에 이질적인 특징들을 분리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다른 한편 사람들은 추론하여, 동일한 일련의 명제들을 진술하며(énoncer), 이 명제들의 각 명제 속에서 동일한 관념은 각 명제가 포장한 여러 다른 표현들에 의해서 그 기원과 전개들을 따를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이 둘째 정의(définition)에서 꽁디약의 중요 주제를 쉽게 재인식한다. (571)
그러나 만일 라로미기에르가, 적어도 그 발견했다는 명예가 꽁디약(1714-1780)에 속하는 철학적 방법을 꽁디약과 달리 생각하지 않았다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방법에 매우 깊은 변모를 이루었다. 사실상, 그는 수동적인 [인식] 역량으로서 감각, 능동적 역량으로서 주의를 넘어서 발생[생성]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는 그 주의로부터 비교를 태어나게 했으며, 이 비교(la comaparaison)는 사물들의 모든 연관들을 덮고 있는 것으로서, 판단과 추론의 출발점이다. 정신적이고 기원적이며 환원할 수 없는 활동성의 이 요구(la revendication)는, 꽁디약에서는 발생적 방법을 아직 건드리지 않은 채 남겨져있을지라도, 학설 속에 아주 새로운 경향을, 그리고 멘드비랑에 부합하는 경향을 도입한다. (571)
라로미기에르가 1811년에 행했던 강의가 1815년에 출간되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영향은 거의 지속할 수 없었다. 역설적으로 그의 영향은 왕정회복기(1814-1830) 동안에 재등장하였다. 그것은 왕정체계의 장관들 중에서 가장 반동적인 자들 중의 한 사람인 드니 프레시누(Denis Frayssinous, 1765-1841) 덕분이었다. 그는 꾸장 강의를 중단시켰고, 1822년 파리 고등사범학교(ENS)의 문을 닫게 했으며, 그리고 라로미기에르와 그의 제자 튀로(Jean-François Thurot, 1768-1832)에게 호소했다. 페리시누는 칸트와 스코틀랜드 학파의 적들인 이데올로그들보다 새로운 정신주의자들을 더 걱정했다.그러나 이 회귀적 영향은 1827년 말에 프레시누의 몰락과 더불어 끝났다. (571) (47MLA), (57QME)
제2절 화이에-꼴라르 Royer-Collard 571
뽈 화이에-콜라르(Pierre-Paul Royer, dit Royer-Collard, 1763-1845)는 1811년에서 1814년까지 파리 학부의 교수였다. 사람들이 전혀 거부할 수 없었던 한 심판관이, 그의 초기에서부터 유심론에게 국가 철학의 검인정을 부여했다. 그 심판관이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은 1811년 화이에-꼴라르가 강의의 첫 과목을 들은 후에, 꽁디약에 반대 입장을 취하였고, 딸레랑(Talleyrand, 1754-1838)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원 위원장님(Grand électeur), 당신은 알지요. 그[화이에-꼴라르)가 우리대학에서 매우 중요한 학설을 세웠지요. 그 학설은 우리에게 커다란 명예를 행사할 수 있었고, 추론에 의해서 이데올로그들을 즉결처분하면서 이들을 완전히 몰라낼 수 있었습니다”. 파리 대학 문학부에서 2년 반 동안에 행해진 이 학설은 1813년에 개강 강의 때 출판에 의해, 그리고 1828년에 주프롸(Jouffroy, 1796-1842)가 편집한 단편들(Fragments)에 의해 제시되었으며, 이 학설은 인간의 공통 신념[신앙]들에 반대되는 귀결들을 열거하면서 “감각작용의 철학”을 단죄하고 있었다. 또 이 학설은 “지각작용의 철학”이란 이름하에, 완전한 평행론과 같은 신념들의 명증을 감각작용의 철학에게 대립시켰으며, 이 평행론에서는 각각의 진리는 각각의 오류에 대립된다. 감각작용 철학의 본질은 “관념론/이상론(idéalisme)”이다. 이 관념론은, 대상들이 우리에게 행사하여 만든 하찮은 인상들을 가지고 모든 실재성을 구축한다. 그 결과로 이 관념론은 자아가 감각작용들의 수집이며 실체도 없고, 시간을 관통하는 동일성도 없다고 한다. 그리고 자연은 감각적 성질들과 이어지는 이미지들의 수집이다. 이 이미지들은 실체와 어떤 연결도 없으며, 어떠한 능동적 힘도 포함하지 않고 있다. 신은 실체 없는 효과의 수집작업[수집품]이 된다. 데카르트는 코기토에 의해 자기의 자아 속에 갇혀 있으면서, 관념론을 책임질 수 있는 주제자라 하는데, 따라서 이 관념론은 회의주의, 허무주의, 도덕적으로 이기주의에 이른다.왜냐하면 다른 인격들은 우주의 다른 대상들처럼, 우리의 인상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각작용의 철학은 분명한 실재성들로부터 출발한다. 왜냐하면 이 실재성들은 의식에게 무매개적으로 주어지기때문이며, 그 철학은 실재성들의 발생에 어떠한 가설을 만드는데도 동의하지 않는다. 무매개적으로 알려진 자아의 현존(l'existence du moi)은 우선 마치 실체처럼 있고(데카르트가 현존으로부터 실체로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고 믿는 잘못을 범했다), 그리고 마치 사유하는 실체처럼 있다(피히테는 사유에 앞서서 자아를 제시하는 잘 못을 범했다). 그런데 자아는 지속 가능하고, 자신 스스로를 기억에 의해서 자기에 동일한 것으로서 인식한다.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추억할 뿐이기 때문이다.자아는 의지적 작동(l'acte volotaire)과 주의 속에서 원인으로서 스스로를 인식한다. 실체성, 영속성, 인과성이란 세 가지 특성들은 외적 세계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세 가지를 무매개적 직관에 의해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잘못 정의된 일종의 귀납법에 의해서 파악한다. 왜냐하면 정상적 귀납법은 개연성에 이를 뿐이기 때문이다. 화이에-꼴라르의 귀납법은 자아의 특성들을 외적 세계에로 어쩔 수 없이 옮겨 놓는 데로 우리를 이끈다. 이 견고성이 우리를 실체적 현존에 맞게 결론 짓게 한다. 이로부터 공간 속에서 또한 경계없는 시간 속에서 우리와 독립적이고 영속하는 현존에 맞게 결론 짓게 한다.결국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인과성 속에 있는 의지적인 것과 반성적인 것을 사유에 의해 제거하면서, 이 특성들 속에서 우리가 상상하는 생산적 원인들(des causes productrice)을 본다. 그것은 물질적 존재들의 인과성의 특성이며, 이 특성이 우리를 신에게로 데려간다. 그런데 부분적이고 흩어져 있는 원인들은 전능의 의지인 유일한 원인 덕분에만 조화될 수 있다. 전능의 의지는 신의 의지이다. 이리하여 철학에 의하여 공통의 실재성들이, 즉 자아, 자연, 신이 회복되게 된다.모든 위대한 철학자들에게서는, 즉 플라톤에서 꽁디약에까지 오류들만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실들의 관찰 대신에 자신들의 가설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573)
