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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 아름다운 신앙의 결산(2003.2019.12.22)
딤후4:7-8
할렐루야!
인생은 마지막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사람들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마지막이라도 아름다워야 하는데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게 아웅다웅 하면서도 마지막은 죽음앞에 모든 것을 다 내녈놓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생은 마지막에도 아름다워야 된다고 생각해 봅니다. 금년도도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마지막이 아름다운 인생의 결산도 있듯이 신앙도 아름다운 결산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주 수요일에는 성탄에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오신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이 기쁜 날을 맞이하여 오늘도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신령하신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탄생하신 감사하고도 기쁨이 충만한 날입니다. 우리들은 이 성탄절을 해마다 맞이하는 그런 행사로서의 성탄절이 아니고 진정 주님께서 내 마음에 새롭게 탄생되어지는 뜻 깊은 성탄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날 베들레헴에는 집도 많고 방도 많고, 사관도 많았지만 주님께서 탄생하신 곳은 마구간 구유였습니다. 2019년의 성탄절은 우리들 자신이 베들레헴의 마구간과 구유가 되어서 주님을 내 안에 영접하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연말이 되면 낸 세금을 되돌려 받기 위한 연말정산서를 직장에 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연말정산서를 카드회사나 보험회사 등으로 받아보면서 두 가지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첫번째는 언제 내가 이렇게 많이 돈을 썼을까?에 놀랍니다. 두번째는 좀 더 아끼고 실속있게 썼더라면?에 놀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결산하면서 우리가 잘한 것은 무엇이며,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를 깨닫고, 다가오는 새해에는 ‘새로운 신앙의 삶, 성숙된 삶 지금보다 더 가치 있고 높임 받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그런 마음의 각성이 일어나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 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시작하였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끝마치는가?’하는데 있습니다. 아무리 거창하게 시작하였다고 해도 끝맺음이 좋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인생을 싸움과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나이 많은 바울은 이제 머지않아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였습니다.
딤후4:6절‘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전제는 유대 제사법에서 일반 제물에 부어드리는 포도주와 같은 액체 제물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전제와 같이 부어졌다는 것은, 이제 육체에 담긴 모든 에너지들이 다 빠져나간 상태, 곧 죽음이 임박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7-8절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고백하면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 지점에 와서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으며, 이제 천국의 소망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인생을 싸움이나 마라톤에 비유했는데,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고전9:26-27절에 보면, 확실한 것은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인내다’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음질을 계속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끝맺음을 잘하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는 세계적인 전도자 바울이 성도로서 살아왔던 신앙을 결산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란 이름은 로마식 이름으로 ‘작은’이란 뜻을 가지고 있고, 히브리식 이름은 사울인데 그 이름의 뜻은 ‘희망’이란 뜻입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출생하여(행22:3)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교육을 받았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으로,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으로,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빌3:5-6).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사울의 모습은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고(딤전1:13),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잔해하고,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던 자였습니다(갈1:13-14). 심지어 행9:1절에 보면 예수를 믿는 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대면하게 될 때 그의 옛 사람은 산산이 부서지고 맙니다. 그런 후에 사울은 바울로 바뀌었으면 이제 그는 그의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한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갈 2:20).
바울은 지칠 줄 모르는 투혼과 열정을 가지고 4차 선교여행을 통하여 아시아의 여러 교회 들을 설립하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구속사 성취의 한 도구로서 기독교사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바울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네로 황제 치세 때에 로마의 감옥에 재차 투옥이 되었고, 이때 디모데후서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첫 번째 감금시(행28:30)와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 사슬에 매인 채(딤후1:6) 겨울옷을 찾을 만큼 그의 육체는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슬픔과 절망 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주실 상급을 바라보면서 승리한 성도로서 자신의 현주소를 6절‘관제와 같이 벌써 부음이 되고’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 ‘관제’란 민수기 15장에 보면 화제, 번제, 서원제, 낙헌제 등을 마무리하는 제사 순서입니다.
