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下有始 以爲天下母 천하유시 이위천하모 旣得其母 以知其子 기득기모 이지기자 旣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 기지기자 부수기모 몰신불태 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 색기태 폐기문 종신불근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 개기태 제기사 종신불구 見小曰明 守柔曰强 用其光 견소왈명 수유왈강 용기광 復歸其明 無遺身殃 是謂習常 복귀기명 무유신앙 시위습상
의역: 천하의 시작점이 있었으니 바로 천하의 어미라. 그 어미를 얻었기에 그 자식의 정체를 알 수 있다. 또 그 아들을 알고 어미의 품으로 돌아가 따르니 종신토록 위태롭지 않다. 色界를 향한 감각을 닫을 수만 있다면 종신토록 수고롭지 않을 것이다. 五感의 문을 열어 색계의 번잡 함에 빠져들면 평생토록 빠져나오지 못한다.
빅뱅이전 응축되었던 본질을 깨닫는 것을 밝음이라 부르고, 生氣를 퍼트릴 수 있는 부드러운 에너지를 유지하는 것을 강하다 한다. 그런 이치를 따라 밝음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절대로 재앙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習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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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전능한 시간이 인간 속으로 스며들었다. - 괴테
인간은 우주 근원과 생명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혼신의 힘을 쏟는다. 움직임과 변화를 만들어내는 주체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우주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인간은 왜 이렇게 행동할까? 이런 의문점들의 본질은 움직임과 변화가 어디에서 출발하였나를 알고 싶은 것이다. 왜 알아야만 할까?
존재가치를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고 의문점이 풀려야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행위의 본질은 인간의 집착이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종교, 철학은 인간 본성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룬다. 始原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 인간세계를 다룬다. 사주팔자도 물질의 미래에 집중한다. 언제 돈을 벌고, 승진하고 자식을 얻고, 집을 사고 등 물질에 대한 궁금증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우리의 始原을 찾을 수 있을까? 지구? 태양계? 은하? 결과적으로 우주에 찬란한 불꽃이 폭발하던 순간으로 돌아가야만 하고 그곳을 지나 빅뱅 이전의 시공간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존재의미가 더욱 명백해진다. 老子도 빅뱅 이전을 언급하고 있지 않은가? 빅뱅 이전과 이후의 움직임과 변화를 알 수만 있다면 우주의 道紀를 아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빅뱅의 장엄한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 열, 찬란한 불꽃이 폭발하는 순간이다. 종교도 철학도 인간본성을 연구하지만 우리는 별 먼지가 아닌가? 그렇다면 빅뱅 이전과 이후의 움직임과 특징 그리고 변화를 살펴야만 우주, 자연, 인간 본성을 명확하게 이해할 것이다.
책 도입부에 양자역학, 시공간, 열과 중력, 무와 대칭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던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老子의 道는 이것들의 중심 혹은 언저리 어딘가에 숨어있다. 왜냐면 빅뱅 이후에 생겨난 시공간과 찬란한 불꽃, 熱이 지구와 우리의 현재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52章은 빅뱅 이후의 순간을 설명하고 있다. 과학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천지가 생겨나던 순간을 그려낸다. 老子는 이 순간을 道紀라 부르고 道의 본질로 이해하고 있다. 52章은 道의 의미와 道를 따르는 방법을 설명한다. 老子의 주장은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천지창조 과정을 설명하는 老子에게 통치, 전쟁, 양생으로 활용하는 잘잘한 주제들이 달가울 리가 없다. 천지가 열리는 순간, 우주를 만들어낸 에너지를 아름다운 스토리로 설명하는 老子의 뜻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天下有始 以爲天下母(천하유시 이위천하모)
천하의 시작점이 있었으니 바로 천하의 어미라.
지구의 하늘과 땅이 열리는 순간을 天下로 상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빅뱅처럼 야구공만한 크기의 어떤 것이 한 순간 시공간이 열리고 우주가 탄생하던 시점을 천하의 어미라고 상상하자. 天下母는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으로 “道”를 만들어낸 본질이다. 창조능력을 가졌고 움직임과 변화의 기준이다.
旣得其母 以知其子(기득기모 이지기자)
이미 그 어미를 얻었으니 자식도 알 수 있다.
어미는 有物混成으로 周行不殆의 움직임이다. 따라서 그 자식도 모친을 따를 것이다. 끝없는 움직임을 통하여 천하에 生氣를 퍼트리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旣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기지기자 부수기모 몰신불태)
또 그 아들을 알고 어미의 품으로 돌아가 뜻을 따르니 종신토록 위태롭지 않다.
