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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클라이머의 삶] 영원한 청년 바위꾼 김용기씨
▶ 소속 MC산악회 명예회장 김용기등산학교 교장 대산련 암빙벽등반기술 정교수
▶ 등반 및 개척 경력 85 대둔산 MC로드 A, B 길 개척 90 토왕성빙폭 1일 3회 연속등반(파트너 이상록) 토왕성빙폭 2인조 1시간45분 등반(파트너 이상록) 90 호랑이크랙(5.11a) 프리솔로 등반 94 설악산 4대 빙폭 당일등반 97~99 토왕폭 빙벽대회 3연패 / 2000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 제1회 종합 22위 / 프랑스 월드컵 공동1위/ 03 인수봉 학교길 A·B 루트 개척
▶ 저서 <실전 암벽빙벽등반>(기술서) <한국암장순례>(중부권/남부권) <김용기등산학교>(교재) 한국위암벽 전5권 클라이밍 가이드북 출간/
▶ 수상경력 2005 대한민국 산악문화상 수상 2012년 대한민국 산악문화상 수상 / 2016년 인수봉 90여 개 루트 전체 보수작업 참여 등.....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55세면 뒷짐지고 거드름 피울 나이였다. 김용기씨(金龍基·밀레 종로·네파 종로 대리점 대표)도 올해 쉰다섯이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도 피 끓는 청년이다. 요즘도 1주일이면 두세 번씩 인수봉을 오른다. 지난해 여름에는 아예 북한산 기슭 우이동으로 이사했다.
한 번이라도 더 인수봉을 오르고 싶어서다. 부부가 그렇다. 아내 이애숙씨(李愛淑) 역시 ‘공범’이다. 두 사람은 부부로 출발했으니 지금은 10년째 줄을 묶어온 자일파트너다.
첫 등반에서 의대길 선등 선 천생 바위꾼 부부는 낡은 승용차를 몰고 우이동에 나타났다. 아니, 우이동에 살고 있으니 마실 나온 셈이다. 도선사 주차장에 도착하자 트렁크에 있는 로프와 암벽장비를 배낭에 주섬주섬 담고, 뒷동산으로 향했다.
“아직 발목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아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하는 거예요. 물리치료 삼아.” 김용기씨는 재작년 여름 미국 요세미티의 엘캐피탄 등반에 나섰다. 91년 미들캐시드럴록을 등반하면서 언젠가 꼭 오르리라 다짐했던 거벽이었다. 아내 이애숙씨를 비롯해 3명의 동료와 함께 고전루트인 노즈 당일등반에 나섰다. “아차 하는 순간 미끄러졌어요. 그런데 툭 하더니 캠이 빠져나가지 뭐예요.
한 10m 떨어진 다음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뭔가 이상하다 싶었어요. 발목을 조금 움직여보았지요. 죽겠더군요. 수직벽 500m를 하강하는 데 정말 끔찍했어요.” 그는 곧장 귀국하여 수술을 받은 다음 네댓 달은 깁스한 채 지내야 했고, 또 부러진 뼈에 박아놓았던 핀을 빼는 수술을 하다 보니 1년 이상 바위를 찾을 수 없었다. 겨우 다시 시작한 게 딱 1년 전이었다.
사고경위에 대한 남편의 얘기를 듣던 아내 이애숙씨는 “남들 사고는 담담하게 대처했는데 남편 사고는 당황하게 되었다”며 “그래서 부부인가 보다”고 했다. 한갓진 산길을 따라 하루재를 넘고 인수대피소를 지나쳐 인수봉 기슭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1시경, 김용기씨는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고 하니 사진 멋지게 나오는 빌라길 2피치까지만 등반하자”며 앞장서 올랐다. 빌레이는 아내인 이애숙씨가 맡았다. “아이들 어릴 때는 남편이 목마 태우고 올랐어요.