어떠한 핍박도, 어떠한 환난도, 심지어는 성도의 생명을 요구하는 그 순간에도 내세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믿음을 세파 속에 침몰시키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역경 속에서도 오히려 기쁨과 감사의 삶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본문에서는 세계적인 전도자 바울이 성도로서 살아왔던 신앙을 결산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순교의 제물로서 자신의 거룩한 죽음을 내다보며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당당히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인생의 종착역에 도달하여 자신의 신앙을 결산하는 바울의 삶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신앙의 결산을 해 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1.아름다운 신앙의 결산은 인생의 가을을 잘 보내야 합니다.
하루 해가 아침과 낮이 있으면 반드시 저녁 황혼이 오는 것입니다. 일년의 계절이 봄과 여름이 지나가면 반드시 가을이 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일생도 청년과 장년기가 지나가면 반드시 노년기, 인생의 후반이 오는 것입니다. 청년기가 인생의 시작인 아침이요 봄이라고 한다면 노년기는 인생의 마침이 되는 저녁과 가을이라고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일에는 시작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와 못지 않게 마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연초보다 연말에 인생의 마지막을 다시한번 재검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유능한 전도자요 목회자요 인생을 성공한 바울 사도 그의 노후 후반 신앙생활도 매우 모범적이 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인생의 가을은 매우 아름답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루 해가 저물어 갈 때에는 저녁노을이 아름답습니다. 일년의 계절가운데 봄과 여름도 모두 아름답지만 가을의 풍요가 주는 아름다움은 좀 더 아름답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은 ‘관제와 같이 벌써 나의 부음이 되어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고 했습니다. 관제는 피를 부어 드리는 제사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의 피를 하나님의 제단 앞에 부어 드리는 제물이 기꺼이 되겠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 앞에 땀과 눈물을 모두 바쳤습니다. 이젠 나머지 피까지 바치리라고 하는 비장한 결심입니다.
바울이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고 하는 것은 마치 출전하는 병사가 야영 생활을 다 마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고 텐트를 묶어서 출발을 기다리는 장면을 말해주는 상징입니다. 바울 사도의 후반이야말로 장엄합니다. 순결합니다. 아름답습니다. 아주 거룩합니다. 바울 사도의 노후는 결코 늙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서는 늙음을 볼 수가 없습니다. 늙어서는 아니 됩니다. 생각이 늙어 버리고 용기가 늙어 버리고, 활동이 늙어 버리고, 의욕이 늙어 버리고, 계획이 늙어 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오직 ‘성숙’이 있어야 할 뿐입니다. 인생의 무르익은 경험의 과실을 따는 때가 인생 후반기여야 합니다. 청년의 특징은 육체의 미와 힘에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의 아름다움은 인생의 후반의 특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인생의 가장 증후 정제한 아름다운 열매를 따는 때는 인생 초기가 아닙니다. 후기입니다. 인생의 후기야말로 일생을 깎아 온 인 격과 믿음이 완숙되고 아름답게 가꾸어지는 계절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을 보면 처음에 탁월하고 천재적이었음은 틀림이 없지만 배타적이고, 독선적이고, 교만하고, 냉혹하고, 편파적이고 아름답지 못한 점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점점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지막에는 세계에서 가장 흠모할만한 인격자가 됐습니다. 그에게서 사랑의 열매도, 신학의 열매도, 화평의 열매도, 인내의 열매도, 자비의 열매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도 풍성하게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경건과 겸손으로 온유로 진실로 관대로 이해로 무르익을 대로 익은 아름다운 인격과 생활이 그의 후반이었습니다. 과거의 온갖 죄악, 아름답지 못했던 것은 그리스도 안에 다 사죄를 받고 그야말로 영광스러운 인생으로 성숙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모든 인생 의 후반은 이런 아름다운 성숙으로 단장되어져야 합니다.