화이에-꼴라르의 학설은 솔직하게 요약적이고 피상적인 방식으로 그 시대의 깊은 경향을 표명했다. 이 시대에는 분석에서 모든 실재성을 사라지게 하는 발생의 문제를 싫어했다. 그의 학설은 분석 안에 있는 인간적이고 인위적인 것을 증명하려 애썼다. 분석은 시작에서부터 이제까지 재발견 할 수 없었던 대상의 독창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화이에-꼴라르 자신은 이런 학설들을 “영혼/심리발생론”(psychogonie)이라 부르면서, 이 학설들에 반대하여 자기의 반감을 표시했다. 영혼발생론을 그는 자신의 심리학에 대립시켰는데, 그것은 마치 한 뉴턴주의자가 데카르트의 가설적인 우주발생론을 새로운 우주론에 대립시킬 수 있었던 것과 같다.분석 가능한 실재성들은 무매개적 직관에 의해서 또는 자연적 신념에 의해서 파악되는가? 1850년부터 프랑스 철학의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될 본질적인 점에 관해서, 화이에-꼴라르는 어정쩡하게 남아있었다. 게다가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그는 1763년에 태어나 대학 학부에서 교수가 되었을 때는 마흔여덟 이었고, 그것도 2년 반 동안이었다. 철학자이기에 앞서 그는 정치가였다. 1792년에 파리 꼬문(대혁명 자치부)의 구성원이었으며, 1797년에는 500인 위원회(le Conseil des Cinq-Cents) 의원이었고, 1797년부터 1803년에는 루이 18세의 정보제공자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시기에는 군주제 옹호자였기 때문이다. 이 군주제는 기본적인 법률에 의해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었다.그는 소르본대학에서 교육을 매개로 해서, 1816년에는 하원 의사당에서 1814년 헌장(Charte)을 가장 설득력 있게 옹호한 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프랑스의 정치적 체계를 이성 자체[신적 지성]에서 나온 것으로 여긴 “교조주의자들”(les doctrinaires, 어용학자) 무리의 선두였다. (573)
따라서 정신주의(le spiritualisme, 정신론)는 그 출생에서부터 매우 제한적인 일종의 자유주의와 인척관계이다. 그 정신주의는 게다가 자유주의의 행운을 뒤따랐다. 그럼에도 이것의 성공은 광분의 반동시기 동안에 축소되었다. 분노의 시기란 1821년에서 1828년까지는 꾸장의 강의가 중단되었고 또 고등사범학교가 문을 닫았다. 그는 프레시누(Frayssinous, 1765-1841)의 몰락이후 1828년에 다시 뜨게 되는데, 그 때 화이에-꼴라르는 샤를 10세(Charles X, 1757-1836; 재위 1824-1830)에게 221개 항의 청원서를 제출했었고, 이는 루이 필립(Louis-Philippe, 1773-1850; 재위 1830-1848) 치하에서 대학의 학설(la doctrine, 교리)가 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항상 자신에는 반대되는, 그런 절대주의 교리[학설]들에 참여하는 성직자였으며, 또한 자유당의 민주주의자였다. 이 민주주의자들 중의 많은 이들은 출신이 이데올로그들이었고, 제한 선거제도라든지 세습귀족 지위 등을 화이에-꼴라르도 만족했던 것으로 보아, 이들은 자유를 풍부하게 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합의들과 끊임없는 결탁 때문에, 끼네(Edgar Quinet, 1803-1875)는 이렇게 평가한다. “내가 정신주의자의 말을 들어보건데, 실재성은 진부한 것(le convenu)에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하여 사라진다.” (574) (47MLB) (57QME)
제3절 쥬프르와 Jouffroy 574
주프화(Théodore Simon Jouffroy, 1796-1842)[마흔여섯]는 고등사범과 소르본대학에서 가르치고 난 뒤에, 1833부터 하원의회 의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사유의 주제들이 여럿 있다. 이것들은 따로 떨어져 있으며, 그가 이것을 통합할 의도를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그의 숙명(la destinée)에 대한 주제는 그의 삶 전체를 불안하게 했는데, 아주 목가적이고 개인적이며, 또한 그의 강의에서 다룬 것들과 전혀 연결되지 않고 있다. 그의 강의는 심리학의 과학적 독립과 그 특성, 자연권, 미학 등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이렇게 산만한 것은 타고난 성격의 특성에 달려있다.대중적이고 교조주의적인 주장들 앞에서 일종의 주저와 귀족정치에 대한 경멸이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서문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모든 것은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저없이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이 그들의 특권이다.”또한 어느 누구도 숙명의 문제에 의해 고통 받는 이 사람보다 더 못한 의식적 인도자는 없었다. 이 사람은,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노력에 의해 자신을 위하여 해결하는 것이 인격적 문제이라는 확신에 도달했다. 자기 마을의 농부들은 철학이 문제로부터 얻은 다양한 해결들을 발견하고 있지 않는가? 그는 프랑스 비평가 두당(Ximénès Doudan 1800-1872)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떤 이는 유심론자이고, 다른 이는 진실로 신비주의자이고, 또 다른 이는 스토아주의자이며, 몇몇은 전적으로 비신앙에 기울어져 흐리멍텅하게 자신들의 성격의 자연적 경사를 따른다”. 순수 철학적 주제에서 보면, 반대로 그는 뚜렷이 구분되는 견해들을 가지고 있지만, 서설들(les prolégonènes)의 수준을 넘지 못하여, 정확하고 구체적인 학설들에 이르지 못하였다. (575)
쥬프화는 1822년에 유명한 논문 어떻게 독단들은 끝나나(Comment les dogmes finissent, 1823)을 썼고, 1825년에 왕정복고시기의 자유일간지 글로브(Le Globe)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아직 먼 미래에 있는 철학이 어떻게 쇠약해진 크리스트교 종교를 대체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쥬프화 자신은 이런 상황을 깊이 있게 느꼈던 것 같다. 1832년에 그의 시론 철학적 과학들의 조직화에 관해서(Sur l'organisation des sciences philosophiques, 1832)의 둘째 부분에서, 그는 도덕적 위기를 이야기했다. 이 글에서 그는 이보다 19년 앞서서 1813년[17살] 12월 밤에, 자신이 신앙을 상실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은 분명히 이 시기에는 드물지 않았다. 이 세기의 아이들은 자기 불안을 배양하고 있었고, 17살의 고등학생[쥬프화]은 그 당시 아마도 낭만주의의 전염병을 감당했을 것이다. 그의 강의들 중에서, 1830년 12월 강의는 인간 숙명에 대한 문제들(Problèmes de la destinée humaine, 1830)을 가지고 열었다. 