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의 뉴질랜드 꽁트(239회). 뉴질랜드 타임즈. 26/06/2020
That Day~
찾아올 수
있을까
피터의 눈자위가 일렁이는 물결처럼 미세하게 흔들렸다. 숙소를 나와서 난간을 잡은 손도 파르르 떨렸다.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골드카드를 다시 확인했다. 어제 집에 두고 나갔다가 낭패를 당한 사연 때문이었다. 요즘 따라 피터의 기억력은 시도 때도 없이 출장을 갔다. 뉴질랜드
국가에서 제공해준 정부 주택에 산지도 얼추 일 년이 지났다. 원룸 타입의 조촐한 거처였다. 코로나 정국 때처럼 집에만 있기에는 온몸이 쑤셨다. 이제부터는 몸을
조금씩 움직여야 살 것 같았다. 집을 나서는데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 집, 제대로 찾아올 수 있을까~ 혹여 길을 잃고 기억이 나지 않으면 큰
일인데~
피터는 집 주변을 부러 빙 둘러보았다. 단층 자리, 연립 숙소가 갯바위에 조가비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왼쪽 끝에서 세 번째가 피터네 숙소였다. 오클랜드 남쪽 Otara의 변두리에 그나마도 작은 숙소를 지녔다는 게 고마웠다. 다니고
있는 인근 교회에서 주선해서 받은 숙소였다. 주로 섬나라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가 어려운 이민자들을 잘
돌봐주었다. 교인인 사회복지사, 리따가 서류를 만들어 정부에
신청해 거처를 배정받았다. 한국 여성을 닮은 통아 출신 리따는 세상을 떠난 딸 또래로 친근함이 묻어났다. 가족 없이 혼자서 어렵게 사는 요즘 이민 생활에 리따는 백의의 천사였다. 피터는
불과 지난해만 해도 방 한 칸짜리 셋집, 유닛을 전전하며 살았다.
피터는 주일날, 교회에
오면 앞줄에서 세 번째 맨 왼쪽에 앉았다. 아예 지정석이 되었다. 주일이면
그 자리가 편했다. 고향 집처럼 아늑해서 그날이면 그 좌석에 눌러앉았다. 교인들도 그런 피터를 기억해 주었다. 리따가 피터를 눈여겨 본 것에도
일조했다. 교회에 들어서면 피터를 연상케 하는 노인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코로나 정국으로 세 달간 교회가 문을 닫아 꽤 적적했다. 비로소
코로나 레벨1로 낮아지며 일상이 조심스레 회복되었다. 교회가
문을 여니 교회 나눔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세상 원망과
자괴감
30여 년 전, 호기롭게 뉴질랜드에 이민 올 때 기상은 옛 추억이 되었다. 겨울비에
젖은 낙엽처럼 축축했다. 피터가 그런 모습으로 떨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가족 와해는 순식간이었다. 지진이나 화재처럼 눈에 보이는 대형 사고가
아니라도 쉽게 무너졌다. 한때 전성기를 이뤘던 로마제국의 흥망성쇠나 앙코르 바트의 유적을 볼 때면 개인
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두 번에 걸친 사업이 부도를 맞은 건, 소멸의
직격탄이었다. 거기에 자궁암으로 고생을 하다 아내가 하늘로 떠나갔다.
애석하게도 그다음 해 교통사고로 딸까지 잃고 말았다. 하나 있는 아들은 가족 사업 실패
후, 멀리 베트남으로 날아갔다. 혼자 남은 피터는 중풍을
맞았다. 세상 원망과 자괴감이 108번뇌처럼 끊이지 않았다. 꽤 오랜 재활 치료를 받고서야 겨우 거동이 가능해졌다. 욕망이 조금씩
숨을 죽여갔다. 분노 기운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은 여전히 잡초처럼 고개를 내밀었다.
돈 없이 병들고 혼자면 끝날 줄 알았는데, 뉴질랜드 국가가 챙겨주었다. 뉴질랜드 재활 복지 운영이 큰 도움을
줬다. 재활 치료를 몇 년에 걸쳐 받고서야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노약한 환자 생활 수당이 나왔다. 연금도 수령하게 되었다.
급기야는 무주택까지 신경 써 주었다. 그런대로 비 피하고 입에 풀칠하고 사는데 연명은 해나갔다. 피터는 그게 참 고마웠다. 사업한답시고 한 때는 세금도 좀 많이
냈던 게 작은 위안이 되었다. 사람이 산다는 게, 혼자만은
살 수 없었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명언이었다. 가족도, 건강도, 관계도, 금전도
마찬가지였다.
고국에 사는 동갑내기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사는 게 다들 호락호락하지는 않아 보였다. 잘 된 친구도 있는가
하면, 피터처럼 아내를 잃은 경우도 있었다. 본인이 암 투병중인
친구는 힘들어했다. 자식들과 함께 사는 예는 없었다. 피터
세대는 늙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고, 자식들 뒤 바라지에도 여념 없었다. 남에게 짐이 되는 걸 경계하는 세대로 살게 되었다. 뉴질랜드에서
칠순이 가까이 되면서도 소일거리가 있고 건강한 자가 부러웠다. 주변 다른 이들에게 불편 주지 않고 독립적인
세상을 산다는 게 복이었다. 신체적 건강과 경제적 건강이 기본이었다.
정신적 건강과 사회적 건강은 그 뒤였다. 피터는 기본 건강이 부실한 편이었다.
특별한 그날
피터가 버스를 타고 오타라 시장에 내렸다. 농산물 과일 야채 먹거리들이
풍성했다. 김이 나는 만두 한 봉지를 샀다. 닭 다리 튀김도
추가했다. 상추, 감, 귤, 감자, 양파도 조금씩 집었다. 가져간
쇼핑용 보행기 백에 담았다. 며칠 먹고 살기엔 괜찮다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석양을 등지고 걸어서 숙소로 갔다. 집
입구 문 앞에 웬 비닐봉지 꾸러미가 보였다. 비닐을 풀어보니 플라스틱 팩이 나왔다.
-잡채 드셔보세요. 김 집사.
플라스틱 뚜껑에 삐툴삐툴한 손 글씨 메모가 붙어있었다. 같은 교회 다니는
할머니 김 집사의 손길이었다. 오타라 섬나라 교회에 한국 사람이 셋 다니는 데 그중 한 사람이었다. 김 집사 역시 외롭게 사는 독거노인이었다. 피터보다 열 살은 더
나이 든 김 집사도 몸은 병치레로 불편했다. 피터처럼 지팡이에 의존하고 다녔다. 골다공증으로 무릎이 쑤시고 아프다고 했다. 김 집사 역시 정부 주택에서
사는 외로운 신세였다. 동병상련의 정에 먹먹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만두 봉지를 풀었다. 플라스틱 잡채 뚜껑도 열었다. 잡채! 윤기가 흘렀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한국음식, 잡채인가. 식은 밥을 한 그릇 덜어
전자레인지에 덥혔다. 만두도 잡채도 이어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 색다른
특식으로 따뜻하게 음식을 먹게 되었다. 골고루 한입 집어넣고 오물거렸다. 피터 코끝이 찡해졌다. 그날이 그날인 날, 오늘은 특별한 그날이었다. 사람 사는 인정을 반추해보는 조촐한 저녁밥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