인생의 가을은 매우 열심히 배우고 일하는 때라는 것입니다. 흔히 저녁은 쉬고 잠자는 때로만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들이라든지 위대한 인물을 보면 저녁일수록 밤을 세워가며 배우고 일에 힘썼습니다. 특히 요즘은 낮 보다는 밤에 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이 늘어간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 선생을 봅시다. 7절‘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노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믿음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인생의 후반을 휴식의 때로 알지 마십시오. 더욱 배우고 일하는 때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실 인생의 후반을 계속해서 젊음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면 늘 새로운 것을 내다보고 배워야 합니다. 흥미를 가져야 합니다. 앞을 향해서 전진하는데 전력을 다 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또 빌립보서에서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상을 위해서 쫓아가노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후반은 휴식의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만년 젊은이였습니다. 나이를 세지 마십시다. 연륜을 자랑하지 맙시다. 남은 때를 아껴서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선을 행하고 할 수 있는 대로 교회 봉사에 믿음의 활동에 더 깊이 연구하며 힘쓸 것입니다. 결코 연령이 높아지면 쉬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더욱 배우고 더욱 일하고 더욱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인생의 가을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하는 때입니다.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눕게 됩니다. 그것은 밤이 지나고 내일 아침이 있다고 하는 것을 희망하기 때문에 잠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 모든 자에게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인생 후반에 가장 귀중한, 산, 영원 한 소망을 가졌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큰 축복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후반이 가까워 올수록 영원한 소망이 뚜렷해진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저녁인 이 노후에는 무엇보다도 희망이 꼭 필요하고 희망에 차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일생은 빠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내세의 소망이 명확해서 전진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이 현세라고 하는 것은 과정에 불과합니다. 내세가 목적지입니다.
사도 요한은 큰 핍박을 만나는 현실 속에서도 아세아 교회의 승리를 내다보면서 전진했습니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갔을지라도 한 뜨인 돌이 우상을 부수고 세계에 꽉 차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내다보는 그런 소망 안에서 전진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남은 날을 계수하면서 또 인생의 마무리도 생각하면서 이 후반이야말로 날이 갈수록 아름다운 후반, 배우고 일하는 후반, 영원한 참 소망을 품고 달성하기 위해서 전진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2.아름다운 신앙의 결산은 선한 싸움을 잘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7절‘내가 선한싸움을 싸우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싸움’이라는 말은 ‘링 위에서 싸워 승부를 내는 권투 시합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피를 흘리기까지 싸우는 싸움입니다. 상대방이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때까지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싸우는 싸움은 생존을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명예를 얻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 전파를 위한 믿음의 싸움입니다.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시험과 유혹과 죄악을 대항하여 담대히 싸워 이겨야 됩니다.
바울이 여기서 싸움이라는 것은 또 아‘아곤’으로서 주로 적과 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원형경기장의 경기를 말합니다. 바울은 온 힘을 다해서 싸웠다고 합니다. 그의 싸움은 단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고, 사람을 그분께 이끄는 선한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싸움은 끝났습니다(동사의 완료형 사용). 그의 싸움의 대상은 특히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어두운 세력입니다. 사람은 보통 겉으로는 웃고 살지만, 속으로는 모두 어둔 세력에 눌려 삽니다.
사도는 이들에게 복음을 가르쳐서 그리스도께서 그를 지배하시게 함으로써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풀어주십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악한 사람들도 들어오고, 심리적으로는 새사람이 되었지만, 존재 자체가 변하지 않아 종교생활로 만족하는 사람(대부분 신자의 경우), 또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했을지라도 악한 과거의 습성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사도는 이들과 어렵게 싸우면서 훈계해야 했습니다. 특히 고린도전후서에서 그가 이 일을 얼마나 큰 고통 가운데에서 했는지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 개척 시에는 유대인과 주민들이 무섭게 그를 대항했습니다. 돌에 맞아서 거의 죽게 된 경우도 있었고, 험한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난 적도 있었습니다. 유대인에게 태장을 39대나 맞아 초주검이 된 적도 있었는데, 이것을 다섯 번이나 당했다고 합니다. 조난도 당하고, 굶고 목마르고 추위와 더위를 견디어야 했습니다(고후 11:23 이하 참조).
그는 또한 무엇보다도 거짓 교사들과 싸우고, 교회를 이들로부터 보호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과 교회를 위한 선한 싸움입니다. 이제 이 싸움을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이 싸움이 끝나 편안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싸움을 디모데와 우리에게 물려주기 위해 이 서신을 쓰고 있습니다. 복음이 계속 전파되고 교회는 말씀으로 정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어야 합니다. 목사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이 전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닙니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한 싸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싸움을 ‘선한 싸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이 싸움은 가장 강력한 원수를 대적하여 사력을 다하는 싸움입니다. 또한 이 싸움은 죄악으로 가득찬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하기를‘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신 속의 육의 사람과의 싸움입니다. 정욕적인 옛 자아와의 싸움입니다. 이생의 자랑과 세상적인 욕심과 싸우는 영전입니다. 이 싸움은 나 자신의 나태와 안일, 교만과 싸우는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자신의 심령 속에 역사하는 죄와 사망의 법에 대한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쾌락주의와 물질만능주의와 과학만능주의와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성경을 거스리는 비성경적인 사상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싸움입니다. 영생을 쟁취하는 싸움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로 부름을 받은 그 날부터 영전의 격전지를 통과한 승리자였습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영전의 적들과 싸워 승리한 용사였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선택을 받아 영전을 하는 성도임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고상한 영적 전투 속에서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요, 우리가 결산해야 될 신앙입니다.