하루종일 야영장에서 아이들과 지내야했어요. 애들 놔두고 남편 따라 갈 순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도 남편과 선후배들이 나누는 얘기를 통해 용어에 대해선 박사가 되었답니다.” 아들 둘이 고등학교를 마칠 때쯤인 97년부터 아내도 바위를 타기 시작했다. 마침 남편이 월간山에서 암릉과 기초암벽, 기초빙벽 교실을 연재하던 시절이었던지라 기초부터 탄탄하게 익힐 수 있었다. 이애숙씨는 한 5년이 지나고서부터 선등을 서기 시작, 지금은 어지간한 루트는 앞장설 수 있는 5.11급 클라이머다.
김용기씨는 말 그대로 물 흐르듯 부드럽게 올랐다. 클라이밍 모습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싶어 감탄할 정도였다. 강풍이 몰아치는데도 첫 피치 등반을 끝내고 사진기자를 비롯해 네 사람이 모두 피치 종료지점에 도착하자 그는 두 번째 피치 등반에 나섰다.
발목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건 순 거짓말이었다. 가끔 힘을 모으느라 훅훅 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난이도 5.12a급인 막판 트래버스 구간도 가볍게 넘어서곤 다시 제1피치 종료지점으로 내려선 다음 사진촬영을 위해 다시 등반할 때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스무 살이 넘어서 서울생활을 시작한 김용기씨는 자연암벽에 관한 한 30년 넘도록 국내 최고수로서 자리를 유지해온 클라이머다.
그의 바위 실력은 시작부터 유별났다. 76년 인수봉 취나드 B코스 첫 바위 때 딱 한 번 뒤쫓아 올랐고, 이후 지금까지 남들한테 선등을 넘긴 적이 기억에 없을 정도라고 한다. “시골서 살다 보니 산은 땔감이나 구하러 가는 곳이려니 했죠. 서울에 와서 보니까 배낭 메고 나서면 등산이라 하더군요. 배지 많이 단 사람이 대장인 시절이었으니까요. 저도 그들처럼 배낭 메고 한 2년 워킹 다녔어요. 그러다 서울의 대다수 바위꾼들이 그랬듯이 백운대에 올랐다가 인수봉을 하강하는 클라이머들의 모습에 빠져든 거예요. 클레터슈즈에 면양말을 장딴지 위까지 끌어당긴 모습으로 시작했어요.
첫날 오전 취나드B를 후등으로 오르고 오후엔 의대길을 톱 섰어요.” 등반에 대한 개념도 없이 무작정 오르다 보니 로프 한 동 길이(40m)를 생각하지 못한 채 오르고 말았다. “귀바위 밑에서 끊어야 하는데 그냥 계속 올랐던 거예요.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마침 위에 사람이 있기에 부탁했더니 슬링에 줄사다리 등 있는 것 없는 것 다 연결해 내려주더군요. 줄을 잡는 순간 살았다 싶었어요.” 그 다음주에는 선인봉 맛을 보기 위해 도봉산으로 향했다. 물개길에 박쥐, 표범길까지 세 코스를 하루에 해치웠다.
그러나 그는 이 등반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표범 두 번째 피치 확보지점에서 옆으로 트는데 발이 빠지지 않지 뭐예요. 발이 빠질까 두려워 크랙에 너무 깊숙이 집어넣은 채 등반에 나섰던 게 화근이었죠. 입이 어찌나 타던지 거품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답니다. 그래서 지금 누가 너무 힘들다 하면, 입에서 거품 나지 않을 정도로 해봤냐고 묻곤 해요.” 선인봉과 인수봉의 모든 루트를 섭렵한 그는 79년부터 5년 가까이 전국 암벽 순례를 나섰다. 그로도 부족해 82년 MC산악회(Mountain Climbing Alpine Club) 창립 이후에는 더욱 뜨거워졌다.
