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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진
유표
역이기
한신-3
팽성대전, 한군의 대패 - 한신의 책임소재는?[편집]
이후 유방은 위왕(魏王) 표(豹), 은왕(殷王) 사마앙(司馬卬) 등을 격파하며 순조롭게 진격을 거듭했다. 당시 항우는 북쪽에서 제나라와 싸우고 있었고, 유방은 다섯 제후를 끌어모아 무려 56만이라는 대군으로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彭城)에 진입했다. 이때, 제나라에서 싸움이 끝나지 않았던 항우는 3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급히 달려와 한군을 그야말로 개박살냈다. 한군은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서 10만이 죽고 수수(睢水)에서 또 10만, 도합 30만 이상이 죽었다. 그야말로 처참할 정도의 패전을 당한 것.
이 팽성대전에 대해서는 유방 때문에 한신이 공적을 세우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한신이 공적을 세우는 것을 시기했거나, 아니면 유방 스스로가 다 이겼다고 생각해서 한신 말을 듣지 않거나 하는 식으로 한신의 군지휘권을 가로막았다는 인식이다. 이후에 유방이 크게 물먹은 다음 한신이 이를 겨우 수습했다는 것이다.
다만 사기나 한서 같은 정사 기록에서는 이와 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소설 초한지 등에서는 유방의 쪼잔함과 방심(...)을 강조하기 위해 위와 같은 에피소드가 첨가되어 있고,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는 유방이 한신의 지휘권을 박탈하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팽성대전에서 끌어모은 제후연합군은 유방이 직접 통솔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유방에게 전권이 있었으며, 한신은 곁에서 유방을 보좌했거나 혹은 유방 휘하에서 일군을 담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신이 팽성전투 당시에 팽성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조본기, 항우본기, 회음후 열전, 하후영 열전, 관영 열전, 유후 세가, 조상국 세가, 한서 고제기, 한서 한신전 등의 역사 기록을 살펴볼 때 한신이 따로 움직여서 행동했다고 보기 힘들다.
그냥 이 싸움은 유방이고 한신이고 할 것 없이 한군을 비롯한 제후국 전부가 항우에게 영혼까지 털렸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한신 직속의 휘하 부대가 있었겠지만 전세를 뒤집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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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신은 패잔병을 수습하고 형양에서 유방과 만나 초나라군을 격파하여 진군을 저지했다. 이로 인해 유방은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여기서 한신이 패잔병을 수습한 후 유방과 만났다는 것에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팽성에서 패배한 후 남은 병사를 데리고 서쪽으로 도망치다가 유방을 만났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신이 패전에 전혀 책임이 없다면 팽성이 아니라 훨씬 서쪽의 후방에 있었다는 뜻인데, 그럼 패잔병을 수습한 게 아니라 지원군을 데리고 왔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또 회음후열전에서도 유방과 한신이 형양에서 만나 적을 격파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항우 본기나 하우영 열전 등에서도 유방이 형양에 도착한 뒤에 패잔병들을 모두 모을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패잔병을 모으고 수습한 게 한신만의 공은 아니라는 것. 무엇보다 소하가 관중의 인력을 모두 끌어모아 형양으로 미친 듯이 보내고 있었다.[27]
결론적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한신은 이 전투에 얽혀 있는 장군 중 한 명이다. 전혀 책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결정권을 가진 총지휘관 유방의 방심이나 팽성을 함락한 후 완전히 풀어져버린 군사 기강을 한신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패배한 측의 장군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패잔병을 수습하고 방어선을 펼쳐 초나라의 진군을 막았다는 점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쪼잔한 유방이 한신을 일부러 물먹여서 패배했다'라는 견해는 다소 왜곡된 것이며,[28] 당시에 유방과 한신의 관계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하겠다. 유방 또한 자기 입으로 "내 휘하에서 용병술로는 한신을 따라갈 자가 없다."라고 했을 정도로 한신의 중요성과 강함을 알고 있었으니, 한신의 병권을 빼앗았다거나 하는 행동을 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29]
참고로 이후 벌어진 경색전투(京索之战)에서는 기병대 관영의 활약이 컸다.[30]
여기까지의 한신의 모습을 정리해 보자면, 분명 전략적인 식견은 있으나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처럼 독보적으로 엄청난 활약을 한 것은 아니었고 팽성대전이라는 참패에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결코 나쁘지는 않은 모습이지만, 수많은 공신들을 제치고 대장군에 임명된 장수의 활약상이라고 하기엔 약간 부족한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한신의 진가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5.3. 위표를 박살내다[편집]
팽성에서 한군이 처참하게 박살나자, 항우의 지릴 듯한 포스에 정신이 번쩍 든 제후들은 죄다 편을 갈아타기 시작했다. 새왕(塞王) 사마흔(司馬欣)과 동예(董翳)가 모두 항우에게 도망쳤으며, 제·조·위나라가 모두 유방을 배신하고 항우에 붙어먹었다. 특히, 위왕 위표(魏豹)는 부모의 병문안을 가야 한다고 구라(...)를 치고는, 유방의 곁을 떠나자마자 항우의 편으로 갈아탔다(...).
