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 청년회 활동할 때 알던 형 한 분한테 어느 날 전화가 와서 종교분야에서 노무현 선거운동을 도와주고 있는데 같이 일할 수 있는 사람 즉 아르바이트 겸 선거운동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해달라고 하더군요.
사실 제가 국교 선생님이셨던 충남 서산 출신 어머님과 경찰이셨던 충남 서천 출신 아버님사이에서 6남매 중 막내로 60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67년 홍성국교 1학년을 입학하고 어머님께서 대전으로 전근가시는 바람에 대전 판암국교에서 선화국교로 1학년을 세 학교 다녔었죠. 73년 대전 동중을 입학하고 76년 대전고등학교를 시험봤으나 떨어져 재수하고 77년에 겨우 입학했어요. 3학년 때 큰 형님한테 폐결핵을 옮아 여름방학 내내 치료하고 학교를 마쳤으나 공부시간이 부족해 80년 서울대 농대를 입학했었죠. 아마 그 해 전두환에 의해 5.17쿠데타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전해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을 당해 뒤숭숭했던 해였죠. 당시 전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제가 들어가고싶었던 자연대를 다시 들어가기 위해서 5월에 종로학원을 다녔었는데 그때 서울역앞에서 5.17 쿠데타 반대 집회가 있었습니다. 학교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었죠 그 거리에서.. 그 후 일년 뒤 81년 원하는 학과에 들어갔었지만 두 번을 재수하다보니 동기생들과도 가까울 수 가 없었고 원래 성격도 내성적인 데가 있어서 적응을 잘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연극반에 들어가 공연을 하고 다음날 학생식당 앞에서 전두환 살인정권 타도 구호를 외치다가 도서관에서 투신자살을 했던 김상진군의 일을 직접 목도하고 우리의 사회와 역사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연극반 활동도 열심히 하고 학생운동도 열심히 했죠. 그 결과로 3학년 2학기 때 학교를 짤리고 재수를 또 결심했습니다. 자연과학의 물리학이 내 적성이 아닌 것을 알게됐던 거죠.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쉽지가 않았고 주변에 아는 선배의 권유로 84년 명동성당 청년회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해 여름 청년회 문화위원회 주최로 하는 시민민요강좌에 진행, 참여했다가 가을에 공부를 핑계로 쉬고 시험이 끝난 뒤 복귀하기로했지요. 물론 학교는 못갔고 84년 겨울, 그 때부터 종교운동을 시작했던겁니다. 그리고 87년 6월항쟁을 겪게되고 문화위원회에서 청년회조직을 맡게 되었지만 89년에 회장단직을 놓고 가톨릭문화운동연합 연극분과 소속 가톨릭극단 산맥을 만들어 90년 1월에 김대중 총재를 모시고 창단공연을 하기도 했답니다. 그 해 겨울 극단의 방향에 대한 이견이 있어 직장인 극단과 프로극단으로 나뉘어 제가 직장인 극단 무리를 만들어 운영해 나가게 된 것이죠. 91년엔 제가 다시 정당활동을 해보기 위해 민중당 중앙당 노동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하고 그해 겨울에 첫 지방자치단체선거때 태백에 가서 장성에서 선거사무장을 했었습니다. 아깝게 200표차로 떨어지긴했었지만요. 다음 해92년엔 경기도 광명시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합류했었습니다. 학교 선배가 출마를 해서 거기 사무장을 맡았었는데, 물론 민중당이죠, 인물의 문제가 있어서 5위로 그쳤습니다. 다시 중앙당으로 돌아왔지만 사분오열.... 당을 그만두고 생활전선으로 돌아왔습니다. 당 생활을 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이 세상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과 이론과 실천이 맞닿지를 않아 모두에게 전혀 설득력이 없다는 것, 경제력에 대한 자신감 결여, 그리고 일반적으로 어느어느 나이 때 되는 사람들이 갖춰야할 사회적인, 보편적인 모습에 너무 못 미친다는 것들 그래서 그것이 자격지심으로 가고 그런 것들 때문에 오히려 맹동주의로 치닫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회를 알아야겠다고 느끼는 순간 여행사를 하는 형님이 저를 부르더군요. 도와달라고...거기서 2년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영업묵기는 아니지만 영업을 하면서 배운 것도 많았고 외국을 나갔다 오는 일이기 때문에 안목도 많이 넓혀졌고..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회사가 거의 부도 비슷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제 카드가 절단이 나서 고생 많이 했지요. 한 3년 걸린 것 같습니다. 복구하는데...
