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39구간(건의령-댓재)
1.산 이름 : 덕항산, 황장산
2.소재지 : 태백시 하사미동 9-6, 삼척시 하장면 두타로 680
3.산행코스
: 건의령 ←(1.1km)→ 푯대봉갈림길 ←(1.8km)→ 한내령 ←(3.6km)→ 구부시령 ←(1.1km)→ 덕항산 ←(1.7km)→ 지각산 ←(1.5km)→ 자암재(장암재) ←(2.3km)→ 1058.6봉 ←(1.0km)→ 큰재 ←(1.8km)→ 1059봉 ←(2.4km)→ 황장산 ←(0.61km)→ 댓재
건의령(835m)- 푯대봉(1,009m)- 석희봉(1,162m) - 1,055봉- 구부시령(1,007m) - 덕항산(1,071m) - 지각산(환선봉)1,080m)- 자암재(932m) - 귀네미마을 채소단지 - 큰재(1,002m) - 황장산(975m)- 댓재(810m) 도착//산행종료
4.산행거리 및 소요시간 : 약 15.21km, 산행시간 : 6시간 30분
5.산행안내 : 태백 모텔 숙박, 태백터미널-건의령 버스(07:00)
건의령(08:00)터널 오른쪽 언덕길 출발, 댓재(16:00)도착
건의령-댓재
태백 모텔에서 숙박을 하고 터미널에서 임계가는 버스가 건의령 삼거리를 통과하므로 6시 20분 버스에 올랐으나 학생들 등교 시간에 마춘 버스라서 골짜기 동네마다 운행하면서 동쪽 태백 길을 돌아 다녀 다닌다. 마지막 건의령 삼거리에 내려서 10분 정도 어제 내려온 터널 입구까지 길을 따라 걸어서 올랐다.
한의령(寒衣嶺, 해발 806m)-건의령
태백 상사미에서 삼척 도계로 넘어가는 고갯길로 건의령이라고도 한다.
고려말 때 삼척으로 유배온 공양왕이 근덕 궁촌에서 살해되자 고려의 충신들이 이 고개를 넘으며 고갯마루에 관모와 관복을 걸어 놓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겠다고 하며 고개를 넘어 태백산중으로 몸을 숨겼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유서 깊은 고개이다.
여기서 관모와 관복을 벗어 걸었다고 하여 관모를 뜻하는 건과 의복을 뜻하는 의를 합쳐 건의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건의령(巾衣嶺) 또한 이정표 곳곳에 한의령과 겹쳐 표기하고 있다. 고려가 멸망하면서 고려 신하들이 두 번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두건과 관복을 벗어 걸어두게 된 데서 고개 지명이 유래됐다는 설로 보아 건의령이 맞을 듯하다.
굳이 지명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이유는 있다. 공공의 목적을 가지고 지명을 표기할 때는 고증된 자료를 근거로 이정표에 표기해야 한다.
특히 산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이정표는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주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같은 곳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중복 또는 잘못된 지명으로 표기하면 자칫 산꾼들에게 혼란을 준다.
산신각 백인교군자당(百人敎君子堂)
건의령 정상에는 예부터 백인교군자당이라는 산신각이 세워져 있으나 오랜 세월 관리가 되지 않아 지붕과 벽이 무너지고 현판이 떨어지는 등 폐허로 변했으나 산신각이 말끔히 복원돼 있어 고려 유신들의 전설과 함께 건의령을 지키고 있다.
건의령의 지명 유래는 앞서 언급했듯이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恭讓王· 재위 1389~1392)과 연관이 있다. 공양왕이 지금의 삼척 근덕면 궁촌에서 유배 중 살해되자 그를 따르던 신하들이 두건과 관복을 벗어 이 고개에 걸어두고 함백산(咸白山·1573m), 금대봉(金臺峰·1418m) 아래로 숨어들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건의령 주변은 1960년대 말을 전후해 무작위로 화전을 일구던 시대에 개간되었던 곳을 자연상태로 복원한 지역이기도 하다.
산신각 백인교군자당(百人敎君子堂)이 있는 건의령(巾衣嶺)은 백두대간을 넘어 태백 상사미에서 삼척 도계로 넘어가는 이 고갯길은 삼척 육백산 기슭에 유배된 공양왕을 배알하고 돌아가던 고려 충신들이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겠다며 복건(巾)과 관복(衣)을 벗었다고 해서 건의령이란 이름이 붙여졌지만 이정표 곳곳에 한의령과 겹쳐 표기하고 있다.
고려가 멸망하면서 고려 신하들이 두 번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두건과 관복을 벗어 걸어두게 된 데서 고개 지명이 유래됐다는 설로 보아 건의령이 맞을 듯하다.