이때, 유방은 위표를 다시 이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역이기(酈食其)를 보내 설득을 해봤지만, 통하지가 않았다. 그러자 유방은 무력 행사로 나가기로 하고, 한신을 좌승상으로 임명해서 위표를 치게 했다.
당시 역이기는 위표를 회유하는 데 실패했지만 위나라를 쳐야 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위군의 정보를 수집하여 돌아왔는데 유방이 역이기에게 물었다. "적의 대장이 누구이던가?"
그러자 역이기가 대답했다. "백직(栢直)이라는 인물이옵니다."
그 말을 들은 유방은 크게 기뻐하고 웃으며 "그놈은 젖비린내나는 더벅머리일 뿐이다. 그놈이 어찌 한신을 당해낸단 말이냐?"[31]라고 말하며 좋아했다.
그리고 위표를 치기 위해 군을 이끌고 가던 한신 또한 위나라에 대한 정보를 알기 위해 역이기를 만났는데, 한신은 주숙(周叔)이라는 자를 경계하고 있어서 역이기에게 혹시 위표가 주숙을 대장으로 삼지 않았냐고 재차 물었다. 역이기가 위표가 백직을 대장으로 삼았다고 재차 답해주자, 한신은 "어린 놈일 뿐이군!"이라고 말하며 좋아했다.[32]
이때, 위표는 포판(蒲坂)이라는 곳에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임진(臨晉)쪽으로 한신이 강을 건너 올 것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한신은 일부러 군을 나누어 임진 쪽에 일부 군을 두고 대군으로 보이게 끔 하여 도강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주어 속이는 한편, 그 사이에 한신 자신과 실질적인 주력은 포판보다 더 북쪽의 하양(夏陽)으로 이동시켜 목앵부(항아리를 나무에 엮어 만든 급조 뗏목)를 타고 강을 건너서 위나라의 수도 안읍(安邑)을 공격했다.
위표가 갑작스런 한군의 공격에 경악해서 군대를 돌려 안읍으로 돌아가자, 임진 쪽에서 적의 주의를 끌던 한나라군이 위나라군의 뒤를 쳤고, 안읍으로 갔던 병력 역시 위표를 공격했다. 앞뒤에서 공격받은 위나라군은 단박에 무너지고 위표는 사로잡혔다.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나라 하나를 멸망시키고, 적 군주를 사로잡은 것. 이 안읍 전투에서 위나라를 평정한 한신은 그곳에 하동군을 설치했다.
6. 한신, 북벌을 시작하다[편집]
하동을 평정한 한신은 유방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원컨대 3만 병사를 더해주시면, 신이 북으로 연(燕)‧조를 잡고, 동으로 제를 치고, 남으로는 초의 보급로를 끊은 후, 서쪽에서 대왕과 형양에서 만나기를 청합니다."[33]
그리고 장량 역시 이를 권하자, 유방은 장이(張耳)를 감군으로 삼아 병사 3만과 함께 보내주었다. 한신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유방과는 별개로 장이, 조참을 옆에 둔 채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6.1. 정형 전투(井陘戰鬪)[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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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이 위표를 격파했을 때가 8월이었다. 그런데 9월 무렵, 한신은 대(代)를 평정하고 있었다. 본래 대나라는 진여(陳餘)의 땅이었으나 진여가 조나라에서 조왕을 보필하고 있었기에 대나라는 그의 측근이었던 재상 하열(夏說)이 지키고 있었다. 한신의 군대가 몰려오자 하열이 한군을 막아보려 안간힘을 써봤지만, 연여(閼與)에서 대패하고 한신에게 사로잡혔다.[34]
대나라 정벌의 과정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 어떻게 전투가 이루어졌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뒤에 광무군 이좌거(李左車)가 계책을 내놓을 때 '한신이 연여(閼與) 땅을 피로 물들였다 합니다.'라고 말하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한군의 일방적인 공세에 대나라의 군대가 처참히 깨진 것으로 보인다.[35]
그런데 이 무렵, 유방은 사정이 급했는지[36] 한신의 부대에서 정예병들을 차출하여 형양으로 데려가 초군을 막도록 했다. 그렇다면 한신의 부대는 규모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정예병이 모두 빠지고 신병들과 위나라, 대나라에서 군사를 개편한 오합지졸의 군대란 이야기다. 게다가 조나라 정벌을 위해 조참에게 따로 군사를 맡겨 오성(鄔城)에 주둔한 조나라의 별장 척장군(戚將軍)을 공격케 했다.[37] 또한 대나라에서의 교전에서도 사상자가 있었을 것이며 대나라 땅에도 군을 주둔시켜야 했기 때문에 한신의 군세는 3만은커녕 실질적으로는 2만 내외의 오합지졸 군대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신과 장이 등은 이러한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동쪽 정형(井陘)으로 나아가 조나라를 격파하려고 했다. 이에 조왕 헐(歇)과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등은 20만[38]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한신을 막으려고 했다. 이때, 조나라의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는 조왕과 진여(陳餘)에게 자신의 계책을 말했다.