사람들은 그가 강의한 목적성의 원리에 대한 주장에서 신앙을 버린 빈 공간을 채우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 원리는 종교의 형식을 취한다. 자연으로부터 태어난 것은 어떤 것도 헛되이 창조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각 존재가 숙명(une destinée, 필연), 소명(une vocation), 임무(une mission)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된 원리는 그가 우리에게 한 가지 답을 주기보다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자기가 숙명을 지녔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어떤 인간도 숙명이 어떤 것인지를 자문하지 않고서 있을 수 없다. 어떤 인간도 그 숙명이 어떤 것일 지라도 실현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고, 따라서 숙명이 현재 삶에서 그렇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부득이하게 미래의 삶을 믿게 한다. 반대로 어느 누구도 숙명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크리스트교의 해결은 더 이상 충분하지 못하다. 철학은 종교 대신에 자신을 대체하기에 거의 이르지 못하고 있다. 쥬프화에 따르면, 이러한 무지가 증명되어, 고요함과 일종의 부정적 확신을 가져온다. 그는 여기서 확실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는다. 어느 날 우리에게 계시될 수도 있을 절대적 진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쥬프화는 상대적이고 인간적인 진리를, 즉 인류의 진보 상태에 해당하는 다양한 종교들과 형이상학들을 인정했다. 이 점에서 그는 르화얄-꼴라르(1763-1845)와도 꾸장(1769-1821)과도 매우 멀리 있다. 전자는 회의주의와 한편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후자는 “비인격적 이성[이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는 한편으로는 르낭(Renan, 1823-1892에 다른 한편으로는 제임스(W. James, 1842-1910)로 가는 길 위에 있었다. 인류는 산다는 이유들(des raison de vivre) 때문에 그 자체적으로 창조되었다.그에 따르면 모든 실천적 문제들은 숙명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주위를 맴돈다. 예를 들어 정치권[리]의 문제와 사람들의 일상인들의 권리문제에 의존하는 자연권의 문제는, 만일 사람들이 인간의 자연, 즉 숙명을 알 수 있을 경우에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권리란 시대의 신념들과 더불어 변함이 틀림없다. 이리하여 소심하면서도 급히 서두루지 않고서, 사실상 일종의 개인주의적 상대주의가 도입되었다. 이것은 나중에 르낭 또는 바레스(Barrès, 1862-1923)에서 꽃피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이 꽁트(Comte, 1798-1857)에서 발견할 사회적 역사적 상대주의와 매우 다르다. (576)
심리학에 관한 쥬프화의 사색들은 이러한 선입견들의 아주 바깥에 위치한다. 그는 꾸장처럼 심리학에서 존재론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연과학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방법과 동일한 확신을 갖는 심리학을 생리학으로부터도 동시에 형이상학으로부터도 독립하게 하는 것을 옹호했다. 또한 그는 1826년에 스트워트(Dugald Stewart, 1753-1828)의 도덕철학의 윤곽(Outlines of Moral Philosophy, 1793(Esquisses de philosophie morale, trad. 1826)의 번역 서문에서 과학자로서 또한 관찰자로서 심리학을 만들 것을 충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반대한 방법의 난점들도, 그리고 영혼의 자연[본성]에 관한 형이상학으로부터 제기되는 나중의 의문들도 고민하지 않았다. 사실상 심리학을 자연과학들에 이렇게 동화시킨 것은 1838년 논문 「심리학과 생리학의 구별의 합법성(Légitimité de la distinction de la psychologie et de la physiologie, 1838)」에서 다음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원인, 중력, 친화성 등은 사람들이 관찰한 사실들에서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물리학적 사실들과 달리, 내적 관찰은 자아이라고 하는 원인을 동반하는 사실들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우리가 형이상학적이고 실체적인 실재성을 자아 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주지는 못한다. 쥬프롸는 이점에 관해서 꾸장의 교훈에 충실하게 남아있었던 것 같다. 꾸장은 실체적 실재성에 대한 모든 직접적 직관을 부정했다. (57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연권 강의(Cours de droit naturel, 1834)(2권)는 몇 가지를 고려하여 이 두 선입견들의 통합을 제시했다. 결국 이것들의 기초는 제3과목에서 말하는 인간의 도덕 심리학이다. 이 심리학은 숙명적으로 인식역량들의 계속적인 출현을 제시하게 된다. 인간은 원초적 경향성들에 따라서 인도되는데, 이 경향성들은 감각, 의지, 지성 이라는 인식역량들을 이것들의 만족에 맞게 사용하게 한다. 따라서 어린이들의 품행은 이 경향들의 놀이(le jeu)에 따르기 때문에 변하기 쉽고 불안정하다. 그러나 이 찰나부터 자유가 나타나고, 이 자유는 무엇보다도 집중하는 능력(un pouvoir)이며, 새로운 힘(une force)이라기보다, 우리에게 저항하는 것들에 대항하여 우리의 흩어지는 힘들을 통합하는 배치(une disposition, 자질)이다. 이 자유는 우선 보기에는 비합리적이다. 인간에게 동기들을 제공하는 이법[이성]의 각성과 더불어서, 이 자유는 충동적이고 반성적이 된다. 그러나 이법 그 자체는 두 층위(deux stades)를 갖는다. 하부 층위와 상부 층위가 있다. 하부 층위에는 경향들의 도움으로 이법이 마치 동기처럼 품행에게 잘 이해된 관심을 부여한다. 그리고 상부 층위에서 이법이 인격보다 높은 외적 법칙의 관념에 도달하며 신적 사유의 표현이라 할 질서의 관념에 도달한다. 따라서 도덕 심리학은 역량의 현존인 이법에 매여 완전히 일시중지 된 체 있다. 이 이법은 자기의 지위인 상위의 형식으로써 숙명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의 미학 강의(Cours d’esthétique, 1843)[유고]는 질서관념을 완성점[왕관씌우기]으로 삼고 있다. 쥬프회는 꾸장과 불일치가 뚜렷하다. 