3.아름다운 신앙의 결산은 달음질에 승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7절‘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달려갈 길’이란 마라톤 경기에서 정해진 경주 코스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복음의 난코스 경주를 마쳤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마치고’는 이미 생과 사명의 코스가 끝나고 완성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훌륭한 경주자로서 경기의 법과 규율을 어기지 아니하고 다 달려갔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뛰는 경주자였습니다(1절). 허다한 증인들 앞에서 달리는 경주자였습니다(히12:1). 그는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하여 인내하며 달렸습니다. 이 달음질은 인내가 없이는 달려갈 수 없는 경주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름을 받은 이후 로마의 감옥에까지 이르도록 온갖 장애물을 통과하면서 달렸습니다.
신앙의 경주는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 경주와도 같습니다. 힘이 든다고 중도에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그 정해진 길이 마칠 때까지 부지런히 달려가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이 달렸던 그 길은 복음 전파의 길이었습니다. 딤후4:17절‘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자기 생명을 내던지기까지 하며 힘을 썼습니다.
행20:24절‘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그는 사명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 생명도 포기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앞과 허다한 증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뛰는 경주자들입니다. 이 경주는 관제로 부음이 될 때까지 달음질해야 합니다. 힘이 들어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경주입니다. 그러나 이 달음질에 포기한 사람들이 성경에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에 태양이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또한 나에게 주어진 예비된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인내하며 경주해야 하는 외로운 독주자들입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의 길을, 사명자의 길을, 순교자의 길을 끝까지 달려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다 마쳤다고 마지막 순간에 고백할 수 있는 축복된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4.아름다운 신앙의 결산은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아무리 선한 싸움을 싸우고 아무리 달려갈 길을 마쳐도, 믿음을 잃어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은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만일 바울이 믿음을 지키지 않았더라면,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의 핍박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로마의 황제 네로 앞에서 믿음을 지키지 않았더라면, 바울은 자신의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언제 어디서나 그의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믿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바울의 믿음은 결코 주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지킨 믿음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었습니다.
롬10:17절‘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예컨대 왜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달려가야 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귀가 가려운 사람들은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허탄한 이야기를 들어서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엄히 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의 직무를 다할 것을 간곡하게 당부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기를 바랍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우리에게 산으로 가라고 명하셨는데, 우리가 바다로 가서 아무리 열심히 고기를 잡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항상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바울의 과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의 달려길 길을 마쳤습니다.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위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바울도 평안하게 자신의 삶을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세상을 떠날 기약은 어김없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우리는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합니까? 사람들은 누구든지 건강하게 살다가 죽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열심히 운동을 합니다. 때로는 먹고 싶어도, 절제하면서 먹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우리의 신체적인 면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면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걸어온 영적인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밝혔습니다. 이는 바울이 우리 모두도 그와 같은 삶을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었습니다.