"듣자하니, 한의 장수 한신이 서하(西河)를 건너, 위왕을 사로잡고 하열을 붙잡았으며, 연여(閼與) 땅을 피로 물들였다 합니다. 오늘 다시 장이(張耳)의 보좌를 받은 한신은 조나라를 함락시키려는 계책을 의논하고 있다니, 승세를 타고 나라를 떠나 멀리서 싸우는 그들의 예봉(銳鋒)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천 리 밖에서 군량을 운송하여 먹는 군사들은 그 얼굴에 주린 기색을 띄우고, 또한 장작을 패고 풀을 베어 불을 지펴야만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군사들은 항상 굶주려 있다.'고 합니다. 지금 정형의 길은 수레가 굴러 다닐 수 없고, 기병이 대열을 이룰 수 없습니다. 수백 리를 행군하였으니, 그 군대의 군량은 반드시 뒤에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족하(足下)께서는 신에게 뛰어난 병사(奇兵) 3만을 빌려주시면, 샛길을 따라 그 수송대를 끊겠습니다. 족하께서는 도랑을 깊이 파고 성채를 높게 쌓고 적과 더불어 싸우지 마십시오. 적은 앞에서는 싸울 수 없고, 퇴각해서는 돌아갈 수 없으니, 신이 병사로 그 배후를 끊고, 들판에서 약탈할 만한 식량을 치워버리면, 열흘도 지나지 않아 두 장군인 한신과 장이의 머리를 휘하에 바칠 수 있습니다. 원컨대 군(君)께서는 신의 계책에 유의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적의 두 장군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즉 우주방어로 일관하면서, 따로 별동대를 뽑아 적의 길어진 보급로를 차단해서 박살을 내버리자는 것이었지만, 진여는 싸움은 항상 정정당당하게 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냥 싸워도 우리가 이길 텐데 비겁하게 그런 방법까지 써야겠나?"(...)라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것만 보면 인의도덕만을 내세우다 송양지인(宋襄之仁)의 주인공이 되어 웃음거리로 전락한 송양공(宋襄公)처럼 보일 수가 있는데, 그렇다고 진짜로 진여가 송양공을 따라한 멍청이는 아니었고 나름대로 병법에 기초한 이유가 있었다. 진여는 이좌거의 계책에 반대하며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내가 들으니 병법에 아군이 적군의 열 배가 되면 포위하고, 두 배가 되면 싸우라고 했소.[39] 지금 한신의 병력이 수만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수천에 지나지 않소. 게다가 천리 먼 곳에 와서 우리를 치는 것이니, 역시 벌써 아주 지쳤을 것이오. 지금 이런 적을 피하고 치지 않는다면 나중에 대군이 쳐들어올 때에는 어떻게 싸우겠소? 그렇게 되면 제후들이 우리를 비겁하게 여기고 함부로 쳐들어올 것이오."