야영장에서 눈을 뜨자마자 바위에 붙으면 적으면 5개 코스 많으면 7개 코스를 등반해야 직성이 풀렸다. 야영장에서 저녁밥 해먹고 나면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손전등에 의지해 하산해야 했다. 설악산 4대 빙폭 19시간57분에 완등 그는 매듭법도 모르고 바위를 선등 섰듯이 빙벽도 독학으로 깨우쳤다. 1년간에 걸쳐 대둔산에 루트 2개를 개척한 85년 겨울 동대문시장에서 밴드식 아이젠과 허밍버드 피켈을 사 가지고 운악한 무지개빙폭을 찾았다. “빙벽화에 아이젠 끈 묶는 데만 해도 한참 걸렸어요. 그런데 빙벽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싶더군요. 너무 쉽게 올랐으니까요.
그래서 그 다음주에 구곡폭으로 장소를 옮겼죠. 웃겼어요. 생각 없이 피켈을 휘두르다 보니 피크가 부러진 줄도 몰랐던 거예요. 3분의 2쯤 오르고 나서야 알았으니까요. 막판에 스텝커팅하며 오르느라 정말 힘들었답니다.” 그 해 겨울 토왕폭에 도전했다. 당시만 해도 토왕폭은 어지간한 수준의 클라이머는 넘볼 수 없었던 거대하고 어려운 빙벽이었다. 그 첫 등반에서 4시간 반만에 한국 최대 빙폭인 토왕폭을 해치웠다. 그 5년 뒤인 90년에는 이상록씨와 파트너를 이루어 1일 3회 연속 등반과 1시간45분이라는 속도등반을 기록하고, 94년에는 토왕폭에 이어 대승폭 야간등반도 해낸다.
그의 빙벽등반은 설악산 4대 빙폭 당일등반으로 절정에 다다른다. “3회 연속등반을 할 때는 3월 초 이른 봄이었어요. 토왕폭 곳곳이 폭포를 이루고 있었으니까요. 3회 등반을 마치고 나니까 빙벽화가 장화가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한 번 더 오르려던 계획을 접었답니다.
4대 빙폭 당일등반은 밤 12시30분 토왕폭을 시작으로, 소토왕골 국사대폭, 소승폭, 대승폭으로 이어졌지요. 토왕폭 외에는 환할 때 끝낼 줄 알았는데 시간이 늦어져 대승폭도 한밤중에 올라야 했답니다. 장비를 모두 짊어지고 이동하는 데 걸린 시간까지 19시간57분 걸렸어요.” 김용기씨는 바위보다는 얼음에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스타일과 맞기 때문이라고 한다. “각도가 수직을 넘어서는 빙벽은 과감하지 못하면 오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 스타일과 맞는다는 거예요. 바위에서는 몇 번 떨어진 적이 있지만 얼음에서는 단 한 번도 추락하지 않았으니까요.” 그의 등반기술은 클라이머로선 뒷전으로 물러설 나이에 오히려 절정을 이루었다. 88년 클라이머로선 늦은 서른여섯의 나이에 월출산 자연암벽에서 열린 제8회 전국암벽등반대회에서 4위에 오르는가 하면 그로부터 9년이 지난 97년부터 99년까지 3년간 토왕빙폭 대회에서 연거푸 우승을 독식했다. “2000년에 또 나가려 하니까 주최측에서 제발 그만 나와달라 하더군요.
그래서 무대를 세계로 옮겼어요. 2000년 겨울 1주일 간격으로 6개국에서 돌아가면서 열린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이었죠. 3개 대회만 나갔는데 종합 22위했으면 괜찮은 거 아니겠어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난다 하는 친구들이 90명이나 참가한 대회였는데 말이에요.” 당시 그는 오스트리아 피치탈 대회에서는 난이도와 속도 모두 20위였으나 프랑스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에서 난이도 공동 우승을 차지하고 속도도 9위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참가한 이탈리아 코르티나 대회에서는 예선 탈락했으니 결국 2개 대회 성적만으로 6개 대회 성적을 합치는 종합순위에서 22위에 오른 것이다.