꾸장은 아름다움을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에 의해 정의했다. 결국에 쥬프화는 아름다움이 이 두 가지 특성을 표현하는 어떤 실재성도 아니라는 것을 주목한다. 그리고 그는 아름다움의 관념을 규정하기 위하여 비교의 방법과는 다른 방법을 제안한다. 비교의 방법은 여러 아름다운 대상들에 접근하면서 그 대상들의 공통의 성질을 규정하는 데 있다. 여기서 또한 의식에 의해 질문할 필요가 있고, 또 우선 아름다움이 우리들 속에서 어떤 현상들을 생산하는지를 규정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우리가 여기서 수강자들에 의해 그의 강의에서 받아쓰기한 노트들만을 가졌기 때문에, 이 책에서 쥬프화의 표현이 가끔은 모호한 채로 남아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정의에서 우리의 내적 상태로부터 어떤 외적 질서로 이행의 시도를, 즉 진실한 실재성의 계시를 발견해야 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만일 우리 속에 있는 상태가, 그 상태는 외부 존재 속에서 질서에 따라 있는 것이라는 어떤 판단을 동반하게 된다면, 우리가 겪는 감정이 아름다움의 감정이고, 그 외적 대상은 아름답다고 불려 질 것이다.” 이런 질서는 사실상 정확하게 정의되지 않듯이, 조금 전에 말했던 도덕적 질서도 정확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인간적 숙명에 맞닿아 있는 불가사의한 영역 속에 있는 것이다. (578) (47LME) (57QMF)
제4절 빅토르 꾸장 Victor Cousin 578
빅토르 꾸장(Victor Cousin 1792-1867)은 유심론 절충주의의 기초자이다. 이 절충주의는 왕정복고(la Restauration)시대 동안에 약간 공백이 있은 후에, 1830년 7월 정부 내내 대학의 공식적 학설로 되었고, 그 학설은 그 당시 교육의 독점을 유지했다. 그는 1814년부터 고등사범학교 교수였으며, 그리고 루이 필립(Louis-Philippe, 1773-1850, 재위 1830-1848)의 통치하에서는 프랑스의 귀족으로 올랐고, 국가자문위원, 고등사법학교 학장, 대학 총장 등을 거쳐서 결국에는 교육부 장관을 지냈으며, 그는 자기 학설을 교육에 심을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가졌다.그의 학설은 화이에-콜라르(Royer-Collard, 1763-1845)와 스코틀랜드 학파의 영향 하에서 형성되었고, 여기에다가 헤겔(Hegel, 1770-1831)과 셸링(Schelling, 1775-1854)을 영향을 보태야 할 것인데, 그는 1817년, 1818년, 1824년 세 번이나 독일 여행에서 이들을 만날 기회를 가졌다. 그러면 이 학설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578)
그의 주장은 이러하다. “그것은 류적 인간의 가장 순수한 신념을, 더도 덜도 아닌 그 신념만을 과학적 정식으로 재생산하는 것이다. 그의 이 특이한 특성은 존재론을 심리학위에 기초하는 것이고, 그리고 심리학적이고 존재론적인 동시에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역량의 도움으로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역량이란 우리를 자신 속에 소속시킴이 없이도 우리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목자(牧者, le pâtre)를 철학자처럼 밝게 하는 것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부족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한 것으로 즉 이법[이성]이다. 그 이법은 의식의 한가운데에서부터 무한 속으로 넓혀지고, 존재들의 존재에까지 도달한다.”그는 스타일과 사유에 맞게 자신의 균형을 맞추어서, 자신과 닮은 수천의 사람들 사이에서 있던 이시기는,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어떤 영향을 간직한 철학한다는 방식에 맞는 충실한 생각[관념]의 시기이었다. 꾸장은 철학자라기보다 더 나은 웅변가였다. 그의 사상은, 마치 사람들이 그 사상을 주목했던 것처럼, 과학적 문화와는 약간 다르며, 순수히 형식적이고 인문주의적 교육의 자연적 결실이었다. 이런 교육을 사람들은 제국의 고등학교에서 받았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소명의 기원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의 기억 속에는 다시 생각하게 하는 감동과 더불어 그 날이 남아있고 또 늘 남아있는데, 그 날에 1810년에 처음으로 문과교육을 받게 되었던 고등사범학교 학생이 되었던 날, 내가 라로미기에르(Laromiguière, 1756-1837)의 강의를 들었다. 그 날 나는 나의 전 삶을 결심했다. 즉 나는 초기 연구에 몰두했다…”(단편들, 70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설적인 주제들이 그의 사상에 중요한 역할 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의 많은 발전들은 반대자를 주저앉히고 설득하려는 욕망에 의해 이루어졌다. 1828년에 꾸장 학파에서 마라스뜨(Armand Marrast 1801-1852)가 고발했던[공식적으로 알린] “서문의 광증[편벽성](La manie de la préface)”은 타인과 더불어 설명되어야 할 통상적 필요의 특징이었다. (579)
동시대 철학의 단편들(Fragments philosophie contemporaine)(1826, 1833, 1838)의 연속적인 세 서문들에서 사람들은 이 학설의 아주 분명한 생각을 잡을 수 있다. 이 학설은 프랑스에 왕정복고와 7월 정부의 정치적 교시와 동일한 수준으로 동일한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이 학설은 모든 체계들에게 절충주의라는 이름으로, 체계들 중에서 이것들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모두 유지하면서도, 이 체계들을 조정[타협]해야 하는 평화의 계약을 제안했다. 이것은 마치 대의정부가 사회의 모든 요소들을 만족하게 하는 혼합 정부인 것과 같다. 이 비교는 꾸장 자신의 것이다. “마치 인간 영혼은 자기의 자연적 발전 속에서 여러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진실한 철학은 그 요소들의 조화로운 표현이며, 마찬가지로 문명화된 사회 전체는 완전히 구별된 수많은 요소들을 갖고 있다. 정부는 이 요소들을 인정하고 대표하는… 7월 혁명은 1688년 영국 혁명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귀족정에 훨씬 덜 못 미쳤으며, [입헌]군주정과 민주정에 조금 더 가까운 것으로… 그런데 이 세 요소는 필수적이다. 과학에서 모든 배타적 원리와 싸우는 자는 국가에서 모든 배타적 원리를 물리치는 것이 마땅했다.”(단편들, 93쪽). (579)