현재의 움직임과 변화를 살피면 어미가 만든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 뜻에 따르면 평생 위태로울 것이 없다. 만물이 어미에 순종하고 뜻을 따르니 어찌 위태로울 것인가? 그렇다면 復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색기태 폐기문 종신불근)
色界를 향한 감각작용을 닫을 수만 있다면 종신토록 수고롭지 않다.
오감작용에 휘둘리지만 않으면 평생토록 평안할 것이라. 눈에, 귀에, 감각에 속아 物質의 세상에서 더 많은 물질, 권력, 명예, 화려한 삶을 쫒으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간택의 고통 속에서 살지 말라. 天下 母는 淡하고 無味하기에 그 자식도 반드시 그래야한다. 이 문장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老子가 色界의 화려함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13章에도 나타난다.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오소이유대환자 위오유신 급오무신 오유하환)
내가 큰 우환을 가진 이유는 육체를 가졌기 때문이니 만약 없다면 무슨 우환이 있을 것인가?
이 문장은 심각한 편견을 가졌다. 老子는 色界의 존재, 생명체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塞其兌 閉其門 해야만 종신토록 수고롭지 않고 육체를 없애야만 大患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을 이해하기 어렵다. 天下 母가 원하는 것은 마치 생기를 없애려는 것이라는 황당한 논리처럼 보인다. 인간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老子의 주장은 에고(ego)와 이기심과 물질욕망을 억제하라는 것이다. 色界의 화려함에 속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 간택하지 말라는 다른 표현이며 생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개기태 제기사 종신불구)
오감의 문을 열어 번잡함에 빠져들면 평생토록 구하지 못한다.
모든 감각의 문을 열어서 色界를 추구하면 물욕에 고통 받을 것이다.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변화는 천지창조요 지구생명체의 가장 위대한 변화는 눈을 갖게 된 것이다. 화석기록에 따르면, 캄브리아기는 동물들의 신체구조에 혁신이 이루어졌던 시기로, 5억 4,800만 년 전 즈음 500만 년에서 1000만 년의 짧은 기간에 오늘날까지도 사용되는 신체의 디자인이 한꺼번에 만들어졌다.
선충류에서 사람에 이르는 모든 생물이 캄브리아기에 만들어진 구조를 사용한다. 이 시기에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동물 하나가 눈을 떴는데 최초의 삼엽충이 출현했다. 빛을 받은 생명체들은 광합성이 가능해졌고 에너지를 얻게 되었다.
이것이 老子가 설명하는 開其兌 濟其事의 시작점이다. 눈을 통해 빛에 적응하면서 彼我의 분별이 생기고 간택함이 생겨났다. 육체를 보호할 갑옷을 두르고 色을 과시하여 적으로부터 도망갈 방법을 연구한다. 눈을 가졌기에 시야가 생겨났지만, 五感을 활짝 열고 번잡함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十干으로 표현해보자.
1. 癸 어둡지만, 五感에 휘둘리지 않는다.
2. 丙 밝음, 눈, 빛 화려한 색계를 보면서 분별이 생겼다.
3. 庚 꽃, 열매, 물질, 탐욕이 생겨났다.
4. 辛 죽음, 씨종자. 열기를 축적하여 중력으로 느려지고, 사망한다.
見小曰明 守柔曰强(견소왈명 수유왈강)
그 작음을 볼 수 있음을 밝음이라 부르고, 부드러움을 유지할 수 있음을 강하다 한다.
이런 표현들은 이상하지만 이미 살펴보았다. 빅뱅 이전의 상태는 樸雖小다. 극도로 응축되어 있지만 獨立不改요 天下 母의 본모습이다. 따라서 이런 이치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明이다. 守柔와 弱은 만물을 이롭게 하는 필수조건이다. 수소와 헬륨처럼 공간팽창을 목적으로 하는 작용력이다. 빅뱅 이전은 小, 빅뱅 이후는 柔弱을 체성으로 한다. 小는 인간의 판단에서 小다. 가치 없고, 중요하지 않은 어떤 것이지만 실제로는 우주 어미의 본질이다.
用其光 復歸其明(용기광 복귀기명)
그 빛을 기준으로 밝음으로 돌아가리.
用其光은 見其小로 우주 어미의 본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明으로 돌아간다. 어미가 만들어놓은 세상의 이치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
無遺身殃(무유신앙)
재앙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오욕스럽게 살지 않을 것이다. 오감에 구속되지 않는다.
是爲習常(시위습상)
이것을 習常이라고 한다.
常은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다. 위의 문장들과 연결하여 習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常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여기에 어울리는 시를 올려본다.
是是非非都不關 시시비비 따질 이유가 없다네.
山山水水任自閑 산과 바다는 모두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네.
莫問西天安養國 서쪽 하늘에 정토가 있는지 묻지도 말게나.
白雲斷處有靑山 흰 구름 걷히면 청산은 스스로 드러나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