즉, 조나라의 군대가 실제 20만이 되지는 않더라도 분명 한군의 몇 배에 달하기에 질질 끌지 말고 단숨에 제압해야 주변 국가들에게도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며, 거의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으니 공격만 해도 절대 질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진여의 영지인 대나라가 한신에게 털린 상황이니 오합지졸에 불과해보이는 한나라 군대를 최대한 빨리 섬멸하고 실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여의 입지가 아무리 확고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조왕의 신하에 불과하니, 압도적인 병력 우세를 앞세워 단기결전 후 실지 회복을 노리는 게 사실 정상이다. 그리고 조왕 또한 이러한 진여의 생각을 받아들여, 진여를 대장으로 삼아 한군을 상대하도록 하였다. 당시 양측 군대를 비교했을 때 조나라 군대가 수도 몇 배는 더 많았고 훈련도 더 잘 되어 있었으며, 자기네 영토에서 싸우기 때문에 지리적 이점과 보급 면에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진여의 계책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석적이었다. 상대가 한신이었다는 걸 감안하지 못했을 뿐.[40] 한신은 첩자를 보내 염탐하였는데, 첩자로부터 이좌거의 계책이 쓰여지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대단히 기뻐하였다. 이좌거의 계책은 멀리 원정군을 이끌고 온 한신으로서는 가장 상대하기 힘든 대처법이었기 때문이다.
여튼 이 소식을 접한 후 한신은 지체없이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나섰는데, 당시 조나라군은 정형구(井陘口)의 누벽에 군을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이에 한신은 정형의 약 30리 앞에서 야영을 했다. 그리고 새벽이 되자 몸을 가볍게 한 경기병 2천을 따로 선별하여 그들 모두에게 한군의 깃발인 적기를 나눠주며, 정형 앞 샛길을 통해 몰래 병사들을 산으로 보낸 후 조나라 군대가 있는 누벽을 보게 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조나라 군대는 우리가 달아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누벽(壘壁)을 비워놓고 우리를 쫓아올 것이다. 너희들은 그 사이에 빨리 조나라 누벽으로 들어가서 조나라 깃발을 뽑아버리고 한나라의 붉은 깃발을 세워라."
게다가 이후 어떤 일련의 움직임을 보여주었는데.. 그 당시로서는 모두가 경악할 만한,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이 전투의 하이라이트와 같은 명령을 내렸다.
당시 정형의 조군 앞에는 '면만'(綿曼)이라 불리는 강이 있는데, 이를 면만수(綿曼水)라 불렀다. 그리고 이곳에서 한신은 가뜩이나 병력도 없는 상황에서 오합지졸의 군사들 중 1만 정예군을 따로 조직하여 이 면만수를 건너게 한 뒤, 강을 뒤에 두고 진영을 치게 했다. 오래전부터 손무(孫武), 오기(吳起), 사마양저(司馬穰苴) 등 기라성 같은 병법가들을 비롯한 많은 명장들이 경고했고 심지어 일반 병졸들도 알고 있으며 절대 해서는 안 될 금기인 등에 강을 지고 진을 치는 배수진(背水陣)을 펼친 것이다. 그러고서는 한술 더 떠 오합지졸의 1만 정예병들을 제외한 나머지 군사들과 노약자들로 부대를 구성하였다.
배수진만으로도 이미 요단강을 눈 앞에 둔 것과 같은데 적이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곳에서 병력을 분산시키는 아주 대담하면서도 위험천만한 행동을 한 것이다. 만약 이때 진여가 군사를 보냈으면 패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우려하였으나 한신은 한 군리(軍吏)에게 이렇게 얘기하며 조나라군이 먼저 나올 일은 없을 거라 단언했다.
"조나라 군대는 우리보다 먼저 유리한 지점을 골라 누벽을 쌓았다. 또 저들은 우리의 대장기와 북을 보기 전에는 우리의 선봉을 공격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좁고 험한 곳에 부딪쳐 돌아가 버릴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즉, 진여는 한군을 이곳에서 전멸시켜 한 번에 끝내고자 하니, 한군이 병력을 나누더라도 도망칠 것을 우려하여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며, 그 말은 그대로 적중하였다.
한군의 배수진을 보고 진여는 물론 일반병사들까지 웃었으며, 진여는 "역시 한신 저 놈은 병법을 모르는 게 확실하다."라고 여겨 한군이 가까이 공격해 오면 전군을 보내 일거에 소탕하려고 했다. 그리고 한신은 날이 밝자 모든 군사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 조나라 군대를 격파한 뒤에 모여서 잔치를 하자!"