이런 입장이 정치적 입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철학적 입장에서도 애매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쉽다. 왜냐하면 때로는, 절충파는 등장에서부터 현존하는 다른 원리들 중에서 우리에게 선택하도록 허락하는 원리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사람들이 이 원리에 의해 다른 학설들의 판단하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 원리는 그 자체가 전적으로 현존하는 학설이기 때문이다. 또 때로는, 그러한 어떤 원리가 없기 때문이고, 조정[화해]이라는 것도 모순 없이 일치될 수 있는 모든 체계들의 단편[조각]들의 탐구에 의해서만 조작되기 때문이다. 두 당파들 사이에서 꾸장의 사유는, 정식들을 단호히 구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정됨이 없이 항상 주저했다. 마라스뜨처럼 사람들이 그[꾸장]에게 반성 없이 수집된 관념들로 이루어진, 멈춤이 전혀 없는 사유라고 비난했을 때, 또 사람들이 절충주의를 종합주의(syncretisme)와 비슷하게 취급할 때, 그러면 꾸장은 절충주의 편을 들고, 독립적인 철학적 분석이 가치 있다고 하고, 그러고 나서 그 분석으로 자기의 역사적 판단들을 정당화한다. “진리들을, 이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오류들로부터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는데, 만일 사람들이 비판의 원리인 평가의 척도를 갖지 않는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진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자체적으로 거짓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면 말이다. 그리고 또한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철학적 문제에 대해 즉 인간의 자연, 인식의 역량들, 이것들의 법칙들 등을 충분한 연구를 하지 않는 경우에는, 사람들은 그것을[진위를] 알 수 없다.… 그 때에만 역사적 분석의 차례가 온다.”(단편들, 228쪽) 더욱이 “절충주의”는 체계의 부재라기보다, “체계의 적용이다. 절충주의는 한 체계를 가정하고, 한 체계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체계를 판단하기 위하여 한 체계를 가져야만 한다.”(단편들, 91쪽) 그러나 그는 이러한 방향(ce sens)으로 더 나아가지 않는다. 그는 모든 가능한 철학적 체계들이 이미 다 생산되었다고, 그리고 [사람들이] 그 모든 철학을 거부한 채 남아 있거나 또는 “상호간에 서로 파괴하는데 쓰였던 낡은 체계들의 원(圓) 속에 동요하고 있다”고 너무나 확신하였다. 또는 그 당시에 “이 체계들의 각각 속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분간해 내야만 하고, 그것으로 모든 체계보다 상위 철학을, 즉 이 모든 체계들을 지배하면서도 그 체계들을 통제하는(gouverner) 상위 철학을 혼성해야(composer)”만 한다고 너무나 확신하였다. 당파성을 지니지 않기 위해 취한 방편의 난점은 분명하게 정식화되는 원환[순환논법]에 이르게 된다. “나는 프랑스에서 철학 연구들의 개혁을 추구하고자 시도할 것이며, 한 체계에 의해 철학사를 밝히는 것과 동시에 철학의 전 역사에 의해 이 체계를 증명할 것이다”(단편들, 41쪽) (580)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유한 사유 속에서 1817년과 1818년에 한 체계를 발견하였고, 그리고 1819년과 1820년에 철학사 속에 절충적 방법을 사용했다. (580)
이 체계는, 인위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꾸장이 연결을 보장해보려고 노력해 왔던 두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 [그 두 주제 중에] 우선하나는 물리학에서 그 성공을 보장했던 관찰 방법과 경험 방법을 철학에서 사용하는 필연성이다. 이것은 이제 시대의 정신이며 사람들이 이 정신을 불신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다른 하나는 이 방법에 의해 상식의 신념을 발견하는 필연성이다. 이 신념들은 모든 반성에 앞서서 모든 사람들에게 있으며, 이 신념들을 철학은 추론에 의해 인격의 실재성, 자연의 실재성, 신의 실재성을 재발견하는 것을 임무로 삼는다.그러나 꾸장은 이 방법과 이 요구 사이에서 일종의 모순을 깨달았다. 로크(1632–1704)와 꽁디약(1714-1780)에 의해 철학에서 사용된 관찰의 방법은 감각주의에 이르렀는데 비해, 꾸장(1792-1867)에게 있어서는 유물론에 이르게 된다. 이 방법은 사람들이 연대를 해야 했던 “가련한 철학”(pauvre philosophie)만을 만들었다. 따라서 독일 철학은 이 방법을 내버리고, 온절대자(l'Absolu)에 대한 일종의 직접적 직관에 의해 이 신념들을 재발견하고자 노력했다. 이 절대자로부터 출발하여 우주를 구축하는 독일 철학은 완전히 추상적인 가설만을 진술할 수 있을 뿐이다. 비난할 수 없는 귀납법에 의하여 형이상학적 주장들에 이르는 것과 같은 관찰의 방법을 찾는 것, 그런 것이 꾸장의 목표였다. 이처럼 형이상학적 주장들은 물리학적 법칙들만큼이나 “과학적” 특성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581)
이 요구에 응답하는 관찰의 방법, 그것은 꾸장이 이해한 대로 심리학이다. 관찰은 이제까지 파손되는 귀결들에 귀착하는 데, 왜냐하면 그 관찰은 불충분하고 게다가 거의 깊이파고 들지 못한다. 실험 방법의 아버지인 베이컨(1561-1626)은 관찰을 물리학적 사물에 제한하면서, 그 관찰에게 처음에는 길을 잃게 했다. 베이컨으로부터 꽁디약(1715-1780)이 나오게 되는데, 꽁디약은 정신의 내용을 감각에, 즉 우리 속에 있는 사물의 수동적 인상에 제한했다. 라로미기에르(1756-1837)는, 주의(主意)와 같이 환원할 수 없는 활동적 현상들의 현존을 주목하면서 꽁디약을 수정했다. 특히 멘드비랑(1766-1824)은거기에 자아의 의식을 연결했던 내적 활동성을 밝혔다. 이리하여 그들 속에서 두 가지 인식 역량들의 관념이 태어났다. 하나는 수동적이고 감각작용이며, 다른 하나는 능동적이며 의지이다. 그러나 이 철학자들이, 한사람[꽁디약]이 그런 것처럼 다른 사람도[멘드비랑] 마찬가지로, 능동적 역량을 이법 즉 원리들의 역량들과 혼동하는 잘못을 범했다. 사람들은 원인으로 간주한 자기 자신의 통각(l’aperception)으로부터 원인성의 보편적 원리를 끌어내기 위해서, 멘드비랑의 성공하지 못했던 노력 속에서 이것들 중의 하나의 예를 보았다. 이런 [종]류의 보편적이고 필연적 원리들은 제3의 역량의, 즉 이법[이성]의 대상이다. 이법[누스]은 감각작용의 우연적 자료(la donnée)를 넘어서 능동적 자아의 독립적 대상들을 인식한다. 그러한 것이 꾸장이 이르게 된 세 부류의 인식능력, 즉 감각성, 의지, 지성이라는 그의 유명한 이론에 대한 고찰들(considérations 연구들)의 [종]류이다. 그에 따르면 이 이론은 자기의 관찰의 결과물이다. 그 결과물은 인식역량들의 분류를 하는 것이지, 사람들이 믿었던 대로 역량들의 발생을 다룬 것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원리들의 필연성과 보편성은 감관의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자격을 지닌 사실들이다. 그런데 소위 말해서 관찰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는 역량들의 삼중성(triplicité, 삼첩성)을, 꾸장은 일종의 변증법적 논증을 통해 다른 곳에다가 세우려는 과오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가 말하기를 삼중성은 의식 조건이다. 왜냐하면, 자아는 감각작용으로부터 구별됨으로써만이 스스로를 깨닫기 때문이고, 그리고 자아는 유일한 이법[이성]의 개입에 의해서만이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582)