그리고 94년 가을에 큰 매형이 운영하던 회사가 지난 92년 부도가 났었는데 시아버님이 할머님 돌아가시고 나서 그 충격으로 바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능력 없는 자식들이 서로 싸움을 하다가 부도가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큰 회사라 망하는 데 만해도 8년이 걸리더군요. 거기서 제 주변 아는 선후배들하고 같이 정리하러 들어갔습니다. 전 회생을 시키고 싶었지만 워낙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상태라 매각위주로 풀다가 세무서 압류로 끝을 맺고 말았습니다. 회사 정리하면서 큰누나는 큰 매형하고 이혼하고 겨우 먹고 살만한 회사하나 남겼죠.
워낙 인간이 안된 사람이라 벌써 이혼했어야 됐지만 누나가 참고 살다가 기회에 이혼을 하고 혼자 살게 된 거죠. 아이들하고.. 그 이후부턴 제가 옆에서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96년 회사를 창립하고 98년 회사이름을 바꾸고 억지로 억지로 운영해나가다 큰누나가 뇌종양으로 쓰러지면서 다시 무너졌습니다. 큰누나의 무지한 경영마인드 때문이기도 했지만 워낙 없는 자본으로 시작했던 것, 그리고 마지막에 아이들 때문에 큰 매형을 다시 받아들인 것 그러나 그 인간의 본성은 그대로였든지라 마지막 누나 사망보험까지 긁어먹고 끝내 자식들까지 내팽개치고 말았죠. 삼촌말을 그렇게 안 믿다가 엄마가 남겨 준 밑천가지 다 뜯기고 만거죠. 누나야 세상을 풍미하면서 살았지만 주변에는 많은 부담만 안겨주고 결국엔 자식까지 짐을 안고 살게 되었습니다. 저도 99년에 사표를 냈었는데 그 대 바로 누나가 쓰러지는 바람에 계속 직장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지요. 결국 2000년 9월 누나 장례를 치르고 12월에 제가 수술을 받게 되었고 지금까지 실업자로써, 요양인으로써, 환자로써 조심스럽게 재활을 위해 힘스고 있는거지요. 그러다 보니 모든 부분에서의 감각이 무디어지고 주변 사람들도 멀어져가서 좀 불안해지고 있었던 차에 그 연락이 왔었던 겁니다. 어떤 면에서 이번 선거를 치러보지않으면 눈뜨고 다신 이런 기회가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시기가 그리 부담스럽게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리고 그 선배가 저하고는 스타일이 맞을 것 같아서 선뜻 동의하고 10월 마지막 째 주부터 일을 하기로 했답니다. 물론 후보에 관한 정치적인 입장이나 개인에 관한 선호도가 맞았기 때문인 것도 있구요.
새로운 인물이어야만 나라의 미래가 밝아질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겠나 싶어서요.
제가 일했던 민중당 사람들이 대부분 한나라당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김문수(민중당 노동위원장)의원, 이재오(민중당 사무총장)의원, 이우재(민중당 총재)의원, 정태윤(민중당 비서실장) 등등 .... 참 뭐라 말할 수 없는 감회가 떠오르더군요. 자신을 빨갱이로 몰아 감방에 쳐넣고 사형 운운을 했던 검사하고 형님동생하며 산다는 게.... 인간적으로야 그럴 수 있겠지만 이념과 지향이 전혀 다른 사람들인데..... 정치에 입문하거나 국회에 들어가거나 정당에 들어가면 다 그렇게 변하는가봅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어야 되겠지요.
물론 노무현씨가 그런 많은 부분을 다 할 수 있다고는 보진 않지만 다른 사람들보다는 가능성이 많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민주당 사람들도 개과천선을 해야할 사람 많지요.
전 민중당을 선택했을 때의 의지와 이념과 지향을 잃고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비록 몸이 힘들어도 그것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지요.
선거가 끝나면 다시 제 침실로 돌아오겠지만 세상은 정말 달라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