7절‘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지키다’라는 말은 도덕적으로는 처녀가 그 정조를 지킬 때 쓰는 용어이고, 군사적으로는 군인이 성을 지킬 때 쓰는 용어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고 식어지지 않는 뜨거운 믿음이 그 중심에 불붙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습니다(엡2:8). 이 믿음이 바로 구원의 빙거요, 보배입니다(벧전1:9-10). 이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이 믿음이 죄를 이기게 합니다. 이 믿음이 나를 그리스도 앞에서 의인이라고 증언합니다. 바울은 질그릇 속에 있는 이 귀한 보배를 상실하거나 변절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처녀가 그 정조를 지키듯이, 그리스도의 신실한 신부로서 오직 주님만을 위해, 복음과 교회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또한 그는 군인이 성을 지키듯이 그 믿음을 지켰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 생명과 물질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쓰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명예를 잃지 않으려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재물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방법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정작 지켜야 할 보배는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아니 거기에는 전혀 관심조차 가지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저들의 결국은 멸망밖에 없습니다. 성도라고 자처하는 내가 믿음을 지키는 이 일에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내가 내 삶속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힘쓰지 못한다면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내세가 있다는 것을 알고 믿고 있기에 절대로 믿음을 저버리지 말고 세상으로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켰으니 이후로는 면류관을 바라보고 또 다시 달려갑시다. 현세에도 막힌 것이 뚫어지고, 솟아날 구멍이 있고, 독수리처럼 휄휄 날 수 있는 은헤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믿다가 믿음을 저버리면 그만큼 손해입니다. 이왕 믿는 것 끝까지 달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왜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는 성도의 삶을 살았습니까? 그것은 바로 내세 신앙, 천국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지칠 줄 모르고 달렸습니다. 이 면류관 즉 상급은 사도 바울에게만 주어지는 것을 결코 아닙니다.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인생의 마지막에 이런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한 해를 마감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신앙 결산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선한 싸움을 지금까지 싸워 왔습니까? 달려갈 길을 마치기까지 인내하며 달렸습니까? 믿음을 지킴으로 승리적인 삶을 살아왔습니까?
바울의 미래입니다. 딤후4:8절‘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먼저 바울은 그의 현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죽음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바울은 그의 과거를 회고했습니다. 그는 승리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는 승리자로서 자기가 받을 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의의 면류관입니다.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말하면, 바울은 경기에서 승리한 선수가 된 것입니다. 그는 달음질에서 승리했습니다. 권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씨름에서 승리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땀을 닦으면서, 재판석을 바라봅니다. 재판장은 그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다. 그는 재판장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재판장은 그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어줄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에 메달을 걸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가 받을 면류관을 가리켜서 ‘의의 면류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의의 면류관을 받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벧후3:13절‘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이와 같이 천국은 의가 거하는 곳입니다. 불의는 그곳에 거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계21장과 22장의 말씀처럼, 살인자와 행음자와 우상숭배자와 거짓말쟁이와 같은 불의한 자들은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의의 면류관을 받은 자만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선한 싸움을 싸웁시다. 우리의 달려갈 길을 마칩시다. 믿음을 지킵시다. 그리해서 우리도 의의 면류관을 받아쓰고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거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딤후4:1절‘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라고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고후5:10절‘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세상 법정에서는 심리가 이루어지며, 변호도 하고, 증거물이 제시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불의한 판결이 내려지기도 합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불의한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바울도 로마의 원로원에서 불의한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는 결코 불의한 판결이 내려지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는 심리도 필요가 없고, 변호도 필요가 없고, 증거물을 제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심판에는 실수나 잘못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우리를 심판하시며, 우리에게 상을 내리십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누구에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마치며 믿음을 지키면서 자기의 직무를 다하면, 누구에게든지 의의 면류관은 주어집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결코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도 또한 우리 모두도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주실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각자가 맡은 바 직무를 다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 길에서 만난 사람 중에 나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 나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아직도 누구를 미워하고 시기 쟁투 속에 빠져 육신의 일에 골몰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의 삶을 정말로 뒤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저희들은 땅 빼앗기라는 놀이를 하였습니다. 마을 어느 마당에서 땅 빼앗기를 하면서 서로 싸우다가 어머니가 아무개야 아무개야 부르고, 석양이 오면 그 땅 빼앗기를 다 놓아두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울고 그렇게 싸우고 그렇게 몸부림하던 것들을 다 놓아두고, 우리는 돌아가야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바울처럼 내가 선한 싸움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을을 지켰으니, 이제 나에게는 면류관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노라, 이 신앙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은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사람보다 똑똑한 것이 아니라 세 상사람보다 착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끝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달려온 우리의 신앙 결산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드려졌다면 교만치 말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까지 면류관을 얻도록 변함없이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며 선한 싸움에 힘을 다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금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더 이상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남은 생애가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선한 싸움을 싸웁시다. 끝까지 달려갑시다. 믿음을 지킵시다. 그리해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 우리 모두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받아쓰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예수님의 칭찬과 함께 큰 상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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