심리학적 분석의 중요한 획득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의식의 무매개적 자료로서 이법[이성]의 발견물이다. 왜냐하면, 이법의 의해서 심리학으로부터 존재론으로 이행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존재론은 형이상학에게 그것의 확실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의식적 사실들인 합리적 원리들의 응용, 즉 다른 의식적 사실들에게 응용이며, 이 원리들의 응용은 의식 밖에 있는 존재들에 관한 주장들로 이끈다. 의식과 존재 사이에 놓인 다리[연결] 이라는 이 이법 덕분에, 우리의 출발점에서부터 접근 가능할 뿐인 내적 자료들에 제한[한계에 부딪힘]은 우리를 주관주의적 관념론에 가두어 두지 못하게 한다. 이 원리들은 두 가지로 귀착된다. 즉 인과성과 실체이다. 의지의 내적 현상들에 적용된 원리들은 자아실체를 부여한다. 감각작용의 현상들에 적용된 원리들은 외적 실체 즉 감각의 원인인 자연을 부여한다. 결국 이 실체들은 이것들 자체 속에 이법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신이라는 절대적 실체로 되돌려 보낸다. 이 다섯 선들은(ces cinq lignes)꾸장의 형이상학 전체를 포함한다. (582)
따라서 실재적 존재들은 꾸장의 학설 속에서는 합리적 귀납법에 의해서만 도달되었다. 합리적 귀납법은 의식적 사실들(faits) 즉 주어진 자료들(donnés)에서만 출발한다. 사람들은 그러한 귀납법이 가능한지를 모든 부분들에서 이의를 제기했다. 귀납법이 기대고 있는 이법은 그 자체로 순수하게 주관적이고 인격적이며 의식적 사실이며, 그리고 사람들은 이법에 의해서 의식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반대는 두 가지 형식들로 제기되었다. 하나는 칸트학파이고 다른 하나는 신학 학파이다. 한편 칸트학파는 (칸트를 심리학자로 만든 꾸장에 의해 해석되었던 것처럼) 원리들의 필연성으로부터 원리들의 주관성으로 결론을 끌어내었다. 이 원리들을 믿는 우리가 지닌 신념에 대해 저항불가능하다는 특성은 자아의 관점에 비추어서 의존성과 상대성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라메네(Lamennais)와 함께 하는 신학 학파는 전통과 상식에 대립되는 이법 속에서 순수하게 개인적인 활동성을 보았다. 그 개인적 활동만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런데] 꾸장은 이 양 학파들에게, 매우 명석한 이론들에 속하지 않는 것인 “비인격적”(impersonnelle) 이법의 이론으로 응답한다. 사람들은, 그가 직접적으로 절대에 도달하는 지적 직관으로부터 나온 독일식 관념을 완전히 거부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그러한 역량은 그의 심리학적 방법에는 소용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법이 그[꾸장]가 원하는 역할을 해낸다면, 이 원리들은 자아와 연관에서 독립적이고 절대적 가치를 갖는 것으로써 인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에게는 실재적인 것과 직접 접촉하는 한 방법 또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것은 거의 불가사의하지 않는 문장으로 지적되어 있다. “그것은 관찰에 의해서이다. 필연적 원리들의 명백한 상대성과 주관성 아래서, 의식의 내밀함으로 그리고 칸트가 꿰뚫지 못했던 정도로 나는 진리의 통각(aperception, 각성)으로부터 순간적이지만 실재적인 사실에 도달하였고 그것을 분간해냈다. 이 통각은 의식의 심층들 속에서 깨닫지 못한 체 통과하면서 그 자체로서는 전혀 반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통각은 나중에 반성의 손 안에 있으면서 논리적 형식 하에서, 필연적인 개념 형성이 되게 하는 것의 진실한 토대, 즉 심층들 속에 있는 진실한 토대이다. 반성 전체와 더불어 주관성 전체는 통각의 자발성 속에서 숨쉰다.”따라서 사람들은 예외적인 조건들에서 (그 조건들의 서술은 아주 다른 야심을 가진 것으로 멘드비랑의 문체(le style)를 상기시킨다) 의식적 사실들이 아니었을 실재성들을 무매개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으리라. 이 대가를 치르고서 우리는 당연히 비인격적 이법을 갖는다. 그러나 그때는 심리학적 발판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존재론이 직접적으로 시작될 수 있다. (583)
꾸장의 체계에서 이 근본적 부정합은 마라스트가 이유 있게도 본질적으로 간주한 특징에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이 특징은 그(꾸장)를 그 시대의 모든 낭만주의 부류에 속하게 한다. 그는 자발성과 반성 사이에서 또는 대중적 용어로는 종교와 철학 사이에서 구별방식(la distinction)을 도처에서 확립한다. 또 반성은, 그 자체로서는 비어있고 불모이지만, 명석한 의식 속에서 자발성이 우선 파악한 그 무엇을 표현하는 역할이외 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그의 주장이 나온다. 이러한 구별은 세 가지 인식 역량들에도 있다. 이런 구별이 감각작용들 속에서는 거의 깨끗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활동적[능동적] 역량 속에서는 매우 잘 볼 수 있다. 이 활동적 능력에서 자발적 자유는, 즉 “무매개적 영감의 자유, 반성보다 우수하고 가끔은 반성보다 나은 영감의 자유”는 우리가 의지라고 부르는 반성을 동반했던 자유보다 필연적으로 앞선다. 반사되지도 않고 의지보다 덜 분명한, “이 자발성은 모호하며, 그리고 이 모호함은 원초적이고 순간적인 모든 것을 감싸고 있다.” 이법 속에서 이 구별로부터, 우리는 이제 막 하나의 형식을 보았다. 그 형식으로부터 모든 반성에 앞서서 진리가 이미 도달되었다는 결과가 나온다. “철학은 탐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은 이미 이루어져 있다.” (584)