백인교군자당’(百人敎君子堂)이라는 산신각 옆에 2L짜리 물통 두 개가 놓여있다. 왜 두었을까? 물이 모자라면 탐을 낼 텐데.......건의령은 공양왕(恭讓王· 재위 1389~1392)과 함백산(咸白山·1573m), 금대봉(金臺峰·1418m), 두문동재 등과 함께 역사의 아픔들이 묻어있건만 건의령의 가을은 수많은 사연과 애환을 묻어둔 채 무심히 맑기만 하다.
고려 충신들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건의령에서 백두대간 마루금으로 올라서면 곧이어 푯대봉을 만난다. 대간에서 약 100m 정도 이탈된 지역이라곤 하지만 우람한 정상석의 위용을 보니 대간임을 자랑하고도 남는다.
푯대봉갈림길에서 급하게 우틀하며 고도를 급하게 내린다. 만추(晩秋)에 떨어진 낙엽들은 켜켜이 쌓여 푹신푹신한 등산로를 만들어 융단을 깐 것처럼 걷기 좋게 한다.
나의 발걸음에 바스락 소리를 질러대는 낙엽들의 처연함이 벌써 겨울의 아픔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하는가 하면 한내령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은 잡목 사이를 한가롭게 걷는 편안한 길이기는 하지만 앞에 거벽처럼 솟아있는 951m봉이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구부시령 3.8km 전 지점에 철사줄로 매어진 목장초원지대인 한내령까지 고도를 낮추었다가 다시 올려야 한다.
951m봉까지 오름이 생각보다 힘들어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숨을 고르고 오르게 한다. 이후 이어진 마루금은 해발 1,000m대 근방에서 표고차가 거의 없는 완만하고 편안한 능선길을 따른다.
앙상한 낙엽송들이 벌써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가 하면 점차 덕항산이 가까워지면서 바람 한 점 없던 등로에 바람이 살살 불기 시작하더니 바람의 세기가 강도를 더한다.
한편 등로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노거수들이 이젠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다. 산길을 걷는 동안에 자연의 일부인 참나무들이 바람소리에 슬피 울고, 모진 세월의 풍상(風霜)을 겪은 나무가 뒤틀리고 휘어지고 속을 비워내고서도 대간을 지킨다.
자신들의 분신이었던 푸른 잎들을 이제 버리고 장중하게 산을 지키고 선 모습에서 거룩함마저 꿈틀꿈틀 전해온다.
잠시 오름을 지속한 끝에 구부시렁 1.3km 전 지점인 1017m봉에 오른다. 나목으로 변한 참나무 군락지엔 푸른 가지로 생을 유지하고 있는 겨우살이들이 많이 있었다.
채취를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고 싶지도 않지만 겨우살이 위에 앉은 까마귀들의 울음소리가 산객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여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조금은 힘겹게 1055m봉에 올라 뒤 돌아 보니 아스라하게 바람의 언덕에 있는 풍력발전기가 눈에 들어온다. 벌써 이렇게 많이 왔던가?
이제 바람은 생각보다 많이 불어 모자가 날아 갈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시원시원하게 자리 잡고 있는 낙엽송 군락지를 지나 태백 하사미의 외나무골에서 삼척 도계읍 한내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구부시령(九夫侍領)에 닿는다.
옛날 고개 동쪽 한내리 땅에 기구한 팔자를 타고난 여인이 살았는데 서방만 얻으면 죽고 또 죽고 하여 무려 아홉 서방을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홉 서방을 모시고 산 여인의 전설에서 구부시령이라 하였다고 한다고 하는 곳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구시부령을 지나 노랗게 낙엽 떨군 낙엽송 군락을 지나며 덕항산에 오른다. 덕항산 오르면 멀리 큰재로 이어진 마루금 사이로 풍력단지와 벌거벗은 고랭지 채소밭이 희미하게 보이고, 산 아래로는 대이리 동굴지대의 호쾌한 계곡이 펼쳐진다.
멀리 동쪽으로는 삼척시가 보이는 덕항산. 예전에 있었던 정상석은 어디로 가고 이젠 그 흔한 정상석 마저도 없다.
오늘 구간 중 대표할 수 있는 산인데도 말이다. 정상엔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을 볼 수 없고, 불어오는 바람만이 늦가을의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환선굴이 있는 대이리 주차장엔 아내를 비롯한 관광객이 타고 온 차가 주차장을 채우고 있었건만 정작 덕항산 정상은 쓸쓸함이 묻어난다. 정상의 양지바른 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환선봉을 향한다.
쉼터를 지나 아찔한 낭떠러지가 우측으로 계속되고, 저 멀리 귀네미마을 뒤에 있는 퐁력발전기가 손에 잡힐 만큼 가깝게 눈에 들어온다. 풍력발전기 뒤에 희미하게 두타산도 조망이 된다.
곧이어 환선봉을 지나 오른쪽 사면으로 내려서는 길이 너무 좋아 산행 속도는 매우 빠르다. 노란 바늘잎이 떨어진 낙엽송이 솟대처럼 서있는 숲으로 들어간다. 바늘과도 같은 낙엽송의 분신들이 켜켜이 싸이고 쌓여 푹신푹신한 등산로를 제공하고 혹시나 하여 밧줄로 등로를 유도까지 하고 있다.