“오스트리아 대회 예선 때는 앞서 출전한 선수들이 시원찮아 완등만 하면 결선에 진출하려니 하고 슬슬 했어요. 그랬더니 내 뒤에 나온 선수들이 줄줄이 완등하지 뭐예요. 시간으로 기록을 측정하니까 저는 12위더군요. 그래서 틀렸다 싶은 마음에 대회장을 벗어나 딴 짓 하고 있는데 그 사이 완등자들끼리 재결선을 벌였다지 뭐예요. 그래서 20위가 된 거예요. 그래도 그 해 월드컵에서 VIP 클라이머로 선정되었으니 할 만큼 한 거 아니겠어요,”
이렇게 큰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보인 것은 당연히 그 나름대로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독하게 바위를 했다. 89년엔 집 옥상의 옥탑에 합판을 세워놓고 인공홀드를 붙여 높이 6m 폭 4m 규모의 인공벽을 만들어 시간 날 때마다 매달려 연습하는가 하면 90년 이른 봄에는 호랑이크랙 등반에 나섰다가 성애가 껴 있자 버너 불로 녹여낸 뒤 등반하고, 두 번째는 프리솔로로 과감하게 등반하기도 했다. 그의 모든 수련은 실전을 통해서였다.
하루에 암벽을 7개 루트나 등반했듯이 얼음도 마찬가지였다. 수없이 반복되는 빙벽등반을 통해 실력을 향상시켰다. 91년 서울자유등반협회 회장으로서 인수봉 남면에 루트개척을 주도하는가 하면, 2003년 역시 인수봉 남면에 학교길A(5.12b), B(5.11c) 루트를 내기도 했던 그는 등반교육에서 20년 가까이 몸을 담고 있다. 88년부터 2000년까지 코오롱등산학교 암벽반과 빙벽반의 대표강사를 맡았고, 2001년 이후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을 단 김용기등산학교(www.kimcs.com)를 운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등산학교를 거친 산악인만 해도 1,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실전 통해 배운 등반기술 실전으로 전수 “코오롱등산학교 암벽반·빙벽반 대표강사를 12년이나 했어요. 97년에는 월간山에 클라이머 만들기, 암릉교실, 빙벽교실을 연재한 적도 있고요. 초보자를 대상으로 교육하고, 그 과정을 연재하는 거였죠. 그렇게 등산교육에 오랫동안 몸을 담다보니까 등반교육은 이론보다는 실전 위주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추구하는 방식으로 운영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등산학교를 만든 거예요.
교육생을 돈으로 생각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무엇보다 어렵게 배운 기술 그냥 썩히면 아깝잖아요.” 등산학교를 시작한 첫해에는 1년 과정으로 가르쳤다. 첫 강의 때는 안전벨트도 제대로 못 차던 이들이 매주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실력이 부쩍 부쩍 향상되었다. 봄에 시작, 늦가을쯤 되면 서울 근교의 웬만한 루트는 선등 설 수준에 이르고, 얼음도 한 시즌 교육으로 토왕폭에 도전하는 이들까지도 생겨났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하다 보니 문제가 있다 싶었다. 초보자들을 가르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초보자반과 중급자반으로 나누어 교육하고 있어요. 5주간의 단기과정이지만 졸업 후 파트너가 없는 이들은 과외등반을 두어 달씩 하니까 서너 달짜리 교육인 셈이죠.” 김용기씨는 “5주 과정을 거치는 사이 생짜배기가 차츰 등반에 눈을 뜨고 불룩 튀어나왔던 배가 쑥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다”며 “특히 내성적이던 사람이 성격이 밝아지고 자신감도 넘치면서 사회생활을 잘 하는 걸 보면 뿌듯하다”고 보람을 말한다. 그는 “자연스럽게 안전등반을 강조하면서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역할도 한다”고 덧붙인다. 그렇지만 아내 이애숙씨는 자신이나 둘째 아들 교육에는 빵점이라고 말한다.