이리하여 우리는 인류의 신념들을 재발견한다는 꾸장 체계의 둘째 요구에 되돌아온다. 그는 이렇게 썼다. “자아에 따르면, 아마도 헤르더(Herder 1744-1803)의 영감을 받아서. 덩어리로서(en masse) 인류는 자발적이고 비반성적이다. 인류는 영감을 받고 있다. 신적 숨결은 인류 속에서 여전히 계시되고 있고, 또 도처에서 한 형식 또는 다른 형식으로 모든 진리들이 계시되고 … 인류의 영혼은 시적 영혼이다. 이 영혼은 그 자체 속에서 존재들의 비밀을 발견하고 이것들을 예언적 노래들로 표현하여 시대에서 시대로 반향을 일으킨다. 인류성 곁에 철학이 있으며, 철학은 이것을 주의 깊게 듣고 또 이 말투들을 수집한다. … 그리고 반성의 찰나가 일어났을 때, 예술가는 자신의 천재성을 의식하지 못하기도 하고 또 종종 자기 자신의 작품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못할지라도, [철학은] 그 훌륭할 예술가에게 이것들을 존경하여 표현하게 한다.” 이 마지막 특징은 철학적 방법이 데리고 다녔던 많은 난점들 중의 하나에 속하는 암시(une allusion)이다. 결국, 사람들은 이 조건들 속에서 새로운 정신주의에게 보낸 중요한 비난의 모든 범위를, 또 대중적 신념들을 존경하지 못하는 비난의 범위를 본다. 이 대중적 신념들의 가장 완전한 표현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에 따르면 크리스트 종교이다. 꾸장과 그의 학파에 반대하여 끊임없이 다시 등장했던 범심론과 숙명론에 대한 비난은 들끓는 논쟁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지나가는 이야기로, 이 논쟁들이 루이 필립(Louis-Philippe, 1773-1850, 재위 1830-1848) 치하에서 대학인과 성직자의 각각의 상황에 의해 격화되었다는 것을 보태자. 대학에 부여한 교육의 독점과 싸우기 위하여, 성직자의 일관된 전략은, 그의 철학의 비종교적 특성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꾸장의 주장들을 받아들였기에, 비난은 더 이상 민감할 수 없었다. 그 논쟁들의 역사 전체는 매우 흥미 진진 하지만, 이 논쟁들의 상세한 내용을 젖혀두고, 토론의 중심점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그 토론은 독일에서 야코비(Jacobi, 1743-1819)와 합리주의자들이 드잡이를 했던 것과 많은 유비가 된다. 야코비에 따르면, 모든 합리주의자는 범신론으로 이른다. 꾸장의 합리주의가 그의 귀납범의 절차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꾸장은 자주 이해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는 “스콜라철학의 추상적 신”과 의식의 신을 대립으로 놓았다. 전자의 신는 “절대적 통일성을 지닌 것으로 신과는 낯선 세계보다 그만큼 상위적이고 또 앞선 것이며” 후자의 신은 자연과 인류 속에 도처에서 현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귀납법에 의해서만 신에 도달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마치 원인과 결과의 연결처럼, 신과 세계를 연결하는 소위 말하는 귀납법으로부터, 꾸장의 사유는 상징적 연관의 관념으로 쉽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 상징적 연관 속에서 신과 세계의 연관은 표본과 그 이미지의 연관과 같다. “그 학파에서 [신을] 공식(formule)으로써 이해할 수 없을 지라도, 신은 자신이 표명되는 세계 속에서, 그리고 신을 소유하고 그것을 느끼는 영혼에서 분명하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하는 신은 어느 정도에서는 인간의 의식 속에서 그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을 표현할 수 있듯이, 인간은 신의 가장 숭고한 속성들을 표현 한다.” 꾸장의 반대자들은 이러한 공식 속에서 게르만 사상의 영향을 찾는 것은 잘못이었다. 꾸장은 그것을 기꺼이 인정했는데, 특히 그가 신을 가지고 대립물들의 통일을 만들려고 한 점에서 그러하다. 즉 [통일이란] 진실하며 실재적이고, 하나이며 다수이고, 영원하며 시간적이고, 무한하며 유한하여 모두를 함께 아우른다. 덧보태어서, “세계 없는 신이 더 이상 없듯이, 신 없는 세계도 없다”고 하고, 창조는 필연성이라 한다. 확실히 이 두 주제 사이에는 근친성[밀접함]이 거의 없다.한 주제는 신을 가지고 창조적 원인을 만들어서, 사람들은 이 창조적 원인에 따라 세계로부터, 즉 세계의 우연으로부터(a contingentia mundi)라는 옛 증명에 따라서, 귀납법에 의하여 진행한다. 다른 한 주제는 세계와 인간 속에서 신적 삶의 이야기거리(에피소드) 같은 것들을 본다. 이때 사람들이 제기하는, 아마도 말일 뿐이고 어쩌면 쓸데없는, 하나의 의문이 있다. 그것은 이 둘째 주제가 범신론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것인지 아는 것이었다. 이것에 대항하여 꾸장은 범신론을 “전체의 신격화 그리고 생시몽(Saint-Simon, 1760-1825)의 신-우주”에 의해 정의하면서 스스로의 입장을 세웠다. 그런데 이것은 그 자신의 학설과는 아주 분명하게 대립된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585)
그러나 이 주제가, 내가 이미 알렸던 학설과 유사한 부정합을 학설 속에 도입하는 것은 매우 난처한 것이다. 결국 유한과 무한의 개념들과 더불어, 심리학적 입문 전체와는 독립적인 변증법이 도입된다. 심지어는 잘 알려진 전형적인 변증법적 놀이를 통해서, 꾸장은 기획하여, 의식의 근본적인 사실이 자기의(de soi)[사회적 자아] 주장과 함께 세계와 신의 주장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무신론은 빈(vide) 공식이라”는 것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때 사람들은 거기에서 내적 관찰과 닮은 어떤 것도 볼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도누(Daunou, 1761-1840)는 분석이 꾸장의 방법이 되기에는 너무 멀리 있다는 것을 주목하였다. 반대로 꾸장의 방법은, 자기[사회 자아]에 관해서 지성의 심층(le repli 겹주름)을 통해서 파악되는 관념을 가지고 사물들의 표본[모델]을 만들면서, 또 진실한 것을 실재적인 것 그 위에 높이 놓으면서, 또 원초적전형의 관념들에 미치는 계시들(les lumières)의 영향을 기다리면서, 말투로서(en paroles) 단죄하는 것으로 보이는 종합을 실행한다.비인격적 이법(la raison)의 이론이 이 방법에서 피할 수 없게 그를 이끌었다. 이런 이법은 우리를 자아(le moi)의 영역 밖으로 내놓았다. 사파리(Jean Saphary, 1796-1865)가 주목했듯이, “이법(la raison)은 우리들의 오류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법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당신이 사유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다른 한편 당신이 사유를 신성시한다… 그러한 방법, 즉 그러한 언어는 철학에 적용된 공기펌프기계이다. 사람들은 가장 완벽한 허공을 얻는다.” 그리고 독일 변증법이 절충주의의 원리에 매우 인위적인 방법으로 덧붙여진다. 사파리는 이 학설이 “하나의 외투 아래서 사람들이 우선 독일 철학을 수입하고자 시도했던” 그런 외투일 것이라고 의심했다. (586)