실로 패기 넘치는 발언이었고, 당연히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각한 병력차와 물자 부족 및 보급 문제, 그리고 도무지 자신들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작전으로 이길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사들은 물론 장수들도 건성으로 "네, 네" 하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한신은 앞서 진영에 남겨둔 병력을 제외한 군사들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장이와 함께 몸소 직접 조나라 군대에게 북을 울리며 도전하였다. 물론 조나라 군사들은 모두 비웃기만 했으며 당연히 이 도전을 받아들여 출격하였다. 그러나 비록 한군도 두려워하며 출정할 때는 건성으로 대답하곤 했으나, 이미 배수진을 치고 진격하니 그들 또한 인간이기에 살고는 싶었으나 도망갈 곳이 없음을 알고서는 오로지 살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한신이 노렸던 점이었다. 살기 위해 미친듯이 싸우는 군사들의 패기(霸氣)와 살기(殺氣)란 실제로 엄청났다.
그래서 수적으로도 매우 우세한 조나라 군대였지만 이러한 한군의 저항에 놀라 쉽게 한군을 밀어내지 못한 채 전투가 지속되어 그 사기가 크게 꺾였다. 허나 전력차가 워낙 컸으며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기에 한군은 이내 감당하지 못하고 병사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것이 연기가 아님을 숨기기 위해 적은 병력으로 오랫동안 싸웠으며, 도망칠 때도 리얼함을 보여주기 위해 대장기까지 버리고 강가에 쳐둔 진까지 도망쳤다. 비록 초반의 완강한 저항에 눌리긴 했으나, 오히려 이러한 저항과 도망치는 리얼함에 속아 넘어간 진여는 요새에 있는 군대까지 모두 출격시켜 도망치는 한군을 추격해 섬멸하려 하였다.
한신, 장이를 비롯한 한군이 도망쳐 강가에 있던 진영에 이르자 진을 지키던 군사들이 문을 열어 그들을 맞이하였고, 진여가 정형에 있던 조나라의 모든 병마를 이끌고 누벽을 비운 채 나오자, 한신은 강가에 진을 쳐둔 1만의 정예병과 합세하여 20만 대군에 맞섰다. 그리고 이제 진짜 도망갈 곳조차 없음을 알게 된 한군은 강을 등지고 필사적으로 싸웠는데, 질적으로는 밀리지만 목적 의식 자체가 다른 한군은 살고자 하는 일념하에 미친개처럼 싸웠고 조나라 군대는 한군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철수하여 진영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조나라 군대의 배후로부터 엄청난 고함소리와 함께 진영에는 이미 한군의 적색 깃발이 도배되어 휘날리고 있는 것 아닌가!!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면, 새벽녘 양쪽 산에 숨겨둔 2천의 경기병들이 줄곧 매복해 있다가 조나라 군대가 한신의 말대로 정말 누벽을 비운 채 전군이 공격을 나가자 한신이 진영에 합세하여 배수진에서 미친 듯이 버티고 있을 때 그 틈을 타 매복해 있던 경기병 2천이 우회하여 적의 누벽을 급습한 것이었다.[41]
이렇게 한신의 예상대로 모든 계책이 성공했고, 조나라 군사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있던 누벽이 한군에게 점령된 것을 보자 아연실색했다. 허와 실을 모르는 조군은 한군이 이미 누벽을 점령해 돌아갈 곳도 없는데 누벽에 휘날리는 많은 수의 깃발을 보자 얼마나 많은 수의 한군이 후방에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기에 포위된 채 뒤에서 한의 대군이 공격해올 것이라 생각하여 그 공포감이 엄청난 속도로 퍼져나갔고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 와해되어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이러한 광경을 본 진여가 병사 몇 명의 목을 베어 막으려 했지만, 이미 패닉에 빠진 조군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왕과 진여도 급히 도주하였다. 이렇게 조군 전체가 혼란에 빠져 도망치자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어 한신은 조군을 추격하였고 뒤에 누벽을 점령한 병사들도 함께 공격해오자 앞뒤로 협공을 당하자 조군은 이제 퇴각하여 도망치기 바빴으며 오히려 조군이 강 속으로 뛰어드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이곳 정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한신과 한군은 계속해서 조군을 추격하여 지수(泜水) 부근에서 진여(陳餘)의 목을 베었고, 조왕 헐(歇)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결국 반나절 만에 조나라의 20만 대군을 물리치고, 단 한 번의 싸움으로 하루 아침에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전투가 끝난 후 정말 한신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조나라 진영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여러 장수들이 전투 전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한신의 용병술에 탄복하면서 절대 이기지 못할 것이라 여기며 한신의 전술을 믿지 못한 자신들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의문어린 표정과 어조로 한신에게 물었다.