“그거 있잖아요. 내 자식과 부부 사이는 가르쳐주기 힘든 거요. 바위 밑에까지 함께 왔다가 마음이 맞지 않아 따로 따로 등반할 적도 있어요. 그래도 집에서뿐만 아니라 가게서도 함께 지내고 바위도 함께 하니 늘 붙어 지내는 셈이지요. 무엇보다 공통화제가 있고 추구하는 게 같다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여러 해 동안 등산교육에 열중하다보니 자신의 등반에 몰두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일요일과 국경일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지난해 여름 15년간 살던 용산에서 우이동으로 이사온 것인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졸업생들과 다니다 보면 아무래도 수업의 연장이 될 수밖에 없어요. 모든 게 신경 쓰이다 보니 제 운동을 할 수가 없고요. 그래서 우이동으로 이사온 이후 매주 토요일만큼은 아내와 둘이서 등반하려고 하는데 그것도 잘 안되네요. 같이 하면 안 되겠냐고 물어오는 제자들이 너무 많아요. 어떻게 알았는지 말이에요.” 그는 실전을 좋아한다.
그래서 실내암장도 싫어한다. 그가 실전을 좋아하는 것은 역시 그가 살아온 인생이 단 한 순간도 연습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동안 그가 펴낸 등반 관련 서적 역시 실전 위주로 정리했다. “96년에 펴낸 <실전암벽빙벽등반>은 제가 몸소 체험한 내용을 담은 거예요. 단 한 줄도 남의 것을 그냥 베낀 게 없으니까요. 사진을 많이 넣었어요. 백 컷이 넘어요. 올컬러로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글을 많이 넣는 것보다 사진을 통해 설명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였어요.
2004년 펴낸 <한국암장순례>(중부권/남부권) 역시 월간山에 6년 넘게 연재한 것을 바탕으로 정리한 책이니 발로 뛰어 쓴 책인 셈이죠. 등산학교 교재로 만든 <김용기등산학교>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는 특히 <전국암장순례>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다. 전국 각지의 암장을 돌아다니면서 암벽루트를 직접 확인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현지 클라이머들과 교류하는 것이 무엇보다 즐거웠다. 게다가 한국 암벽등반을 위한 영원한 길잡이라는 생각을 할 때면 마음이 뿌듯해진다고 한다.
그렇지만, 초판으로 끝나버린 것에 대해 몹시 아쉬워한다. 그는 이를 독서문화의 결여에서 원인이 비롯된다고 보고 있다. 김용기씨도 흰 산에 대해 꿈을 가진 적이 있다.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꿈이 이루어져 1996년 알프스 몽블랑(4,807m) 등반에 나섰다.
그 등반에서 그는 고산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 고소증에 시달리다 보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산에 몰입하면서 살아오면서도 가족을 위한 경제적인 뒷받침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2003년 유리가공업에서 등산장비 판매업으로 전업한 그는 현재 장비점 2곳을 운영하고 있다.
동대문시장 내 에델바이스 종로대리점과 네파 종로대리점은 김용기-이애숙 부부와 두 아들이 운영하는 장비점이다 “기회가 오면 세계의 암빙장 순례하고 싶어요” 빌라길 제2피치에서 등반을 끝내고 하강해 장비를 추리는 사이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김용기씨는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아내 역시 날씨에 개의치 않고 바로 옆 루트를 등반하러온 클라이머들과 담소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장비를 챙기는 김용기씨를 아무리 꼬집어보고 뚫어지게 살펴보아도 50 중반의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영원히 청년 바위꾼으로 남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꿈도 많았다. “30년쯤 했지만 일요일에만 다닌 게 아니라 평일에도 다녔으니 남들로 치면 한 50년쯤 다녔다 할 수 있을 거예요. 꼭 난이도를 추구하는 건 아니에요. 제 자신에 대한 도전이죠. 나이를 더 먹어도 클라이밍을 통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싶어요. 물론 나 자신에 대해서죠.” 그는 내년 여름 노즈에 재도전할 계획이다.
“재작년엔 발목이 부러지면서 포기해야했지만 내년 여름에 꼭 당일에 끝낼 거예요. 얼음이든 바위든 좋은 곳을 찾아 세계를 돌아다녔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이태 전 계획했던 건데 이것 역시 발목 골절로 흐지부지된 거예요. 아들들이 샵을 알아서 운영할 때쯤 되면 꼭 해볼 거예요.”
/ 글 한필석 차장대우 / 사진 허재성 기자