사람들은 꾸장이 심리학 위에다가 존재론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학설이 그에게는 모든 체계 속에 현존하는 진실한 요소들을 선택하는 데 소용이 되었다는 것, 그것은 자가당착적인 학설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체계는 부분적으로 진실하기 때문에, 일종의 총체적[적분적] 철학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말하는 선택에 도달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독일 표본[모델]들의 모방에 따라서, 체계들 속에서 어떤 법칙에 따라 연쇄되어 있는 인간 정신의 필연적 생산물들을 본다. 감관들에 예속되어 있는 정신은 우선은 감각주의를 선택하며, 감각주의는 정신을 유물론으로 인도한다. 그러고 나서 감관의 불신으로 정신은 관념론으로 인도된다. 실재성에 대한 관념론의 의심은 정신을 회의주의로 인도한다. 그러나 이법[이성]에 의해 만족될 수 없는 확실성에 대한 관념론의 요구가 정신을 신비주의에 이르게 한다. 게다가 이런 네 가지 국면의 전개는 끊임없이 다시 시작한다. 사람들은 이 순환적인 운동에서 안정된 상황으로 진보를 파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안다. 그리고 특히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는 이 계속적인 국면에서 하나의 전체 속에서 구성될 수 있는 특성들을 파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안다. (586)
빅토르 꾸장은 의도상으로 평정자(un pacificateur)이며 중재자(un arbitre)였다. 생트 뵈브(Sainte-Beuve, 1804-1869)가 말했듯이 그는 철학하는 정치가로서 거대한 철학학파를 세우고자 애썼다. “이 학파는 종교에 충격을 주지 않고 옆으로 비껴 있었고, 종교와는 독립적이었으며 겉보기에는 종종 보조적이었으나 훨씬 더 보호적이었으며, 아마도 이 학파는 종교의 상속자(héritière)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몇몇 순간들에서는 지배자(dominatrice)였다”. 그의 체계가 전개되었던 공간에서 모든 논쟁들의 이유가, 아마도 종종 그 체계의 방향을 바꾸게 했던 여러 번의 기진맥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이런 정치적 포부 때문이었다. (587) (47MMB) - (12:32, 57QMD), (14:32, 57QMI)
# 참고문헌 587
H. Gouhier(1898-1994), Les Grandes Avenues de la pensée philosophique en France depuis Descartes,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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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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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 Jouffroy(1796-1842), Cours de droit naturel, 1834; Mélanges philosophiques, 1833; Nouveaux mélanges philosophiques, 1842(유고출판); Cours d’esthétique, 1843(유고); Correspondance de Théodore Jouffroy,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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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 꾸장(Victor Cousin, 1792-1867), 프랑스 철학자. 1815-1820년의 근대철학사 강의(Cours de l'histoire de la philosophie moderne de 1815 à 1820(5권; 그리고 1828-1830년까지 3권), 철학 단편들(Fragments philosophiques)(4권), 진, 미, 선에 대하여(Du Vrai, du Beau et du Bien, 1837),
1796 주프롸(Théodore Simon Jouffroy, 1796-1842)(마흔여섯), 자연권 강의(Cours de droit naturel, 1834)(2 vol), 철학 잡문집(Mélanges philosophiques, 1833, 새 철학 잡문집(Nouveaux mélanges philosophiques, 1842)(유고출판), 미학 강의 (Cours d’esthétique, 1843)(유고), Correspondance de Théodore Jouffroy(publiée avec une étude sur Jouffroy par Adolphe Lair, 1902).
1805 바르텔르미-상-띨레르(Jules Barthélemy-Saint-Hilaire, 1805-1895) 철학자, 기자, 정부요인. 꾸장씨의 생애와 편지교환(M. Victor Cousin, sa vie et sa correspondance, 1855)(3권)
1828 뗀(Hippolyte Taine, 1828-1893), 프랑스 철학자, 역사가. 19세기 프랑스에서 고전적 철학자들(Les Philosophes classiques du XIXe siècle en France, 1857).
1839 올레-라프륀(Léon Ollé-Laprune, 1839-1898) 프랑스 카톨릭 철학자, 테오도르 주프롸(Th. Jouffroy, 1899.
1876 알파릭(Prosper Alfaric 1876-1955) 프랑스 크리스트교 전문역사가, 라로미기에르와 그 학파(Laromiguière et son École, 1929).
1882 랑즈롱(Roger Langeron, 1882-1966) 프랑스 공무원, 역사가, 루이 18세의 비밀 자문위원: 롸이에-꼴라르(Un conseiller secret de Louis XVIII : Royer-Collard, 1956),
1898 구이에(Henri Gouhier, 1898-1994), 프랑스 철학자,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 데카르트 이래로 프랑스에서 철학적 사상의 중요 도로들(Les Grandes Avenues de la pensée philosophique en France depuis Descartes, 1966),
?-? 쩨렐라(Francesco Zerella, s.d.), L'eclettismo francese e la cultura filosofica meridionale nella prima meta del secolo XIX, Rome, 1952 [(F. Zerella, s.d.) 이.위키(it.Wiki) 없음] (47MMB)(57QME) (16:03, 57Q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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