"병법에는 '산릉(山陵)을 오른편으로 해 등지고, 수택(水澤)을 앞으로 해 왼편으로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장군께서는 저희들에게 도리어 물을 등지는 배수진(背水陣)을 치라고 명령하시고, 조나라를 깬 뒤에 잔치하자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마음속으로 승복하지 않았으나, 허나 결국은 이겼습니다. 이것이 대체 무슨 전술입니까?"
그러자 한신은 여제껏 장수들이 의문을 품어왔던 전술에 대한 질문에 웃으며 명쾌히 답했다.
"이것도 병법에 있는 것이다. 다만 그대들이 살펴보지 않았을 뿐이다. 병법에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 '사지에 빠뜨린 뒤에야 살 수 있고, 망지에 놓은 다음에야 보존할 수 있다.' 또한 내가 평소부터 훈련받은 사대부들을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았던 시장 바닥의 사람들을 몰아다가 싸우게 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들을 죽을 땅에 두어서 사람마다 자신을 위해 싸우도록 만들지 않고, 이제 그들에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준다면 모두 달아날 것인데, 어찌 그들을 쓸 수 있겠는가?"
한신이 이것 또한 병법에 있는 것이라 하였지만, 배수진(背水陣)은 줄곧 금기처럼 여기던 전술인데 한신이라 하여 어찌 이것을 몰랐겠는가? 허나 한신의 말처럼 그가 이끌던 병사들은 어딘가의 정예병이 아닌 시장 바닥에서 놀던 사람들을 급히 모아 만든 오합지졸의 부대였다.[42] 위나라와 대나라에서 모병된 군사들도 많았기에 한군에 대한 애착이 없어 살 길이 생기면 도망치기 바빴을 것이며 기존 한나라의 군사들 또한 신병이기에 조금만 패색이 보여도 도망쳤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신 또한 어쩔 수 없이 고민 끝에 병법을 응용하여 군사들을 사지로 내몰아 그 능력을 극대화시켜 죽기살기로 싸우게 하였고, 한편으론 상대의 생각을 읽어 과감한 행동으로 진여와 조나라군을 방심하게 만들고 자만하게 하여 계획을 손쉽게 이끌고 갈 수 있었다.
즉, 한신은 이러한 한군의 상황과 진여의 심리를 자세히 관찰하고 따져 계책에 계책을 더한 용병술을 썼으며, 배수진(背水陣)이라는 금기이자 위험한 상황을 오히려 대전략으로 승화시켜 지금까지도 계속 쓰이는 금기가 아닌 전략적 배수진(背水陣)의 정의를 만들었다.
이 조나라와의 정형 전투는 전략, 전술적 관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초한전쟁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한신의 이름이 온 천하에 알려져 명성과 위세를 떨쳤으며, 동시에 한신이 북방에서 자리를 잡아 세력을 키우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반면 항우는 전선이 늘어져 북쪽에 적을 두게 된 탓에 군을 나눠야만 했다.
또한 후대에 한신의 이 배수진을 얼치기로 따라하려다가 강가를 피로 물들이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좋은 예로 읍참마속의 그 마속이 있으며, 신립의 탄금대 전투를 이 얼치기 양산형 배수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런 얼치기 배수진과 한신의 배수진을 비교해보자면, 한신의 군사들은 애초부터 상식적이고 규칙적인 전술을 운용할 수 없는 잡배들이었기에 한신으로서는 뭔가 변칙수(배수진으로 모든 사람들의 원초적 욕망인 생존의지를 자극함)를 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거기에 이러한 잡졸들의 의지만으로는 전술적 승리를 불러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2000의 경기병을 활용하여 적의 사기와 진형에 거대한 충격을 가한 것이다.(일단 성이 점령당했다는 것에 놀라고, 양쪽에서 포위당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진형이 형편없이 무너지지 않을 수가 없다.) 즉 적은 군사와 보잘 것 없는 구성성분(군사 대부분이 전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합지졸)을 최대한 알뜰하고 살뜰하게 활용한 결과물이었기에 그 승리가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지, 아무 때나 쓴다고 이길 수 있는 전술은 아니다. 쉽게 생각해도, 적군이라고 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즉 한신의 배수진은 오합지졸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힘(생존 의지)을 통해 활용가치를 최대한 끌어올린 것이지, 아무 정예병이나 강물 앞에 들이붓는 것이 아니다.[43] 정예병들은 그 외에도 다르게 더 잘 쓸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적이 보다 신중하여 위에서 언급된 이좌거의 계책대로 성문을 걸어잠그고 한신이 말라죽기를 기다렸더라면 이러한 전술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성공한 전략에는 운도 따라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4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