잡목이 우거진 헬기장지나 순탄한 숲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환선봉으로 가는 갈림길인 자암재에 닿았다.
자암재에서 물 한 잔만 하고 1036m봉까지 오르는 꽤나 가파른 오름길을 따른다.
이후 등로 왼쪽으로는 일박 이일에도 나왔던 배추고도인 귀네미마을과 함께한다. 태백시 삼수동 귀네미마을은 해발 1000m에 자리한 전형적인 산촌으로 정감록에 피난처로 기록된 마을이다.
태백 쪽에서 올라오는 외길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귀네미마을은 삼척시 하장면에 광동댐이 생기면서 수몰지역에 살던 37가구가 집단으로 이주해 1988년에 형성되었다.
첩첩이 가로 선 산맥 사이로 보이는 동해바다에서 떠오르는 아름다운 해돋이는 동해안의 바닷가나 태백산 정상에서 보다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름철에 볼 수 있는 ‘배추의 바다’는 없고 늦가을의 황량함만이 산객을 반긴다. 척박한 땅에서 도시민들을 위한 채소를 생산하여 공급한다는 것은 좋으나 과연 그것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쓸 만한 배추들이 벼려져 있어 그 중에 제일 실한 것으로 한 포기를 배낭에 넣고 임도를 따라 큰재로 향한다.
백두대간 자락에는 수많은 고랭지 채소밭이 산재해 있다.
건의령에서 큰재로 이어진 백두대간 자락은 대표적인 고랭지채소 재배단지로 산행 내내 왼쪽에 고랭지 채소밭을 보며 걷는다.
채소를 재배하고 난 후의 채소밭들은 황량한 황토 빛을 띠고 있다. 백두대간 훼손의 주요 사례 중 하나인 고랭지 채소밭은 결국 우리들이 만든 것이다.
싱싱한 채소를 도시에 공급하기 위해 백두대간의 나무들을 걷어내고 산비탈을 개간하여 채소를 심기 위한 용도 외에는 벌거벗은 채로 있다.
많은 비가 내리면 채소밭들의 토사가 유출되어 산이 패이고 산사태가 발생하고 또한 흘러내린 토사들은 하천을 오염시킨다.
오염된 하천은 결국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는 슬픈 현실이다. 후손들에게 물려줄 소중한 백두대간을 생각하며 산길을 이어간다.
큰재까지 1.8km 남았다는 이정표에서 부터는 고냉지 배추밭 사이로 나있는 시멘트 임도를 따라 큰재까지 가야한다.
여기서 이정표만 따르면 길 찾기가 힘들 수도 있는 지점으로 각별히 유의하여 큰재까지 가야한다.
시멘트 임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길이 아닌 것 같은 좁은 숲길로 오르면 산정이 1058m봉이다. 잘 모르면 풍력발전기를 찾아간다고 생각하면 크게 어렵지 않다. 1058m봉을 오르는데 시멘트 임도에서 좀 전 헬기장에서 만난 대간꾼이 뒤를 따른다.
자신감이 떨어져 보이는 것이 길을 모르는 것 같기도 하여 큰재 1.1km남았다는 이정목에서 내려다보니 내가 오른 곳으로 오르고 있어 나 역시 편안하게 임도를 따라 대간을 잇는다.
임도를 따르며 대간 지도 있는 곳에서 차량 차단막이 있는 곳을 그대로 통과하여 임도를 조금 더 내려서면 큰재와 만난다. 이제 날머리인 댓재까지는 5km남았다.
댓재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상사전리에 위치한 고개이다. 두타산으로부터 10㎞쯤 남쪽의 산줄기에 있다.
『조선지도』, 『해동여지도』, 『대동여지도』에는 죽령(竹嶺)이라 표기되어 있다. 『진주지』에 "죽치(竹峙)는 삼척군 서쪽 60리에 있다. 아흔아홉 구비를 돌아 서쪽의 하장면으로 통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고개를 넘으면 『대동여지도』에서 말하는 죽현천(竹峴川), 즉 하장면 번천으로 갈 수 있어 예로부터 영동과 영서를 넘나드는 보행로로 이용해 왔다. 지금은 도로가 개통되어 버스가 다닌다.
큰재에서 댓재까지는 단선의 길이라 크게 어렵지 않다. 고도차도 크지 않아 큰 어려움 없이 황장산을 지나 댓재에 닿으며 산행은 끝났다.
생각보다 먼 거리를 큰 어려움 없이 짧은 시간에 마무리할 수 있어 참 좋았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오는 댓재에서 인증을 하고 댓재 민박집에 전화를 하여 숙박을 알아 보았으나 집 주인장은 외출 중이라고 2층 거실에 들어가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